오이란
[image]
花魁
과거 일본에 존재했던 직업. 유곽에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거나 최상급인 유녀를 말한다. 서양권으로 치자면 상류층을 손님으로써 상대했던 고급 창녀(유럽에서는 코르티잔)이다. 한국으로 치면 일패기생급 능력을 가진 창기에 가까웠다. [1]
게이샤, 마이코들과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예능인들을 말하는 것이고 유곽에서 매춘을 하던 자는 오이란 쪽이다.
한 유곽의 유녀 자리의 알파격 자리에 있는 고급 유녀라 할 수 있으며, 오이란 외에 '타유'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가발이 크고 화려하며, 일반인들이 오비를 뒤로 매던 것과 달리 앞으로 오비를 맸다.
유곽에서도 화대가 몹시 비싼 고급 유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면대면이 가능하긴 개뿔이고[2] , 찻집[3] 을 매개로 삼아 연락을 주고받았을 정도이며[4] 손님보다도 오이란이 상석에 앉았고, 오이란과 초기에 관계를 가질 손님은 무려 3차까지의 대면절차가 존재했다(...)
이러다보니 당연히 더 급 낮은 유녀들에 비해 몸 치장이나 옷 치장, 머리 모양 등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며, 그 직책에 걸맞게 섭렵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또한 출신지를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 이쪽 업계에서나 쓰는 언어와 말투('쿠루와코토바(郭詞)'라고 한다)를 따로 또 배우며, 기본 출신지가 말투 등에서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5]
여하튼 이런 연유 때문에 오이란들은 용모가 아름다운 건 기본에 지성과 품격, 잠자리 스킬, 다도, 꽃꽂이, 향도,[6] 샤미센과 고토 연주, 노래, 장기, 시, 춤 전반에 매우 능해야 했으며, 미모·지성·교양 모두를 다 갖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써 팔리는 존재들인 만큼 패션적 측면에서도 자신들을 갈고닦아 당대 패션 리더라 불릴 정도로 유행 패션을 주도하기까지 했다.[7] 이리 까다로운 조건들을 갖춘 만큼 각 유곽이 보유한 오이란의 숫자는 당연히 적었다.
이쯤 보면 매춘부임에도 가히 귀족 아가씨들과 맞먹는 스펙의 보유자라 할 수 있으나 그래도 결국 유곽에 붙잡힌 인생이고 직장에서 뛸 수 있는 기간도 길어야 30세 안팎에[8] 나간다고 해도 직접 몸값을 치르고 중도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었는 데다가[9] 결국 나이가 다 차서 나가거나[10] 은퇴한 후에도 반토신조 등의 형식으로 유곽에 남아 후임 유녀 양성을 하거나, 손님 중 돈 있는 손님들에게 미우케(身請け)[11] 를 받아 첩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만 노릴 수 있었다.[12]
오이란(花魁)은 과거 일본의 유명 공창 구역인 요시와라(吉原) 유곽의 유녀로 계급이 높은 사람(= 고급 유녀)을 말한다. 18세기 중엽 요시와라의 카무로(동녀)와 신조 등의 동생뻘 되는 여자가 언니뻘 유녀를 '오이란'으로 부른 것이 변하여 상위 요시와라 유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13]
상위 유녀의 대명사격 직책이어서 그런지 창작물에서는 1차와 2차를 막론하고 보통 이 사진처럼 요염하고 화려한 밤의 여왕님격 이미지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으며, 오이란 캐릭터들도 보통 그런 성향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14] 역으로 그런 클리셰를 깨고 야한 이미지가 강조가 덜 되는 외유내강형 타입의 오이란 캐릭터라던가, 오이란조차도 극복 못할 암담한 유녀들과 유곽의 현실을 표현해주는 식의 오이란 류 캐릭터도 제법 있다.
유녀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유녀가 앉을 수 있는 최고 직책이다보니 유녀들의 꿈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이란'의 어원에 대해서는 동생뻘 유녀들이 '우리 집의 언니'[15] 라고 불렀던 것에서 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에도 시대, 도쿄, 오사카에서는 최고위의 유녀의 것은 타유(太夫)라고 불렀다. 또 요시와라에도 처음엔 타유가 있었지만, 호레키 연간에 타유가 소멸하고 이후부터 고급 유녀를 오이란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넓은 유녀 일반을 가리키고 오이란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처음부터 바로 오이란이 되는 유녀는 없다. 보통 유곽의 유녀들의 맨 초기 계급은 카무로(禿)[16] 에서 시작한다. 오이란이 되기까지의 정식 유녀의 순위라던가 자세한 계급 구성도는 다음과 같다.
1) 구 요시와라 초기: 타유(太夫) > 코우시(格子) > 하시타(端)
2) 구 요시와라 말기: 타유 > 코우시 > 츠보네(局) > 하시타 > 키리미세(切見世)
3) 신 요시와라 초기: 타유 > 코우시 > 산챠(散茶) > 츠보네 > 키리미세
4) 신 요시와라 중기: 타유 > 코우시 > 산챠 > 우메챠(梅茶) > 키리미세
5) 중기 이후: 요비다시(呼出し) > 츄산(昼三) > 츠키마와시(附廻し) > 자시키모치(座敷持ち) > 헤야모치(部屋持ち) > 키리미세
오이란은 그 유곽의 상급 유녀/최상급 유녀인 만큼 만나는 데 있어서도 절차가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첫 손님과 오이란의 대면만 해도 3차례로 나뉘어졌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드는 돈도 기본 화대비 + 중개료 + 연회 비용 + 종업원에게 주는 웃돈(...)으로 붙는 추가 요금이 굉장히 많아서 당연히 한 번 만나는데 들어가야 하는 돈도 많았다.[25]
오이란을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절차 중 잘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26]
1. 손님이 히키테챠야(引手茶屋)에서 자신의 신분, 재력, 성향에 맞는 오이란을 소개받는다. 이 때 손님은 호기를 부리며 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2. 오이란에게 전갈이 가는 동안 손님은 토로(登楼) 2층에 위치한 연회장[27] 내지 객실로 이동하여 연회를 준비한다. 연회 비용은 손님이 냈으며, 첫 만남 때 오이란이 손님보다 상석[28] 에 앉고 손님은 말석/하석[29] 에 앉는다.[30]
3. 지명된 오이란이 몸단장을 하고 연회장으로 간다. 이 때의 행렬은 '오이란도츄(花魁道中)'라 하여 요시와라의 주요 볼거리라 알려졌다.
4. 첫 대면(쇼카이, 初会). 오이란은 상석에 앉았으며, 손님과 오이란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술만 한 잔 나눌 수 있었다. 손님이 품평받는 시기로, 이 때 손님은 많은 악사와 게이샤를 불러 자신의 재력과 교양을 나타냈다.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이란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었다.
5. 두 번째 대면(우라, 裏). 1~4번의 절차를 반복하여 가지며, 손님은 오이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동침은 할 수 없다.
6. 세 번째 대면. 1~4번의 절차를 반복하며,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연회에서 손님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을 받아 오이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7. 세 번째 대면 때 손님이 '단골금'이라 불리는 축의금을 가게에 지불한다. 이 때부터 손님은 '나지미(馴染み)' 라 불리는 단골이 되어, 오이란과 동침할 수 있었다.[31]
다만 이런 절차는 실제했는지 의문시되기도 하며, 있었다고 해도 에도 시대 호황기인 겐로쿠 시대의 계급 높은 손님들에게 한정적으로 했으리라는 추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리고 요시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유녀들의 손님들이 무사 계급에서 평민 계급으로 옮겨감에 따라 점점 유녀의 접대도 대중화 · 간략화되어서 최소한 요시와라 후기엔 이런 절차들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나지미(馴染み)는 위에서도 나와있듯이 오이란에게 3번의 화대를 하는데 성공해 단골로 인정받은 손님을 말한다.
나지미가 되는데 들어가는 돈이 못해도 현재 가치로 200만엔을 넘어가므로[32] , 당연히 나지미들은 오이란에게 이 정도 화대비를 내어줄 정도로 돈 많고 신분도 높은 이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대신 나지미가 된 손님은 오이란에게 자기 이름이 적힌 젓가락 주머니 '하시부쿠로' 를 받으며, 오이란에게 이름을 불려질 수 있으며 부부처럼 대해지는 것도 가능하고, 나지미가 된 시점부터 오이란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지는 등 확실히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나지미에게도 따라야 할 규정이 있었다. 타 유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오이란을 두고 바람 피우는 것으로 취급되어서 들킬 경우 요시와라 문 앞에서 붙잡혀 위자료를 물어내고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다른 유녀들에게 조롱받거나 여장을 당하게 되는 등 망신당할 것도 감안해야만 했다.
나지미들 중 일부 나지미의 경우 자신이 단골이 된 오이란을 갖다가 몸값을 치르고 유녀직에서 낙적시켜서 자기 곁으로 빼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미우케(身請け)라고 불렀다.[33]
그 외에 여러 손님이 오이란 한 명을 지정할 경우 오이란은 그중 한 명만 상대하고, 나머지는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신조들이 상대했다.[34]
여러 개의 비녀를 좌우로 대칭시키듯 배치하는 오이란 특유의 헤어스타일은 다테효고(伊達兵庫)라 불려졌고, 이 외에도 유녀가 유행시킨 헤어스타일인 카츠야마 마게(勝山髷)[35] , 겐로쿠 시마다 마게(元禄島田髷), 그 이후인 에도 중기에 유행하게 된 등롱빈(燈籠鬢)[36] 과 시마다 마게(島田髷) 등이 있다.[37] 이런 오이란의 헤어스타일은 유행을 타고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기도 했다.
이 외에 오이란들은 큰 비녀들 외에도 여러 꽃비녀로도 머리칼을 장식했다.
오이란이 신는 신발은 산마이바 게타(三枚歯下駄)라고 해서 굽이 높되[38] 통굽이 아니라 3개로 된 동양판 하이힐을 신고 다녔으며, 걸을 때 발을 안쪽으로 모아 걷는 특별한 팔자걸음 보법인 하치몬지(八文字)[39] 를 시전하며 걸어다녀야 했다. 이 하치몬지 보법을 제대로 숙달하려면 무려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오이란은 최고급 유녀답게 의상도 장난 아니게 호화로웠다. 기본 기모노 위에 화려한 무늬와 색상이 있는 겉옷인 우치카케(打掛)를 입고 오비를 앞으로 걸쳐 풍성하게 오비의 천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의상의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워 30kg 이상이었다고 한다.
달리 보면 이동시 장난 아니게 힘들었을 확률이 높은데, 상당한 무게의 장신구가 있는 가발 + 굽 높은 신발 + 8자걸음 + 30kg나 되는 의상(...)을 몸에 매달고 움직여야 했으니 이동시 쌀가마니 30kg이상의 무게를 지고, 그것도 힘든 내색 없이 우아한 자태로 요상한 걸음걸이까지 써서 다녀야 했던 것.
참고글.
이명은 스베리도츄(滑り道中). 손님에게 지명된 오이란이 몸단장 후 행렬을 거느리고 손님이 기다리는 찻집이나 연회장으로 가는 것으로, 이는 오이란이 요시와라의 중앙 거리인 나카노쵸(仲之町)를 행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이란들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손님이 있다는 점과 자기가 잘 나간다는 점을 자랑할 기회였기에 오이란들이 경쟁적으로 행차를 한 적도 있었는데, 덕분에 생기는 폐해를 막기 위해 에도 막부가 아예 오이란 행차를 하루 1번으로 정해서 과하게 하는 것을 막을 정도였다. 매우 화려한 볼거리식 행렬이어서 그런지 현대에서도 재현 행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이란도츄 행렬의 참가인원은 아래와 같다. 그 중 기본은 오이란, 카무로, 신조, 미세반.
해당 문단은 오이란이 아닌 오이란의 외형만 따온 오이란 풍 캐릭터들이다.
1. 개요
花魁
과거 일본에 존재했던 직업. 유곽에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거나 최상급인 유녀를 말한다. 서양권으로 치자면 상류층을 손님으로써 상대했던 고급 창녀(유럽에서는 코르티잔)이다. 한국으로 치면 일패기생급 능력을 가진 창기에 가까웠다. [1]
2. 특징
게이샤, 마이코들과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예능인들을 말하는 것이고 유곽에서 매춘을 하던 자는 오이란 쪽이다.
한 유곽의 유녀 자리의 알파격 자리에 있는 고급 유녀라 할 수 있으며, 오이란 외에 '타유'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가발이 크고 화려하며, 일반인들이 오비를 뒤로 매던 것과 달리 앞으로 오비를 맸다.
유곽에서도 화대가 몹시 비싼 고급 유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면대면이 가능하긴 개뿔이고[2] , 찻집[3] 을 매개로 삼아 연락을 주고받았을 정도이며[4] 손님보다도 오이란이 상석에 앉았고, 오이란과 초기에 관계를 가질 손님은 무려 3차까지의 대면절차가 존재했다(...)
이러다보니 당연히 더 급 낮은 유녀들에 비해 몸 치장이나 옷 치장, 머리 모양 등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며, 그 직책에 걸맞게 섭렵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또한 출신지를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 이쪽 업계에서나 쓰는 언어와 말투('쿠루와코토바(郭詞)'라고 한다)를 따로 또 배우며, 기본 출신지가 말투 등에서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5]
여하튼 이런 연유 때문에 오이란들은 용모가 아름다운 건 기본에 지성과 품격, 잠자리 스킬, 다도, 꽃꽂이, 향도,[6] 샤미센과 고토 연주, 노래, 장기, 시, 춤 전반에 매우 능해야 했으며, 미모·지성·교양 모두를 다 갖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써 팔리는 존재들인 만큼 패션적 측면에서도 자신들을 갈고닦아 당대 패션 리더라 불릴 정도로 유행 패션을 주도하기까지 했다.[7] 이리 까다로운 조건들을 갖춘 만큼 각 유곽이 보유한 오이란의 숫자는 당연히 적었다.
이쯤 보면 매춘부임에도 가히 귀족 아가씨들과 맞먹는 스펙의 보유자라 할 수 있으나 그래도 결국 유곽에 붙잡힌 인생이고 직장에서 뛸 수 있는 기간도 길어야 30세 안팎에[8] 나간다고 해도 직접 몸값을 치르고 중도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었는 데다가[9] 결국 나이가 다 차서 나가거나[10] 은퇴한 후에도 반토신조 등의 형식으로 유곽에 남아 후임 유녀 양성을 하거나, 손님 중 돈 있는 손님들에게 미우케(身請け)[11] 를 받아 첩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만 노릴 수 있었다.[12]
3. 상세
오이란(花魁)은 과거 일본의 유명 공창 구역인 요시와라(吉原) 유곽의 유녀로 계급이 높은 사람(= 고급 유녀)을 말한다. 18세기 중엽 요시와라의 카무로(동녀)와 신조 등의 동생뻘 되는 여자가 언니뻘 유녀를 '오이란'으로 부른 것이 변하여 상위 요시와라 유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13]
상위 유녀의 대명사격 직책이어서 그런지 창작물에서는 1차와 2차를 막론하고 보통 이 사진처럼 요염하고 화려한 밤의 여왕님격 이미지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으며, 오이란 캐릭터들도 보통 그런 성향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14] 역으로 그런 클리셰를 깨고 야한 이미지가 강조가 덜 되는 외유내강형 타입의 오이란 캐릭터라던가, 오이란조차도 극복 못할 암담한 유녀들과 유곽의 현실을 표현해주는 식의 오이란 류 캐릭터도 제법 있다.
유녀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유녀가 앉을 수 있는 최고 직책이다보니 유녀들의 꿈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3.1. 어원
'오이란'의 어원에 대해서는 동생뻘 유녀들이 '우리 집의 언니'[15] 라고 불렀던 것에서 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에도 시대, 도쿄, 오사카에서는 최고위의 유녀의 것은 타유(太夫)라고 불렀다. 또 요시와라에도 처음엔 타유가 있었지만, 호레키 연간에 타유가 소멸하고 이후부터 고급 유녀를 오이란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넓은 유녀 일반을 가리키고 오이란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3.2. 유녀들의 계급과 오이란
처음부터 바로 오이란이 되는 유녀는 없다. 보통 유곽의 유녀들의 맨 초기 계급은 카무로(禿)[16] 에서 시작한다. 오이란이 되기까지의 정식 유녀의 순위라던가 자세한 계급 구성도는 다음과 같다.
1) 구 요시와라 초기: 타유(太夫) > 코우시(格子) > 하시타(端)
2) 구 요시와라 말기: 타유 > 코우시 > 츠보네(局) > 하시타 > 키리미세(切見世)
3) 신 요시와라 초기: 타유 > 코우시 > 산챠(散茶) > 츠보네 > 키리미세
4) 신 요시와라 중기: 타유 > 코우시 > 산챠 > 우메챠(梅茶) > 키리미세
5) 중기 이후: 요비다시(呼出し) > 츄산(昼三) > 츠키마와시(附廻し) > 자시키모치(座敷持ち) > 헤야모치(部屋持ち) > 키리미세
- 카무로(禿)
유곽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10세 전후의 견습 유녀들을 가리키는 계급으로, 유녀 계급의 맨 밑바닥이자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카무로들은 언니/선배격 유녀들의 시중을 들며 유곽의 일을 배웠고 오이란의 시녀 역을 하기도 했는데, 오이란들은 최소 2명 이상의 카무로를 부렸다고 한다.[17]
카무로들 중 유독 일을 잘해 유녀로써의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힛코미카무로(引込禿)'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이들이 카무로들 중에서도 특별 취급되어 오이란으로 길러지기 위해 따로 관리를 받아 성장한 후 오이란이 된다는 절차를 밟았다. 역으로 아래 나오는 신조 중 토메소데신조처럼 유곽에 좀 더 늦게 팔려와 이 시기를 건너뛰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차후 고급 유녀 못 된다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카무로들 중 유독 일을 잘해 유녀로써의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힛코미카무로(引込禿)'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이들이 카무로들 중에서도 특별 취급되어 오이란으로 길러지기 위해 따로 관리를 받아 성장한 후 오이란이 된다는 절차를 밟았다. 역으로 아래 나오는 신조 중 토메소데신조처럼 유곽에 좀 더 늦게 팔려와 이 시기를 건너뛰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차후 고급 유녀 못 된다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 신조(新造)
카무로 바로 다음 단계의 유녀들을 가리키는 계급을 말하며, 10~15세 무렵이 주 연령대.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손님과 동침까진 하지 않았으나, 카무로 시절처럼 언니/선배 유녀들의 시중을 들고 일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손님의 말상대나 술자리 상대가 되어주며 좀 더 유녀의 일에 가까워지는 계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이란은 신조 1~2명의 부양을 받고, 신조들은 오이란이 몸치장을 하는 사이 손님의 말상대(시간벌이)를 하며 접대하는 역할도 맡았고, 동침만 안 하지 오이란에게 몰려든 손님들 중 일부를 상대해주기도 했다. 주로 오이란에게 손님이 너무 많이 몰렸을 경우다.
신조는 또 여러 가지로 구분되는데 다음과 같다.
신조는 또 여러 가지로 구분되는데 다음과 같다.
- 힛코미신조(引込新造): 특별히 기량이 좋고 외모가 아름다운 신조로 일반 신조에 비해 높게 쳐주는 신조.
-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 : 줄여서 후리신이라 하는 신조로, 어원은 후리소데. 일반적인 신조들이 여기에 속한다.
- 타이코신조(太鼓新造) : 유녀로써의 인기는 없으나 기예에 뛰어나 연회에 동원되는 신조로, 게이샤의 역할을 대신해 악기연주나 노래 등을 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는 신조들이다.
- 토메소데신조(留袖新造) : 어원은 토메소데. 후리소데신조와 동년배이지만 고급 유녀가 될 수 없다 취급받는 유녀로써 보통 10대쯤에 팔려와서 카무로 시기를 건너뛴 케이스이다.[18]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는 것은 후리소데신조와 동일하나, 손님까지는 안 받는 후리소데신조들과 달리 토메소데신조는 손님을 받았다.
- 반토신조(番頭新造) : 줄여서 반신이라 불리는 신조로, 타 신조들과 달리 나이가 많아 30세 전후였다. 이들이 나이가 많은 이유는 유녀 일을 은퇴하고 신조 이상 계급의 유녀들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 자시키모치(座敷持ち)
손님과 동침할 용도의 개인 침실과 개인 응접실을 지닌 중급 유녀.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2만 엔 정도로 중급 유녀들 중에선 그나마 화대가 제일 비쌌다. 자시키모치까지 상급 유녀로 분류하거나 자시키모치를 오이란의 한 종류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중급 유녀로 분류한다.
- 헤야모치(部屋持ち)
개인 침실을 지닌 중급 유녀.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1~2만 엔 정도였다.
- 우메챠(梅茶)
우메챠죠로(梅茶女郎)라고도 한다.
- 츠보네(局)
츠보네죠로(局女郎)라고도 한다. 간혹 하시타죠로와 혼동되기도 했으며,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5천 엔 정도로 중급 유녀들 화대 중에선 뒤에서 두 번째.
- 하시타(端)
하시타죠로(端女郎)라고도 한다. 본디 중~하급의 유녀의 통칭이었으나 키리미세의 등장 이후 중급 유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다만 키리미세를 그대로 하시타죠로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위의 츠보네와 더불어 하시타는 하급 유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타유(太夫)
최상급의 유녀.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요시와라에서 타유라 불리는 이들은 사라졌고, 그 호칭은 오이란이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시와라 사이켄(吉原細見)>에 따르면 요시와라에 타유는 1744년에 5명, 1751년에 1명이 존재했다.
타유에 대해서는 '오이란의 이전 명칭이다', '타유가 최고 등급이고 오이란이 그 다음이었으나 타유가 사라지면서 오이란이 최고 등급이 되었다', '요시와라의 최고 유녀는 오이란, 교토 시마바라의 최고 유녀는 타유'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전국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기준으로 일반 유녀가 타유까지 되는 과정은 카무로(禿) >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 > 카코이(鹿恋/囲) > 텐진(天神) > 타유(太夫)였다고 한다.[19] 즉 타유라는 계급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 계급이었다.
역사가 깊은 최상위 계급인 만큼 타유는 받는 손님의 급도 일반 유녀들과 달라서 대상인, 귀족, 황족, 관리, 문인 등을 상대해야 했고, 그 때문에 용모는 물론 가무(歌舞)를 비롯해 온갖 것들[20] 과 높은 계급 사람들에 맞먹는 교양과 학식까지 쌓아올려서 엄청난 교양과 품성을 갖췄다고 한다. 이 특징들은 오이란에게서도 반영되는 특징이다.
타유에 대해서는 '오이란의 이전 명칭이다', '타유가 최고 등급이고 오이란이 그 다음이었으나 타유가 사라지면서 오이란이 최고 등급이 되었다', '요시와라의 최고 유녀는 오이란, 교토 시마바라의 최고 유녀는 타유'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전국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기준으로 일반 유녀가 타유까지 되는 과정은 카무로(禿) >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 > 카코이(鹿恋/囲) > 텐진(天神) > 타유(太夫)였다고 한다.[19] 즉 타유라는 계급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 계급이었다.
역사가 깊은 최상위 계급인 만큼 타유는 받는 손님의 급도 일반 유녀들과 달라서 대상인, 귀족, 황족, 관리, 문인 등을 상대해야 했고, 그 때문에 용모는 물론 가무(歌舞)를 비롯해 온갖 것들[20] 과 높은 계급 사람들에 맞먹는 교양과 학식까지 쌓아올려서 엄청난 교양과 품성을 갖췄다고 한다. 이 특징들은 오이란에게서도 반영되는 특징이다.
- 오이란(花魁)
상급 유녀. 타유 다음 등급이었다고도, 타유를 포함하여 최상급~상급의 유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고도 한다. 타유라는 말이 사라지고 나서[21] 오이란이 그 유곽의 우두머리 유녀이자 고급~최고급 유녀의 대명사가 된 걸로 봐서 타유의 의미와 계급적 특징을 오이란이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오이란 자체가 (타유라는 말이 사라진 이후) 단순 최상급 유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상급 유녀에 포함되는 계급 전반을 다 포괄해서 불렀다는 말도 있다. 소규모 가게[22] 에서는 오쇼쿠(お職)가 이 위치를 대처하기도 했다. 오이란의 화대는 오늘날의 화폐로 1회 4~10만엔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 오이란 자체가 (타유라는 말이 사라진 이후) 단순 최상급 유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상급 유녀에 포함되는 계급 전반을 다 포괄해서 불렀다는 말도 있다. 소규모 가게[22] 에서는 오쇼쿠(お職)가 이 위치를 대처하기도 했다. 오이란의 화대는 오늘날의 화폐로 1회 4~10만엔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 코우시(格子)
오이란 다음 가는 상급 유녀. 격자창(=코우시) 너머에 앉아 있었다 하여 이렇게 불렸다.[23] 코우시죠로(格子女郎)라고도 한다. 이 정도만 올라가도 유녀 업계에선 선방한 수준이었고[24] 코우시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전체 손님 대비로는 오이란을 보러 가는 손님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오이란, 요비다시, 츄산, 츠키마와시 등으로 흡수되거나 분화되어 사라졌다.
18세기 이후 오이란, 요비다시, 츄산, 츠키마와시 등으로 흡수되거나 분화되어 사라졌다.
- 산챠(散茶)
코우시 다음 등급의 중상급 유녀. 산챠죠로(散茶女郎)라고도 하며 상급 중에선 가장 낮은 계급에 위치한 유녀이다.
- 요비다시(呼出し)
본래는 유녀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였으나 이후 찻집에서 손님을 맞는 상급 유녀로 뜻이 바뀌었다.
- 츄산/히루산(昼三): 요비다시 다음 등급의 유녀. 후대로 갈수록 사라졌다.
- 츠키마와시(附廻し): 츄산 다음 등급의 유녀.
3.3. 오이란을 만나려면?
오이란은 그 유곽의 상급 유녀/최상급 유녀인 만큼 만나는 데 있어서도 절차가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첫 손님과 오이란의 대면만 해도 3차례로 나뉘어졌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드는 돈도 기본 화대비 + 중개료 + 연회 비용 + 종업원에게 주는 웃돈(...)으로 붙는 추가 요금이 굉장히 많아서 당연히 한 번 만나는데 들어가야 하는 돈도 많았다.[25]
오이란을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절차 중 잘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26]
1. 손님이 히키테챠야(引手茶屋)에서 자신의 신분, 재력, 성향에 맞는 오이란을 소개받는다. 이 때 손님은 호기를 부리며 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2. 오이란에게 전갈이 가는 동안 손님은 토로(登楼) 2층에 위치한 연회장[27] 내지 객실로 이동하여 연회를 준비한다. 연회 비용은 손님이 냈으며, 첫 만남 때 오이란이 손님보다 상석[28] 에 앉고 손님은 말석/하석[29] 에 앉는다.[30]
3. 지명된 오이란이 몸단장을 하고 연회장으로 간다. 이 때의 행렬은 '오이란도츄(花魁道中)'라 하여 요시와라의 주요 볼거리라 알려졌다.
4. 첫 대면(쇼카이, 初会). 오이란은 상석에 앉았으며, 손님과 오이란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술만 한 잔 나눌 수 있었다. 손님이 품평받는 시기로, 이 때 손님은 많은 악사와 게이샤를 불러 자신의 재력과 교양을 나타냈다.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이란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었다.
5. 두 번째 대면(우라, 裏). 1~4번의 절차를 반복하여 가지며, 손님은 오이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동침은 할 수 없다.
6. 세 번째 대면. 1~4번의 절차를 반복하며,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연회에서 손님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을 받아 오이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7. 세 번째 대면 때 손님이 '단골금'이라 불리는 축의금을 가게에 지불한다. 이 때부터 손님은 '나지미(馴染み)' 라 불리는 단골이 되어, 오이란과 동침할 수 있었다.[31]
다만 이런 절차는 실제했는지 의문시되기도 하며, 있었다고 해도 에도 시대 호황기인 겐로쿠 시대의 계급 높은 손님들에게 한정적으로 했으리라는 추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리고 요시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유녀들의 손님들이 무사 계급에서 평민 계급으로 옮겨감에 따라 점점 유녀의 접대도 대중화 · 간략화되어서 최소한 요시와라 후기엔 이런 절차들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3.4. 오이란의 단골, 나지미(馴染み)
나지미(馴染み)는 위에서도 나와있듯이 오이란에게 3번의 화대를 하는데 성공해 단골로 인정받은 손님을 말한다.
나지미가 되는데 들어가는 돈이 못해도 현재 가치로 200만엔을 넘어가므로[32] , 당연히 나지미들은 오이란에게 이 정도 화대비를 내어줄 정도로 돈 많고 신분도 높은 이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대신 나지미가 된 손님은 오이란에게 자기 이름이 적힌 젓가락 주머니 '하시부쿠로' 를 받으며, 오이란에게 이름을 불려질 수 있으며 부부처럼 대해지는 것도 가능하고, 나지미가 된 시점부터 오이란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지는 등 확실히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나지미에게도 따라야 할 규정이 있었다. 타 유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오이란을 두고 바람 피우는 것으로 취급되어서 들킬 경우 요시와라 문 앞에서 붙잡혀 위자료를 물어내고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다른 유녀들에게 조롱받거나 여장을 당하게 되는 등 망신당할 것도 감안해야만 했다.
나지미들 중 일부 나지미의 경우 자신이 단골이 된 오이란을 갖다가 몸값을 치르고 유녀직에서 낙적시켜서 자기 곁으로 빼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미우케(身請け)라고 불렀다.[33]
그 외에 여러 손님이 오이란 한 명을 지정할 경우 오이란은 그중 한 명만 상대하고, 나머지는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신조들이 상대했다.[34]
3.5. 오이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여러 개의 비녀를 좌우로 대칭시키듯 배치하는 오이란 특유의 헤어스타일은 다테효고(伊達兵庫)라 불려졌고, 이 외에도 유녀가 유행시킨 헤어스타일인 카츠야마 마게(勝山髷)[35] , 겐로쿠 시마다 마게(元禄島田髷), 그 이후인 에도 중기에 유행하게 된 등롱빈(燈籠鬢)[36] 과 시마다 마게(島田髷) 등이 있다.[37] 이런 오이란의 헤어스타일은 유행을 타고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기도 했다.
이 외에 오이란들은 큰 비녀들 외에도 여러 꽃비녀로도 머리칼을 장식했다.
오이란이 신는 신발은 산마이바 게타(三枚歯下駄)라고 해서 굽이 높되[38] 통굽이 아니라 3개로 된 동양판 하이힐을 신고 다녔으며, 걸을 때 발을 안쪽으로 모아 걷는 특별한 팔자걸음 보법인 하치몬지(八文字)[39] 를 시전하며 걸어다녀야 했다. 이 하치몬지 보법을 제대로 숙달하려면 무려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오이란은 최고급 유녀답게 의상도 장난 아니게 호화로웠다. 기본 기모노 위에 화려한 무늬와 색상이 있는 겉옷인 우치카케(打掛)를 입고 오비를 앞으로 걸쳐 풍성하게 오비의 천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의상의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워 30kg 이상이었다고 한다.
달리 보면 이동시 장난 아니게 힘들었을 확률이 높은데, 상당한 무게의 장신구가 있는 가발 + 굽 높은 신발 + 8자걸음 + 30kg나 되는 의상(...)을 몸에 매달고 움직여야 했으니 이동시 쌀가마니 30kg이상의 무게를 지고, 그것도 힘든 내색 없이 우아한 자태로 요상한 걸음걸이까지 써서 다녀야 했던 것.
3.6. 오이란의 이동 행렬, 오이란도츄(花魁道中)
참고글.
이명은 스베리도츄(滑り道中). 손님에게 지명된 오이란이 몸단장 후 행렬을 거느리고 손님이 기다리는 찻집이나 연회장으로 가는 것으로, 이는 오이란이 요시와라의 중앙 거리인 나카노쵸(仲之町)를 행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이란들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손님이 있다는 점과 자기가 잘 나간다는 점을 자랑할 기회였기에 오이란들이 경쟁적으로 행차를 한 적도 있었는데, 덕분에 생기는 폐해를 막기 위해 에도 막부가 아예 오이란 행차를 하루 1번으로 정해서 과하게 하는 것을 막을 정도였다. 매우 화려한 볼거리식 행렬이어서 그런지 현대에서도 재현 행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이란도츄 행렬의 참가인원은 아래와 같다. 그 중 기본은 오이란, 카무로, 신조, 미세반.
- 오이란: 오이란도츄의 메인인 상급 유녀. 메인이나 맨 앞에 걸어가기보단 행렬 끝자락에서 포인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카무로와 후리소데신조: 해당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견습 유녀들, 카무로는 최소 2명 이상, 후리소데신조는 1~2명 정도였다.
- 은퇴 후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전직 유녀[40]
- 미세반(見世番):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는 젊은 남성으로, 오이란의 수행원 일도 맡았다. 양산을 받쳐들거나 등불을 들고 오이란의 뒤를 따랐다.
- 오이란의 경호원들
- 가나보히키(金棒引き): 이명은 츠유하라이(露払い). 석장과 비슷한 형상의 쇠막대를 들고 행렬 선두에서 걷던 사람들로 밤에 순찰을 돌거나 안전을 확인했던 일종의 자경단 같은 사람들이다.
- 테코마이(手古舞): 행렬에 참가하는 남장한 여성들. 가나보하키 뒤에서 걸었다.
- 기타 수행원들: 각종 분장을 한 남녀 수행원들로, 오이란도츄를 꾸며주고 흥을 돋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4. 여담
- 최근 오이란에 대한 정보가 퍼지면서 오해와 잘못된 정보도 돌아다니는데, 대표적으로 '오이란은 상황에 따라 매춘을 안했다', '오이란이 되면 매춘을 안했다'는 오보다. 전자는 오이란에겐 손님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서 마음에 안 드는 손님만 거절하거나, 다른 손님을 상대할 때 대기 손님들이 많았다면 휘하 신조를 대신 보내는 거였지, 매춘 자체를 안했으면 생계에 문제가 생겼기에 매춘을 아예 안한다는 건 불가능했었다. 후자는 게이샤와 조선의 일패기생과 동일시해서 헷갈린 것으로[41] , 오이란은 상류층을 상대하기 위해 귀족 여성 못지 않게 교양과 가무를 빡세게 배웠다 해도 일본 막부가 공인한 엄연한 고급 매춘부다. 애당초 고급 매춘부들은 전 세계 역사 속에 존재했다. 유럽권에는 '코르티잔(Courtesan)'이, 고대 그리스에는 '헤타이라'라고 불렸던 이들은 성관계만 하면 끝나는 단순한 매춘부로 보기 힘든 게, 귀족들이 주 상대다 보니 단순히 예쁘기만 해선 안 됐고 기품과 서화가무 풍류, 각종 문학과 교양 등 귀족들의 취미와 교육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했었으며 이들을 향유하는 귀족들도 단순히 성관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유사연애를 하는 개념으로 취미 공유나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성관계를 하는 식이였다. 한국에서 이런 오해가 도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매춘을 금지해 삼패기생들은 일패, 이패기생이 부르는 노래와 춤을 못추고 고등교육과 교양을 못갖춰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고급 매춘부라는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2]
- 미디어에서는 오이란의 인기때문에 오이란 타이틀이 붙는 식으로 흔하게 묘사되었고 요시와라가 한물 간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부터 유녀 전체를 오이란이라고 부르게 되어서 오이란이 흔한 걸로도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실제 오이란은 양성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기에 오이란을 보유한 유곽은 소수의 고급 유곽밖에 없었다. 요시와라 중기때도 유곽을 조사해보니 고급 유녀를 보유한 가게 수는 한 자리 남짓했다.
- 오이란 관련 매체에서는 타카오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타카오는 실제 존재했던 오이란의 예명으로 세습명이였다고 한다. 이 중 2대째 타카오 타유는 또다른 유녀의 나게코미데라인 사이호지(西方寺)에 유골함이 묻혀있다.
5. 대중매체
5.1. 오이란 캐릭터
- 고마카타 유미 - 바람의 검심
- 코이나츠, 다키 - 귀멸의 칼날
- 노카제 - 타임슬립 닥터 JIN
- 유우기리 - 좀비 랜드 사가
- 우스카와 타유 - 사무라이전대 신켄저[43]
- 코무라사키 - 원피스
- 히노와, 스즈란 - 은혼
- 린(치하야) - 요시와라 피안화
5.2. 오이란 컨셉 캐릭터
해당 문단은 오이란이 아닌 오이란의 외형만 따온 오이란 풍 캐릭터들이다.
6. 관련 문서
- 요시와라 유곽
- 쿠루와코토바
- 매춘부
- 성노예 - 유녀 문서에도 서술된 것처럼 오이란들은 자신들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유곽에 팔아넘기거나 유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매춘관련 기술과 가무를 배우면서 살았으며 강제적인 지출이 많아 스스로 빚을 갚지 못했고 성병에라도 걸리면 죽거나 죽는게 나을 정도로 유곽에서 쫓겨나 길거리 창부로 전락하는 일이 많았다. 설령 성병에 안걸리거나 내성이 생겨 건강하게 산다해도 27살이 넘으면 은퇴라는 이름으로 강제해지를 당했는데 이마저도 할 줄 아는게 없으니 유곽에 남아 후배를 양성하거나 오이란의 시중담당이 되는 등 미우케가 되지 않는 한 유곽에 묶인 슬픈 인생이였다.
- 죠칸지 - 유녀와 오이란들의 나게코미데라(投げ込み寺, 投込寺).
7. 외부 링크
- 블로그 포스팅
[1] 정작 한국에선 오이란의 이미지와 거의 유사한 기생의 경우 '''몸을 파는 직종이 결코 아니었다'''. 조선은 매춘을 엄금했기 때문. 덕분에 창기와 기생은 엄연히 구분되는 직종이었다. 물론 기생 중에서도 성접대를 한 경우는 있었지만 공인 매춘부는 아니였다. 기생 역시 일본으로 치면 게이샤에 가까웠다.[2] 보통 유곽의 격자창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가게인 하리미세(張見世)에 오이란은 가지 않았다. 격자창 뒤편에 있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유녀들은 주로 오이란보다 아래 계급 유녀인 코우시. 가게 밖을 지나다니는 손님 유인용 유녀들은 주로 이쪽이었다.[3] 茶屋. 발음은 자야 혹은 차야라고 했다.[4] 유곽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는 찻집은 체면을 중시하는 무사 계급의 특징상 바로 기루로 찾지 않고 유녀에게 기별을 보내 자신을 모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던 곳이어서, 말 그대로 찻집의 역할도 하면서도 간단한 밀회 장소(물론 밀회 이상의 것들(...)도 할 수 있는 자리도 2층에 마련)로도 활용되었다. 덕분에 찻집에서도 호기를 부려 유흥비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다고.[5] 이건 다른 유녀들도 매한가지여서 만약 스스로 들어온 게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의 동의 없이 억지로 팔려간 여아가 이 말투가 입에 배어버리면 출신으로 아이를 추려내서 찾기가 어려워지기도 했다고.[6] 향을 맡고 그게 어떤 향인지 알아맞추는 등 향에 대한 학식을 쌓는 것.[7] 이런 오이란들 덕에 발생한 직종이 바로 유녀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여성 미용사인 카미유이(髪結)였다.[8] 유녀들의 평균 은퇴 시기가 27세이다.[9] 유녀가 유곽에 팔려왔을 때의 몸값의 경우 보통 유녀를 판 사람들이 받아 챙긴 지 오래이며, 급이 높은 유녀가 밑에 두고 부리는 카무로와 신조의 부양 비용을 상급 유녀들이 모두 내야 해서 번 돈이 얘들 챙기느라 빠져나가기도 하고, 개인실을 가지는 중급 이상의 유녀들의 경우 여기에 더해 방세도 내야 했으며(...) 손님 받기용 치장비(옷과 머리 다듬기, 장신구 비용 등등)도 '''유녀 자신이 다 내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오이란들의 경우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빠져나가는 돈이 그만큼 많았기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 급이 올라갈수록 기본 낙적료도 천정부지로 치솟기에 유녀 일을 하던 중도에 자기를 빼낼 수준의 돈을 유녀 스스로가 마련하는 것은 어려웠다.[10] 참고로 나이가 다 차서 나간 20대 후반의 유녀들은 이제 한물 간 퇴역이었기에 일을 받기도 힘들고 잘 나가는 손님 잡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유녀들에겐 잘 나가던 시절 몸값 다 치르고 나가거나 미우케를 받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그것도 어려웠던 게 현실.[11] 유녀의 손님이 돈을 치러 유녀를 낙적시켜서 밖으로 빼내주는 것.[12] 오이란에게 그나마 이상적인 결말은 미우케였는데, 제아무리 학식과 교양이 높고 아름답다고 해도 결국 매춘만 해오던 인생인 만큼 맨몸으로 유곽에서 나가게 되면 그 뒤로 살아남기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미우케를 받게 된다면 최소한 돈줄과 보호자(남편)가 될 남자의 첩 자리라도 얻어 살 수 있었다.[13] 아래에도 나오나 오이란 전의 최상급 유녀를 가리키는 말이던 '타유'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안 쓰는 말이 되었다.[14] 그러다 보니 오이란 기믹이 있으면 자연히 색기담당 기믹도 따라오기도 한다.[15] 원문은 '오이라노 도코로노 오네상(おいらの所のお姉さん)'.[16] 머리에 머리가 없음을 말하고(즉 유녀 특유의 올림머리를 할 수 없다는 것), 어깨까지 가지런히 자른 아동기의 머리 모양, 혹은 그 머리 모양을 한 아이들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에서 이 카무로라는 말은 에도 시대의 유곽에 사는 계집아이를 가리킴과 동시에 견습의 유녀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 봐도 된다.[17] 더 아랫단계인 중급 유녀들도 1명 정도의 카무로를 밑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18] 즉 카무로 시기부터 한 후리소데 신조들과 달리 이들은 늦깎이 취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19] 카코이(鹿恋)는 후리소데 신조 다음 단계로 본격 손님 받기를 시작하는 단계인데 비용은 가장 쌌다. 텐진(天神)의 경우 카코이의 바로 다음단계이자 타유의 바로 뒷단계인 고로 취급은 카코이보다 더 좋았는데, 이들은 연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가게인 '아게야(揚屋)' 에 초청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상급 유녀들의 계급이 바뀐 다음에도 '아게야 = 상급 유녀들만 출입 가능' 이라는 규정은 여전히 지켜졌다고.[20] 와카, 차도, 화도, 향도, 서도, 바둑 등 각종 귀족 취미.[21] 18세기 중엽 요시와라에서 타유라는 말이 사라졌고, 오이란이라는 말이 이 시기에 자리 교대를 하듯 나타났다.[22] 소위 코미세(小見世)라고 불리는 곳들.[23] 즉 이쪽은 손님 유인용도 겸한다.[24] 오이란이 1등짜리면 코우시는 2등쯤 되는 지위다.[25] 그래서 자연히 오이란을 만날 수 있는 이들도 돈 많은 계층의 사람들에 한정되었다.[26] 덤으로 오이란을 비롯한 상급 유녀를 사는 것을 '머리 올리기' 라고 부르기도 했다.[27] 이런 연회장을 갖다가 히키츠케베야(引付部屋)라고 불렀다.[28] 上席, 카미자.[29] 下席, 시모자.[30] 당연히 요시와라 밖에선 오이란보다 손님 지위가 위이지만, 요시와라 유곽 내에선 오이란의 지위가 한정적으로나마 손님보다 위라는 취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1] 이 때 손님은 하시부쿠로(젓가락 주머니)를 받게 되었는데 오이란에게 인정받은 징표라 한다.[32] 겸사겸사 나지미킨(馴染み金)이라는 단골비도 내야 했다.[33] 오이란에게 있어서 미우케 말고는 일할 수 있는 적령기인 20대가 다 지나서 나가게 되거나, 그 전에 요절하거나, 아니면 은퇴 후 가게에 남아 후임 유녀 양성을 하거나, 뭐 그런 결말밖에 없어서 그나마 미우케가 노후보장이 되는 안전빵에 가까운 결말이긴 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미우케를 제대로 받을 확률도 아주 높진 않았는데, 오이란을 정식적으로 돈을 치뤄 낙적시켜 요시와라에서 빼내려면 미우케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며, 유곽 주인(보우하치)들이 사실상 맘대로 오이란의 값을 불러대서 몸값을 천정부지로 높게 제시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즉 미우케를 해주는 쪽에서도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오이란을 빼가서 첩이나 아내로 삼아주는 사례도 제법 있었다.[34] 그래도 화대는 받아낸다고 한다(...) 물론 통상의 화대 수준으로만.[35] 카츠야마라는 유명 유녀가 유행시킨 헤어스타일이라 한다.[36] 고래수염 등을 사용한 봉으로 머리를 옆으로 부풀려 안이 비춰보이게 고정시키 머리 모양으로, 등롱의 갓 같다고 해서 등롱빈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덤으로 빈(鬢,びん)은 옆으로 퍼지게 코디한 머리 모양을 일컫는다.[37] 이중 시마다 마게는 현재도 살아남은 전통 헤어스타일로, 일본 전통 신부의 혼례 때의 머리 모양이 되었다.[38] 높은 건 20cm였다는 말도 있다.[39] 이 보법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요시와라는 '외팔문자'(내딛는 발걸음이 밖으로 돌림), 교토 시마바라(京嶋原)와 오사카 신쵸(大坂新町)는 '내팔문자'(다리를 안쪽으로 돌림)로 방식 차이가 있었다.[40] 아마도 반토신조.[41] 사실 게이샤도 초창기때 매춘을 하다 막부에서 오이란과 구분짓기 위해 매춘 금지를 했다지만 오이란 문화가 쇠퇴하면서 오이란이나 유녀가 게이샤로 갈아타거나 게이샤의 손님들이 후원을 핑계로 성접대를 강요하거나 요시와라마냥 가난하거나 빚이 많은 부모가 어린 딸을 하나마치에 팔아넘기는 문제 행위도 빈번히 발생했고 조선의 기생도 양반들이 성접대를 몰래 강요하거나 매춘이 안되면 첩으로 삼아 빼돌려내는 식으로 성적 대상으로 보았다는 기록이 많다.(삼패기생은 대놓고 매춘을 한 창기였지만 국가에서 직접 관리해 매춘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일패기생 조차 정말 매춘을 안하거나 유부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대 여성 예능인들은 겉으로는 교양이니 풍류니 포장해도 결국 주 목적은 연회의 유흥과 상류층의 접대였기에 매춘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으며 매춘이 금지된 곳도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음지에서 몰래 했었다.[42] 물론 삼패기생도 정말 길거리 창부들(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거리의 창부와 일본의 요타카)처럼 싼값에 팔리는 아무나 상대하는 것은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의 재력이 있어야 만날 수 있었다. 구운몽의 계섬월과 가춘운은 매춘을 했다는 묘사가 있어 조선시대에도 기생에 대한 인식이 박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의 유녀 시스템을 굳이 기생과 비교하자면 삼패기생은 일반 유녀, 이패기생은 중상급 유녀, 오이란은 일패기생급 능력을 갖춘 이패기생으로 그나마 대응되는 수준.[43] 전생에도 오이란이었고, 이름부터가 오이란 이전에 쓰인 고급 유녀를 가리키는 타유였다.[44] 2차 각성 일러스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