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와라 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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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와라 유곽의 전경 (1872년에 찍힌 사진)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구조
5. 용어
5.1. 문서가 있는 용어
5.2. 문서가 없는 용어
6. 어두운 면
7. 미디어 매체
7.1. 만화, 애니메이션
7.2. 게임
7.3. 영화
7.4. 소설
7.5. 기타
8. 여담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및 참조


1. 개요


吉原遊廓
통칭 '''요시와라'''로 일본 에도 시대때 생겨난 거대 유곽촌(집창촌)이자 3대 유곽(교토 - 시마바라 유곽(島原遊郭), 오사카 - 신마치 유곽(新町遊郭)) 중 제일 유명한 유곽촌이다. 원래는 니혼바시(현재의 일본 니혼바시 닌교쵸) 근처였으나 에도 말기에는 니혼츠미(현 니혼츠미 1초메와 2초메로 센소지(아사쿠사)의 북쪽에 위치.)으로 옮겼으며, 지금도 근처에는 고급 사창가가 존재한다. 가까운 전철역은 이리야역이다.
이 때문에 현 타이토구 센조쿠3쵸메(와 4쵸메 일부분)는 지명 이름 에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그냥 요시와라 라고 하면 여기를 가르키는 말로 통한다.
요시와라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실제 요시와라 유곽 터가 설립된 장소가 갈대 천지였기에 붙여진 것이다.

2. 상세


일반적인 성관계만 하면 끝나는 뒷 골목에 위치한 음습한 이미지를 가진 일반적인 집창촌과 다르게 요시와라는 거대한 번화가로 유곽만이 아니라 각종 찻집과 음식점, 고급 소바와 초밥 가게, 우키요에 가게, 기모노 가게, 가부키 극장 등이 즐비했고 전성기때는 요시와라에서 만들어진 머리스타일과 패션이 일반 아녀자들에게도 전해져 유행을 타거나 정계, 재계 등 상류층의 사교장소로, 요시와라에 놀러가는 것이 일종의 흥이였다.
이 때문에 오이란뿐만 아니라 일반 유녀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배울 필요가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단돈에 팔리는 싸구려 창부는 키리미세라는 하급 가게에 소속된 유녀(가시죠로)였고 최하층은 요타카라 불리는 가게 및 요시와라 거리에서조차 장사를 못하던 신조조차 못될 나이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등으로 유곽에 쫓겨난 길거리 창부였다.

3. 역사


당시 일본은 공창제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요시와라가 생겨나기 전에도 개인이 운영하는 윤락업소는 존재했었으며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은 성질부터해서 시스템까지 일본 최초의 유곽촌에 가까웠다. 요시와라는 구 요시와라(元吉原)와 신 요시와라(新吉原)로 나뉘어져있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0년 8월 30일 에도로 입경하고 1603년에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를 창설, 당시 촌구석에 불과했던 에도를 재건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때문에 공사를 하러 온 남성 인부를 상대로 한 윤락업소가 에도 근처에 설립되고 그 수가 증가하게 되었는데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업소들이 늘어났고 이미지 관리 차원하에 유곽 이전을 종용하기도 했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막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때, 교토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쇼지 진에몬이 유곽 경영인의 대표로 나서서 유곽을 한 곳에 모아 운영해달라는 청원을 냈고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1617년) 니혼바시 근처에 터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요시와라 유곽은 1618년 11월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규모가 커졌기에 막부는 요시와라를 에도 외곽으로 옮기라고 명령을 했고 1657년 3월 2일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나면서 구 요시와라는 전소, 결국 니혼츠제(현재의 니혼츠미)로 장소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신 요시와라였다.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요시와라는 신 요시와라로 에도 말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에는 오이란의 인기가 시들고 당시에 유녀와 오이란의 뒤에서 연주만 했던 게이샤가 인기를 끌면서 정계와 재계의 중심지도 요시와라 유곽이 아닌 게이샤의 마을인 하나마치(꽃마을)로 옮겨가면서 요시와라 유곽은 침체기를 맞이해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되었고 1872년에 마리아 루즈호 사건의 영향으로 유녀 해방령이 내려지면서[1] 일반적인 사창가로 전락. 결정적으로 1956년 5월 31일 성매매 방지법이 통과되어 1957년 4월 1일에 법이 시행되어 요시와라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요시와라의 터는 소프랜드 같은 변종 성매매 업소들이 즐비한 현대적인 사창가가 되었다.

4.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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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와라 유곽 내부 지도 (1846년 기록)
지도에 나온 것처럼 북쪽 정문(그림에서는 오른쪽에 위치) 을 중심으로 구획은 십(十)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문과 이어지는 중앙의 거리가 나카노쵸라 불린 번화가로 오이란을 소개시켜주는 찻집인 하카테차야와 오이란을 불러 연회를 열 수 있는 토로, 오이란이 있는 고급 가게(오오미세)는 나카노쵸에 몰려있었고 오이란도츄(오이란 행렬)도 나카노쵸에서 했었다. 골목길에는 흔히 유곽 매체에서 묘사되는 격자창이 달려있고 그 안에 유녀들이 앉아서 손님을 끌어모으는 가게가 하리미세로 코우시급의 상급 유녀부터해서 중하급 유녀들이 있는 곳이였다. 오이란을 살 수 없는 중하급 손님들은 하리미세로 갔으며 키리미세같은 싸구려 가게는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5. 용어



5.1. 문서가 있는 용어


최상급·고급 유녀를 부르는 별칭. 모든 유녀들을 총괄하는 위치이자 교토의 유곽에서는 타유(太夫)가 대응되었다. 오이란을 포함한 유녀들의 세부 계급과 생활상같은 자세한 내용은 오이란 문서를 참고.
유녀들이 주로 썼던 특이한 어휘, 오이란코토바, 아린스코토바, 사토코토바로 불렸다.

5.2. 문서가 없는 용어


  • 나지미(馴染み)
오이란의 단골 손님. 다른 말로는 남편을 뜻하는 단나. 그러나 나지미와 단나의 사용례는 기록마다 다른데 단나만 오이란의 단골을 뜻하는 말이였고 나지미는 모든 유녀의 단골을 뜻하는 말이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이란의 나지미가 되면 부부의 연을 맻은 것으로 간주되어 다른 유곽의 오이란과 유녀를 살 수 없었다.
  • 미아가리(身上がり, 身揚がり)
유녀가 자의로 일을 쉬는 것. 그러나 이에 따른 손해 비용은 유녀의 사비에서 지출되었다. 주로 연인을 둔 유녀들이 많이 한 행위.
  • 미우케(身請け)
돈이 많은 손님이 유녀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되 첩, 정실 부인으로 삼아 유곽에서 빼내는 행위. 미우케 비용은 일반 화대 비용보다 배로 비쌌고 특히 오이란은 화대 비용이 그만큼 비싸 미우케 비용도 엄청 높았기에 미우케가 되어 낙적된 유녀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었다. 어두운 면의 문단에서 후술하듯 유녀들이 안전하게 유곽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른 말로는 낙적.
  • 요타카(夜鷹)
거리에서 매춘하는 노숙 창부의 은어. 중세 일본 성매매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존재로 쓰지기미라고도 불렸다. 쏙독새의 일본어에서 따왔으며 토메소데신조조차 못될 늦은 나이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이나 손님이 줄어들어 유곽에서 장사할 수 없게되어 쫓겨난 전직 유녀들이 대부분이였다. 주로 멍석(돗자리)를 들고 길거리 아무데나 누워서 손님을 받았으며 아예 마을 내에서 매춘을 못한다면 강가나 숲속에서 뗏목이나 오두막 하나 짓고 매춘을 했었다. 우키요에에서 멍석을 든 여인이 그려진 그림들은 전부 요타카를 묘사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40대 중년은 물론이고 70대 노년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요타카는 집이 없었다보니 야쿠자에게 의탁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나마 유곽이라는 안전지책이 있던 유녀보다 더 위험했다.
  • 요시와라의 계율
이름 그대로 요시와라에서 어기면 안되는 규정이자 어길 시에는 처형을 당했다. 보통 남성은 즉시 사형이였고 여성(유녀)는 어지간히해서 죽이지는 않고 죽지 않을 정도의 매질만 했지만 죄가 심각하다 싶으면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 마쿠라아라시(枕荒らし)
직역하면 "베게분란"인데 유녀가 손님이 잠든 틈을 타 지갑에 손을 대는 도둑질에 대한 은어이다.
  • 신주우(心中)
연인간의 동반자살. 주로 유녀가 연인이나 나지미와 같이 자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에도 막부에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부키극인 소네자키 신주가 대박나면서 이를 따라하는 연인들이 늘어나자 신주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엄히 다스렸다. 유곽이 아니더라도 신주를 하다가 한쪽만 살아남았을 경우 살아남은 이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
  • 아시누케(足抜け)
야반도주. 즉 빚을 다 갚지 않고 유곽에서 탈출하는 행위이다. 어두운 면의 문단에 후술하듯 일반적으로 빚을 갚아서 나간다는건 불가능했고 미우케도 극소수만이 가능했기에 야반도주를 시도하는 움직임은 많았다.
  • 아편 사용(阿片喫引)
말그대로 아편(마약)을 사용하는 것.
  • 유곽 내의 밀통(廓内の密通)
유녀가 손님이 아닌 유곽의 종업원과 밀회를 가지거나 사랑에 빠지는 것.
  • 카쇼우란부츠(起請文乱発)
번역하면 "기청문 남발"로 연애 편지를 남발해 노골적인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이다.

6. 어두운 면


'''태어나서는 고계(고통스러운 세계), 죽어서는 죠칸지'''
生まれては苦界、死しては浄閑寺[2]

- ''죠칸지의 공식 소개문''

참고- 귀멸의 칼날 마이너 갤러리의 요시와라에 대한 글.[3]
당대에는 인권 개념이 없었고 그 조차 근세에서야 대두되었기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은 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이기도 했으나 집창촌이라는 특성상 성매매의 부정적인 면모를 대표로 어두운 면도 매우 많았으며 하단에 서술된 요시와라 유곽을 다룬 대중매체에서도 어두운 면은 빠지지 않고 다룬다.
일본은 동아시아 3국 중 성적으로 좀 더 개방적이었고 에도 막부에 와서야 유교를 도입했다보니 중국, 조선보다 유교의 영향력이 낮았다. 그러나 풍기문란 수준으로 개방적이거나 유교를 떠나 당대 동서양 사회상이 그러했듯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잣대가 존재했으며 당시 피임 기술과 성병 치료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없는 것만도 못한 수준이였다. 때문에 어자간히 사정이 나쁘지 않고서야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겠다는 여성은 없었으며 유녀들의 사회적 인식도 좋지 못한 것을 넘어서서 인권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4] 그래서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 공급은 전부 인신매매로 이루어졌는데 아동인권 개념이 없었던 만큼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였기에 가난해서 입을 줄이거나 빚이 많다는 이유로 10살도 안되거나 성인식도 안 치른 어린 딸을 업자에게 팔아넘기고[5] 업자는 각 유곽에 파는 식으로 유녀들을 외부에 충당하거나 피임 실패로 임신한 유녀가 아이를 출산할 시 그 아이들도 유곽의 소유물이 되었기에 남자아이면 유곽 종업원(기둥서방)으로, 여자아이는 유녀로 키우는 식으로 인력을 충당했다.
이렇게 유녀들 전부는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유녀가 되었고 일정한 고용기간 내에 가족의 빚을 갚는다는 목적으로 일을 했는데 이를 빌미로 비용은 유곽에서 지원해주는게 아니라 식비부터해서 치장비용, 방세, 일을 쉴 시 발생하는 손해 비용은 전부 유녀 자신의 수입과 사비에서 지출해야했고 유곽 주인에게 뜯기는 마진세도 매우 많았으며 중급 이상은 휘하 후배 유녀(카무로, 신조)은 필수적으로 둬야했는데 카무로와 신조의 의식주나 교육비용도 유녀의 수입으로 해결하는 식이라 유녀들은 개인 재산 축적은 커녕 스스로 빚을 갚아 나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오이란은 버는 돈이 많은 만큼 지출 비용 대부분 소속된 유곽 전체에서 빠져나갔기에 오이란도 제발로 나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유녀들은 야반도주 방지로 유곽 주인의 허가가 없으면 요시와라 밖을 나갈 수 없었고 바깥 사람인 척 위장해서 나가는 것도 막기 위해 일반 아녀자들도 요시와라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특히 매춘 문제의 0순위라 볼 수 있는 성병 감염은 취약한 것을 넘어서서 창궐했는데 만일 유녀가 성병에 걸린다면? 시름시름 앓다가 갑작스레 죽거나 발각되면 유곽에서 쫓겨났는데 오갈 곳이 없으니 돗자리를 들고 거리에서 매춘하거나 거리에서조차 매춘을 못하면 아예 도시 밖으로 나가 뗏목같은 것을 띄우고 강가에서 매춘을 하는 요타카(夜鷹)로 전락해 죽는 게 나은 최악의 삶을 살았다. 이 요타카는 일반 유녀만 아닌 코우시같은 상급이나 오이란도 얄짤없었으며 죽은 유녀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売女[6]」라고 적은 뒤 대충 멍석에 말아 강가나 절 근처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식으로 방치했다. 이렇게 죽어 길가에 버려진 유녀들은 병이나 사고로 돌연사해 죽은 유녀나 요타카도 있었으나 요시와라의 계명을 어겨 처형당하거나 처벌목적으로 구타당하다 죽은 유녀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장례를 치루지 않고 길가나 절 앞에 버렸다는 것 의도가 인간으로 취급하면 뒤탈이 나기때문에 축생도에 버린다는 의미로 버린 것인데 '''즉 짐승 취급을 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이렇게 죽어 버려지는 것은 일반 유녀만 아니라 중상급 유녀와 오이란도 해당되었다.
다만 유녀들은 유곽 측에서도 중요한 상품이였기에 요시와라 계율을 심각하게 어긴 것이 아니라면 어지간히해서 죽이지는 않았고 구타만 한 뒤 유곽으로 돌려보냈지만 얼굴이나 몸에 흉터가 생기면 계급이 떨어지거나 일하는데에 지장이 생겼고 최악에는 요타카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즉 죽어도 죽지 못해도 노예 신세였던 것이다.
신 요시와라 근처에 세워진 죠칸지(浄閑寺)라는 절은 유녀들의 나게코미데라(投げ込み寺, 投込寺)[7]라는 별명이 붙여진 만큼 보통 요시와라에서 유녀들이 죽으면 죠칸지 앞에다가 내다 버렸고, 죠칸지의 승려들은 화장해주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죠칸지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공식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고 절에 들어가보면 유녀들의 유골함을 볼 수 있는데 2000개가 넘어간다. 죠칸지만 아니라 유곽 근처의 절들은 전부 유녀 전용 나게코미데라를 겸했는데 또다른 유녀의 나게코미데라인 사이호지(西方寺)는 유명한 오이란이자 세습명으로 유지한 2대째 타카오 타유의 유골함이 모셔져있다.
아무튼 상기 서술된 사정으로 인해 유녀들의 평균 수명은 약 23세. 보통 15살부터 정식 유녀가 되었는데 아무리 옛날에는 의료 문제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았다해도 유녀만큼은 심각하게 짧은 수준이며 성병 감염으로 인한 병사나 규율을 어겨 처형된 것만 아니라 당시 화장품의 주 재료였던 수은과 납 중독, 좁은 가게 내의 비위생적인 집단 생활로 인한 면역 저하와 스트레스, 낙태를 하겠다고 시술을 받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만일 운좋게 성병에 안걸리거나 성병에 내성이 생겨 건강을 유지했다해도 20대 후반이 되면 빚을 다 갚았다는 이유로 낙적이 되었으나 실상은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내쫓는 것에 가까웠고 어릴 때부터 매춘과 가무만 배웠으니 달리 할 일이 없고 유녀 시절부터 각종 이유로 돈을 유곽에게 뜯겼으니 개인 재산이 없거나 부족해서 반토신조가 되어 후배 유녀들을 양성하거나 오이란의 시중담당, 호객꾼, 뚜쟁이, 게이샤로 전직해 유곽에 계속 남게 되었다. 즉 한번 유곽에 팔려오거나 태어났다면 나이가 들거나 죽을 때까지 유곽에 묶여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착취당하고 죽으면 멍석에 말려 나게코미데라 앞이나 길가에 버려져 이름없는 시체로 잊혀지는 것이다.
결국 유녀들의 유일한 구원이자 안전하게 유곽에서 나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27세가 되기 전에 단골손님이 빚을 갚아주는 대신 첩이나 부인이 되어 유녀에서 낙적되는 것. 전문 용어로 미우케(身請け)가 되는 것이였다. 문제는 미우케 비용은 화대비용보다 비쌌고 오이란은 배로 더 비쌌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자도 미우케를 하는건 매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을 현대 자료에서는 현대적인 공창 제도가 아닌 막부가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문제점들을 묵인한 인신매매·성노예 소굴로 보고 있다.

7. 미디어 매체


오이란과 함께 에도 시대와 에도 시대 말기, 메이지 시대 초기를 기점으로 중근세의 에도(현 도쿄)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에는 요시와라 유곽 그 자체나 요시와라 유곽에서 모티브를 따온 가공의 유곽은 반드시 등장한다고 보면 된다. 특히 유녀(오이란)이 중심이 되는 창작물에서는 주요무대.

7.1. 만화, 애니메이션


  • 귀멸의 칼날 - 도깨비가 사는 유곽(유곽 잠입)편의 주요 무대로 등장했다. 유곽 잠입편의 주요 적인 다키는 오이란과 유곽 문화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캐릭터인데 자세한 것은 문서를 참고바람. 그러나 현실 다이쇼 시대에 요시와라 묘사가 아니라 완전 에도 시대의 요시와라 묘사이다.
  • 바람의 검심 - 시시오 마코토의 측근 고마카타 유미가 요시와라의 오이란이었다는 설정. 프리퀄 외전인 이막편에서는 요시와라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 원피스 - 와노쿠니편 한정. 요시와라 유곽 그 자체는 등장하지 않으나 코무라사키가 와노쿠니의 유일한 오이란에 쿄시로가 운영하는 유곽에 소속되어있다는 설정이 있으며 유곽의 존재가 종종 언급된다. 귀멸의 칼날과 바람의 검심과 다르게 유곽의 어두운 면은 안드러나거나 최대한 순화했다.
  • 염한 - 에도,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의 특징들을 섞어 창작된 가공의 나라가 모티브라 요시와라 유곽 자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유곽과 유녀, 오이란이 심심하면 나온다.
  • 은혼 - 요시와라 도원향으로 각색. 정확히는 천인과의 전쟁으로 지상의 요시와라는 전소되었지만 높으신 분들의 전용 사창가라는 특성에 주목한 각 지배층이 지하 방공호에 다시 만들었다는 식으로 각색되었다. 요시와라 도원향이 주요 무대가 되는 에피소드는 요시와라 염상편, 붉은거미편 (지라이아편, 츠쿠요편) 애염향편.
  • 오오쿠 - 남자들이 병으로 단명하는 바람에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반전된 성반전 대체역사물로 이곳의 요시와라 유곽은 남성 창기들이 가는 곳으로 바뀌었다. 단 쾌락 목적보다는 남성 귀족을 얻지 못한 지위낮은 여성들이 씨를 얻기 위한 목적이 1순위.
  • 오이란 걸 - 순정만화. 화재로 부모를 잃어 요시와라에 팔려간 여주인공이 오이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만화이다. 총 5권 완결.
  • 타임슬립 닥터 JIN - 주요인물중 하나인 노카제가 요시와라의 오이란.
  • 청루 오페라 - 무가에서 자란 여식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과정에서 목숨만 건지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신분을 숨기고 유녀가 된다. 본격적인 유녀가 되기 전 견습과정에서 고리대금업자 댁의 아웃사이더 문제아 도련님인 과 알게 되고 죽은 아버지가 누명을 쓴 정황도 알게 되는데... 미성년자 대상(!) 순정만화이기 때문에 유곽의 어두운 면은 최대한 순화한 편이지만 마냥 가벼운 분위기는 아닌 작품.

7.2. 게임



7.3. 영화


  • 사쿠란 -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로 유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화소도중 - 해당 작품도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 메트로폴리스(영화) - 작중 언급된다.
  • 요시와라의 요녀 이야기 - 1960년에 개봉된 영화로 얼굴에 심각한 반점이 나 결혼은 커녕 여성들에게 기피받던 상인이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에게 넘어가 파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7.4. 소설


  • 키 재보기 - 1895년 발표된 일본의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 당시 요시와라 유곽촌에 살던 청소년의 삶을 그렸다.
  • 에도시대 유곽의 누주로 환생했기 때문에, 유녀와 요시와라의 미래를 바꿀까 생각 - 소설가가 되자에서 연재된 소설로 라이트 노벨로 출간되었다.

7.5. 기타


  • 요시와라 라멘토 - 요시와라 유곽에 팔려간 유녀의 비애를 주제로 삼은 노래.
  • 화강루 시리즈 - 보이즈 러브 드라마 CD 시리즈로 주인수(主人受) 캐릭터들은 화강루라는 유곽에 소속된 남창들이다.

8. 여담


  • 요시와라역은 동명의 철도명으로 요시와라 유곽과 관계없는 곳이다. 이 요시와라역은 시즈오카현 후지시에 위치해있으며 요시와라 유곽에 해당되는 지역은 타이토 구 일부이다.
  • 우구이스다니역 문서는 과거 요시와라 유곽터가 있던 곳이라고 대한민국 인터넷 상에서 잘못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는 우구이스다니역이 사창가가 즐비한 거리라는 오보가 퍼져서인데 우구이스다니역의 위치는 도쿄도 타이토구 네기시 1초메 4-1로 요시와라 유곽이 있었던 타이토구 센조구 3초메와 4초메 지역과 관련이 없다.
  • 화재로 장소를 이전했다는 서술을 보면 알다시피 에도 시대때는 화재가 잦았는데 요시와라도 화재때문에 길거리마다 물통을 배치했다.
  • 당시 일본은 남색을 일종의 풍류로 인정했던 것 만큼 요시와라에서도 남창 전문 가게가 있었는데, 카게마챠야(陰間茶屋)라는 이름으로 찻집 형태로 운영했다.[8] 그러나 남색 향유층들도 진짜 동성애자는 아니였기에 이러한 남창 전문 찻집은 극소수였고 고급 남창같은 개념은 없었다.
  • 요시와라 유곽 터에 존재했던 에도 시대 때의 건물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교토에 있는 영화 세트 촬영장인 토에이 우즈마사 영화마을(東映太秦映画村)에서는 이 요시와라 유곽을 재현한 세트장을 볼 수 있다.일부 사진 보러가기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및 참조


[1] 그러나 막부 측은 유녀들에게 배상금을 물어주기 싫어서 인간으로서 해방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짐승 취급을 해 해방령을 내렸다.[2] 고계는 불교 용어로 "괴로운 인간세계"를 말한다. 한편으로는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매춘하게 된 "괴로운 유녀의 처지"를 뜻하는 은어도 담고 있다.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죠칸지는 유녀들의 나게코미데라로 유명했고, 해당 문구도 유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적인 신 요시와라 총령탑을 세우면서 읆은 시이다. 즉 요시와라 유녀들을 위한 시.[3] 해당 글은 자료 조사가 잘되어있으나 약간 오보가 있는데 요시와라역은 여담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요시와라 유곽과 연관이 없는 동명의 철도고 귀멸의 칼날의 악역인 다키(규타로, 우메)의 모친은 키리미세의 싸구려 유녀였을지언정 요타카는 아니였다. 요타카라면 유곽에 있지도 못하고 쫓겨나서 거리에서 매춘을 해야 한다.[4] 비단 성엄숙주의를 내세운 기독교·유교 문화권만 아니라 매춘부의 사회적 인식은 전 세계적으로 좋지 못했는데 종교 영향력이 낮아 성적으로 개방적인 곳도 보수적인 곳보다 그나마 나았다는거지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병 감염 때문에'''. 그래서 매춘부는 결혼 상대로서도 낙제점에 기껏해야 정부나 첩이 되었지 정실 부인은 테오도라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되지 못했으며 실제 성적으로 지나치게 개방적이여서 퇴폐적인 것을 자랑한 그리스에서도 유명한 헤타이라인 프리네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는데 그 이유가 어떤 화가가 아프로디테 여신을 그리기 위해 프리네에게 모델을 부탁해서였다. 헤타이라도 결국 고급 매춘부였기에 매춘부가 여신의 모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5] 단 이 인신매매도 부모가 합의하에 판 것만 인정되었지 아이의 부모를 속이고 요시와라에 몰래 팔거나 납치해서 파는 건 불법이였기에 불법으로 팔려온 여자아이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여자아이나 아녀자가 실종되면 1순위로 수색하는 것이 요시와라였다. 실제로도 어떤 부모는 딸을 아는 지인에게 양녀로 보냈는데 그 지인이 양녀로 온 아이를 요시와라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부모의 신고로 아이는 부모에게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었다.[6] 부정한 여자를 뜻하는 말로 보통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매춘부들을 칭하는 비속어이다.[7] 번역하면 "던져 버리는 절 "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연고가 없거나 인수인이 없는 자가 죽으면 장례를 치뤄주지 않고 아무 절에 내다 버렸기에 붙여진 별명. 유녀는 인수인이 없었고 연고가 없는 자들은 말그대로 객사한 행려인들이라 현존하는 나게코미데라에 가보면 이렇게 이름없이 죽은 자들의 유골함이나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을 볼 수 있다.[8] 참고 자료 : 요시와라에도 남창이 있었다? 카게마챠야에 대해. 해당 글에 나온 것처럼 주요 손님은 남성이였지만 소수의 여성 손님도 있었는데 오오쿠에서 일하던 시녀들이였지 유녀들은 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