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도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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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성동구의 행정동으로, 성동구의 최서북단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중구 황학동, 신당동과, 청계천 건너 북쪽으로는 동대문구 신설동, 용두동과 맞닿아 있고 안으로는 동쪽으로 마장동과, 남쪽으로 왕십리2동과 맞닿아 있다.
법정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창 번성했을 때는 각 법정동마다 산하에 행정동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도 도심 공동화를 피하지 못하고 인구가 줄어들어 행정동이 모두 통폐합되었다.
2. 지명 유래
조선 초,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금의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북으로 행당산, 서로 매봉산, 동과 남으로 청계천이 흘러 명당으로 보고 지금의 한양대 캠퍼스 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생각하던 찰나에,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소에게 "야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하자, 무학이 깜짝 놀라 그 노인에게 가서 "혹시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십니까?"하였더니 노인은 "북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보시오. 도읍이 될만한 터가 있을 것이오"라고 하자 무학대사가 그 말을 따라 십리를 더 걸어 나온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다. 갈 왕(往) + 열 십(十) + 거리 단위 리(里) = '왕십리'가 된 것이다. 바로 옆의 청량리와는 달리 왕십리의 리는 "마을 리(里)"가 아니므로 주의.
노인이 사실은 도선대사의 혼백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무학대사가 경복궁 터를 보고 나서 '그런 곳을 점지할 사람은 도선대사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동명 중에도 도선동이 있다. 무학대사의 이름도 인근 무학초등학교, 무학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하왕십리동 무학봉 등에 쓰이는 등, 도선대사와 무학대사에 관한 지명과 교명이 많다. 사극 용의 눈물 23화에서도 이에 관해 야사로서 소개한 에피소드가 나왔다.
그러나 명칭에 대한 위 유래는 신빙성이 그다지 없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인근 지역을 '왕심리'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이 표기가 변화하여 현재의 왕십리가 됐다는 설이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애초에 무학대사는 천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았았다. 오히려 하륜이나 정도전 등에 의해 천도가 구체화되었다고. 물론 그런 거 다 떠나서 태조 이성계가 기득권이 꼴 보기 싫어서 천도하자고 떼쓴 게 가장 크다..)
그러나 도읍의 중심예정지였던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는 왕십리동이 아니라 행당동과 사근동에 걸쳐져 있다. 그러니 왕십리동이 경복궁에서 십리가 아니라 한양대 캠퍼스 부지가 경복궁에서 십리인 것이다.
왕십리평(往十理坪) 또는 왕심평(往尋坪)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들판이라는 말이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왕십리 일대의 주민은 반농반상(半農半商)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곳 일대를 일명 진퍼리(진펄)라고 부른 것도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3. 역사
조선 초부터 한성부 성저십리 동부 인창방에 속했다. 현재의 사근동, 마장동, 용답동을 제외한 성동구의 나머지 지역들은 남부 두모방 소속이었다.
1911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 두모면의 서부 지역이 한지면으로 개편되었을 때, 하왕십리는 한지면으로 편입되었고, 상왕십리와 마장리, 사근리는 여전히 인창면 소속이었다. 1914년에 상왕십리와 마장리, 사근리가 한지면으로 편입된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하왕십리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성동구에 속하였다.
광복 직후에 서울시가 발간한 ‘시세일람(市勢一覽)’을 보면 상왕십리동 내에 상왕십리동부동회(東部洞會)와 서부동회(西部洞會)를, 광복 직후에 도선동 지역은 하왕십리동부동회, 홍익동 지역은 하왕십리중앙동회에서, 나머지 지역[3] 은 하왕십리서부동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1955년 동제 실시로, 상왕십리동부동회는 상왕십리제1동으로, 상왕십리서부동회는 상왕십리제2동으로, 하왕십리동부동회는 하왕십리제1동, 하왕십리중앙동회는 하왕십리제2동으로, 하왕십리서부동회는 하왕십리제3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59년 10월 30일(시조례 제165호) 상왕십리제1동을 조선시대의 인창방 이름을 따서 인창동(仁昌洞), 상왕십리제2동을 현인동(賢仁洞), 하왕십리제1동이 도선동, 하왕십리제2동이 홍익동, 하왕십리제3동이 당현동 (堂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6년 하왕십리동에서 법정동 무학동이 분동되었다.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홍익동을 폐지하고 도선동에서 도선동과 홍익동의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시조례 제981호) 인창동 지역의 일부와 현인동 지역을 중구 황학동으로 편입하여 남은 인창동 지역과 당현동을 합쳐 하왕십리제1동 관할에 두었는데, 1985년 9월 1일(시조례 제2015호)에 하왕십리제1동을 왕십리제1동으로 개칭하였고, 2008년 8월 11일 도선동과 합쳐졌다.
4. 관할 법정동
4.1. 상왕십리동
왕십리·도선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성동구의 최서북단이기도 하다. 왕십리로를 경계로 위쪽은 상왕십리, 아래쪽은 하왕십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어째 하왕십리동이 왕십리로를 넘어서 청계천 쪽으로 쑥 올라와 있다.
왕십리뉴타운 서부를 관할하며, 하왕십리동과의 경계는 왕십리뉴타운 조성 전, 구불구불한 옛 골목길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텐즈힐2단지와 센트라스아파트가 관할구역이다. 왕십리뉴타운이 완공되면 경계가 조정될 것 같았으나, 아직도 센트라스 단지는 옛 경계를 따라 하왕십리동과 나뉘어 있다.
역사 항목에서 선술하였듯이 현재의 상왕십리동은 꽤 많은 영토를 황학동에 편입시킨 후 남은 지역이다. 난계로가 중간에 놓이면서 1975년 중구와 경계 조정을 했는데, 난계로의 서부에 있던 상왕십리동의 영역이 뚝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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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하왕십리동
왕십리로를 경계로 왕십리의 아래쪽이라고 해서 하왕십리가 되었는데, 왕십리로 이북의 마장로19길 동쪽의 지역도 모두 하왕십리동이 관할했다가 홍익동과 도선동이 추후 분동되었다.
왕십리·도선동 내에서 하왕십리동이 관할하는 지역은 텐즈힐1단지 중 116, 117, 130동을 제외한 지역과 센트라스아파트 일부와 청계벽산아파트를 관할하고 있다. 상왕십리동과의 경계는 재개발 이전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생긴 것인데, 한 번 정해진 법정동은 경계 변경이나 통합이 어려워서 그냥 그대로 두고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아파트 단지는 입구를 기준으로 모두 하나의 주소를 쓰기 때문에 자신의 집이 경계에 걸쳐져 있다고 어느 동을 주소지로 써야 하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5]
원래는 현재의 중구 무학동과 신당5동도 하왕십리의 관할이었지만 1975년에 신당동에 편입되고 무학봉 동쪽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1949년 성동구에서 개교한 성동고등학교는 성동구가 아닌 중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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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홍익동
동명은 한민족의 시조 단군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따서 제정되었다고 한다.
하왕십리동과의 경계는 왕십리뉴타운 조성 전, 구불구불한 옛 골목길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텐즈힐1단지의 116, 117, 130동은 홍익동의 영토 안에 있지만, 아파트단지는 입구를 기준으로 단일 주소를 쓰기 때문에 홍익동에 걸쳐 있다고는 해도 하왕십리동의 주소를 쓴다.
실질적으로는 하왕십리동과 마장동의 경계가 되는 청계천로10길 도로는 홍익동이기 때문에 하왕십리동과 마장동이 접하지 못하고, 홍익동 본토(?)와 좀 떨어져있는 청계천로의 일부(무학교 동쪽)도 청계천로10길을 통해 이어져, 홍익동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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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도선동
고산자로와 왕십리길을 끼고 있는 도선동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그 하나는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秘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졌다고도 하며, 또 조선개국 때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고 지시를 하였는데 바로 이 노인이 신라말 도선대사의 현령이었다는 것이다.
도선동에서는 왕십리역이 매우 가까워 이용하기 편리한 만큼 도선동의 지가는 왕십리·도선동 내에서도 탑급이다.
동 전역이 주택가와 상가가 혼재해 있다. 현재의 왕십리역 민자역사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왕십리역의 배후 상권은 이 곳이었다. 특히 전풍호텔이라는 지명은 40대 이상에게 물어보면 대개 들어본 적이 있다는 반응이다. 현재는 전보다는 많이 시들해졌지만 아직도 곳곳에 먹자골목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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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리
산세가 험한 왕십리2동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동 전역이 평탄하며 청계천이 북쪽에 흐른다.
6. 상권
텐즈힐아파트 2단지 내에서 난계로와 가장 가까운 5개 동을 주상복합으로 지었고 그 안에 텐즈힐몰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바로 길건너에 황학동 주방거리가 있으며, 왕십리로를 따라 공구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홍익동과 도선동의 경우는 성동구에서 가장 큰 상권인 왕십리역이 있고, 고산자로 가변을 따라 상가나 식당가가 있다.
7. 주요 시설
7.1. 주거
7.2. 학군
왕십리뉴타운 내에 새로 생긴 서울숭신초등학교는 원래 종로구 숭인동에 있다가 도심 공동화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6] 또한, 뉴타운 안에 도선고등학교가 있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는 인근에서 다닐 수 있지만, 관내에 중학교가 없어 멀리 마장동의 동마중학교나 마장중학교 혹은 한양대사대부중으로 배정된다. 상왕십리동에서 가장 가까운 중학교는 신설동의 대광중학교지만, 학군이 달라 배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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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통
8.1. 도로
8.2. 대중교통
2호선 본선(을지로순환선)의 상왕십리역이 관내에 있고, 1호선과 2호선 성수지선이 교차하는 신설동역이 인근에 있다. 같은 2호선이라고 두 역 중 아무데서나 타지 말자. 두 역은 같은 2호선이지만 같은 노선이 아닌 별개의 노선이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도선동 쪽은 왕십리역이 가깝다.
시청과 광화문 방면으로 데려다 줄 수많은 버스 노선들이 왕십리로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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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홍익동에는 한국기원이 있는데, 바둑인들에게도 유명한 곳이지만, 바로 응답하라 1988 촬영지가 여기라는 것이다. 한국기원 앞에서 최택이 성덕선을 쓰다듬는 장면도 실제 여기서 찍었고, 극중에서도 한국기원을 가리키는 말로 홍익동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응답하라 1988의 5번째 OST인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의 앨범 커버가 홍익동 한국기원 앞이다.
[1] 2021년 1월 주민등록인구[2] 2020년 1월[3] 구 당현동[4] 하왕십리동에서 관할하는 왕십리·도선동의 면적이다.[5] 비슷한 예를 들어서 한양대학교의 경우는 법정동 행당동과 사근동의 경계에 위치하여 반으로 갈린 건물도 허다하지만 입구는 행당동이기 때문에 그냥 행당동의 지번을 쓴다.[6] 비슷한 예로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가 인구가 줄어 폐교한지 20년만에 강북구에서 재개교한 서울수송초등학교가 있다.[7] 1, 2번 출구가 도선동에 걸쳐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