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 한 그릇
1. 소개
일본의 작가 구리 료헤이 원작의 단편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로 알려졌으며, 원래는 구리 료헤이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구연하던 이야기라고 한다. 국내에서 과거 보물섬에 만화로도 나온 적이 있다.[1]
배경은 홋카이도 삿포로시다.
2. 등장인물
- 북해정 주인 부부
북해정의 주인 부부로, 주인인 사장은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으로는 정이 깊은 사람이며, 사장의 부인은 인자하고 자상한 성격이다.
늘 소바 1그릇만 시키는 세 모자를 위해 남 모르게 반 그릇 분량을 더 넣어주고, 가격을 내리며, 지정석까지 남겨주는 등 여러모로 친절한 사람들이다. 세 모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가게를 크게 확장하고 인테리어도 화려하게 바꿨지만, 그들이 매 해 앉았던 그 자리만은 바꾸지 않고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올려둔 채 그대로 놔둔다.
늘 소바 1그릇만 시키는 세 모자를 위해 남 모르게 반 그릇 분량을 더 넣어주고, 가격을 내리며, 지정석까지 남겨주는 등 여러모로 친절한 사람들이다. 세 모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가게를 크게 확장하고 인테리어도 화려하게 바꿨지만, 그들이 매 해 앉았던 그 자리만은 바꾸지 않고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올려둔 채 그대로 놔둔다.
- 세 모자
매년 섣달 그믐 밤이면 손님들이 다 나갔을 시간에 찾아와 소바를 1그릇만 시켜 셋이 나눠먹는 사람들로, 주인이 이들을 위해 소바를 몰래 반 그릇분을 넣어주며 작중에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연이 드러난다.
원래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택배기사인 남편이 운반도중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이 8명이나 부상 당하자 배상액을 갚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해야 했으며,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벌다보니 어머니의 몸이 아픈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형은 중학교에 들어서자 신문, 우유배달을 하며 살림에 보탰고 동생은 집안일을 담당하였다. 다행히 2그릇을 시킬 때 비로소 돈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두 아들이 장성하여 어머니와 함께 북해정으로 다시 찾아와 '인생 최고의 사치'인 소바 3그릇을 주문하고, 마침내 오랫동안 올라가 있던 '예약석' 팻말이 치워지게 된다.
이 무렵 형은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처음엔 소바 가게를 열 생각이었지만 동경 지부의 은행원으로 일을 한다고 언급된다.
원래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택배기사인 남편이 운반도중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이 8명이나 부상 당하자 배상액을 갚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해야 했으며,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벌다보니 어머니의 몸이 아픈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형은 중학교에 들어서자 신문, 우유배달을 하며 살림에 보탰고 동생은 집안일을 담당하였다. 다행히 2그릇을 시킬 때 비로소 돈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두 아들이 장성하여 어머니와 함께 북해정으로 다시 찾아와 '인생 최고의 사치'인 소바 3그릇을 주문하고, 마침내 오랫동안 올라가 있던 '예약석' 팻말이 치워지게 된다.
이 무렵 형은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처음엔 소바 가게를 열 생각이었지만 동경 지부의 은행원으로 일을 한다고 언급된다.
- 나미코
만화판 오리지널 캐릭터. 북해정에 일하는 직원이다.
3. 스토리
1972년부터 매년 북해정이라는 한 음식점에, 섣달 그믐달 밤에 한 어머니와 두 아들이 찾아와 소바 1그릇을 시켜 먹는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찾아와 소바 1그릇을 시켜 셋이서 나누어 먹는다. 해마다 찾아오는 가족이 안쓰러워서 사장(겸 주방장)의 부인이 "한 그릇은 서비스로 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사장은 "그런 거 없다"고 하면서도, 면을 삶을 때 면 한 그릇 반 양을 넣어준다. 두 그릇 이상을 삶으면 티가 나서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할까 봐.
그러던 어느 해에 소바 2그릇을 시키면서[2] 세 모자의 사정이 드러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로 8명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던 것.[3] 세 모자는 고생고생하며 돈을 갚았고, 돈을 다 갚은 날 소바 두 그릇을 시켜서 먹은 것. 이때 동생은 나중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소바 가게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결국 자라서 은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세 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가게를 새롭게 꾸밀 때도, 그때 세 모자가 앉았던 테이블만 바꾸지 않고 놔두었다. 어느 날 섣달 그믐날, 주인 부부는 이번에도 예약석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날 밤에는 청년이 된 아들들과 어머니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인 소바 3그릇을 시켰다. 잠시 멍하니 있었던 사장은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이 왔는데 주문 안받고 뭐하냐'는 손님의 충고에 정신을 차리고 세 모자의 주문을 받아들인다.
4. 일본에서의 평판
이야기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88년 한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면서였고, 이듬해 2월 공명당의 오오쿠보 나오히코 의원이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장에서 이 이야기를 낭독한 것을 계기로 일대 붐이 일게 된다. 명확한 교훈이랄 건 없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세 모자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결국 성공하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이야기가 한창 일본 사회에서 붐을 일으킨 1989년에 이에 대한 반발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한 허구 및 순수 창작이 아니냐는 의문이 조금씩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단 작중의 시대 배경인 1970년대 초반의 사회상을 고려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전직 만담가였던 일본의 원로 방송인 카미오카 류타로는 가게 문을 닫기 직전이라면 아마 팔다 남은 면이 있었을 테니 만약 가게 주인이 세 모자의 사정을 알았다면 3인분을 내 주었어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으며, 우동 한 그릇 붐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9년 5월 19일 후지 TV의 예능 '와랏테 이이토모'에서 MC 타모리가 우동 한 그릇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당시는 150엔만 있으면 인스턴트 소바 3개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눈물의 파시즘" 등 작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한 일이다. 실제로 토시코시소바를 가게에서 먹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보통은 일년의 마지막을 돌아보며 집에서 단란히 먹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다. 게다가 작중에서 소바 한 그릇의 가격으로 언급되는 150엔은 1970년대 초 당시의 일본 물가를 고려하면 너무 비싼 금액이었는데, 타모리의 발언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 그 돈으로 츠유와 건조면을 사서 집에 두고 먹었으면 적어도 3일은 소바로 때울 수 있다(...)
아울러 타모리의 비판을 전후로 작가를 둘러싼 각종 추문들이 하나씩 폭로되기 시작했다. 시가현의 한 소바집 주인이 지역 언론에 폭로한 일로, 구리 료헤이가 이 소바집에 세 들어 사는 동안 소아과 의사를 사칭해 마을 주민들에게서 약값 명목을 돈을 받아 챙기는가 하면, 자동차를 빌린다는 명목으로 소바집 주인에게 10만 엔을 빌려가 그대로 자취를 감추는 등 사기 행각을 저질렀다고 한다.
결국 우동 한 그릇 붐은 불과 5개월여 만에 급격히 사그러들었으며, 작가와 작품을 옹호하는 일각에서는 타모리가 유치한 비난 발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폄하했다며 탐탁찮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극히 일부의 의견이었다. 그나마도 작가의 각종 사기 행각과 학력위조와 불륜 등 각종 추문들이 폭로된 이후에는 이런 시선들도 사실상 묻혔다.
한국에서는 이런 뒷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아직도 감동적인 동화로 인식되어 있고 청소년 추천 도서에도 자주 거론되지만, 일본에서는 전술된 일련의 추문들로 인해 내용과는 상관 없이 불쏘시개 신세가 되었다. 시사 만화가 주완수가 일본인 아내 '켄짱(별명)'과 이 책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의 "그 책, 일본에선 아무도 안 봐요. 작가가 그걸 영화로 만든다고 여기저기서 돈만 받는 사기를 저질렀거든요"[4] 라는 말에 놀라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한국 쪽에서는 관련된 정보를 도통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사이트들을 여기저기 찾아봤더니 일본에서는 아주 인간 말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결국 작가는 학력위조와 영화화 판권에 관한 사기죄로 2014년까지 수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보자면 일본에서는 실체가 드러나서 제명되는 와중에 한국에서는 만화나 위인전의 주인공으로서 추앙받던 노구치 히데요와 비슷한 부류.
5. 얽힌 이야기들
한국에서는 "우동"을 먹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일본 사람들이 연말에 먹는 건 우동이 아니라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5] 라는 메밀국수다. 참고로 토시코시소바에 해당하는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없고, 그나마 잘 알려진 요리 중 따뜻한 국물과 함께 먹는 일본식 면요리가 우동이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6] 면이면 다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디 굵고 뚝뚝 끊어지는 우동 면이 아니라 가늘고 긴 메밀온면을 포기하지 않고 가늘고 길게 가는 삶의 내러티브로 삼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7]
과거 뽀뽀뽀에서는 우동 대신 떡국으로 번안해서 내보낸 적도 있었다. 새해랑 관련된 음식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떡국이 먼저 떠오르고, 일본 문화 개방 이전이기도 해서 그렇게 번안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2006년 3월에 있었던 일로, 어느 가난한 가족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입원 중이었을 때 다섯 아이가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자 이를 딱하게 여긴 병원의 간호사가 아이들에게 완탄면을 사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섯 아이 중 셋이 면만 건져 먹고 완탄을 남겨서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엄마가 이걸 먹고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주려고 남겼다는 것이다. 이에 감동한 간호사가 아이들의 사연을 소개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대만 전역에 알려지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 가족을 돕게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1개월 후인 동년 4월 투병 끝에 아이들을 남겨둔 채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으며, 당시 대만 총통인 천수이볜이 직접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한국의 좋은생각 잡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고아로 보이는 삼남매가 동생 생일이라서 중국집에 왔는데 큰누나가 동생을 챙기느라 자신은 먹지 않는 걸 보고 여주인이 기지를 발휘해서 아이들 부모의 지인인척 해서[8] 아이들이 자존심 안 상하도록 선심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엮은 만화책 '''으악! 너무너무 슬프다!'''에서도 이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어령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 에서 이 이야기를 분석해 놓았으니 관심 있는 위키러들은 참고하자.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금요일 코너 까칠한 미식가에서 황교익은 우동 한 그릇에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그 극복의 서사가 담겨있다고 한다. 일본이 버블 경제 붕괴로 인해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 소설이 소개되어 일본 내에 큰 반향을 가져 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에게는 그 당시 현실과 대비하여 격하게 공감할 여지가 있지만, 소설의 배경 당시에 우리나라는 광복을 겪고 있었을 것이므로 우리 한국인들이 공감하여 눈물이 나거나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여담으로 면 자체의 가격은 딱히 비싸지 않아서, 일본의 소바집에 가서 면의 양을 1.5배, 혹은 2배로 시키면 기본 가격에서 50~100엔만 더 내면 된다. 물론 머릿수만큼 시키는 게 예의지만, 사정도 있고 한가한 시간엔 딱히 주인이 손해보는 것도 아니니, 여의치 않으면 이렇게라도 시켜서 이왕 온 거 배불리 먹일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건 의문. 물론 이 시절엔 식권 자판기 같은 게 없었고, 직접 입으로 말해야 하니 부담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지금의 시대상과 완전히 다른 때였기도 하고.
[1] 문제집에 부록 형식으로 수록된 적도 있는데, 이 버전은 첫 번째로 소바를 시키고 계산하고 나가는 장면에 '''"아이 재수없어"'''(...)라는 괴언이 딱딱한 폰트로 작게 적혀 있다.[2] 주인은 마찬가지로 우동을 1인분당 한 그릇 반 양으로 넣어 줬다. 3인분을 준 셈.[3] 물론 보험을 들어두긴 했지만, 그 보험금만으로는 배상액이 모자랐기 때문에 매달 한 사람당 5만 엔(한화 약 50만 원)씩을 더 주어야 했다.[4] 다만, 영화 자체는 베테랑 감독이 손을 대서 그럭저럭 괜찮게 나온 편이다. 작가의 행각들 때문에 덩달아 무시당하고 있는 게 문제지만.[5] 직역하자면 해넘기기 메밀온면.[6] 소바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차가운 국물에 찍어먹거나 말아먹는 자루소바를 생각하기 때문.[7] 스즈키 나오키가 홈페이지와 어느 잡지에 이러한 이야기를 기고한 적이 있다.[8] 아이들 대화로 대충 이름을 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