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역사
1. 청동기 시대
울릉도에 고인돌, 토기, 갈돌과 갈판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동해 먼 바다에 외로이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민족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사건.[1][2]
512년에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배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나누어 싣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이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하자 항복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정벌 과정은 삼국 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는데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여기에서 착안해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 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 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아슬라주(阿瑟羅州)[3]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4] 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 마립간
관련 설화가 울릉도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바로 우해왕과 풍미녀#
그래도 신라의 직할령에는 편입되지 않고 존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신라는 외왕내제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5][6]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복속 이전 우산국 시절이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전에 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이후부터라고 한다.
종교는 언젠가부터 신라를 따라 불교를 받아들인 듯. 훗날 고려시대 김유립이 거의 빈 섬이 된 울릉도를 조사했을 때 사람은 없지만 돌로 만든 탑과 불상, 쇠로 만든 종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지리지에 있다.[7]
3. 고려시대 이후
후삼국시대인 930년(고려 태조 13년), 우릉도주가 보낸 사신 백길(白吉)과 토두(土豆)가 고려로 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공 관계가 생겨났다.(고려사절요, 동사강목)
신라에 이어 고려 때까지 느슨한 조공 관계가 계속되었고, '고려에 복종하는 고려 본토 바깥의 작은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1004년에 우산국 사람들이 일본까지 표류해서 양식을 주고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일본 기록에서 최초로 울릉도를 언급한 사례다. 여기서도 우산국을 고려의 속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18년, 1019년에 여진족 해적의 공격을 몇 차례 받았고[8] 약탈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웬 뜬금없이 여진족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려 초기엔 지금의 함경도가 여진족 땅이었고[9] , 지도를 보면 함경도에서 내려오면 울릉도가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다. 참고로 1019년 여진족 해적들은 쓰시마 섬, 일본 본토 일부까지 약탈할 정도였으니 중간에 끼인 우산국은 뭐 말할 것도 없다.
1022년 결국 못 견디고 고려 본토로 도망쳐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禮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정착하게 했다.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이 때 망했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나중에 텅 빈 섬이 되는 걸 봐선 우산국이라는 나라는 이 때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 할 듯.
4. 우산국 관련 기록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ㅡ 《태종실록》
于山島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及業掌空 南峯梢卑 風日清明則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説于山鬱陵本一島 地方百里
우산도와 울릉도또는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 두 섬이 이 현(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허공에 있는데, 남쪽의 봉우리는 약간 낮다.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고,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 리에 걸쳤다 한다.
ㅡ 《신증동국여지승람》
우산도(지금의 울릉도)는 고려 중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다.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 산구(黑色 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하략)
ㅡ 《세조실록》
1032년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고려 조정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직 토착 세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 전까지는 나라처럼 우산'국'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행정 구역처럼 우릉'성'으로 나온다. 이 행정 구역의 변화를 여진 해적 피해로 인한 위상 약화로 보기도 한다. 혹은 이전의 백길과 토두와는 달리 이름이 굉장히 길고 이상한데 어쩌면 차후에 여진 해적이 일부 눌러앉으면서 언어와 종족 구성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후 1141년 울릉도(蔚陵島)에 사람을 보내 과핵(菓核)과 나뭇잎 중 이상한 것을 취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1157년 울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게 하는데 거의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는 무인도처럼 묘사한다.
제주도와 탐라국이 직접 단절될 법한 사건 없이 탐라국 국민의 혈통이 대체로 제주도로 쭉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당대 우산국 주민들은 여진족 해적의 침략을 받아 대부분은 한반도 본토 울진군 지역으로 이주했고 조선 시대에는 공도 정책으로 인해 한때 거의 사람이 없는 텅 빈 섬이 되었다. 현재 울릉도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19세기 ~ 20세기에 주로 경상도에서 새로 이주한 주민들로, 옛날 우산국에 살았던 주민들과는 큰 관련은 없으며, 우산국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울진군의 경우에는 현재에는 경상북도에 속해있지만 1963년 이전에는 강원도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와 거리차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사람들의 언어가 본토 경상도 사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