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군/역사
1. 울릉도에서의 사람의 거주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은 청동기 시대때부터로 추정되는데 대락 기원전 4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 경까지의 고인돌이 발견되는것을 보면 이 즈음해서 군장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짐작할수있다. 삼국지에는 위나라 장군 왕기가 옥저로 도망친 동천왕을 추적하다가 어떤 노인에게서 '바다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는 소문을 듣는데, 이것이 역사상 울릉도의 첫 등장으로 추정된다.
2. 우산국의 성장과 쇠망
이후 울릉도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자리잡는다.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의 우해왕은[1] 대마도(!)까지 쳐들어가서 담판을 지었을 정도라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찌되었든 512년에 신라 지증왕 때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입에서 연기가 나는 나무 사자상을 보여주며 따르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놓겠다는 야바위를 시전하여 우산국을 정벌한 사실은 상당히 유명하다. 신라-우산국 전투 참고.
3. 신라에 복속된 이후의 울릉도
이후 신라에 복속되었고 신라를 통해 한반도 본토에서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물을 도입했다. 당시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울릉도 곳곳의 여러 고분들인데,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복속 이전 우산국 시절이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전에 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이후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역사를 알수있는 고분들은 일본인 도굴꾼들에게 대거 약탈당하는 바람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어 상당수가 미지에 쌓여있다. 또한 고려중기까지만 해도 탐라국처럼 일종의 왕국으로 유지되었던 만큼, 우산국에도 도성과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우산국의 궁궐터는 발견되지 않고있다.
후삼국시대에는 '''우릉도(芋陵島)'''에 독자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아[2]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워낙 육지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이러한 독립성은 더욱 강해져서, 이들은 다시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정도.
4. 후삼국시대의 울릉도
우산국은 512년 이사부에 의하여 신라에 복속된 이후 잘 지내다가 9세기 말 신라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후삼국시대의 난세가 시작되자, 바다 건너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적당히 지켜보다가,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생각해 930년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라는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하기를 원했다. 왕건은 백길과 토두에게 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이 우산국은 1018년에 동북여진족의 침략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1032년에는 우산국에서 다시 호족 단위로 격하된 '''우릉성(羽陵城)'''이 고려 조정에 조공을 바쳤고, 115년 뒤인 1147년에는 고려의 명주도감창사 이양실이 사람을 보내 '''울릉도(鬱陵島)'''를 조사한 것으로 미루어 울릉도의 독자적인 정치체는 이 기간 사이에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5. 여진해적의 울릉도 약탈
이런 가운데 1157년에는 고려 의종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보였다가 울릉도를 현지 조사한 김유립의 부정적인 보고에 논의를 중지하기도 했고, 최충헌도 한때 사민정책을 벌여 울릉도 개척을 시도했다가 풍랑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울릉도에는 이러한 사민정책 이외에도 국가의 통제를 피해 자발적으로 들어가 산 사람이 있었고,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에도 울릉도에 촌락 터가 7곳 있었다고 한다.
6. 고려시대의 울릉도
고려 때까지 느슨한 조공 관계가 계속되었고, '고려에 복종하는 고려 본토 바깥의 작은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1004년에 우산국 사람들이 일본까지 표류해서 양식을 주고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일본 기록에서 최초로 울릉도를 언급한 사례다. 여기서도 우산국을 고려의 속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18년, 1019년에 여진족 해적의 공격을 몇 차례 받았고[3] 약탈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웬 뜬금없이 여진족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려 초기엔 지금의 함경도가 여진족 땅이었고, 지도를 보면 함경도에서 내려오면 울릉도가 그렇게 멀지는 않다. 참고로 1019년 여진족 해적들은 쓰시마 섬, 일본 본토 일부까지 약탈할 정도였으니 중간에 끼인 우산국은 뭐 말할 것도 없다.
1022년 결국 못 견디고 고려 본토로 도망쳐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禮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정착하게 했다.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이 때 망했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나중에 빈 섬이 되는 걸 봐선 이 때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 할 듯.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ㅡ 《태종실록》
于山島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及業掌空 南峯梢卑 風日清明則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説于山鬱陵本一島 地方百里
우산도와 울릉도또는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 두 섬이 이 현(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허공에 있는데, 남쪽의 봉우리는 약간 낮다.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고,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 리에 걸쳤다 한다.
ㅡ 《신증동국여지승람》
우산도(지금의 울릉도)는 고려 중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다.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 산구(黑色 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하략)
ㅡ 《세조실록》
1032년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고려 조정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직 토착 세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 전까지는 나라처럼 우산'국'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행정 구역처럼 우릉'성'으로 나온다. 이 행정 구역의 변화를 여진 해적 피해로 인한 위상 약화로 보기도 한다. 혹은 이전의 백길과 토두와는 달리 이름이 굉장히 길고 이상한데 어쩌면 차후에 여진 해적이 일부 눌러앉으면서 언어와 종족 구성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후 1141년 울릉도(蔚陵島)에 사람을 보내 과핵(菓核)과 나뭇잎 중 이상한 것을 취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1157년 울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게 하는데 거의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는 무인도처럼 묘사한다.
1259년 고려와 몽골 전쟁 막바지 즈음, 울진현령 박순(朴淳)이 가족,노비,재물을 싣고 울릉도(鬱陵島)로 가려는 것을 백성들이 알아채고 박순을 잡아서 막았다. 배에 실은 재물들은 뱃사람들이 그대로 가지고 울릉도로 튀었다.
[4]
제주도와 탐라국이 직접 단절될 법한 사건 없이 구성원의 혈통이 대체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당대 우산국 주민들은 여진족 해적의 침략을 받아 대부분은 울진군 지역으로 이주했고 조선 시대에는 공도 정책으로 인해 한때 거의 사람이 없는 텅 빈 섬이 되었다. 현재 울릉도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19세기 ~ 20세기에 주로 경상도에서 새로 이주한 주민들로, 옛날 우산국에 살았던 주민들과는 큰 관련은 없으며, 우산국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울진군의 경우에는 현재에는 경상북도에 속해있지만 1963년 이전에는 강원도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와 거리차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사람들의 언어가 본토 경상도 사투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울릉도 주민들의 본토 이주가 없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제주어(제주 방언) 수준으로 이질적인 고유 언어 또는 방언이 존재했을 것이다.
7. 공도 정책의 시행
하지만 조선은 왜구의 출몰에 맞서 이러한 섬의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1403년 조선 태종은 강원도의 '''무릉도(武陵島)''' 거주민에게 모두 육지로 나오도록 명하였고, 이에 쓰시마에서는 무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조선 조정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한다는 내용.
그럼에도 군역을 피해 무릉도에 들어가 산 사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1416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무릉도에 보냈지만, 무릉도 주민 86명 가운데 김인우를 따라온 것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이에 태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울릉도 주민을 끌어낼 것을 논의하게 했는데,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황희가 홀로 쇄출에 찬성하는 바람에 결국 진행되었다. 이게 1417년.
그 뒤로도 조선 조정에서는 무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공도 상태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의 독도로 추정되는 우산도(于山島)가 발견되어 일부 이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몰래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모두 정착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1614년에는 쓰시마 번주가, 1615년에는 일본 선박이 각기 '''이소다케시마(磯竹島)'''와 '''다케시마(竹島)''' 안내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 당초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가리켜 '다케시마' 또는 '이소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명명하며 편입한 이후의 일이다.
8. 안용복의 도항과 쟁계
하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25년부터 1691년까지 66년 동안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가문에게 매년 번갈아 도해면허가 발급되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업을 일삼았고, 마침내 1692년에는 조선인 어민과 충돌하여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하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693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자 안용복 등을 일본으로 잡아갔고, 이들을 조선에 송환하는 과정에서 쓰시마 번주 소오 요시쓰구(宗義倫)는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보내 "다케시마에 조선 배가 드나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상의 영토 요구에 대해 남인의 온건대응론이 대세를 차지한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인 울릉도라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다른 섬이야 당연하다"는 답서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5]
그러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마사시게가 파견되어 답서에서 울릉도 언급을 빼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이미 1694년 갑술환국이 벌어진 조선 조정은 강경대응론으로 선회하여 오히려 전에 보낸 답서를 취소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한 섬을 두 이름으로 부른 것이니, 일본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답서를 새로 보냈지만 마사시게는 그 뒤로도 10개월을 버티며 답서의 수정을 요구했다.[6]
그러던 중 1695년 요시쓰구가 죽고 소오 요시미치(宗義倫)가 새로이 쓰시마 번주가 된 가운데, 마사시게는 본국에서 자신을 소환하자 한동안 조선 조정과 논쟁을 벌이다 마침내 열폭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 12월 돗토리번에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독도)의 일을 문의했던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는 이듬해인 1696년 1월 소오 요시미치가 입근한 자리에서 "다케시마는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볼 수 있으므로,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했다.
한편 안용복은 이러한 정황에 힘입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울릉도와 자산도(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꾸짖어 내쫓고,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11명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호키(伯耆)에서 번주와 만나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는 엄중 처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러한 일본 측의 도해 금지 결정이 조선 측에 통보된 뒤에도, 조선 조정의 답신 여부와 그 내용을 두고 한동안 이어지던 이 문제는 1698년 조선 조정의 답신이 쓰시마 번을 통해 에도 막부로 전달되고, 다시 1699년 쓰시마 번의 답신이 조선 조정으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종료되었다.
또 여담이지만 18세기 후반, 서양 선박들이 동해를 탐사를 하기 시작을 하면서, 지도에 울릉도를 '''다줄레(Dagelet)'''로 지도에 적었다.
9. 울릉도 개척과 그 이후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지던 조선의 공도 정책은 1881년에 일본인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 벌목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고종은 일본 정부에 이를 항의하는 한편,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해 울릉도에 파견하면서 조만간 울릉도에 행정 구역을 설치하려는 뜻을 드러냈다. 그리고 1882년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돌아오자, 임오군란이 수습된 직후 울릉도 개척 방안을 공표해 김석규(金錫奎)를 도장(島長)으로 임명하고 5년간 면세 조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김옥균(金玉均)을 개척사(開拓使)로 임명하면서 울릉도 개척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울릉도 이주 정책과 토지 개간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속적인 항의를 통해 울릉도에 불법 침입해 벌목을 자행하던 일본인 254명을 그해 9월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이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 등이 축출된 뒤에는 울릉도민 서경수(徐敬秀)를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하고 월송만호가 도장을 겸임하도록 해서 개척사업을 이어나갔지만, 서경수는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2월에는 다시 도장을 설치하고, 이듬해 8월에는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격상시켜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더불어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인의 벌목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한제국은 1899년 내부관원 우용정(禹用鼎)을 시켜 다시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과 더불어 1900년 울릉도 관제개정안을 발표하여 도감을 감무(監務)로 개칭하기로 하였으나, 도중에 개정안을 바꾸어 울릉도에 정식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군수(郡守)를 두며, '''강원도''' 관할에 둔다는 '칙령 제41호'를 공표하였다. 이 당시 군의 명칭은 '''울도군'''이었다. 1906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1915년 울도군은 울릉도(島)로 개칭되었으며[7] , 군수(郡守)는 도사(島司)로, 군청은 도청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울릉도에서 울릉군으로 다시 개칭되었고, 도사 직책도 군수로 환원되었다.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되었다.[8] 2000년 울릉읍 도동리로부터 독도리를 신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