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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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롯데 자이언츠와 SK 와이번스의 포수이자 한화 이글스,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kt wiz의 배터리코치.
2. 선수 경력
1970년 1월 5일 부산광역시 출신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대신초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를 거쳐 경남상업고등학교 시절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쳐 단국대학교(88학번)를 졸업한 후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첫 해 주전 포수 김선일의 백업 포수로 뛰면서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포수로서 .303의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존재감을 뽐냈다. 그 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어 비록 경기에 출전은 못했지만 롯데의 두 번째 우승의 순간을 함께 했다.
이듬해인 1993년은 방위복무와 병행하느라 출전 경기수도 대폭 줄었고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역 후 맞이한 1994년은 김선일과 포수 마스크를 번갈아 쓰며 사실상의 주전 포수로 활약. 타격에서도 시즌 내내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하며 당시 롯데가 주전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복무로 인해 전력의 크게 약했해졌음에도 시즌 중 나름 4강 싸움도 하면서 선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타율은 .286로 마무리했다.
1995년은 상무에서 제대하고 전해 롯데에 입단한 동갑내기 포수 임수혁이 마해영과 마림포를 결성하고 장타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강성우 본인은 정규시즌에서 타율 .222에 그치는 등 예년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수비에 있어서는 임수혁보다 한 수 위였기에 꾸준히 중용되었으며, 특히 이 해 포스트시즌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정규시즌 20승에 빛나는 당시 최고의 좌완투수 이상훈으로부터 2회초 선제 3점 홈런을 날리고 연장전에서 결승 적시타를 때리는 등 타격에서 5타수 3안타 5타점으로 펄펄 날고, 수비에서도 기가막힌 홈 블로킹으로 득점을 위해 홈으로 달려드는 LG 주자들을 무려 세 차례나 횡사시키는 등의 엄청난 활약으로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는 강성우 역대 커리어 단일경기 최고의 퍼포먼스로 종종 회자된다. [2]
9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롯데의 안방을 지켰고, 특히 1999년에 차명주를 내주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최기문이 가세했음에도 본인의 한 시즌 최다 경기인 112경기를 출전했으며 공격에서도 .283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존재감을 뽐냈다. 이 시즌 팀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를 거뒀고 시즌이 종료된 후 차기 시즌 주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0년은 주장이었음에도 최기문과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밀려나 출전 경기수가 51경기로 크게 줄어들었고, 타격에서도 .192의 타율에 그치며 크게 부진했다. 결국 2000년 시즌 후 포수 손석만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됐으며 그 이후 고향 팀이자 친정 팀인 롯데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양용모, 장재중과 경쟁이 있었는데, 장재중은 2001년 4월 LG로 트레이드됐다.
그 후 양용모, 김동수(2002년 이적)과 함께 경쟁을 벌여 SK 와이번스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힐 듯 싶었지만, 그나마 2001년 트레이드 첫 해 110경기에 출전한 이후 매년 출전 경기수가 점점 줄어갔다. 특히 2003년부터는 FA로 풀린 박경완의 영입으로 인하여 주전 포수뿐만 아니라 백업 포수인 정상호와의 경쟁 면에서 입지가 더 좁아졌다. 결국 2군을 전전하다가 2005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FA를 신청하지 않고 구단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쓸쓸하게 은퇴했다.
현역 시절에는 경기의 흐름을 읽는 센스, 투수 리드, 근성, 정확한 견제구 등 수비형 포수로서의 장점을 두루 갖춘 선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러브 후보에 여러차례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아예 방망이를 못 치는 것도 아니었던게 신인 시절 3할 타율을 기록했고, 1994년과 1999년에도 2할 8푼대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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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배터리코치 시절.
현역 은퇴를 선언한 후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 코치를 맡아 2006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투수의 쿠세(버릇)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 선수로서 은퇴한 후, 배터리코치로 삼성에 들어갈 때 SK를 상대로 영 좋지 못한 성적을 보여 주던 삼성의 승률을 확 뒤바꿔 놓았을 정도.[3] 특히 강성우 코치의 능력이 더욱 돋보였던 건 2006년 7월 6일 대구 경기.
이 날 SK의 조범현 감독은 지난해와 달리 삼성에 밀리며 삼성전에 8연패를 기록하자, 당시에 무명이었지만 삼성 킬러로 삼팬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좌완투수 고효준을 선발로 기용했다. 여태껏 삼성 타자들은 고효준을 상대로 매번 끌려다니기만 했지만 이날 경기에서는 원래 제구력이 들쭉날쭉했던 고효준이 자멸하도록 기다려 고효준을 조기 강판시키고 곧이어 구원 등판한 송은범마저 난타하며 2회말에만 선발 전원이 득점을 기록하는 등, 17:1로 대승을 거뒀다.[4]
3.2. 한화 이글스 시절
2009년 시즌 후 한대화 삼성 수석코치가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한화 이글스의 배터리코치로 스카웃되었다.쿠세를 읽는 기술뿐만 아니라 배터리코치로서의 능력도 뛰어나서 한화로 이적할 때 삼성 팬들이 몹시 아쉬워했다.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으로 2군 배터리코치를 맡았으나, 2012시즌 종료 후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면서 계약 해지 수순을 밟았다.
3.3. 두산 베어스 시절
2012년 10월 23일 김민재, 문동환과 함께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1군 배터리코치.
잠실에서 열린 201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정명원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와 작전 지시를 한 후, '''파울라인 안으로 들어 와 최재훈에게 작전 지시를 하여''' 당시 선발이자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강했던 유희관이 조기 강판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파울 라인 안 으로 들어 온 것이 코칭스태프의 마운드 방문으로 인정 되어 한 이닝에 2번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올 경우 투수를 반드시 교체 해야 한다 는 규정이 적용되었기 때문인데, '''코치가 야구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선발 강제 강판의 원인을 제공 하였기에''' 강성우 코치는 가루가 되도 록 까였다. 게다가 이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삼성 라이온즈에 1승을 내주었고, '''결과는 역스윕.... 그리고 돌진욱은 이에 책임을 지고 목이 날아갔다!'''
2014 시즌 들어 투수들이 난타를 당하며 권명철 투수코치와 함께 책임자 신분으로 까이던 중, 6월 24일 자로 김진수 2군 배터리코치와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보도자료는 아직까진 없지만 쇄신 차원에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즌 후 두산 베어스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3.4.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2014 시즌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 세리자와 유지 배터리코치의 후임으로 안현호 단장이 직접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다시 옛 친정 팀으로 돌아온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지만, 삼갤 등에서는 멍게 강점기 시절의 배터리코치였다는 이유로 인해 싫어하는 의견이 있다.
일단 2015년 시즌은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지영과 이흥련 모두 도루저지율이 리그에서 최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일취월장했고, 그 외 수비 기본기가 역시 많이 좋아져 진갑용이 마음놓고 은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도.
하지만 시즌이 진행될수록 볼 배합 문제[5] 로 투수들이 흔들리면서 나쁜 쪽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김태한과 동급 혹은 그 이하로 묶은 사람이 있을 정도.
결국 본인을 다시 삼성으로 부른 안현호 단장의 해임을 시작으로 찬바람이 불던 2016 시즌 후, 삼성이 세리자와 유지 배터리코치를 다시 부르면서 재계약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그 후 김진욱 감독의 부름을 받아 김용국 수비코치와 함께 kt wiz에 합류했다.
4. 기타
- 1997년 국민은행 여자 농구단 출신이며 여자농구 국가대표 포인트 가드였던 이강희[6] 와 결혼.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 현재 아내 이강희는 KBL의 수도권 기록원으로 활동 중이고, 장녀는 골프 선수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얼굴 찌푸리며 슬라이딩 하는 선수는 정수근[2] 그당시에는 포스트시즌 데일리 MVP 수상이 없었는데 있었다면 MVP가 될수 있었다.[3] 강성우가 박경완과 함께 포수를 보던 2005년까지 삼성은 지난 3년간 SK를 상대로 24승 4무 28패로 열세였지만, 강성우가 배코로 온 2006년에는 13승 5패로 뒤집혔고, 김성근 감독 부임 첫 해이자 SK가 통합 우승을 따낸 2007년에도 8승 2무 8패로 다른 팀들이 탈탈 털리는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상대 전적에서 동률을 만들었다. [4] 덧붙이자면 이 날 박살난 고효준이 다시 삼성에게 복수하기까지는 무려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5]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한다. 첫해로는 쏠쏠히 재미를 봤으나 2016년 현재 타 팀도 이 카운트 승부를 다 알기에 흘러보내어 볼카운트를 불리하게 만들거나 아예 노리고 장타를 만들어낸다. 투수진의 피홈런이 늘어난 이유가 구장의 문제, 투수진의 기량 저하가 가장 크나 볼배합 문제도 크다. 또한 작년 백업포수 역할을 잘 해준 이흥련의 추락도 한몫하나, 이흥련은 미필이고 선수 본연의 문제일 수도 있기에 간간히 언급된다.[6] 당시 실업단과 금융단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시절 금융단쪽을 대표하던 포인트가드 였고 팀의 레전드였지만 전형적인 국내용 선수라는 평가가 많았던 선수였다. 확실히 국가대표로는 실적이 없었으며 이강희가 활동하던 시기는 농구붐 시대였는데 이때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 엄청난 선수들이 많았던지라...더군다나 힘은 있었지만 발이 느린편에 피지컬이 썩 좋은편도 아니어서 국제무대에서는 잘 통하지 않을 타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