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인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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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인도'''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중세
2.3. 근세
2.4. 근대
2.5. 20세기
2.6. 21세기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


이란인도의 관계. 이란인도는 종교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1], 전통적으로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고대부터 이란과 인도는 역사적인 관계가 매우 깊었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인도아리아인[2]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로 이주하였다. 이후 이란과 인도는 종교적, 언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례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마를 데바(Deva)라고 칭했는데 반해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 사이에서는 신을 데와(Deva)라고 칭했다. 서로 연관이 있되 적대하는 사이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왕을 뜻하는 라자(Raja), 땅을 뜻하는 스탄(~Sthan) 같은 어휘는 매우 흡사하다. 이렇듯 이 두 문화권과의 연관성은 인도 브라만교경전이었던 베다어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 사용된 아베스타어 사이의 상호유사성으로 입증이 된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인더스 강 일대까지 조공을 받아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란을 정복한 뒤에 인도 접경까지 정복했던 적이 있지만, 결국 철수했다.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경우처럼 이란계 왕조가 인도 문화권 북서부에 왕조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쿠샨 왕조 시절에는 페르시아에서 미트라교가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유입되어 불교 미륵 신앙의 기원이 되었다. 한 때는 파르티아 동부에 불교가 번성했으나 이후 등장한 3세기 등장한 사산 왕조조로아스터교 중흥 정책을 펴고 불교를 탄압하면서 불교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2.2. 중세


사산 왕조의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니가 기독교 영지주의와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교리 및 불교와 자이나교 수행 방식을 합쳐서 마니교를 창시했다. 불교와 자이나교 교리에서는 꿀 대신 설탕과 사탕수수를 먹을 것을 권장했는데, 엄격한 채식주의 교리를 가지고 있던 마니교도 이를 수용하여 덕분에 사탕수수와 설탕이 페르시아 민간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가 이란의 사산 왕조를 정복해서 이란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당시에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페르시아인들이 인도로 많이 이주를 했다.[3] 이들은 파르시라고 불린다. 사산 왕조가 아랍에 정복당한 뒤, 아랍 세력은 호라산 지방을 통해 인도 북서부를 정복했고 아랍의 영향으로 인도에도 이슬람교가 퍼지게 되었다. 호라산의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과 동화된 이후 가즈나 왕조 같은 이슬람 왕조가 호라산 및 인도 북서부를 장악하였다.
또한, 집시들이 이주한 경로이기도 했었다.

2.3. 근세


그리고 무굴 제국 시절에는 페르시아어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페르시아어가 무굴 제국 궁중 용어에 영향을 주어 힌디어, 우르두어, 벵골어 등이 생겨났다. 특히 우르두어는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를 사용한다. 동시에 인도는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의 문화에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이란과 교류가 많았다. 다만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 문화를 애호한 자체와는 다르게 시아파 사파비 제국과는 거리를 두고 대신 같은 순니파 이슬람인 오스만 제국과 더 친한 관계였다. 사파비 왕조 초창기에는 순니파 페르시아인들이 무굴 제국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사파비 왕조의 몰락 이후에는 나디르 샤가 이끄는 아프샤르 왕조 군대가 무굴 제국을 초토화시키고 델리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

2.4. 근대


1857년 무굴 제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멸망당하며 인도 전역은 공식적으로 영령 인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고, 반대로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끼어서 완전 식민지 상태는 면했으나 BP plc사에 심각한 경제적 수탈을 당하며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근대사에서 비롯된 반영감정 면에서 둘은 동변상련 관계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과 카자르 왕조는 발루치스탄 지방을 통해 서로 직접 영토를 맞대고 있었다.

2.5. 20세기


이란의 팔레비 왕조와 인도는 1950년 3월 15일부로 서로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란은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가 2010년대 후반부터 심화되기 전에는 이란산 원유 상당량이 인도로 수출되기도 했다.

2.6. 21세기


현대에는 인도내에도 이란어 계열 다리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이 카슈미르 지방 일대에 거주하며 이 외에도 파르시라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란에도 인도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인도는 이란과 지금까지도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두나라도 상하이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다. 또한, 인도와 이란은 러시아와도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두나라는 아프간 문제, 아프간 재건에 대해서는 협력을 하고 있고, 2001년에 러시아, 이란, 인도는 당시에 탈레반에 대항중이었던 아프간의 북부동맹에 대한 지원을 모색한 적이 있었다.# 2003년에 이란의 모하메드 하타미 前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면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2016년 5월 22일에 모디 총리는 이란을 방문해서 2001년 이후 15년만에 이란을 찾는 총리가 되었고, 양국간의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2018년 2월 19일에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의 차바하르 항을 임대하는 협약을 이란측과 체결했고 동시에 이란과 아프간을 연결하는 새로운 해로 운송망이 열리게 되었다.[4]## 그리고 인도는 미국의 이란제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8월에 인도는 이란산 원유 수입을 절반으로 줄이는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의 이란 제재로 인해 인도도 홍차를 인도에 수출하는 것에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의 이란 제재 이후에도 원유를 계속 수입하는 것을 이란측과 계약했다.# 2018년 10월 31일에 러시아의 리아노보스티는 러시아, 이란, 인도가 수에즈 운하를 대신할 대체 운송로 개설에 논의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1일에 힌두스타타임스는 인도가 아프간과 이란을 잇는 철도를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8년 11월 5일이후, 미국은 이란제재를 시작했지만, 인도를 포함한 8개국에 대해선 한시적으로 이란 제재를 면제해줬다. 그리고 차바하르 항은 이란 제재에서 제외되었다.#
2019년 1월 7일에 인도를 방문한 이란의 외무장관은 이란의 전통적 우방인 중국, 러시아, 인도와 경제 협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란측이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는 과정에서 승무원중에 인도인이 포함되어 있단 사실이 알려지자 인도측은 영국과 함께 선원18명의 석방을 위해 이란측과 접촉했다.#

3. 문화 교류


인도와 이란은 양국간의 교류도 많아지면서 인도에서도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인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무굴 제국때에는 이란의 문화가 인도 문화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언어외에도 음식 문화에서 이란의 영향이 남아있다.
이란과 인도는 전통적으로 경제와 문화적인 것에서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5]
인도와 이란은 문화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인도 요리이란 요리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고 인도 요리가 이란 요리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4. 관련 문서


[1] 이란은 시아파가 주류이며 인도는 힌두교수니파가 주류다. 다만 이란에도 소수의 수니파 신자들이 있으며 반대로 인도에도 소수의 시아파 신자들이 있다.[2] 이란인과 인도인의 공통조상이던 아리아인은 원래 코카서스 근처에 기원한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으로, 동진하기 시작하여 이란 고원쪽으로 내려가 엘람인들을 정복한 이들은 메디아인의 기원이 되고, 그보다 더 동쪽으로 간 이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인도아리아인이 되었다.[3] 오늘날 조로아스터교의 신자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국가는 이란이 아니라 인도다.[4] 그외에도 인도측은 중국이 과다르 항을 이용하자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차바하르 항을 이용하고 있다.[5] 이러한 경향은 고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어힌디어, 우르두어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우르두어는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인 나스탈릭체를 사용한다.[6] 인도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