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역사

 





1. 개요
1.1. 인도 고대의 역사 기록 전통
2. 문명의 발생
3. 국가의 발전과 신 사상의 발흥(BC 700 ~ BC 300)
4. 마우리아 제국(BC 321 ~ BC 184)과 해상 교역
5. 분열의 시대 - 고전 시대의 개막(쿠샨 왕조, 굽타 왕조)
6. 지방 왕조들의 성립과 힌두교의 성장(550년 ~ 1206)
7. 인도 이슬람 제국시대(1206 ~ 1526)
8. 무굴 제국(1526 ~ 1858)의 인도 통합과 문화
9. 영국령 인도(1858~1947)와 독립운동
10. 독립과 인도 공화국
11.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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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의 프리스코화
땅이 넓은 탓에 소국들이 많았고, 히말라야 반대편인 서쪽에서 들어온 공격자들이 제법 많았던지라 역사적으로 봤을 때 완전한 '통일'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나마도 영국인에 의한 통합(인도 제국)이었고, 독립 후에도 분열 문제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하노버 왕조가 인도를 통일한 왕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인도는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만 하였다'라고 보는 것은 인도인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식민주의적 입장이거나, 현재의 인도 공화국을 전제로 한 시각에서 인도사를 보려는 편협한 입장이 될 수 있다. 인도의 역사는 분열했던 국가 하나의 역사라기보다 수많은 국가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대륙의 역사에 가깝고, 인도의 면적은 유럽과 거의 같으며 인구는 유럽의 2배 이상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유럽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만 하였다."라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인도는 크게는 북인도와 남인도로, 그 내부에서 다시 펀자브, 벵갈 등의 수많은 지역들로 나뉘어 그 내부에 각각 민족/문화/종교/언어 면에서 독립적인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언어는 단순히 서로 다른 수준이 아니라 어족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언어를 쓰는 인구도 인도에서 대략 30% 정도 된다. 말이 30%지 인구로는 '''4억 명이 넘는다'''. 미국 인구가 3억 2,000만 명이니 인도유럽어족 아닌 인구가 미국 인구보다 더 많은 셈.
더군다나 유럽의 경우에는 그리스를 제외하면 라틴문자 혹은 키릴문자를 쓰기에 나라가 제각기 다름에도 문자적으로 어느정도 통일성을 지닌다고봐도 무방하겠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하나의 나라에 속함에도 각 지역별로 문자가 다르다. 힌디어네팔어. 펀자브어 표기에 쓰이는 데바나가리 문자뿐만 아니라 아랍문자, 라틴문자, 구자라트 문자, 타밀 문자. 텔구르 문자, 올치키 문자, 벵골 문자. 말라얄람 문자, 칸나다 문자, 오리야 문자 등 지역에 따라 다른 문자가 쓰여지며 이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들 사이의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유럽의 국가들보다 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항목의 내용도 각지의 다양한 경향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며, 파키스탄 등 현재는 인도가 아닌 지역의 역사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정식으로 인도사를 공부하고 싶다면 주의해서 읽기를 바란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브라만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양한 문화의 요람 역할을 했다. 결과는 힌두교 승리에 가깝지만, 그 힌두교 역시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남부와 북부의 문화는 큰 차이가 있는 편이며, 역사를 공부할 때에도 북부를 통일한 국가는 제법 많았던지라 주로 북부를 위주로 배운다.
인도인 특유의 내세적인 신화철학은 조, 경, 해의 시간이 밥먹듯이 튀어나오는 칼파의 시간관[1]윤회 사상을 낳았다. 덕분에 인도인들은 현생에 대한 기록을 잘 남기려 하지 않았으며, 사료로 쓸 자료들의 보존성도 좋지 않아서 남아있는 문서가 그리 많지 않다. 종교의 경전마저도 주로 암송으로 전해지는 형태였다. 이는 세계사의 큰 축이었던 중국, 중동, 유럽이 풍부한 기록을 남긴 것과 대조적인데, 어느 정도냐면 고대의 경우 같은 시기 한국사보다도 참고할 기록 분량이 적다. 이슬람교가 유입된 11세기 이전까지 정식 역사서가 편찬된 바 없고 그 이후 한동안의 역사서 또한 인도의 통사를 꿰기에는 매우 조악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전근대사의 상당 부분은 타국의 기록이나 서사시, 종교 문헌 등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도의 고대 역사가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기원 이전과 첫번째 천년기의 세계최대의 경제권은 중국이 아니라 전세계 경제력 GDP 비중의 30%를 차지하던 인도대륙이었고 중국이 인도의 GDP 를 추월한 것은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원나라 대인 서력 1200-140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중국이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던 시기는 대략 19세기 중반 이전 약 400-500년 정도로 그렇게 길지않다. 인도가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던 시기가 4배 정도 월등히 길다. ##

1.1. 인도 고대의 역사 기록 전통


인도에는 적어도 이슬람 세력의 도래 이전에 '역사' 개념이 희박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사료가 충분치 않았다는 주장은 매우 역사가 길다. 이런 류의 주장은 11세기에 《인도의 역사》를 저술한 페르시아인 학자 아부 라이한 알비루니(Abu Rayhan al-Biruni, 973–1050?) 이래[2] 오랜 기간 이슬람 전통의 역사가들이 지속적으로 해 왔으며, 무굴 제국과 그 통치 기구, 문헌을 접수한 19세기 대영제국의 관료와 역사가, 그리고 인도의 문헌을 입수한 19세기의 유럽 동양학자들도 오랜 기간 견지하였다.
인도에서 역사 관념의 발달이 그리스–로마나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고, 고대에 인도에서 사용한 문서 기록 매체인 패엽 등의 보존성이 낮아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사 사료가 다른 주요 문명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도에서 역사 관념이 결과적으로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거나 아예 발달하지 않았다는 강한 주장은 이것과 조금 다른 문제인데, 인도 독립 후 20세기 중반부터 인도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근대적 역사학을 토대로 조금씩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하였으며, 21세기 현재 이러한 주장과, 나아가 인도사 사료의 구성 방식 자체는 인도와 영미권 인도사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거리이다. 오늘날 인도사를 정식으로 배우려면 우선 역사 기술 내지 사료학(historiography)만 별도로 심도 있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전통 시대 사료의 가치를 평가하고 인도에서 역사 개념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인도 고대사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이하에는 이 문제를 다루는 인도 역사학자 로밀라 타파르(Romila Thapar)의 2013년 저서에서 관련 내용을 간단히 요약 서술해 둔다.[3]
인도에서 역사 전통의 발달은 그리스-기독교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동아시아 문명권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역사 서술은 크게 브라만교힌두교 전통과 불교 전통, 자이나교 전통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브라만–힌두 전통의 역사 기록은 고대의 이티하사(Itihasa)–푸라나(Purana) 전통을 그 기원으로 하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은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지배적인 역사 기록 양식이었다. '이티하사'는 산스크리트어로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 즉 대략 역사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초기 이티하사 문헌은 역사 기록 그 자체를 위해 남긴 것이 아니라 베다 성전의 종교적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이티하사 문헌에는 준역사적인 서사시 《마하바라타》, 허구적 서사시 《라마야나》, 그리고 '푸라나'가 있다.
'푸라나'는 '오래된 것'을 뜻하며, 기원후 굽타 제국 시대를 전후로 하여 베다 시대 이래 구전으로 전승되던 푸라나가 문헌의 형태로 대거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푸라나에는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우주 창조 설화 등과 함께 신, 반신, 전설적 영웅, 그리고 어느 정도 역사적인 군주와 성인의 행적이 설화적 필체로 기록되어 있다. 푸라나 문헌은 인도 고대사에 대한 사료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으며, 이 푸라나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내는 방식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굽타 제국의 멸망 이후 약 7세기부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을 출발점으로 하여 힌두교 문헌에서 보다 전기(傳記)적, 연대기적인 서술 양식이 점차 종교적 내지 설화적인 것들에서 독립하여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이러한 서술 양식으로 차리타(carita, 전기, 행전), 프라샤스티(praśasti, [특정 군주에 대한] 찬가)[4], 왕샤왈리(vaṃśāvalī, 연대기) 등이 있는데, 여러 문서와 비문에 남아 있는 이들 문헌은 이슬람 도래 이전까지 새로운 힌두 전통의 사료가 된다. 차리타 문헌의 예로는 가령 7세기에 작성된 바르다나 왕조 하르샤 왕의 전기 《하르샤차리타》(Harṣacarita) 등을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왕샤왈리 문헌으로는 12세기 초의 《제왕들의 강》(Rājataraṅgiṇī)을 꼽을 수 있다. 종합적으로, 기원후 첫 번째 천년기에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는 "종교 문헌에서 역사 의식이 서서히 출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은 고대 인도의 기록 문화에서 브라만–힌두 전통의 주요 경쟁자였다.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역사 기록이 종교 문헌에서 서서히 분리 독립해 나간 것과 달리, 불교 전통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이른 시기부터 명확한 역사적 목적을 갖고 나름대로 내용의 진실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며 남긴 다양한 전기와 연대기 문헌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교 텍스트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불교적 형태의 역사 의식을 관찰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의 연대기에서는 특히 사건의 진실성과 인과 관계에 따른 서술이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부터 편찬된 스리랑카의 연대기는 이러한 불교 연대기의 훌륭한 사례이다. 자이나교 전통은 상대적으로 브라만–힌두 전통과 불교 전통에 비해 문헌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기원후 두 번째 천년기 초부터 프라반다(prabandha)라는 독자적인 전기 기록 양식이 자이나교 전통에서 발달하였고, 14세기 초에 집대성된 《프라반다친타마니》(Prabandha-cintāmaṇi)가 좋은 사례이다.

2. 문명의 발생


인더스 문명 항목 참조

3. 국가의 발전과 신 사상의 발흥(BC 700 ~ BC 300)


이후 인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국가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800년 ~ 600년경부터 ''''16국 시대''''가 펼쳐졌다. 이 시기의 경전은 베다 계통의 문헌(이를 '스루티(shruti)'라고 한다)에서 우파니샤드 등의 '스무르티(smriti, 베다 이외의 후세의 모든 문헌)' 등에 대한 연구로 넘어가는데, 이 시대의 사상은 통일적 질서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진다.
16국 시대는 서서히 소국들이 병합되면서 주도적인 4개 국가의 시대로 넘어가는데, 이 중 갠지스 강 중류에 있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번성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 왕국의 난다 왕조가 마침내 인도 통일을 (부분적으로) 완수했으나, 얼마 안 가 붕괴하였다.
한편 이 시기 분열 속에서 브라만교의 지나친 의식 중시에 반발하여 자비와 평등을 역설한 석가모니(고다마 싯다르타)[5]불교와 살생 금지, 고행 금지 등의 계율을 강화한 바르다마나의 자이나교가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에 등장한 윤회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는 모두 윤회 사상에 큰 기반을 두어 후의 인도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4. 마우리아 제국(BC 321 ~ BC 184)과 해상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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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전 세계 최강대국이자 불교의 발흥지다.'''
한편 기원전 4세기경 인도는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진군해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기원전 322년에 세워지는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득세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마우리아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아프가니스탄의 상당 부분 및 이란의 일부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헬레니즘 제국의 침략은 마우리아 왕조를 인도 최초의 (어쩌면 그리고 마지막) 통일 왕조로 만들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먼치킨아소카 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영국이 인도 제국을 세우기 전까지 남북 인도 전체가 하나의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6]. 브라만교 세력의 억제와 통일 제국의 안정을 위해 아소카 왕은 불교 진흥책을 폈으며, 이로 인해 불교의 해상 전파가 이루어졌다.
한편 해상 무역이 기원전 2세기경부터 흔적이 보이는데, 이들이 남긴 문화는 참파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고대에는 이슬람교 상인들이 활약을 펼치기 전까지 바다(해상) 무역에서 큰 활약을 했다.

5. 분열의 시대 - 고전 시대의 개막(쿠샨 왕조, 굽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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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우리아 왕조가 아소카 왕 이후 급속히 쇠퇴하면서 인도는 다시 분열 상태에 들어갔다. 이 시대부터 델리 술탄 왕조의 등장과 촐라 왕조의 멸망으로 이슬람 왕국이 본격 등장하는 시기까지를 고전 시대(인도 중왕국, BC 200년대 ~ 1279)라고 부른다.
이 시기 북인도에는 이전부터 인도에 진입했던 스키타이의 일파인 샤카족,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파르티아 왕국, 쿠샨 왕조[7] 등이 들어서면서 격변을 맞는다. 한편 남부에는 사타바하나(안드라) 왕조(BC 200년대 ~ AD 200년대)가 세워져 무역으로 번성한다.
'''쿠샨 왕조'''(105년경 ~250년경)의 대승 불교위진남북조시대의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산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스와 인도의 양식이 결합된 간다라 불상이 유명하다. 한편 남부에서는 간다라 미술과는 다른 양식의 마투라 미술이 등장하였다. 이때의 명군으로는 카니슈카 1세가 유명하다.
이란사산 왕조에게 쿠샨 왕조가 망한 뒤 북인도에는 '''굽타 왕조'''(320–550)가 들어섰는데, 이때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힌두교가 성립하는 등 인도 고전 문화의 기틀이 섰다. 그리스계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브라흐마 - 비슈누 - 시바의 3신 신앙이 이때 본격화되었으며, 왕은 힌두교의 화신('라자')으로서 권위를 누렸다.
굽타 왕조는 사무드라 굽타, 찬드라 굽타 2세, 쿠마라 굽타 등으로 이어지며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2대 사무드라 굽타는 북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합병했고 남인도의 여러 왕국을 굴복시켜 영향권에 두었으며, 3대 찬드라 굽타 2세는 사카 왕조를 무너뜨려 북인도의 서부 해안 지대를 확보하는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과시했다. (한편으로는 찬드라 굽타 2세가 지금의 아무 다리아 일대까지 원정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또한 중국인 여행자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인도는 국민은 평화를 누렸으며 각종 복지 시설이 잘 구비되고 치안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였다고 한다.
이전부터 전래되던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전승이 문헌으로 정리되었으며, 칼리다사 등의 시인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힌두교의 등장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으나 학문적 연구와 미술적 발전은 계속되었고, 0의 개념과 십진법을 기반으로 한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으로 만든 것도 이 시기 이 동네의 업적이다. 물론 이것도 중동인들을 거쳐서 넘어가는 바람에 숫자 이름부터 저 모양이 됐지만... 이외에 지전설, 지구 구형설 등의 과학 발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세기경 굽타 왕조는 훈족 계통의 유목민족 에프탈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혼란 속에서 바르다나 왕조가 북인도를 한 차례 통일하였으나 순식간에 멸망하고, 인도는 다시 분열 시대에 들어간다. 흔히 굽타왕조의 몰락을 인도 고대사의 끝으로 본다.

6. 지방 왕조들의 성립과 힌두교의 성장(550년 ~ 1206)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인도에서는 유럽처럼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전개된다. 이 시기부터 무굴제국의 등장까지를 흔히 인도사의 중세로 본다. 북방에서는 바르다나 왕조 이후 구자라트계 왕조(프라티하라 왕조가 대표적 - 740–1018), 팔라 왕조(750–1174) 양대왕조가 흥성하였고, 데칸 고원의 라슈트라쿠타 왕조(753–982)와 8~10세기에 걸쳐 카나우지에서 삼각 구도를 이루었다. (이 중 프라티하라 왕조는 미히라 보자와 마헨드라팔라의 재위를 거치면서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고, 300년 동안 이슬람의 인도 침입을 저지한 북인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의 유럽 침공을 저지한 것과는 달리 이쪽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에는 남방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힌두 왕국인 팔라바 왕국(3 ~ 9세기), '''촐라 왕국'''[8](9 ~ 13세기), 찰루키아 왕국(6 ~ 13세기, 중간에 동찰루키아 - 서찰루키아가 갈라지는 역사를 포함), 비자야나가르 왕국(14 ~ 17세기) 등이 동남아시아 및 이슬람권과 교역을 활발히 해나갔다.
또한 굽타 왕조가 국가 재정비를 위해 불교 대신 계급 위주의 힌두교를 후원한 이래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여 갔으나, 8 ~ 9세기경까지 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계와 직접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9]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하층민들은 신분제의 틀이 엄격했던 힌두교 대신 평등 사상이 담긴 이슬람교를 많이 택했는데, 이 때문에 평등 사상에 힘입어 세력을 이어가던 불교는 다시 한 번 치명타를 입게 된다. 당시 인도의 불교계는 상좌부/대승 불교로의 분열 이후 수많은 부파로 갈라져 이들 간의 소모적인 교학 논쟁에 집중되어 대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지고 오랫동안 주류 위치를 차지하면서 평등 사상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 데다가 힌두교를 흡수하기 위해 신격과 주술, 의례를 받아들여 불교화한 밀교가 등장한 상태였는데 이 밀교가 이슬람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되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이 시기는 샹카라, 라마누자 등 뛰어난 힌두교 이론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불교 철학을 논박하며 특히 아트만(자아, '나')과 브라흐만(우주와 그 통일적 질서)의 일체화(범아일여)를 중시하였으며, 베단타 학파를 융성하게 했다.

7. 인도 이슬람 제국시대(1206 ~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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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델리의 쿠툽 미나르와 이슬람 술탄국들의 영토 변천
한편 8세기를 넘어 북부 인도에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면서 인도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동진은 10세기 이후 본격화되어, 이슬람 계통의 '''가즈니 왕조'''(962년~1186년), '''고르 왕조'''(1117년~1215년)는 아프가니스탄투르크 왕조로서 인도로 침투하다가 마침내 델리를 점령하여 인도 이슬람교의 본격적 발걸음을 떼게 된다. 한편 잘랄 웃 딘과 같은 호라즘 제국의 잔당세력이 인더스 강 너머로 도피한 경우도 있었다.
고르 왕조는 대정복자였던 무함마드 고리의 죽음(1206)으로 군벌들이 분립하면서 멸망하고, '''델리 술탄 왕조'''(1206 ~ 1526)는 이 지역에서 토착화하여 완전히 북인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해, 델리 술탄 왕조 내에서 5개의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노예 왕조 - 할지 왕조 - 투글라크 왕조 - 사이드 왕조 - 로디 왕조) 하지만 델리에 자리 잡은 술탄국들은 어찌되었건 점차 힘을 강화하여 점차 남방으로 진출하였고, 무굴 제국의 건설에서 전초 역할을 하게 된다.
남방 지역에도 데칸 고원에 이슬람 왕조(데칸 술탄국, 1490 ~ 1596)가 자리 잡았던 반면, 힌두교를 믿는 왕조인 라지푸트('라자'에서 나온 말로, 힌두계 왕조를 지칭) 왕조들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힌두계 왕조로서 장기 지속된 왕조로는 건축의 발달과 교역의 흥성 등으로 유명한 비자야나가르 왕국(1336 ~ 1649) 등이 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 역시 델리 술탄 왕국처럼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으며(상가마 - 살루바 - 툴루바 - 아라비두), 이 중 상가마 왕조의 데바 라야 2세와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 시기에 그 국력이 정점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내에서 제일의 세력을 자랑했다. (데바 라야 2세의 시기에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에게서까지 조공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1565년, 이슬람 연합군에게 탈리코타 전투에서 털리고 수도까지 털려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8. 무굴 제국(1526 ~ 1858)의 인도 통합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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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1526 ~ 1858)이 들어서면서 북인도의 국가 흥망사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무굴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해 티무르 제국에서 유입된 종족이 세운 나라로 1556년 즉위한 악바르 대제에 이르러 정치 체계의 안정을 갖추게 되었다. 악바르 대제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3분의 1세와 조세 금납화 등의 정책을 펼쳐 나가면서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힌두교도에서 부과되던 세금을 폐지하면서 힌두교와 이란계 이슬람교, 시크교 등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저항을 완화하였다.
이후 무굴 제국에서는 타지마할 등으로 대표되는 섬세한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이슬람교 신비주의와 신비주의 계통의 힌두교가 종합되어 시크교가 탄생하기도 했다. 한편 16세기 초부터 고야 등의 지역에는 서양 세력이 유입되어 인도와 교류하기도 하였으며, 근대 공업의 등장 이전까지 인도의 목화와 면직물 산업은 크게 흥성하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굴 제국은 지나친 정복 활동과 영토 유지, 그리고 토목 공사로 인해 재정상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남방 원정을 주도하여 형식적인 인도 전체의 지배자가 되는데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치세 중반 이후 과격한 이슬람교 절대주의 정책으로 타 종교를 적대시하고 탄압하면서 많은 반발을 샀다. 결국 아우랑제브조차도 원정 중에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국 아우랑제브에 대항해 1674년 시바지가 힌두교도 호족들로 이루어진 마라타 왕국(마라타 동맹, 1674 ~ 1818)을 건국하고 펀자브/벵골 지방까지 진출함과 동시에 델리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부유한 펀자브 지방에서 시크교 세력이 힘을 모아 시크 동맹(1716 ~ 1799)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킴과 더불어 시크 왕국(1799 ~ 1849)을 세우는 등 무굴 제국의 천하는 기울기 시작했다. 여기에 라지푸트족의 소국, 자트족의 소국들, 아와드족 세력들까지 난립하면서 인도는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버렸고,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무굴제국에 적대적이었다.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괴물 나디르 샤는 1739년 델리에 입성하여 엄청난 살육과 함께 약탈을 하였고, 이는 무굴 제국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이런 적대 세력들을 예전처럼 통합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 내부의 혼란과 분열도 심각해졌고, 여기에 페르시아의 침공까지 겪게 되면서 사실상 무굴 제국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9. 영국령 인도(1858~1947)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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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후 인도 각지에 침투하던 유럽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영국동인도 회사(영국의 경우 1757년 설립)로 요약되는데, 7년 전쟁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인도 현지 군대와 합세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지배력을 굳혔고,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라는 동인도 회사 소유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이후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각지 중소 국가들을 격파하고 영국이 전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무굴 제국 왕실은 형식적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858년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면서 무굴 제국 왕실(과 함께 동인도 회사도)이 폐지되었고, 1877년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1858~1947, 황제 즉위는 1877)으로 굳혀진다. 이 시기까지 로이의 브라모 사마지 운동 등 의식 개혁 운동과 교육의 보급 운동 등이 진행되었으나, 추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식민 지배 시기 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 회의 계통의 독립 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독립 운동 등이 계속되어 인도의 주권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대체로 인도의 독립 운동은 자치권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의석 보장을 원하는 이슬람교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반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힌두교 세력이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을 이용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 한 찬드라 보세의 활동도 있었다. 1942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 하에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 제국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들 운동을 신속하게 무력 진압했다.

10. 독립과 인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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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쇠퇴,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 그리고 인도의 일본 제국주의 세력 확대 저지의 공을 인정받아 1947년 영국은 인도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사실상 독립을 승인했다. 인도의 독립 기념일(자치령 선포일)은 8월 15일, 즉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같다.[10]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사실상의 종교 내전이 발발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수천만 명이 피난길에 오르는 가운데[11]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밖의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서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독립 후에도 몇 년간 영국 왕을 모시다 1950년 개헌하여 대통령을 뽑고 영국 국왕을 섬기지 않는 공화국인 인도 공화국으로 정식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격심해져 마하트마 간디의 암살이 일어나기도 했고, 불가촉천민의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활동도 있었다.
인도의 현대사는 자와할랄 네루의 네루-간디 가문이 정계를 주도하였는데, 이때 제3세계 운동과 녹색 혁명, 사회주의민족주의를 결합한 국가적 산업화 정책을 폈다. 이후 1990년대에 빠르게 성장하면서 현재는 BRICS 중의 한 국가로 꼽히며(브릭스의 인도), IT 산업 등의 분야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
비록 카스트 제도를 비롯한 구습이 강하게 작용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여성인디라 간디와 소수 종교인 시크교도 만모한 싱[12]이 수상 자리에 오르고 불가촉 천민 출신인 람 나트 코빈트가 대통령이 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많이 있었다. 반면 인구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아 현재 13억을 넘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 인민당의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집권한 1998년부터 2004년 사이에는 파키스탄과의 핵무기 경쟁이 심각했다. 힌두교 근본·민족주의는 인도의 여러 골치거리 가운데 하나.
인도는 영연방 국가이다. (비교 대상으로, 파키스탄은 한때 탈퇴했으나 다시 영연방에 가입했다) 그러나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지 않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제 국가인 건 엄연하다. 어마어마한 인구수 때문에 미국을 제치고 "지상 최대의 민주국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현재 여당인 인도 인민당의 세력이 가장 크지만 인도 독립 이후 인도 정계를 주도해왔던 인도 국민회의의 세력은 여전히 크고, 공산당이 선전하는 지방정부도 제법 있다.
2018년 9월 6일부터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150여년간 이어졌던 반동성애법이 폐지되었고 이에 남성간 성관계가 합법화되었다.#

11. 관련 항목


[1] 한국어로 劫으로 알려져있는데, 우주가 창조되고 파괴되는 1겁의 시간은 약 43억년의 시간이며 '''브라흐마의 하루'''에 해당되며, 브라흐마시바는 1겁이 끝나면 우주를 없애고 또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브라흐마 시간으로 '''100년''' ( = 36000 칼파)동안 계속한다. [2] 알비루니는 인도인들이 "사건들의 역사적 배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왕조의 연대기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부주의했으며,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썼다.[3] Thapar, Romila. 2013. ''The Past Before Us: Historical Traditions of Early North Indi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4] 단, 비문에 남은 초기 형태의 프라샤스티는 기원후 2세기 등 이보다 훨씬 일찍 기록되기도 했다.[5] 석가모니는 일종의 존칭으로, 그가 있었던 '샤카족의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석가모니의 종족인 오늘날 네팔지역의 '''샤카'''(Shakya)와 뒤에 나오는 BC 2세기 이후 인도로 유입된 동부 이란유목민인 '''사카'''(Saka)는 전혀 다른 집단이다.[6] 굽타 왕조나 무굴 제국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남인도 국가들의 복종을 받기는 했지만 영토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에도 실론(현재 스리랑카) 등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땅은 있었다. 물론 그래서 영국이 잘 했다는 것은 죽어도 아니고.[7]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한나라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보내 찾아간 대월지와 큰 관련이 있는 민족이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와 '쿠샨' 왕조로 불렀다.[8] 남인도 왕조로서 유일하게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9] 혜초왕오천축국전을 보면 이러한 불교의 쇠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에서도 5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의 세태를 알 수 있다.[10] 파키스탄은 인도 독립 하루 전인 8월 14일 독립하였다.[11] 독립 전후 종교를 따라 양측의 조국으로 떠난 피난민 수는 1500만 명, 많으면 2천만 명에 달한다.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집단 이주였다.[12] 터번으로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