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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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瀧
1944년 4월 2일 (80세) ~
1. 개요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출신 방송인.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1] 출신으로, 뽀빠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대전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임학과를 거쳐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장교 출신 연예인이다. 종교는 원래 개신교였으나, 이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세례명은 헨리코.
2. 경력
2.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이상용은 미숙아로 태어났고 너무나 병약해서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이상용을 '''생매장'''했다. 다행히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이상용의 막내이모가 몰래 이상용을 구해내어 산으로 도망갔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이상용을 그냥 키우기로 했다. 이상용을 살리려는 막내이모의 의지가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용은 너무나 병약해서 책가방 들 힘조차 없어 아버지가 대신 책가방을 들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상용은 불굴의 노력으로 매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되어 다른 평범한 아이들 수준으로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으며, 고등학교 때 보디빌딩을 시작해서 '미스터 대전고'를 수상했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대학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해서 '미스터 고대'로 등극했다. 이 외에도 고려대 응원단장으로도 활약했다.
2.2. 방송계에서의 활동
ROTC(5기) 장교로 군에 복무했고 병과는 기갑으로 전차소대장을 역임했다. 전역한 이후 외판원이나 보험설계사 등으로 근근히 먹고 살다가 CBS 기독교방송의 진행자로 방송을 시작했다. 친분이 있는 변웅전 아나운서의 소개[2] 로 MBC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하게 되어 1973년 처음으로 TV에 모습을 드러냈고 패기있고 신선한 젊은 코미디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KBS의 어린이 노래 프로그램인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진행보조를 하다가 MC로 승격되어 뽀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어린이 프로그램은 성인 남자 MC와 여자 어린이 진행자가 같이 나오는 형태였는데, 이상용과 함께 어린이 진행자로 오래 활동[3] 한 이가 바로 아역 배우를 겸하였던 윤유선이다.) 특히 <모이자 노래하자> MC 시절에는 아역배우 출신 박설희와 콤비로 명성을 높였다. 1989년부터는 MBC 우정의 무대의 MC를 맡아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70년대엔 어린이들의 친구, 90년대엔 군인들의 큰 형님 역할을 하며 전성기를 보낸 이상용은 2010년대부터는 노인의 친구라고 할만큼 노인, 실버 대상 행사, 방송에 많이 나간다. 본인이 이제 노년이 되기도 했고, 노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공채 줄신이 아니고 초창기 빼곤 코미디 프로그로그램에 나온 적도 많지 않아 코미디언이냐 전문 MC냐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원래는 코미디언으로 출발한 것이 맞다. 방송에서는 여전한 입담을 보여준다. 방송에서는 건전한 개그만 하지만, 방송되지 않는 성인 대상 행사에서는 19금 개그에도 능하다고 한다.
방송 출연 외에도 1973년 '한국어린이보호회(현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를 세워 심장병 어린이 등 불우아동 돕기 사업을 하거나 1994년 이벤트업체 겸 출판사 '뽀빠이훼미리'[4] 를 세워 <가슴속의 작은 소망> 등 심장병 어린이 수기를 6권이나 낸 적도 있다.
2.3. 사건·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인이 사고를 친 것이 아닌 피해를 입은 거다.
우정의 무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이상용에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이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라고 권유 했지만 이상용은 정치보다는 지금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취지에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의 인생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것이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누명을 쓴 사건이다.
그는 억울한 누명으로 인하여 우정의 무대를 비롯해 한국어린이보호회 회장직 등 자신이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전부 그만두어야 했고,[5] 결국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물론 누명이니 만큼 무혐의 처분을 받긴 했으나, 공금횡령 폭로(?) 기사는 '''대문처럼''' 크게, '''무죄'''판결 기사는 '''손톱만한''' 비중으로 작게 나와 본인의 명예 회복에 도움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이상용은 인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었으나[6] 훗날 해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인망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후 다시 방송인으로 복귀했으며, 요즘은 노인대상 실버프로그램에 나오고 있다. '''이상용은 이 억울한 사건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꼬깃꼬깃한 무죄판결문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실제로 이상용의 무죄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거의 이야기를 안하다 보니 이 사건에 대해서 애매하게 알아서 이상용이 진짜로 횡령을 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잘못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이상용 본인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자.
이후 2019년 TV는 사랑을 싣고 출연분에서 위 사실이 다시 한 번 언급되었다.
뽀빠이 이상용이 이상용의 직설개그 에서 "개만도 못한 놈이 대통령이 됐다"[7] 라는 언급을 한 적 있다. 물론 이는 그의 직설적인 개그요소라 큰 논란거리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조회수만 바라 본 유튜버들 이 본인 채널의 뽀빠이 이상용을 저격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유튜버들 말만 듣고 똑같이 댓글에 뽀빠이 이상용을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튜버와 그 유튜버처럼 이상용에게 욕설을 하는 사람들한테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윗부분에 써있다 시피 이상용은 피해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억해두자.'''
3. 기타
- Y담을 비롯해 각종 유머를 수첩 수백권에다 적어두고 써먹는다고 하며, 머리속에는 유머가 1,000개 이상 들어있다고 한다. '이상용의 폭소열차'라는 유머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없어서 못팔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 편만 하고 끝낼 예정이였는데 팬들의 성화를 못이겨 결국 10탄까지 냈다. 다만 하필이면 저작권 개념이 부족하던 시절에 나온 만담 테이프라, 이후에 복제 테이프가 너무나 많이 풀렸기에 대박을 터뜨린 것에 비해 이상용이 많은 돈을 가져가진 못했다고 한다.
- 위에서 말한 성인유머 외에도 수위를 살짝 낮춘 아동유머 관련 책도 낸 바 있다. 1980년에 <뽀빠이 아저씨 시금치 대작전>(문화서적)이라는 제목의 어린이용 유머 모음집이 그것으로 삽화로 들어간 만화는 박수동 화백이 그려넣었다. 표지와 내용 일부 #
- 한자로는 '李相瀧'이라고 쓰는데 이게 다소 문제가 있다. 자전에서 瀧은 '비가 오는 모양 롱', '여울 랑', '물 이름 상'으로 쓰이는 글자라서 일반적으로는 룡(용)이라는 독음이 없다.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게, 반절음과 독음을 "룡"으로 적은 문헌도 없진 않다(《正韻》盧容切, 竝音龍.)[8] . 아무튼 컴퓨터 코드 상으로는 '롱'으로만 등록되었기 때문에 입력시에도 그렇고, 과거 기사에서도 '이상롱'으로 검색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현재는 대법원 인명용 한자표에서 瀧은 '롱'으로만 등록할 수 있고 용/룡에는 없기 때문에 등록이 불가능한 이름이다. 다만 '상롱'으로 등록하든가, 아니면 한자 없이 한글로만 '상용'이라고 할 수는 있다.
- 군복무 시절 미군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우연히 프라이드 치킨을 처음 맛보게 되었는데 천상의 맛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당시 한국에선 닭을 튀겨 먹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소한 때였으니... 사족으로 한때 이서방양념치킨이라는 체인점에서 그를 홍보모델로 섭외했었다.
- 이상용이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면서 겪었던 해프닝에 의하면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군대간 아들을 둔 아버지들이 계속 편지와 전화로 '왜 아버지 만나는건 안하느냐. 아버지들 섭섭하게' 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상용에게 피드백을 보내자, 이상용이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부르는 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특집으로 진행한 우정의 무대에서 이상용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객석의 병사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쭈뻣쭈뻣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 노련한 진행자인 이상용이 당황해서 '어어 이게 아닌데...' 하고 허둥대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출연하게 된 해당 아버지는 감동적으로 나오는 어머니들과는 딴판으로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하면서 어흠어흠하며 가오잡고 오면서 또 분위기를 갑분싸 시켰고 병사들 중 해당 아버지의 아들이 마지못해 이끌려 나오면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데 아버지는 방송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요즘 군대 반찬 잘 나온대매?"하며 좌중을 썰렁케 하더니 "야, 너 자꾸 집에 전화 좀 하지마. 너무 자주 걸어서 지겨워"라고 말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같이 나란히 서라는 이상용의 안내에도 슬금슬금 떨어지려 드는 등 이상용 방송 인생에 제대로 흑역사(?)를 만들었다. 물론 그 이후 아버지 특집은 영구 봉인되었다. 이상용은 그 당시의 해프닝을 이야기하면서 자식들이 어머니한테 느끼는 감정과 아버지한테 느끼는 감정이 다르며 아버지는 겉으로는 체면을 챙기려고 있는폼 다잡고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다 한국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 그렇게 된거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거기에 이때 방송을 진행하면서 해당 장병이 아버지에게 불릴 때 '무슨 애 잡으러 온 경찰같다'고 해서 좌중을 폭소케 했다. 사실 그럴만도 한게 저 시절은 아직 가부장적인 의식이 짙게 깔려 있던 1990년대였다.
- 2세대 지프 랭글러(TJ)를 자가용 승용차로 타고 다닌다. 차량관리를 상당히 공들여서 했으며 군용 도색까지 해서 개성을 살렸다. 우선 방송에선 1989년식이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1세대 초기 랭글러가 출시된 연식인 1989년과 현재 타고 다니는 2세대의 연식을 헷갈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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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뽀빠이 이상용TV'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국했으며 인트로에 박상철, 김연자 등의 유명한 인맥이 나왔다. 조상구(야인시대 시라소니역), 황정리(유명한 한인 출신 중국 영화 배우이자 원조 한류스타)[9]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런데 2020년 12월 27일 기준으로 해당 유튜브 계정은 유튜브 통계 사이트에선 뽀빠이 이상용 TV라고 나오지만 정작 유튜브 링크로 타고 들어가보면 아무 관련 없는 주식투자 관련 유튜브 계정이 되어있고 이름도 '김포동' 으로 바뀌어있다. 2019년 9월 후반까지는 확실하게 이상용이 유튜버로써 활동을 했던 걸로 보인다.[10] 2020년도 근황은 불명.[11] 그의 개그를 모아놓은 영상 계정이 있긴 하다.
- 이상용 공금횡령 누명 사건에서 무죄라고 입증된지 한참 지난 2020년에서도 유튜브 등지에서 일부 댓글이 여전히 그를 유죄 취급하는걸 볼 수 있다.
4. 함께 읽기
1996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자전적 이야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뽀빠이 이상용>
- (1) 건드리면 부서질듯한 '약골'
- (2) 몇번이나 가족을 버린 아버지
- (3) 촌놈의 인생을 바꾼 육체미
- (4) 아직도 눈감으면 '애틋한 사랑'
- (5) 눈물속에서 태어난 '뽀빠이'
- (6) 영원한 친구 '작은 천사들'
- (7) '나이가 들어도 늙을 수 없다'
5. 관련 문서
[1] TJB 촌거동락 프로젝트 여기가 대한민국 강당1리 편에서 밝힌 바로는 서면 동백정을 언급.[2] 고향이 같은 충청남도이며 가까운 곳이다.[3] 대략 1975~1982년. 처음에는 어려서 보조 진행자였다가 성장하면서 메인 어린이 MC로 승격했다.[4] 1996년 초까진 '뽀빠이디엠'이었다.[5] 이후 우정의 무대는 후임으로 김병조가 1997년 프로그램 종영까지 진행했다.[6] 한동안 사람들의 시선, 구설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7] 여기서 대통령은 문재인[8] 사실 이런 경우는 작명시 원래 쓰려는 글자가 있는데 사주나 성명의 오행(목화토금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첨가하는 경우가 많다. 즉, 龍을 쓸 자리에 물(水)의 기운이 필요해 삼수변을 첨가했을 가능성이 크다.[9] 성룡 주연의 취권 시리즈에서 악역으로 나오던 배우이며 성룡의 절친이자 성룡과 같이 영화를 찍는 동업자 관계였다.[10] 해당 글은 뽀빠이 이상용TV 계정이 주식투자 계정으로 바뀌기 전에 해당 계정을 방문한 사람이 적은 글이다.[11] [image]이었던 시절의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