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무장의 이명

 


1. 동물, 사물, 신 등에 비교되는 경우
2. 무용이나 성격, 행적 등으로 따온 경우


1. 동물, 사물, 신 등에 비교되는 경우


오다 노부나가 -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 또는 아카오니(赤鬼).[1]
사찰 엔랴쿠지를 불태워 버린 일에서 별명인 '제육천마왕'이 비롯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신벌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자, 그는 오히려 "나에겐 '제육천마왕'이 깃들어 있으니, 신벌도 두렵지 않다."라고 대꾸하며 이후 공문서 등에 서명할 때도 한동안 "제육천마왕 오다 노부나가"라고 서명하기도 했다고. 참고로 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한 악귀 '마라'가 바로 제육천마왕.
도요토미 히데요시 - 대머리 쥐(禿げ鼠).
오다 노부나가가 원숭이라고 불렀던 걸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원숭이라 부르지 않고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 원숭이는 히데요시 부인 네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간토너구리(関東の狸).
몸이 퉁실하고 성격이 능글맞다 하여 붙은 이명. 역시 본인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전국시대 관련 작품에서 너구리라는 비유가 쓰이면 거의 100% 이 남자.
다케다 신겐 - 카이의 호랑이(甲斐の虎).
아래의 겐신과 달리 딱히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행동은 안했지만, 대구를 이루어 그렇게 불리웠다. 카이가 산간지방이기도 하다.
우에스기 겐신 - 에치고의 용(越後の龍) 또는 군신(軍神).
실제로 '용'이라 쓴 기인을 쓰긴 썼다. 흔히 알려진 '毘'의 기인은 '성전'이라 여긴 전투에서만 사용했다 하며, '용'은 총 돌격을 명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뛰어난 군략을 보여 군신이라고도 불렸다.
호조 우지야스 - 사가미의 사자(相模の獅子).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과 짝을 이루는 간토(관동) 지방의 패자. 지명도에서 밀릴 뿐, 능력 자체는 저 둘과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모리 모토나리 - 모신(謀神) 또는 서국 제일의 다이묘(西国一の大名).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호조 우지야스와 비견되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 희생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평생동안 모략과 암살을 자주 행했다.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는 희대의 책략가였다.
다테 마사무네 - 오슈의 독안룡(奥州の独眼竜).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한쪽 눈을 잃었기에 생긴 별명. 이로 인해 어머니에게 외면당하고(이 어머니는 후에 차남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버지한테 숙청당했다.) 본인도 이것을 컴플렉스로 여겨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으나 부하이자 심복 카타쿠라 코쥬로 카케츠나가 흉하게 불거져나온 죽은 눈을 도려내 준 것을 계기로 나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안대와 초승달 투구로 대표된다. 오슈-센다이 지방의 다테 가문, 그 중에서도 이 독안룡의 인기는 대단해서 그 지역에는 독안룡 술, 마사무네 떡, 마사무네 도시락, 마사무네 파르페(…) 등등 다양한 특산품이 존재한다. 독안룡은 반 대명사화되어 사전에도 실려있다. 단 독안룡이라는 단어는 다테 마사무네의 별명에서 유래한 단어는 아니다. 원래 독안룡은 중국 오대십국시대 군웅인 이극용의 별명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사이토 도산 - 살무사(蝮).
센고쿠 3효웅 중 한 사람. 온갖 권모술수로 지위를 쌓아올린데다 냉혹한 성격으로 자신을 천거해준 은인과 자신을 중용해준 주군마저 추방하여 붙여진 별명.
아마고 츠네히사 - 이즈모의 늑대(出雲の狼).
센고쿠 3효웅의 한 사람으로서, 늑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권모술수로 가문의 번영을 가져왔다. 또한 '서국재상'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생전에 주코쿠 11개국을 제패했기 때문.
류조지 다카노부 - 히젠의 (肥前の熊).
곰처럼 음흉하고 냉혹한 성격과 무략으로 류조지 가를 큐슈 3강으로 불릴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가토 기요마사 - 호랑이 가토(虎狼─加騰).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임 증세에 시달렸는데 불임 치료에 호랑이 고기가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기간동안 틈나는 대로 호랑이를 사냥해서 일본에 보냈다. 이에 당대 조선사람들이 그를 '호랑이 가토'라 불렀다.
타케나카 시게하루 - 현세의 구스노키(今楠木) 또는 금공명(今孔明).
'今(금)'은 지금을, '楠木(남목)'은 일본 남북조 시대의 영웅이자 군략의 천재였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구스노키", "구스노키의 재림" 정도로 보면 될 듯.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군공을 많이 세우도록 도와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만들어 주었다. 다른 표현으로 오늘날의 제갈량(今孔明)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자국의 영웅이고 더 가까운 시대의 인물인 구스노키에 밀려 별로 사용되지 않았으나 현대에는 제갈량의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창작물에 등장한다면 이쪽으로 더 자주 나온다.
타치바나 도세츠 - 뇌신(雷神) 또는 오니 도세츠(鬼道雪).
벼락을 맞았는데 죽지 않고 반신불수만 되었는데, 이 때 들고있던 칼로 뇌신을 베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붙은 별명. 그 칼은 라이키리(雷切)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바바 노부후사 - 불사신의 오니 미노(不死身の鬼美濃).
다케다 3대를 섬기며 40여년 간 70여차례의 합전에 나가 싸웠으나 나가시노 합전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단 한개의 작은 상처도 입지않아 '불사신의 오니 미노'라고 불렸다.
아카이 나오마사 - 단바의 붉은 귀신(丹波の赤鬼).
단바국 내 호족간의 전투와 오다 노부나가의 대군을 막아냈다. 그가 병사한 이후에야 오다군의 단바국 평정이 이루어진다.
모미이 노리나리 - 단바의 푸른 귀신(丹波の靑鬼).
위의 나오마사와 함께 쌍벽으로 이뤘던 용장. 나오마사의 사망 이후 밀려오는 오다군을 상대로 농성하다 전사한다.
마츠다 야스사토 - 오니마고타로(鬼孫太郞).
호조 가신으로 우에스기 겐신이 호죠령인 쿠스이성을 침략하자 100여기를 이끌고 싸워 우에스기군 본진까지 돌입할 기세를 보인끝에 겐신을 격파하였다. 이 일로 오니마고타로라는 이명을 얻게 된다.
시바타 카츠이에 - 독 깨기 시바타(瓶割り柴田) 또는 오니 시바타(鬼柴田).
적의 맹공으로 인해 성에 틀어박힌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되었는데 큰 항아리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이제 성에 남은 물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며 병사들을 고무시켜 그와 그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해서 붙은 별명이다. '오니(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무장은 전장에서 피아간에 경외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귀신과도 같은 뛰어난 무용을 발휘한 경우가 많다. 또한 싸워라 시바타(かかれ柴田). 전장에서 무작정 싸우라고 고함을 많이 질렀다 한다. 동네 어린이들이 그리 노래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시마즈 요시히로 - 꾸이시만쯔(鬼石曼子 ... 귀석만자).[2]
임진왜란 당시 사천 전투에서 1만 2천으로 20만의 명군을 대파한 뒤, 명군에서 '귀석만자(鬼石曼子)'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서만 그리 주장하며, 적어도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귀석만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한다.(통신사의 기록에 실전하는 부분)
이이 나오마사 - 이이의 붉은 오니(井伊の赤鬼).
특수부대인 이이 적비(井伊赤備)를 조직하고 여러 전쟁에서 도쿠가와군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
모가미 요시아키 - 데와의 여우(出羽の狐).
여우처럼 교활하고 영민하여 모략과 암살을 즐겨 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에 가담하여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키야마 노부토모 - 다케다의 맹우(武田の猛牛).
이에야스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패한 그의 용맹함을 보고 '사나운 소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모리 나가요시[3] - 오니 무사시(鬼武蔵).
재능이 뛰어나 무용에서 시바타 카츠이에의 '오니 시바타'에 비견된다고 하여 붙혀진 이명. 기골이 장대하였고, 격한 성미였지만, 노부나가는 그의 무용을 높이 평가하였고, 신뢰했다고 한다.
사타케 요시시게 - 오니 요시시게(鬼義重).
사타케 가문의 최대 판도를 넓혔다. 같은 동부권의 다테 가, 호조 가 등과 열심히 싸웠는데, 항상 진두에 선 모습을 적병들이 두려워하여 그리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핫토리 한조 마사나리 - 오니노 한조(鬼の半蔵).
도쿠가와의 은밀두로 활약.
코지마 사다오키 - 오니 코지마(鬼小島).
우에스기 가신으로 '오니 코지마 야타로(鬼小島弥太郎)'라는 긴 호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꽃과 열매를 모두 갖춘 용사(花も実もある勇士). 위의 이명은 카와나카지마 전투 때, 적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사다오키를 격찬했던 말이라 한다.
하라 도라타네 - 야차 미노(夜叉美農).
미노는 미노 국을 말하는 것이다. 미노 출신이면서 싸움을 워낙 잘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도자와 모리야스 - 야차 쿠로(夜叉九郎).
전장에서는 귀신 같았지만, 자비로운 일면도 있었다고.
호조 쓰나시게 - 지오 하치만(地黄八幡).
노란 색의 기인과 궁시를 관장하는 무신(武神)인 하치만(八幡)에서 유래.
혼다 시게츠구 - 오니 사쿠자(鬼作左).
용맹하고 과감하면서도 강직한 성격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사이토 토모노부 - 에치고의 종규(越後の鍾馗).
종규란 중국의 도교에서 역병을 물리치는 신이다. 전투, 행정 모든 면에서 활약했다. 우에스기 겐신, 카게카츠 양대에 걸쳐 활약했고, 매우 오래 살았다.

2. 무용이나 성격, 행적 등으로 따온 경우


쵸소카베 모토치카 - 도사의 걸물(土佐の出来人).[4] 또는 새 없는 섬의 박쥐(鳥無き島の蝙蝠).
다만 오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가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여겨 박쥐로 비꼬았다. 또한 유년시절 얼굴이 하얗고 고운데다가 아름다웠다. 성격도 조용하고 얌전하여 무장으로의 자질을 보이지 않아 이것을 비꼬아 '히메와코(공주같은 아이)'라고 불렸지만 나가하마 전투에서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귀신 같은 아이(鬼若子)로 바뀌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 - 검호쇼군(剣豪将軍), 또는 빈핍공방(貧乏公方).[5]
당시에 검술 같은 류의 '예능'은 천시받는 것이었는데, 당대 쇼군인 요시테루는 흉흉한 세상물정에 호신 겸해서 배웠던 검술(유파는 카토리 신토류라고도 함)이 면허개전을 받고 달인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미요시 3인중기습으로 수십명을 도륙내며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살해되고 만다.[6]
아시카가 요시아키 - 떠돌이 공방(流れ公方).
형 요시테루와 어머니가 미요시 3인중에 의해 살해되어 떠돌아다니며 여러 다이묘에게 의탁하면서 붙여진 별명.
나이토 마사토요 - 가중 제일의 부장(家中一の副長).
침착하고 사려깊은 성격으로 주로 후방 지원, 공작을 맡았다.
니와 나가히데 - 코메고로자(米五郞左) 또는 오니고로자(鬼五郞左).
고로자는 마치 쌀(米)처럼,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의미.
도요토미 히데츠구 - 셋쇼간파쿠(殺生関白).[7]
그가 저질렀다는 수많은 악행 때문에 살생관백이라 불리며, 오사카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 살인의 범인이 그라고도 한다.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 악행을 일삼은 포악한 권력자와 음모에 휘말린 불우한 청년으로 견해가 갈린다. 과거에는 전자가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점, 센 리큐사사하고 공가들과 교류 했던 교양인이었다는 점 등이 조명되면서 후자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미요시 나가요시 - 일본의 부왕(日本の副王).
미요시 정권을 세워 기나이를 통치한 그에게 선교사들이 붙인 별명.
스에 하루카타 - 서국무쌍의 사무라이 대장(西国無双の侍大将).
킷카와 모토하루의 의형제이기도 했다. 서국 일대에 용맹을 떨치고 있었지만, 모리 모토나리의 계략으로 허무하게 전사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 -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進むも引くも滝川).
항상 오다 가의 선봉, 최후미를 맡아 싸웠기 때문.
호조 소운 - 나라 훔치기 명인(国盗り名人).
살아 생전 들은 이야기는 아니다. 말 그대로 교묘한 계략으로 성과 나라를 빼앗았다.
타치바나 무네시게 - 서국무쌍(西国無双).
1590년 오다와라 호조가 정벌 당시에는 히데요시에게 수많은 다이묘들 앞에서 '''"동쪽에 혼다 타다카츠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듯, 서쪽에도 타치바나 무네시게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도다."''' (東に本多忠勝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ように、西には立花宗茂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 라는 극찬을 듣는다. 서군을 지지하고도 영지 보전을 했다.
타카하시 쇼운 - 난세의 꽃(乱世の花).
살아 생전에 들었던 소리는 아니다. 이와야 성의 처절한 20일 간의 농성으로 시마즈 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주가를 보전시키면서 자신은 옥쇄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붙였던 별명.
이마가와 요시모토 -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東海一の弓取り)[8]
사나다 마사유키 - 겉보기와 달리 보통내기가 아닌 자 (表裏比興の者)[9]
히데요시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1582년의 혼란기에 마사유키가 주인을 5번이나 바꾸면서 살아남은 것을 가리킨 말. 이 말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사유키는 시나노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지만 쟁쟁한 대세력들 사이를 교묘하게 건너다니면서 끝내 가문을 지켜냈다.
사나다 노부시게 - 일본 제일의 무사(日本一の兵).
사실 생전에 불렸던 별명은 아니고,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보인 초인적인 활약상에 시마즈 타다츠네가 평했던 말이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 유명해진 말이 되었다.
사나다 유키타카 - 진격단죠(攻め弾正).
다케다 가의 군사로서 많은 활약을 보였기 때문. 특히 신겐이 애를 먹어 마지않았던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성을 무혈입성하기도 했다.
코사카 마사노부 - 후퇴단죠(逃げ弾正).[10]
가장 어려운 임무 중 하나인 후퇴하는 아군의 후위를 담당하여 이 역할을 잘 수행해서 얻은 별명이라는 설과,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붙었다는 말이 있다.
호시나 마사토시 - 창단죠(槍弾正).
전국 3탄정 가운데 한 명. 창을 잘 써서 붙여진 별명이다.
혼다 타다카츠 -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 또는 일본 제일, 고금 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고금 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라는 찬사를 받았다.
타다카츠가 보였던 초인적인 활약을 보고 했던 말이다.
가니 사이조 - 조릿대 사이조(笹の才蔵).
그의 용맹함과 세키가하라에서 벤 적장의 목의 입에 조릿대를 물려 창끝에 꽂고 다니던 공포스런 모습에 붙여진 별명이다.
마에다 토시이에 - 창의 마타자(槍の又左).
이름인 마타자에몬(又左衞門)에서 유래. 창을 잘 쓴다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가토 요시아키 - 침묵의 용장(沈勇の士).
냉정침착하고 견실한 성격으로 붙여진 별명.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승리가 확정되고 달아나는 서군 군사를 앞다투어 뒤쫓는 상황에서, 오직 요시아키의 군사만이 진형을 갖추어서 진격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야스마저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와타나베 모리츠나 - 창의 한조(槍の半蔵).
핫토리 한조와 대구를 이루는 별명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충실한 심복으로 창술에 능했다.
이나바 잇테츠 - 완고한 잇테츠(頑固一徹).
사이토 도산의 가신으로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완고한 성격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이러한 별명을 얻게 된다.
나카사카 노부마사 - 혈창쿠로(血鑓九郞)
도쿠가와 가신으로 마츠다이라 키요야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3대를 섬겼다. 오다가와 싸움에서 맹활약하여 주군인 키요야스로부터 혈창쿠로라 불렸다.
이케다 테루마사 - 히메지 재상(姫路宰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서전에서는 기후성을 공략하고, 결전에서는 동군 선봉을 맡아 분전하였다. 전후 그 공으로 하리마국 히메지에 영지 53만석을 받아서 붙혀진 별명.
구키 요시타카 - 해적 다이묘(海賊大名).
해적 출신으로 모리 수군을 상대로 펼친 활약으로 전국시대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래서 붙은 별명.
센고쿠 히데히사 - 방울소리 무사(鈴鳴り武者).
오다와라 정벌 당시 진바오리(갑옷 위에 걸치는 겉옷)에 방울을 붙이고 분전하여 '방울 소리 무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 '제육천마왕'이 유명하지만 아카오니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 중국어로, 귀신(꾸이)+ 시마즈의 음차(시만쯔)[3] 모리 란마루의 형이다.[4] 토사노데키비토(とさのできびと)라고 읽는데 데키비토는 번역하자면 "뛰어난 인물" 정도의 의미다. 한국에 정발된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장성록에서는 '도사의 위인'으로 의역했다.[5] 공방(公方)은 쇼군(將軍)을 의미한다.[6] 이때 다다미 위에 여러 개의 명검을 꽂아놓은 다음 칼날이 무뎌질때마다 다른 칼로 바꾸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여긴 습격자들은 일제히 문짝을 던져 요사테루를 넘어뜨린 뒤 다다미로 덮어 누른 후 그 위에서 창을 찔러댔다고 한다.[7] 셋쇼는 일본어로 살생을 뜻하기도 하고 섭정을 뜻하기도 한다. 일종의 말장난.[8] 弓取り의 뜻 자체는 직역하면 '궁수'지만 실제로는 '무사'로 번역하는게 맞다. 센고쿠 시대에 와서는 좀 시들했지만, 헤이안 시대의 무사들의 주 무기이자 상징이 활이었기 때문에 '궁수'가 '무사'라는 일반 명사 취급을 받은 듯 하다.[9] 현대 일본어에서는 표리 비겁한 자이라는 한자가 되지만, 전국시대에 이 말은 くわせもの(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얕잡아 볼 수 없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老獪(경험이 많아 의뭉하고 능란함)이라는 뜻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10] 단죠 → 군 역직의 일종, 탄정(彈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