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여자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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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사립 중학교.
2. 학교 연혁
1886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서울 중구 정동에 정동여학당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이희천 교장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처음 세워진 교사 부지는 현재의 덕수궁 석조전 자리.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이사 가면서 연동여학당으로 교명을 바꿔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꽤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1911년에 학제개정으로 중등교육기관이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될 때, 일제 학무국이 정신여학교를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 해주지 않고 탄압했다. 그 와중에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 때 복상[1] 하며 일제에 항거한 것은 덤. 동문(同門) 등에서 구명운동을 벌인 끝에 1928년 지정학교로 지정받았다. 당시 지하조직을 통하여 3.1 운동을 전개하였던 애국부인회 회장에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 김마리아가 선출되고, 그 본부가 정신여학교에 설치되자 그것도 탄압의 표적이 되는 데 일조했다는 듯. 의의로 고종황제 복상과 애국부인회 이야기는 학교에서도 잘 안 가르쳐준다.
1939년 국어말살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2] 로 1945년 3월 폐교됐다. 학교는 이후 이후 친일 한인에게 경영권이 형식적으로 승계되었다가 1945년 3월 풍문학원(豊文學園)에 합병되었다.
정신여중고에 애착이 큰 선배나 교직원들은 여기에 자부심과 아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가 김활란의 친일 부역 덕에 무사히(?) 일제강점기를 넘기고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된 것과 비교하는 것. 자부심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 일본에 부역할 때 우리 교장은 독립투사였다"는 식이고, 아쉬움은 "당시의 박해가 없었다면 우리도 정신여자대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는 식이다.
1947년 졸업생인 김필례가 교장이 되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51년 한국전쟁 때는 부산에 피난 학교도 임시로 세웠었다. 1978년 현재의 위치인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사왔다. 지금이야 상상이 어렵지만, 이때만 해도 잠실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잠실로 이사왔을 당시에는 학교 주위가 온통 밭이었고 원두막도 있었다 카더라. 옛 연지동 부지에는 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대호 빌딩'이라는 사무용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2.1. 학교 연혁
3. 학교 상징
4. 학교 특징
5. 학교 시설
5.1. 중학교 건물(신마리아관)
1층부터 4층까지 있으며 동쪽으로 2014년에 증축한 김필례 회관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급식실과 본관과 연결되어 있다. 2층 서쪽 끝에 생활지도부실이 있다. 2014년 교과교실제 시행으로 학교 시스템이 바뀌면서 동편 김필례관이 증축되었으며 교사동 일부 교실은 휴게실로 개조되었다. 본관보다 미묘하게 층 높이가 낮다.[3] 2015년 여름에 외벽을 바꿨다.
중학교 교정에는 벚나무가 많으며, 벚꽃이 만개했을 때 4층 연결복도에서 내려다보는 봄풍경은 그야말로 장관. 선생님들이 추천하는 벚꽃구경 포인트다.
6. 학교 생활
6.1. 주요 행사
6.2. 학교 일과
7. 운동부
8. 출신 인물
9. 교통편
10. 사건·사고
11. 기타
- 감리회 학교인 이화학당보다 1년 늦게 세워졌다. 정신여중과 정신여고는 있는지만 정신여대(..)는 없다.[4][5] 같은 장로회 계통의 여대로는 서울여자대학교가 있다.
- 중고등학교 모두 교실마다 김마리아의 사진이 걸려 있다. 본관 1층 중앙 계단 옆에 커다란 김마리아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무섭게 생겨서 아무도 안 쳐다볼 때 눈이 움직인다는 소문도 있다. 개신교 학교라 과학실에는 찰스 로버트 다윈의 사진 대신 멘델 같은 사람들이 액자에 걸려있다.
- 입지조건이 좋다는 평이 있다. 바로 맞은편이 잠실종합운동장이며 걸어서 5~10분쯤 거리에는 COEX가 있다. 게다가 롯데월드도 그리 멀지 않다. 공부하다 지쳐서 여가활동을 하기엔 최상의 입지조건을 갖췄다. 그래서인지 평일 방과 후 시간대가 되면 COEX와 롯데월드에서 정신여중고 학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