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맥
[clearfix]
1. 개요
[image]
John D. Carmack II. 이드 소프트웨어의 공동창업자이며 기술 감독이자 게임 프로듀서 및 프로그래머. 1970년 8월 20일 미국 캔자스 출생.
현대 1인칭 슈팅 게임(FPS) 장르의 원조격인 울펜슈타인 3D,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FPS 장르를 대중화하는데 일조한 둠, 퀘이크의 핵심 프로그래머로 그가 개발한 빠른 데스매치 타입의 FPS에 최적화된 3D 렌더링과 네트워크는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존 카맥은 당대 게임 개발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활발한 온/오프라인 커뮤니티 활동[1] 을 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2] 그래서 존 카맥은 한동안 PC 게임업계에서 스타 개발자이자 3D 게임 그래픽 프로그래밍 기술의 구루(Guru)로 추앙받기도 했다.
1998년에 시작해 매년 1명씩 선정되는 AIAS(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 2001년에 선정되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관리직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소규모 팀을 유지하면서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현재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하고 오큘러스 리프트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2. 생애
어린 시절 애플 컴퓨터를 접한 후 진로를 프로그래머로 정했다. 하지만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카맥의 어머니는 아들이 아이비 리그 명문대에 진학해 교수 또는 대기업의 고액연봉자가 되기를 원했다.[3] 이렇게 어머니와 마찰을 겪으며 카맥의 성격은 점점 어두워지고 공격적이 되어갔다. 14살 때 애플 컴퓨터를 손에 넣으려고 '''테르밋과 바셀린을 섞은 끈끈이를 유리창에 부착해 테르밋의 고열로 녹이는 방식으로 인근 학교에 침입'''[4] 했다가 걸려서 소년원에 1년 동안 가 있기도 했다. 참고로 적발된 사유는, 같이 간 친구 한 명이 뚱뚱해서 창문에 끼는 바람에 센서에 걸렸다나 뭐라나...
소년원에 들어가 있을 당시 정신감정을 맡은 의사는 그의 무감정함에 많은 신경을 써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소년은 다리 위로는 뇌밖에 없는 것 같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은 '다리와 뇌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니 '심장이 없는 (무감정한) 자'라는 뜻이다.
소년원을 나온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시에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하게 된 카맥은 쉐도우포지, 레이쓰 등의 게임을 만들어 소매점에 직접 판매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후 대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 정도 있다가 자퇴한 후 소프트디스크 잡지사의 부록 게임을 만드는 부서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게임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카맥은 존 로메로, 에이드리언 카맥, 케빈 클라우드 등 대표적인 초기 이드 소프트웨어 멤버들을 만났으며, 때마침 어포지 사(현재의 3D 렐름즈)의 CEO인 스콧 밀러의 사업 제안을 받고 소프트디스크 사를 퇴사한 존 로메로, 에이드리언 카맥, 톰 홀과 함께 이드 소프트웨어를 공동 설립한다.
1990년, 이드 소프트웨어의 첫 작품인 '커맨더 킨(Commander Keen)'을 통해 카맥은 당시 PC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스크롤을 선보였다. 게임 자체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아류 게임이었다.[5] 커맨더 킨 이후 카맥은 3D 게임 개발로 방향을 돌려 원시적인 FPS 게임인 '호버탱크 3D'를 개발했지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회사 내부에서 '커맨더 킨'의 후속작 및 다른 횡스크롤 게임들을 발매할 동안 존 카맥은 더욱 개선된 3D 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92년 5월 5일, '울펜슈타인 3D(Wolfenstein 3D)'를 발매하였고 그로부터 1년 7개월 후인 1993년 12월 10일, '둠(Doom)'을 내놓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96년에 발매한 퀘이크에서는 본격적으로 풀 폴리곤을 도입했다.
흔히 비교되는 존 로메로가 이드 소프트웨어의 얼굴이었다면, 존 카맥은 이드 소프트웨어의 두뇌였다.
퀘이크 1이 발매된 1996년에는 이전까지 이드 소프트웨어의 얼굴 마담 역할을 하던 존 로메로가 회사에서 해고된 후였기에 존 카맥이 대신 소규모 랜파티로 시작한 퀘이크콘 행사부터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후 퀘이크 2를 개발하던 1997년 즈음부터 존 카맥은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3D 게임 그래픽 기술의 구루(Guru)로서 추앙받기 시작했다.
2002년 E3에서는 개발중인 둠 3의 데모를 공개했는데 당시로서는 생소했던[6] 실시간 광원 및 그림자와 노멀맵을 적용한 그래픽을 선보여서 게임업계에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둠 3의 출시 연기로 존 카맥은 게임 그래픽 기술의 Guru로서의 빛이 서서히 바라기 시작했다. 특히 둠 3 출시 전에 둠 3를 아득히 능가하는 비주얼과 신기술들을 선보인 언리얼 엔진 3가 공개됨에 따라 둠 3는 기술적으로 크게 특출나지 않은 게임이 되었으며 둠 3가 출시된 2004년 시점에서는 이미 파 크라이 등 둠 3의 그래픽 기술을 능가하는 게임들이 먼저 출시된 상태였다.
2005년 무렵엔 모바일 게임의 개발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둠 RPG를 시작으로 소수의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였으나 크게 성공한 게임은 없었다. 추후 iOS용으로 레이지를 개발, 발매하였으나 이 역시 별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7] 2007년에는 id Tech 5와 함께 메가텍스처라는 기술을 공개해서 또 한번 게임업계의 화두가 되었으나 그 기술로 만들어낸 레이지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미적지근한데다가 레이지 발매 초기 PC 버전의 치명적 결함, 시대를 역행하는 개념으로 개발된 메가텍스쳐의 기술적 실패로 인해 대중에게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에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 후 오큘러스 리프트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재직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제니맥스 미디어와 페이스북+오큘러스의 소송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소송이 페이스북+오큘러스의 패배로 끝난 후인 2019년에는 오큘러스의 CTO 자리에서 내려와서 자문역할만 수행하고 있다. 또한 CTO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개인 자격으로 인공지능 개발에 보다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게임 개발 현장에서는 사실상 물러난 상태라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언급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3. 개발 철학
단순함 및 최소주의를 추구한다. 개발자가 너무 많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오랫동안 적은 개발자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 결과 퀘이크 3는 10명, 둠 3는 25명 남짓의 적은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언리얼 토너먼트나 하프 라이프 2 같은 당시의 경쟁 게임에 비하면 1/3 정도의 수준이다. 그러나 2008년 무렵부터 이드 소프트웨어도 이와 같은 소규모 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공격적인 확장을 거듭했고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기 위해 제니맥스 미디어의 이드 소프트웨어 인수 제안을 받아들여서 제니맥스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개발 효율이나 단순함에 대해 언급을 자주 하는 편이며, "요즘 게임들은 개발하기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을 여러번 토로한 적이 있다. C++의 경우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려했는데, 게임 프로그래밍에 C++가 주류이자 필수가 된지 이미 한참 지난 시점인 1999년에 출시된 퀘이크 3도 여전히 C로 개발됐고 둠 3 개발 시기에 가서야 C++를 사용했다. 그리고 PC 게임 개발에서 OpenGL이 시대 흐름의 동향에서 밀려나고 Direct3D가 주류가 된지 지났음에도 OpenGL만을 고집했다. 또한, 멀티쓰레드 프로그래밍이 대세가 되어가는 시점에서는 멀티쓰레드 프로그래밍이 복잡하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존 카맥이 만들었던 둠, 퀘이크 1, 2, 3, 둠 3 엔진의 공개된 소스 코드를 보면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한 엔진임에도 전체적으로 알아보기 힘들며 주석에 상세하게 설명해놓은 부분들조차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그 이유는 표준화된 틀을 만들기 보다는 대부분을 본인의 편의대로 코딩했고 단순함과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 개발한 게임에만 최적화된 코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용 엔진으로 사용할 수 없고 개량에도 많은 제한이 따른다.
2005년 무렵부터 둠 RPG를 비롯한 모바일 게임을 만든 건 복잡함을 벗어나 옛날의 단순함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며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는 모바일 게임 개발이 더 재미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게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한 디자인도 존 카맥의 영향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존 카맥은 원칙적으로 오리지널 둠 이후 게임 디자인에서 손을 떼었으며, 그간 "게임 디자인은 내 영역이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따라서 이건 직접적으로 존 카맥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다른 이드 개발진들의 성향도 존 카맥과 비슷해서라고 봐야할 것이다.
1992년, 둠의 개발 당시 언급했다는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에서의 스토리와 같다. 있으면 좋겠지만, 중요하진 않다'''(Story in a game is like a story in a porn movie. It's expected to be there, but it's not that important)." 라는 발언이 유명하다. 이 언급은 스토리에만 치중하고 게임은 제대로 안 만드는 쓰레기 개발사들을 깔 때 자주 인용된다.
또한 당시의 이드 소프트웨어는 개발 인원이 '''총 6명'''이었던 소규모 개발사로 너무 많은 것을 시도했다가는 게임이 언제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의 커맨더 킨 등을 담당한 간판 게임 디자이너였던 톰 홀은 둠의 제작 과정에서 자신이 쓴 100페이지로 구성된 깊이 있는 설정안을 게임에 반영하길 원했는데,[9] 그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여긴 존 카맥은 해당 발언으로 톰 홀의 방향에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고 다른 동료 개발자들 역시 반대했다. 결국 톰 홀은 둠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던 시기에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했다. 2011년의 인터뷰를 보면 정말 본인이 저 대사를 언급한 것이 맞는 듯하다.카맥은 자신이 만든 엔진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을 로메로가 마음껏 연출해주려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부분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깔끔하고 단순하면서도 빠른 엔진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로메로는 이해했던 것이다. 로메로는 그런 엔진을 이용해 깔끔하고 단순하면서도 빠른 게임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게임 일부를 제거하는 것마저 서슴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죽은 나치를 끌어 옮겨 몸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작인 <캐슬 울펜슈타인>이 그렇게 돼 있었다. 그러나 만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어이구." 시체를 끌어 옮기는 화면을 본 로메로는 불만스러웠다. "저건 게임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돼. 게임이 느려지잖아. 아이디어는 좋지만, 복도를 달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하는 판국에 저런 지저분한 것들을 끌어 옮길 정신이 있어? 저건 없애야 돼. 쓸어버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없애!"
출처: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8]
결국 이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라는 발언은 지금 와서는 "게임은 게임 플레이가 중요하다" 라는 게임의 본질을 꿰뚫은 명대사로 간주되기도 한다.
존 카맥은 1984년 출간된 '해커, 광기의 랩소디'[10] 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기술의 발전을 위해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존 카맥이 입버릇처럼 자주 쓰는 "그것이 옳은 일이다"(Right thing to do)라는 문구도 이 책에서 나왔다. 지식의 공유에 대한 믿음은 카맥으로 하여금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특허를 걸어 로열티를 받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부하고[11] 사용자들이 게임의 모드를 만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게임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가 정한 질서를 크게 개의치 않는 그의 성향도 이러한 믿음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큘러스 리프트 개발에 참여하다가 결국 아예 회사를 퇴사하고 오큘러스 VR측으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회사 재직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를 인수하여 모회사가 되어있던 제니맥스 미디어 측의 핵심기술들과 인력들을 무단으로 빼돌려[12] 제니맥스에게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경영적인 위법 행위는 인정되어 오큘러스 VR은 손해배상을 하게 되었지만 기술적인 위법행위는 사전에 존 카맥이 열심히 흔적을 뜯어고친 탓에 인정받지 않아서[13] 본인은 손해배상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본인으로 인해 오큘러스 VR이 입은 손해가 있으니[14] 본인이 직접 피해를 안입었을 뿐 사실상 피해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여담으로 이때 존 카맥은 제니맥스 미디어를 향해 "제니맥스측이 재직시절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다"며 맞고소를 놓았는데 이건 제니맥스측과의 비공식 합의로 무산되었다. 여하튼 오큘러스 리프트 소송전에서 물질적으로는 되려 이득 본 사람이지만, 도의적인 면에선 꽤나 타격을 입은 사건.
4.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1995년 울펜슈타인 3D의 소스 공개를 시작으로, 출시한 게임의 풀 소스를 GPL 라이선스 하에 공개하고 있다. 1997년에 둠, 1999년에는 퀘이크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으며, 이어 2005년에 퀘이크 3, 그리고 2011년에 둠 3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다. 퀘이크 3부터 소스 코드 공개 주기가 길어진 것은, 해당 게임의 소스 코드(엔진)를 라이선스한 회사들이 이른 소스 공개로 피해를 입는 걸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비록 소스 코드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되었으나, 그것을 아무데나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GPL 라이선스로 공개되었으므로 엔진과 결합되는 게임 소스 코드도 함께 공개해야만 하는 제약이 걸려버린다. 게임 소스 코드를 공개하기 싫다면 여전히 이드 소프트웨어에 라이선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원래 프리웨어와 오픈 소스는 다른 개념이다. 프리웨어는 아무나 무료로 쓸 수 있는 것이지만, 오픈 소스는 말 그대로 소스가 공개만 되어 있을 뿐 라이선스에 따라 사용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존 카맥은 특허출원이 기술 발전을 저해한다며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존 카맥의 기술이 큰 주목을 받던 90년대 중반, 특허를 내는게 어떠냐는 동료에 말에 "나보고 특허 내라고 하면 회사 그만둔다."고 엄포를 놓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특허에 대한 반대는 인터뷰나 키노트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또 공개된 소스 코드를 이해하려면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C++, OpenGL, Win32API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5. 하드웨어에 대한 비평
3D 가속 카드와 관련된 일화로는 글라이드 3D(Glide 3D)라는 전용 그래픽 처리기술을 갖고 있었던 부두 그래픽카드에 대해 "글라이드 3D는 어려우니까 안 쓸 거다."라고 말하거나, "지포스 4 MX는 둠 3를 돌리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다."라며 혹평을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지포스 4 MX에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셰이더(지포스 3에서 도입)가 없었다. 지포스 2에서 이름만 바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효과 측면에서는 사실상 지포스 3보다도 못했다. 물론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또한 콘솔은 주로 제한적인 성능과 어려운 제작 환경 때문에 비판을 많이 했는데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3에 대해서는 유독 많은 혹평을 남기며 플빠의 공적이 되었으며,[15] 상대적으로 호평해 왔던 엑스박스 360에 대해서도 디스크 3개로 게임 발매시 과도한 로열티를 부과한다며 'DVD 용량은 충분치 않다'는 단골 떡밥을 다시 환기시킴과 더불어 마소의 비즈니스 정책을 깠다.
2006년 퀘이크콘에서 그가 두 콘솔 기종을 비교한 걸 들어보면 엑스박스 360을 지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잘 보면 "둘 다 병신이고 PC가 최고임"이라는 그의 논지를 찾기 쉽다. 그러나 하드웨어 스펙을 제외하고 개발환경만 따지면 엑스박스 360의 개발환경이 무척 편하다며 매우 호평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지도 엑스박스를 리드 플랫폼으로 제작했다. 그 외 PhysX 물리 가속카드에 대해서 "이건 쓸데없는 짓이다"라며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2011년 들어 PC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PC 그 자체보다는 PC 제조사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픽 카드의 성능은 충분히 빠르니 하드웨어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란 인터뷰를 한 바 있다(브링크 관련돼서 한 말 같다). 또한 15년간 고수해왔던 OpenGL에 대해 이제는 D3D가 더 좋지만 귀찮아서 그냥 쓴다'는 논지의 발언도 했는데, 그로부터 몇달 후 발매된 레이지가 AMD 하드웨어에서 헬게이트를 연 후 아예 마음이 돌아섰는지 D3D로의 전환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지가 존 카맥이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개발한 마지막 PC 게임이 되면서 존 카맥이 PC 게임에 D3D를 사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 로켓 개발
2000년부터 아르마딜로 에어로스페이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로켓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16]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X Prize 컵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완전히 필이 꽂혀서 바로 로켓 개발에 착수했다고. 그에게 동기부여를 했던 X Prize 컵은 이미 2004년에 마소 공동창업자 폴 앨런의 막대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다른 팀이 우승했지만 그 이후로도 로켓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결국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8년과 2009년, NASA의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과하며 85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2013년까지 들어간 개발비만 800만 달러는 족히 넘는다. 게다가 모든 개발비는 존 카맥의 주머니로부터 빠져나간다.
취미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탓인지, 그가 오랫동안 애지중지하던 개조한 페라리를 모두 팔고 현재는 로켓 부품 수송을 위해 밴 한 대를 구입하여 굴리고 있다. 그러나, 2013년 1월 들어서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결국 로켓 개발을 접는다고 한다.
7. 오큘러스
2013년 8월 7일, VR HMD 업체인 오큘러스의 CTO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드 소프트웨어의 자문 역은 계속 맡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22일,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퇴사한다고 밝혔다. 이드 소프트웨어에 기술 자문으로 계속 남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고, 관심사를 나눠서 집중하기 힘드니 잘 된 것 같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2014년 8월, 마인크래프트의 노치가 페이스북의 오큘러스 리프트 인수 후 마인크래프트의 포팅이 취소되자 짜증을 낸 트윗에 '코드만 주면 다시 잘 돌아가게 해 줄게'라고 답변을 남겼다. 관련 기사
2019년 11월, 오큘러스의 CTO에서 사임하고 자문역으로 물러났다.
8. 사생활
부인인 '캐서린 안나 강'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둘은 1997년에 처음 만났는데, 안나 강은 이드 소프트웨어 사무실에 방문하여 "여성 퀘이크 대회의 스폰서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했고, 존 카맥은 그에 응했지만 기껏해야 수십명 정도의 작은 랜파티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안나 강이 주최한 퀘이크 대회에는 2,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했고, 존 카맥은 그녀의 능력에 감명받아 반했다는 이야기. 둘은 2000년에 결혼하여 2004년에 첫째(20세)를, 2009년에 둘째(15세)를 낳았다. 캐서린은 이렇게 카맥과 인연을 맺은 후 게임계에 뛰어들어 머시니마(Machinima. 쉽게 말해 게임 관련 종합 동영상 업체)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image]
왼쪽부터 안나 강, 나인 인치 네일스로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 그리고 카맥이다. 트렌트 레즈너는 둠 광팬이라고 하며, 실제로 퀘이크 1의 OST를 담당하기도 했다. 반려견 이름이 데이지인데 둠가이의 애완토끼 이름도 데이지다.
그의 첫째 아들은 2020년 처음 본 SAT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존 카맥은 자기 아들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트위터를 통해 아들 자랑을 했다. #
고사양의 폭력적인 게임을 만들지만 정작 본인은 닌빠 기질이 농후하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매우 존경하고 있으며, 평소 즐기는 게임의 대부분이 닌텐도 게임이라고 한다. 이건 간단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존 카맥 본인의 믿음과도 관련 있어 보이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드 소프트웨어 게임이 퀘이크 3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반면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는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도 했는데, 사실 스매시브라더스 시리즈가 평이나 인기가 좋은 시리즈이긴 하나 대전 액션 게임 중에서도 생소한 스타일의 작품이다보니 취향에 따라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별개로 그가 가장 최고로 뽑는 게임은 세가의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라고 한다. 사실 그가 만든 폭력적인 게임도 닌텐도 게임과 비슷하게 직관적인 컨트롤을 꽤나 신경쓴 편이다.
애플빠 기질도 농후하다. 어린 시절에는 애플2 컴퓨터를 훔치다가 소년원을 간 적도 있고, 미디어에 노출된 사진을 보면 당대의 최신 애플 컴퓨터가 같이 찍혀 있는 경우가 많다. 둠은 macOS의 전신인 NeXT로 개발되었고, 존 카맥은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 "Developed on NeXT computers"라는 로고를 둠 실행화면에 넣으려하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다.
본인이 직접 페이스북에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스스로 10대 시절 애플팬으로서 잡스와 워즈니악의 이야기에 빠져 살았고, 다른 사람들의 부탁은 거절해도 스티브 잡스의 부탁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들어줬다고 한다.
또한 존 카맥은 아이폰 출시 이후로 매번 아이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개발자 중 한 명이며,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에 서드파티 앱을 허용해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 중 한명이다. 카맥은 OS-X 기반인 아이폰은 다른 폰들보다 뛰어난 보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드파티 네이티브 앱을 허용해도 된다고 설득했다. 이에 서드파티 앱은 웹 앱만 허용하려고 했던 스티브 잡스는 "존, 너는 똑똑하니까, 니가 직접 OS를 만들어보던가?(You’re a smart guy John, why don’t you write a new OS)?”라고 말했고, 존 카맥은 이때 마음 속으로 "좆까 스티브(Fuck you, Steve)." 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나중에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에 서드파티 네이티브 앱을 허용하게 된다.
유도와 주짓수를 배운 적이 있다. 이드 소프트웨어를 방문한 쇼 호스트 제이슨 홀에게 목 조르기를 시전한 적도 있다.
2010년 중순을 기점으로 트위터를 시작했다.
1999년, 당시 나스닥 상장을 앞뒀던 엔비디아로부터 기술자문위원 자격을 인정받아 많은 IPO 주식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카맥은 이를 받은 즉시 팔아버렸다. 2021년 1월 기준으로 엔비디아의 주가는 상장 첫날 시초가의 300배에 이른다. #
게임스탑 주가 폭등을 약 세 달 앞둔 2020년 10월 14일, 존 카맥은 한 투자자로부터 당시 주당 12불이었던 게임스탑 주식이 심상치 않으며 역사에 남을 숏 스퀴즈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과거 주식을 통해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카맥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아 큰 기회를 놓쳤다. 카맥은 이 일화를 공유하며 '나는 주식보다는 엔지니어링으로 먹고 사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
9. 기타
집중력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드 소프트웨어의 초창기 시절 프로그래밍에 심취하여 화장실 외에는 컴퓨터 앞에서 한시를 떠나지 않고 먹고 자고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존 로메로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카맥이 있는 옆 방에서 대놓고 포르노를 틀어서 그를 컴퓨터와 떼어내 보려 했는데 카맥은 시끄럽다며 잠시 코딩을 멈추었다가 '음...' 하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컴퓨터 앞에서 하던 작업을 계속 했다고 한다.
비디오 게임 사이트인 루리웹에서는 레이지의 PS3 버전 30프레임 소동이나 PS3의 개발 환경에 대한 불만을 표한 사건 때문에 플빠들로부터 3류 프로그래머로 불리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 오타였는지 잘 몰라서였는지 '13류 프로그래머'라고 지칭한 것이 크게 흥해서 'n류 프로그래머'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으며(n 값은 인기와 평판에 따라 오르내린다) 현재는 18류 또는 그 이하까지 내려가는 등 여러가지로 말장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신작 레이지 개발과정에서 PS3의 블루레이 용량을 추켜세웠는데 정작 발매된 게임에서 텍스쳐 로딩이 개판이자 2^10류 프로그래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에 휘말려서 코지마 히데오 등 다른 개발자까지 'n류 개발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하필이면 레이지 PC판이 엉망일 때 존 카맥이 "PC를 게임 개발의 리드 플랫폼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해서 더 까였다.
퀘이크 2에서는 숨겨진 이스터에그 공간 중 하나에서 (페라리와 함께한 사진, 둠 로고 등이 있음) 그의 머리가 나오는데 아이템으로 취급된다. 최대 체력을 1 올려주는 아드레날린 8개를 한꺼번에 먹는 취급이라 존 카맥 머리를 먹으면 최대 체력 8이 올라간다. 근데 이쯤되면 거의 최후반부에 입수하는 아이템이라...
퀘이크 3의 어느 맵 구석에 존 카멕의 머리가 있다.
둠 3에 목소리로 출연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둠 3의 생존자 항목 참고.
퀘이크를 제작할 때 실리콘 그래픽스/인터그래프사의 인터뷰 28HD96라는 1920×1080(!!!) 해상도가 지원되는 28인치 16:9 와이드스크린 모니터로 제작했다.[17][18]
[1] 온라인 : .plan, 오프라인 : 랜 파티, 각종 게임쇼나 신제품 발표회 등[2] 현재는 게임 개발자들의 커뮤니티 활동이나 오프라인 게임쇼 또는 게임 파티 같은 것들이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게임 개발자의 적극적인 커뮤니티 활동이 적었다.[3] 고액연봉자가 되기는 했다. 다른 방법으로.[4] 사제 폭탄을 제조했다는 루머도 있지만 유리창을 녹인 쪽이 맞다.[5] 실제로 커맨더 킨 1편은 평소 닌텐도 게임의 광팬이었던 이드 소프트웨어의 팀원들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를 PC로 이식하여 닌텐도에 보냈지만 돌아온 대답이 '훌륭한 작업물이나 우리는 PC 시장에 관심이 없다'여서 마리오 PC판의 엔진에 캐릭터와 레벨 디자인을 바꿔서 발매한 것이었다.[6] 그 전에도 해당 기술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미 노멀맵은 1999년에 출시한 3D 마크 2000에서 보여준 바 있었고, 2001년작 블레이드 앤 다크니스처럼 실시간 광원과 그림자를 이미 채용해서 출시한 게임도 이미 시중에 나와있었다.[7] 여담으로 iOS용 레이지는 구기종 호환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구형 기술로 어디까지 구현 가능한가를 알고 싶어 테스트라도 해본 건지 아니면 그러한 행위에서 재미라도 찾으려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OpenGL ES 2.0을 놔두고 OpenGL ES 1.1 기반으로 구현했다고 한다.[8] 원제: Master of Doom[9] 알파버전에 설정안을 적용하려던 흔적으로 보이는, "포커치는 해병들"이 남아있다.[10]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 스티븐 레비 저.[11] 부드럽게 거부 의사를 표한 게 아니라 "내 앞에서 다시 특허 얘기 꺼내면 나 이 회사 그만둔다!"하며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꺼냈다고 한다.[12] 이드 소프트웨어를 제니맥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제니맥스 산하에서 만든 모든 기술은 제니맥스의 적법한 소유물이다'라는 조항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고, 오큘러스 리프트는 프로토타입인 '리프트' 시절부터 이것에 관심을 보인 존 카맥의 소개로 제니맥스 측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빠방하게 받아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오큘러스 리프트의 개발 토대는 제니맥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니맥스의 흔적이 강했다.[13] 법원 조사 결과 개발 기록이 일부 누락되었음이 발견되어 고의로 개발 기록을 지웠다는 의심은 샀지만 그럼에도 명확한 물증으로 잡을만한 건수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14] 하지만 이 사건은 존 카맥이 독단적으로 행한게 아니라 오큘러스 리프트의 창업주인 팔머 럭키와 공동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자세한건 오큘러스 리프트의 기타 문단이나 제니맥스 미디어의 오큘러스 VR과의 소송전 문단을 참고.[15] 하지만 플삼의 프로세서가 복잡한 병렬 연산으로 성능을 뽑아내는 해괴한 구조 때문에 개발자들로부터 까일 만한 명분을 준건 사실이다. CELL-Broadband Engine 항목 참조.[16] 흥미롭게도 스페이스X의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와 매우 비슷한 행적이다.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익힌 게임마니아 출신으로, 20대에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뒤, 그 자본으로 로켓 개발 회사를 설립한 부분까지 매우 흡사하다.[17] 2010년부터는 이 해상도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저 시기는 '''1995년'''이었다.[18] GLQuake 0.97 이상 버전을 받으면 와이드스크린으로 플레이할 수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