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트 레즈너

 

''' 트렌트 레즈너의 주요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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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 음악상 '''
'''제82회
(2010년)'''

'''제83회
(2011년) '''

''' 제84회
(2012년) '''
마이클 지아키노
()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
(소셜 네트워크)

루도빅 바우스
(아티스트)


''' 역대 골든글로브 시상식 '''
[image]
''' 음악상 '''
'''제67회
(2010년)'''

'''제68회
(2011년) '''

''' 제69회
(2012년) '''
마이클 지아키노
()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
(소셜 네트워크)

루도빅 바우스
(아티스트)



''' 트렌트 레즈너 '''
''' Trent Reznor '''
'''본명'''
마이클 트렌트 레즈너 (Michael Trent Reznor)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65년 5월 17일 (59세)
미국 펜실베이니아뉴캐슬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소속 그룹'''
나인 인치 네일스 (1988년-)
하우 투 디스트로이 에인절스 (2009년-)
'''서명'''
[image]
[ 그 외 정보 펼치기 · 접기 ]
'''학력'''
앨러게니 대학교 컴퓨터 공학 중퇴
'''배우자'''
마리퀸 맨디그 레즈너 (2009년 결혼)[10]
'''신장'''
170cm
'''민족'''
독일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종교'''
무종교
'''자녀'''
5명[11]
'''활동기간'''
1982년 -
'''장르'''
인더스트리얼, 인더스트리얼 락, 인더스트리얼 메탈, 앰비언트, 신스팝
'''사용 악기'''
보컬, 기타, 베이스, 피아노, 색소폰, 신디사이저, 드럼머신
'''데뷔'''
1988년, 《Purest Fe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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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음악계 진출 이후
3. 여담


1. 개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황제이자, 차가운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인간성을 부여한 혁명가

타임, 1997년 4월호

그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재능있는 친구죠

데이브 그롤, Sound City, 2017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영화 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록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창립자이자 상징이다. 1988년 나인 인치 네일스를 결성하고 수 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꾸준히 높은 퀄리티의 음악을 창작해내는 음악가이며 현재까지도 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천재 아티스트이다.
그래미 어워즈에서 세 번 수상을 했는데, 두 번은 나인 인치 네일스로서 수상을 했고, 세 번째 수상은 현재 같이 활동하고 있는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영화 음악으로 수상을 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마이클 트렌트 레즈너 (Michael Trent Reznor)는 1965년 5월 17일 펜실베니아뉴캐슬 (New Castle)에서 낸시 루 (Nancy Lou)와 마이클 레즈너(Michael Reznor)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와 아일랜드계 출신이며 상업 미술가였고, 조지 레즈너 (George Reznor)의 후손이다. 참고로 조지 레즈너는 냉난방 전문 기기 회사인 레즈너 컴퍼니의 창립자라고 한다.링크 즉 기업인의 후손이라는 얘기.
레즈너는 펜실베니아 주 머서 (Mercer)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0대였을 때 결혼하여 레즈너를 낳은 부모님이 레즈너가 5살 때 이혼을 하면서, 레즈너는 외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여동생인 테라 레즈너[1] (Tera Reznor)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래도 부모님이 가까운 곳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주 왕래는 했다고 한다.
레즈너는 5살 무렵에 외할머니의 권유로 클래식 피아노 교육을 받게 된다. 본인도 이를 좋아했고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인 빌 클락(Bill Clark)은 1995년 인터뷰에서 "레즈너는 어릴 적부터 음악이 일상인 아이였고,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고 회상했으며,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리타 베글린(Rita Beglin)은 "레즈너가 피아노를 연주할때면, 흡사 Harry Connick, Jr.를 떠올리게 했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당시로서는 고가였던 신시사이저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SF 장르를 좋아해서 TV 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의 팬이었다고 한다. 소머즈가 죽었을 때 슬픔에 빠졌다고. 링크
한편, 레즈너는 펜실베니아에서의 숨 막힐듯한 삶이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고 언급 했었다. 1994년 9월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음악 산업에 뛰어든 계기에 대해 말했다.

''' "시골을 탈출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 싶던 욕망을 제외하면, 솔직히 왜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내 고향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지만, 그냥 옥수수 밭 뿐이었다. 내 인생 경험은 영화 감상, TV 시청, 독서, 잡지를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매일 TV를 보는 것으로 문화를 접하게 되면, TV에서 나오는 각종 멋진 장소, 흥미로운 곳, 멋있는 직업과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의 이미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있었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2]

다만, 이 인터뷰가 나간 직후 자신의 발언이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되어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저 당시 기사들을 보면 이혼 가정, 조손가정 출신임이 강조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부모님이 자식을 비참한 환경에 빠트린 막장부모로 비칠까 우려했는지,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시골이라 지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관심이 왕성해졌다고.
레즈너는 Mercer Area Junior / Senior High School에서 테너 색소폰과 튜바를 배웠다. 그리고 재즈와 마칭 밴드의 멤버였다. 이 시기에 로컬 밴드 '''Option 30'''에 가입하여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하곤 했다. 머서 고등학교의 전 밴드 감독이자 훗날 이 학교의 교장이 된 Hendley Hoge는 레즈너를 '''매우 긍정적이고 사교적인 아이'''로 기억했다. 출처: <People> 1995년 2월 6일자, "The Music of Rage"
또한 레즈너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참여하여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유다 역할을 연기했으며, 급우들로부터 "Best in Drama"라는 투표를 받기도 했다. 출처 사실 음악을 하기 전에 배우를 할까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198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인근의 Allegheny College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2.2. 음악계 진출 이후


1년 후, 레즈너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동해 음악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첫번째 밴드는 커버 밴드 '''Urge'''였다. 1985년, '''The Innocent'''라는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합류를 하고 ''Livin' In the Street'' 이라는 앨범을 발표했지만, 3개월 후에 밴드를 탈퇴했다. 1986년 로컬 밴드 '''Exotic Birds'''에 들어갔고 영화 Light of Days (1987)에서 The Problems라는 가상의 밴드로 출연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스팝 밴드 '''Slam Bamboo'''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레즈너는 Cleveland의 라이트 트랙 스튜디오 (Right Track Studio)에서 보조 엔지니어 및 잡역부로 일했다. 스튜디오 주인 바트 코스터 (Bart Koster)는 레즈너에 대해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열중했어요. 바닥에 왁스칠 한 번 하는 것도 끝내주게 했었죠"라고 회상했다. 화장실 변기에 붙어있는 음모를 하나하나 떼 내는 등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신임을 쌓아간 레즈너는 코스터에게 스튜디오를 쓰지 않는 시간 동안 자신의 노래 데모를 무료로 녹음 할 수 있겠냐는 요청했고, 코스터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첫 데모를 녹음하는 동안, 레즈너는 자신이 원하는만큼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밴드원을 찾을 수 없었다. 방법을 궁리 하던 레즈너는 프린스에게 영감을 받아 드럼을 제외한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로 결심했다. [3] 이렇게 완성된 데모를 레즈너는 여러 레이블에 돌렸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레이블 중 TVT 레코드와 계약하게 된다. 데모 곡 중 9곡은 비공식적으로 1988년 《Purest Feeling》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으며, 이들 곡은 Nine Inch Nails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최초의 공식 릴리즈인 《Pretty Hate Machine》에 많은 부분이 수정된 형태로 재수록된다. 당시 레즈너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서 1집을 작업하다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는데 이웃 주민이 수염이 덥수룩한 레즈너를 보고 수배 중이던 범죄자로 착각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2.3. 나인 인치 네일스




2.4. 영화 음악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와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스의 사운드트랙을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평단과 팬들의 반응은 좋은 편. 로스트 하이웨이에 수록된 'The Perfect Drug'는 자신이 작곡한 곡들 중에서 제일 ''''''적인 코러스가 등장하는 곡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여담으로 트렌트 레즈너는 시간에 쫒겨 급하게 쓴 곡이란 이유로 이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결말 처리의 문제로 그동안 라이브로 단 한 번도 이 곡을 공연한 적이 없었으나, 2018년 9월 18일 북미투어 공연에서 최초로 공연했다.
레즈너는 본인 명의로 2010년에 NIN의 프로듀서인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사운드트랙을 작업했다. 라디오헤드Creep 합창 버전을 사용했던 트레일러와는 정 반대되는, 본인의 직전 앨범 Ghosts I-IV와 비슷한 스타일의 사운드트랙을 만들어 평단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심지어 LP판으로까지 판매하며 상업적으로도 크게 밀었고, 83회 아카데미 사운드트랙 상을 수상했으며 Best Original Score 부문은 아카데미와 68회 골든글러브(2011년), 모두 수상했다.

아카데미 사운드트랙상 수상 당시 모습, 카메리가 관객석에 있는 여성 둘을 비춰 주는데, 트렌트 레즈너의 와이프인 마리퀸 만디그와 애티커스 로스의 와이프인 Claudia Sarne이다. 둘 다 깨알같이 와이프를 언급한다.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캐런 오가 보컬을 맡은 레드 제플린Immigrant Song 커버에 맞춘 트레일러부터 난리가 났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탄력을 받아, 그리고 팬 및 평단의 압도적인 반응을 의식했는지, 영화 러닝타임보다 더 긴 3CD 구성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사운드트랙 평도 아주 좋고 영화 평도 덩달아 좋은 것까진 좋았으나,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라가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그래미 어워즈 BEST SCORE SOUNDTRACK FOR VISUAL MEDIA 부문에서 수상을 하긴 했다.
<나를 찾아줘>의 사운드트랙도 맡았는데, 가수가 가수이니만큼 일반적인 리듬이 아닌 특유의 느낌을 준다.
2020년에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결국 해를 넘겨 2021년에 개봉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품 소울에서도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영화 음악을 맡았다. 레즈너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어린이용 영화의 음악을 맡은 셈.

3. 여담


  • 코트니 러브에게 스토킹을 당하여 스튜디오를 게이 포르노 사진으로 도배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레즈너가 싫어하는 스튜디오 남직원들을 쫒아내기 위함이었다 한다. 어떤 남직원이 호모포비아적인 발언을 하자 당황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한다.
1994년 롤링스톤 인터뷰에 따르면 1992년 EP 앨범 녹음 당시 에피소드라고 나와 있다.
  • 이와 관련해 언급되는 의외의 인물이 토리 에이모스인데, 레즈너가 The Downward Spiral 앨범을 녹음했던 Le Pig 스튜디오에서 토리의 곡에 백 보컬로 참여해 레코딩을 했다. 그 곡이 'Past Mission'[4]이다.
토리 에이모스트렌트 레즈너가 평소 서로를 음악적으로 리스펙했기 때문에 성사된 콜라보레이션이었고, 이 시기에 이들은 서로의 곡에 가사를 인용하는 식으로 리스펙을 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둘이 사귀는 사이였으나 코트니가 훼방을 놓았다는 식의 루머가 있었다.
다만, 레즈너와 토리는 어디까지나 음악적인 우정일 뿐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현재는 각자 가정이 있는 관계로 당연히 언급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나, 토리 에이모스가 2014년에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연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의 'Something I Can Never Have'를 연주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음악적으로는 여전히 리스펙하는 듯하다. 링크
  • 젊은 시절,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90년대 당시 기사들을 보면 키아누 리브스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는데, 저 당시는 꽃미남 스타일이었다.[5] 텀블러 등에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이미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절에는 몸매가 슬림해서 딱 달라붙는 가죽 의상, 가터벨트, 긴 장갑, 망사 스타킹 등 어지간한 여성들도 소화하기 힘든 파격적인 복장도 무난하게 소화했다.(...)
  • 이 팬 아트를 보면 그동안의 패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링크
  • 헬스 매니아라고 한다.[6] 유일하게 갖고 있는 취미가 게임과 식스팩 만들기라고.
  •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털, 옥수수[7], 돼지풀, 잔디, 먼지, 꽃가루 알레르기 등 온갖 알레르기를 달고 살아서 귓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저 기사만 하더라도 레즈너가 투어 도중 알레르기 때문에 온몸에 발진이 났을 때 기자가 호텔 방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해서 작성한 것이었다.
  • 유명인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매스컴에 의해 자신의 이미지가 왜곡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링크 앞서 언급된 1994년 롤링스톤 인터뷰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한 것도 그렇고[8], 자신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괴기스럽게 알려진다거나 반대로,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원치 않는 듯하다.
  • 2006년, 41번째 생일날에 자신의 모교인 고등학교에 금의환향했다는 기사가 지역 언론에 실렸다. 링크 이날 레즈너는 머서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모교의 선배로서 장학금도 기부한다고.
2011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음악상을 받았을 때는 그 지역이 축제 분위기였다 한다.
  • 5월 17일생으로 퀸즈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조시 호미와 생일이 같다. 레즈너가 8살 형이다.
  • 정치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를 극혐하는 진보 성향[9]이지만,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원래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환영했던 입장이었지만, 2013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으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과 경제를 파탄시킨 금융 범죄자들을 언급하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아무도 이런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편리할 때만 목소리를 높인다가 실현됐다고 강력 비판했다. 참고로 는 미국인들의 정치 무관심으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앨범이다. 링크
[1] 트렌트 레즈너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만, 데이빗 보위와 만나게 해주거나 자신의 라이브 공연에 초대하는 등 여동생을 챙기는 것을 보면 나름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하는 듯 하다.[2] 1995년 잡지 <Details>와의 인터뷰에서 1994년 당시 롤링스톤과 가진 인터뷰는 비참한 어린 시절의 느낌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여담으로 <Details>와의 인터뷰는 1994년도 롤링스톤 인터뷰에 나간 내용을 정정하는 내용이 많다. 일례로 '''"but essentially Nine Inch Nails are theater. What we do is closer to Alice Cooper than Pearl Jam.(본질적으로 나인 인치 네일은 연극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펄 잼보다 앨리스 쿠퍼와 더 가까워요.)"'''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불쾌해했다. 2013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에선 이와 관련해 키스의 진 시몬스나 앨리스 쿠퍼와는 달리 캐릭터를 위해 곡을 쓰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 나오는 콘셉트에 좀 더 가깝다. 본인 음악이 할로윈 코스프레인 것처럼 오해받을 상황이었으니 불쾌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3] 이후 레즈너는 가끔 다른 뮤지션, 드러머 및 관련 전문가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밴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는 이러한 규칙을 고수하였다.[4] 토리 에이모스가 성폭력 피해자가 된 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가사에 등장하는 장미향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링크[5] 참고로 아래 사진은 1992년도 모습이다.[6] 헬스 매니아가 된 계기는 코카인과 알코올 중독 때문이라고 한다. 2000년에 헤로인을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흡입했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링크 다만, 기사에도 나오듯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이나 화이트 헤로인으로 불리는 펜타닐 계통 마약을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흡입한 것인데, 펜타닐 항목에도 나오듯이 기존의 헤로인보다 훨씬 강력하며, 치사량은 코카인의 500분의 1이다.(...) 이후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고. The Downward Spiral 시절까지는 슬림한 몸매였으나 The Fragile을 거쳐 With Teeth에 이르러서는 근육질의 몸매를 소유하게 되었다.[7] 뮤비 촬영시 옥수수 녹말을 뒤집어썼다는 것으로 보아 옥수수 성분 자체가 아니라 옥수수 껍질 알레르기인 것으로 보인다. 복숭아 털 알레르기와 비슷한 케이스. 참고로, '옥수수 알레르기'로 검색해 보면, 집에서 옥수수를 삶았을 때 옥수수 껍질을 만져서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났다는 체험담이 의외로 흔하다.[8] 레즈너가 언급하지도 않은 앨리스 쿠퍼펄 잼의 에디베더를 엮어 어그로를 끈 롤링스톤 기사도 그렇지만, 저 당시 기사들을 보면 90년대 당시 얼터너티브 락커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적용하여,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사회부적응 문제아라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었으며, 이는 트렌트 레즈너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뮤지션들 기사에서도 나타난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긍정적인 학생으로 기억하는 모교 은사들의 증언도 있다.[9] 자녀가 욕설을 배울까 봐, 트럼프가 나오는 뉴스 장면이 아이들 눈에 띄면 TV를 음소거 상태로 만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