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C. 브레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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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미국 최연소 부통령(당선 당시 만 35세)이다.
자신이 부통령으로 재임했던 나라에 반역을 저지른 이력을 가진 부통령이다. 부통령 임기 후 아메리카 연합국의 전쟁장관이 되었기 때문. 남북전쟁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끝까지 미국 연방에 충성을 거부하여 국적 회복을 하지 못하고 무국적자로 사망했다.
2. 초기 정치경력
1821년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켄터키 주에 있는 센터 칼리지(Centre College)를 졸업하고 1844년 제임스 포크의 선거 캠페인단에 들어가[1] 켄터키 주의 선대위원장으로 포크의 대선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포크가 대통령이 되면서 벌어진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였다. 브레킨리지는 야전부대가 아닌 사단 작전참모로 복무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미멕전쟁 참전 경력을 내세워 1849년 민주당에 입당한다. 브레킨리지는 미멕전쟁으로 얻은 새 영토는 '''모두 노예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부 강경성향을 내세워 순식간에 민주당의 거물이 된다. 1850년 중간선거에서 켄터키 주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1852년에도 재선된다. 이후 1854년 중간선거에서는 건강을 사유로 불출마한다. 표면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실제 이유는 켄터키 주지사인 라자루스 파월(Lazarus W. Powell)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파월은 노예 지지성향이긴 했지만 브레킨리지만큼의 강경파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파월 주지사와 브레킨리지 의원은 주 정치 내에서 정적으로 변했고, 파월 주지사는 1854년 하원의원 선거구 게리맨더링으로 브레킨리지의 선거구를 마구잡이로 재편성한다. 브레킨리지는 파월 주지사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3. 미국 부통령
브레킨리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몸 관리를 하다가, 북부인 펜실베이니아 출신인 제임스 뷰캐넌이 185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자 브레킨리지의 운명이 바뀌었다. 뷰캐넌은 매우 고령이었고 당시 민주당의 주 지지기반이 남부였기에 북부 출신인 뷰캐넌은 민주당 내에서 왕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북부 출신이면서 남부에 유화적인 것을 높이 사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당시 경선 후보 중에서는 뷰캐넌이 가장 노예제에 유화적이었기 때문이다. 1856년 민주당 경선 당시, 뷰캐넌 외의 후보였던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노예제 반대론자였으며, 루이스 카스는 노예제가 주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새로 생겨나는 주들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예제에 반대했으므로 남부에 적대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랭클린 피어스도 노예제에 유화적이었지만 그는 대통령 임기 중 실책으로 남부와 북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뷰캐넌도 민주당 주류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후보는 아니었으므로, 민주당에서는 속칭 '''차세대 주자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낙향했던 브레킨리지를 워싱턴 D.C.로 소환, 뷰캐넌의 러닝메이트로 붙인다. 그래서 미국 헌법에 규정(대통령 만 35세 이상, 부통령 만 32세 이상)된 최연소 부통령 후보가 탄생한다. 결국 56년 대선에서 뷰캐넌이 승리하여 브레킨리지도 '''30대의 나이에 부통령'''이 된다. 2019년 지금까지 브레킨리지의 '''최연소 미국 부통령''' 타이틀은 깨지지 않고 있다. 미국 대통령을 합쳐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선 당시에 30대였던 인물은 존 C. 브레킨리지가 유일하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1856년 미국 민주당 경선도 1860년 민주당 경선만큼이나 진흙탕 싸움이었다. 대통령 후보를 뽑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무려 17번'''이나 투표해서 간신히 뷰캐넌이 대통령 후보로 뽑힌 것이다. 브레킨리지가 부통령 후보가 된 것은 뷰캐넌이 대선 후보로 뽑히고 나서 3개월이나 있다가 확정됐다. 브레킨리지는 전당대회 당시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4위'''밖에 못했다. 미시시피 주지사였던 존 A. 큇맨(John A. Quitman)이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1위를 해서 부통령 후보가 됐지만, 이 사람은 원래 휘그당에 있다가 대선 경선할 즈음에 휘그당에서 공화당이 분당하자 여기서 민주당으로 들어온 인사였다. 당연히 '''노예제 반대론자'''였고, 민주당 주류였던 남부에서는 큇맨이 부통령으로 뽑히면 탈당하겠다(...)고 선포하여 결국 큇맨이 부통령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하게 만든다. 남부의 실력행사로 브레킨리지를 부통령 후보로 앉힌 것이다.
민주당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1856년에 민주당 뷰캐넌 - 브레킨리지 조가 당선은 됐지만 고작 '''45.3%'''만 득표했다. 당시 휘그당에서 공화당이 분당하면서 전직 미국 대통령이던 밀러드 필모어가 휘그당 후보로 재선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링컨보다 4년 빠른 1856년에 공화당에서 정권교체를 했을 것이다. 1856년 공화당 후보는 존 C. 프레몬트(John C. Frémont)로 33.1%의 득표를 올렸고, 밀러드 필모어 휘그당 후보는 21.5%의 득표를 올렸다. 선거인단 역시 뷰캐넌 174표 - 프레몬트 114표 - 필모어 8표로 경합주에서 표가 갈려먹힌 것이 뷰캐넌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몬트는 원래 민주당에 있다가 노예제에 반대하여 공화당에 입당한 인사로, 공화당은 당시 '''급조'''된 정당이라 당시 미국 전체 주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인 '''18개 주'''밖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프레몬트는 강경한 노예제 반대 입장으로 표를 쓸어담아서 전체 주에 출마했던 밀러드 필모어를 따돌렸던 것.
하여간 민주당 주류의 지지를 받는 것은 브레킨리지였기에 브레킨리지는 아주 젊으면서도 백악관 내에서 '''실세''' 부통령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뷰캐넌은 노예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브레킨리지가 주장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뷰캐넌은 브레킨리지와 민주당 주류한테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러자 민주당 내에서는 북부 출신의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신주류 정치인으로 떠올랐고, 기존의 민주당 주류였던 남부와 갈등을 빚는다.
4.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선 캠프는 엉망진창이었다. 타협파로 분류되어 남부에서 이미지가 좋은 편이 아니던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다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이미 1856년 대선에서도 남부 측이 더글러스와의 경선에서 뷰캐넌을 내세워서 간신히 이겼던 터라 이번에는 정말로 더글러스가 민주당 후보가 될 게 뻔했다. 더글러스는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만큼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노예제 반대 인사였다. 당연히 민주당 구 주류인 남부에서는 더글러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안 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남부에서는 무려 '''63회'''나 대선 경선 선거인단 투표를 하는 등 조직적으로 더글러스를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자행했으나 결국 더글러스가 후보로 뽑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아예 남부는 줄 탈당을 결의, 남부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분당을 감행했다. 결국 잔류 민주당은 '''북부민주당'''으로 개명했으며, 뷰캐넌 대통령은 북부민주당에 잔류했지만 혈기왕성한 브레킨리지 부통령은 남부민주당으로 입당한다. 남부민주당에서는 만으로 39살밖에 안 되는 브레킨리지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며, 부통령 후보로는 오리건 주 상원의원인 조셉 레인(Joseph Lane)[2] 을 내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주당 내 중도파 세력과 공화당에서 탈당하고 남은 구 휘그당 세력이 만나서 헌정연합당(Constitutional Union)을 창당하고 여기서는 존 벨(John Bell)을 대통령 후보로, 에드워드 에베르트(Edward Everett)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다.
구 민주당 세력이 북부민주당, 남부민주당, 헌정연합당 세개로 쪼개지니 에이브러햄 링컨은 고작 '''39.8%'''로 40%도 얻지 못했지만 '''선거인단을 180명이나 쓸어담는 초초초 압승'''을 하고 만다. 존 C. 브레킨리지 남부민주당 후보는 18.1%에 그쳤지만 남부 주를 싹쓸이해 72명 선거인단으로 2위를 했고, 존 벨은 테네시, 켄터키 , 버지니아 주에서 승리하여 12.6%를 얻고 39석을 차지했다.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북부에서는 표 분산으로 링컨한테 털리고, 남부에서는 브레킨리지한테 털렸으니 '''29.5%나 받고도 선거인단 12석에 그쳐서 꼴지'''(...)로 전락했다. 브레킨리지, 벨이 독자 출마를 하지 않아, 민주당 표가 더글러스로 단일화되어 표 분산되지 않았다면 링컨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대선에서 낙선한 브레킨리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앞에 사표를 제출, 미국 부통령직을 사퇴하고[3] , 남부연합에 가담한다.''' 본격적인 반역자의 인생이 시작된다.(...)
5. 남북전쟁
브레킨리지는 아메리카 연합국에서 정보참모로 참전했다. 전쟁 초기에는 브레킨리지가 미합중국의 부통령까지 했던 거물이라, 미국 연방의 정보를 잘 알아서 남부 측에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이 소모전으로 흘러가자 브레킨리지의 정보도 낡아갔고, 결국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 1863년 브레킨리지의 직책은 다른 사람에 넘어갔고, 남부연합의 멸망이 확실시되는 1865년 브레킨리지는 남부연합의 전쟁장관에 오른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북부로 기울었기에 전쟁장관이 되고서도 특별히 뭘 한 것은 없다. 남북전쟁 항복 문서에 브레킨리지가 전쟁장관 명의로 서명한 것이 있어서 그래도 역사에 이름은 남겼다.
6. 말년
1865년 남부의 패망으로 남북전쟁이 끝났지만 브레킨리지는 미국에 충성을 거부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수정헌법 제 14조에 따라 남부연합에 가담한 자에 대해 북부에 충성맹세를 하지 않으면 국적을 주지 않았고, 브레킨리지는 끝까지 충성을 거부했기에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브레킨리지는 적극적인 전범이었던 터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결국 브레킨리지는 켄터키 주 렉싱턴에 있는 본인의 농장에서 '''무국적자 신분으로''' 1875년 숨을 거뒀다. 그나마 장례라도 성대히 치른 제퍼슨 데이비스와 달리 브레킨리지는 장례조차도 직계 가족만 참석할 수 있게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강력하게 막았다.
[1] 민주당 입당 전이다.[2] 대선에서 패배하고 남북전쟁이 터지자, 조셉 레인은 오리건 주를 아메리카 연합국에 넣으려는 정치 공작을 하다가 발각되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반역죄로 상원의원직을 삭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사형감인데 링컨이 봐줬다.[3]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브레킨리지 부통령의 사직서를 반려하는 바람에 공식적인 사퇴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레킨리지는 이미 남부연합에 가담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때문에 브레킨리지의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았음에도, 브레킨리지는 백악관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브레킨리지의 부통령 임기는 정상적인 만료일인 1861년 3월 4일까지로 되어 있다. 브레킨리지가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부통령직을 태업한 기간에는 국무장관인 Jeremiah S. Black가 부통령직을 대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