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98-99 · 2000-01




'''베스트팀'''





''' 네덜란드의 축구감독 '''
''' 이름 '''
'''제럴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Jerrel Floyd Hasselbaink[1]'''
''' 출생 '''
1972년 3월 27일 (52세) /
네덜란드령 기아나 파라마리보
''' 국적 '''
[image] 네덜란드 | [image] 수리남
''' 신체 '''
183cm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GVO (1984~1986 / 유스)
ZFC (1986~1987)
Zaanlandia (1987~1988 / 유스)
DWS (1988 / 유스)
텔스타 (1988~1990 / 유스)
텔스타 (1990~1991)
AZ 알크마르 (1990~1993)
SC 캄포마이오렌세 (1995~1996)
보아비스타 FC (1996~1997)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7~1999)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9~2000)
'''첼시 FC (2000~2004)'''
미들즈브러 FC (2004~2006)
찰턴 애슬레틱 FC (2006~2007)
카디프 시티 FC (2007~2008)
''' 감독 '''
로얄 앤트워프 (2013~2014)
버턴 앨비언 FC (2014~2015)
QPR (2015~2016)
노스햄튼 타운 FC (2017~2018)
버턴 앨비언 FC (2021~)
''' 국가대표 '''
23경기 9골 (네덜란드 / 1998~2002)
1. 소개
2. 클럽
3.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
5. 감독 경력
5.1. 로얄 앤트워프 시절
5.2. 버튼 알비온 시절
5.3. QPR 시절
5.4. 노스햄튼 타운 FC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clearfix]

1. 소개


네덜란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前 축구 감독이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 프리미어 리그를 평정했던 스트라이커 중 한명으로 특히 첼시에서의 4년 동안, 축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른 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특히 첼시에서의 활약상은 첼시 팬들이 레전드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본인 또한 선수 경력 중에 득점왕을 2번이나 차지하기도 했던 첼시 시절을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 현재는 축구 감독으로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2. 클럽



2.1. 에레디비시 시절


하셀바잉크는 1972년 3월 27일 수리남의 파라마리보에서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6살이 될 무렵,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잔담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수리남에 남았고 이후 가족과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듬 해, 하셀바잉크는 GVO(Gestaagt Volharding Overwint) 유스팀에 소속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엔 골키퍼였지만 나중에 ZFC(Zaansche Football club)로 이적한 후 우측 윙어로 포지션을 바꿨다. 그러나 하셀바잉크는 10대 시절 방황기를 맞이했고 거리의 갱이 되어서 좀도둑질을 했다. 급기야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붙잡혀 석달 동안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다.
[image]
이렇듯 나쁜 길에 빠져들던 하셀바잉크는 얼마 후 텔스타의 프로 선수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갱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는 1990년 10월 27일에 데뷔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팀 감독은 경기 직후 그를 방출해버렸다.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인듯 했지만, 뜻밖에도 그에게 선수 계약을 제의한 팀이 있었다. 그 팀은 AZ 바로알크였다. 당시 AZ에는 하셀바잉크의 형인 카를로스가 뛰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막내가 아직도 방황하는 것에 가슴아파하고 있었고 구단 보드진을 열심히 설득하여 동생에게 프로 선수로 뛸 기회를 주게 했다. 하셀바잉크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곧 팀의 주요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90~1993년까지 3년간 총 4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3년, 행크 울렘 AZ 감독은 그와 재계약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계약이 만료되자 쓸쓸히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하셀바잉크는 FC 에인트호번에서 트라이얼을 수행했지만 불합격 처분을 받았고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테스트를 받았지만 역시 합격하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오스트리아로 가서 2년간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해야 했다.

2.2. 프리메이라 리가 시절


[image]
그러던 1995년 8월, 하셀바잉크는 포르투칼 축구 클럽인 SC 캄포마이오렌세에서 트라이얼을 받았다. 마누엘 퍼란데스 감독은 그의 기량을 체크한 후 이 선수가 공격수로 대성할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퍼란데스는 하셀바잉크와 계약한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관계자들에게 언론에는 "지미란 이름의 선수와 계약했다"라고만 알릴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계약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는 오히려 진짜 이름인 애럴이 아닌 지미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그는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로서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는 데뷔 후 첫 4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다섯 번째 경기에서는 페널티킥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여섯 번째 경기에서 멀티골을 터트리며 서서히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31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넣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캄포마이오렌세는 이 시즌에 강등되고 말았다.
[image]
이후 그는 1996년 여름에 보아비스타 FC로 3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그가 갓 이적한 1996-97 시즌, 보아비스타는 두 명의 감독이 경질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결국 팀은 겨우 7위에 그쳐야 했다. 하지만 하셀바잉크 개인은 이 시기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리그 29경기에서 20골, 리그에서 득점 2위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하셀바잉크는 이후 재정난에 시달린 팀 사정 때문에 리즈 유나이티드로 보내졌다.

2.3. 리즈 유나이티드 FC 시절


[image]
당시 리즈의 감독 조지 그레이엄은 1997년 여름 하셀바잉크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당시 사람들은 군소 리그에서 어느 정도 활약했다고 너무 많은 이적료를 지불했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실제로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겨우 5골만을 기록하며 우려는 현실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후반기에 대폭발했고 1997-98 시즌이 끝났을 때 리그 33경기 16골, FA컵 4경기 4골, 리그 컵 3경기 2골을 기록하며 종합 40경기에 출전하여 22골을 넣는 활약을 선보였다.
다음 시즌, 하셀바잉크는 36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하며 리즈를 4위로 올려 UEFA 컵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그해 골든 부츠를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에이전트는 클럽의 낮은 주급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에이전트는 하셀바잉크를 설득하여 팀을 떠나게 했다. 그는 1999년 여름 이적료 천만 유로를 기록하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4.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 시절


[image]
하셀바잉크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팀의 주요 득점원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레알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첫번째 골을 기록한 뒤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다. 10월 30일, 하셀바잉크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더비전에서 2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프 누에서도 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1로 패했다.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목표로 뒀지만 구단주가 급료를 체불하는 짓(...)을 하는 바람에 선수들이 경기를 제대로 뛰지 않아 결국 성적은 최악으로 굴러떨어졌고 라니에리는 2월에 해고되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셀바잉크는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라 리가 득점 2위를 차지했고, 코파 델레이 결승전에 팀을 올려놓고 결승전에서도 골을 넣었지만 팀은 에스파뇰에게 2:1로 패했다. 이후 AT 마드리드는 하셀바잉크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못했고 결국 강등되고 말았다. 선수들이 경기를 대충 뛰는 상황에서도 홀로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결국 팀을 잔류시키는 데 실패한 그는 결국 2000년 5월 첼시로 이적했다.

2.5. 첼시 FC 시절


[image]
하셀바잉크는 2000년 5월 15m 파운드의 이적료(로만 체제 이전 첼시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 기록이다)를 기록하며 첼시로 이적했다. 그는 2000년 커뮤니티 실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하셀바잉크는 당시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와 함께 팀의 리빌딩을 이끄는 선봉장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2000-01 시즌에 35경기에 출전하여 23골을 넣었다. 특히 2000년 10월 21일 코벤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선 4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6:1 완승에 기여했다. 그는 이 시즌에 최다 득점자가 되어 골든 부츠를 수상했다.
[image]
2001-02 시즌, 하셀바잉크는 득점 행진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2002년 5월 13일 토트넘 핫스퍼와의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그는 이 시기 아이두르 구드욘센과 환상의 호흡을 맞추며 첼시의 원투펀치로서의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소화했다. 하셀바잉크는 모든 대회에서 29골을 기록했고 구드욘센은 23골을 기록했다. 즉, 두 사람은 한 시즌에 총합 52골을 몰아넣은 것이다. 첼시는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FA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하셀바잉크는 결승전에서 후반 68분경에 햄스트링이 올라오는 바람에 부상을 당했고 결국 팀은 아스날에게 2:0으로 패배했다.
2002년 여름, 하셀바잉크는 햄스트링 부상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부상 회복을 위해 재활 훈련에 전념했다. 그는 2002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ITV의 패널로서 축구 경기를 리뷰했다. 라니에리는 2002-03 시즌 동안 지안프랑코 졸라와 하셀바잉크를 로테이션으로 돌렸다. 하지만 주로 졸라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하셀바잉크는 상대적으로 적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에 바르셀로나의 감독 루이 판할은 하셀바잉크를 1월 이적 시장에서 800만 파운드에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반 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되었고 결국 이 딜은 무위에 그쳤다. 하셀바잉크는 이 시즌에 기회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44경기에 출전해서 15골을 넣었는데 이는 졸라에 비해 불과 한 골 뒤진 수치였다.
2003-04 시즌, 하셀바잉크는 모든 대회에서 18골을 넣었다. 2004년 3월 27일(이 날은 그의 32번째 생일이었다.), 하셀바잉크는 60분 경에 교체선수로 투입되어 울버햄튼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첼시는 이 시즌에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선 4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고 라니에리는 경질되었고 새로 부임한 주제 무리뉴는 하셀바잉크를 방출했다. 그는 첼시에서 177경기에 출전하여 88골을 기록했다.
참고로 하셀바잉크 이후로 첼시는 제대로 된 9번 선수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중에는 '''페르난도 토레스라다멜 팔카오'''같은 뛰어난 실력의 공격수가 왔었는데도 아직까지도 그 누구도 하셀바잉크만큼 잘한 선수가 없다. 이쯤 되면 아스날 9번의 저주 못지 않은 첼시 9번의 저주 수준.[2][3] 17/18시즌 알바로 모라타가 영입되어 9번을 달고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있어 드디어 첼시의 9번의 저주도 막을 내릴지 관심을 받고 있다. 일줄 알았으나 모라타도 부진하여 저주는 계속...
하지만 최근 아스톤 빌라에서 임대복귀한 타미 에이브러햄과 그의 활약에 팬들은 '첼시 9번의 저주'가 깨질지 기대하고 있다.

2.6. 미들즈브러 FC 시절


[image]
2004년 6월 하셀바잉크는 풀럼, 셀틱, 레인저스의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미들즈브러와 2년 계약을 체결했다.
이 당시 미들즈브러는 당시 구단 최대의 거금인 800만 파운드로 2002년에 마시모 마카로네를 영입했으나 이적료에 못미치던 OME스러운 활약으로 스트라이커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첼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하셀바잉크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8월 14일, 뉴캐슬과의 개막전 때 데뷔전을 치뤘고 이날 골을 기록하며 2:2 무승부에 한몫을 했다. 2004-05 시즌때 하셀바잉크는 마크 비두카와 투톱을 이루며 36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팀내에서 가장 많은 골 기록이었다. 또한 미들즈브러는 이 시즌에 7위를 기록하며 유로파 대회 진출권을 획득했다.
2005-06 시즌, 하셀바잉크는 새로 영입된 공격수인 야쿠부 아이예그베니[4]의 보조역할을 하는 스트라이커로 리그 22경기에 출전하여 10골을 기록했고 FA컵에서 6경기 3골, 리그컵에서 3경기 1골, 그리고 유로파컵 13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하며 종합 44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 특히 이 당시 맨유를 4:1[5] 로 관광시킨 경기에서 그의 추가골로 2:0으로 만들어서 맨유의 추격 의지를 꺾어버렸으며, 이 경기에서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MOM급 활약을 펼쳤던 가이즈카 멘디에타와 함께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미들즈브러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AS 로마, FC 바젤 등을 연파하며 유로파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세비야에게 4:0으로 아쉽게 참패해서 은메달을 타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 유로파 결승전은 하셀바잉크가 미들즈브러에서 뛴 마지막 경기였다. 이후 새 감독으로 부임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팀의 리빌딩을 위해 선수시절에는 동료였지만,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하셀바잉크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2.7. 찰턴 애슬레틱 FC 시절


[image]
하셀바잉크는 2006년 여름에 셀틱으로 이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셀틱은 하셀바잉크에게 충분한 주급을 줄 여력이 없었고 결국 그는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던 찰튼 애슬래틱에 자유계약으로 합류했다. 이후 하셀바잉크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제소했다. 그는 2004년 챔피언스리그 당시 첼시 보드진이 아스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며 언론에 호소했다. 하지만 이 보너스 지급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하셀바잉크는 첼시와의 소송전에서 패했다.
하셀바잉크는 찰턴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2007년 1월 13일에 전 소속팀인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여 팀의 3:1 승리를 이끌긴 했지만 그 외에는 기량이 저하된 모습을 보였고 29경기에 출전하여 불과 4골만 기록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그는 방출되었다.

2.8. 카디프 시티 FC 시절


[image]
하셀바잉크는 2007년 8월에 카디프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카디프의 감독 데이브 존스는 그와 로비 파울러로 하여금 투톱을 형성하여 팀의 공격진을 이끌게 했다. 9월 19일, 하셀바잉크는 왓포드를 상대로 20 야드 거리에서 중거리슛을 날려 골을 기록하는 묘기를 보였지만 팀은 2:1로 패했다. 그는 카디프에서 쏠쏠한 활약을 선보였고 카디프가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됐다. 다만 카디프는 FA컵 결승전에서 포츠머스에게 1:0으로 패했다. 하셀바잉크는 2007-08 시즌에 종합 44경기 출장하여 9골을 기록했고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클럽 커리어만 보면 부동의 국가대표 주전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공격수였지만, 문제는 하셀바잉크의 전성기 당시에 네덜란드는 배가 부르다 못해 찢어질 정도의 A급 스트라이커 부자 나라였기 때문에 단 한번도 확고한 주전이었던 적이 없었다. [6] 뤼트 판니스텔로이파트릭 클라위버르트는 통산 빅리그 득점왕을 4번(리그 2번, 챔스 2번)이나 차지한 골게터와 재능만큼은 네덜란드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FC 바르셀로나의 주전 스트라이커였다. 더 골때리는 건 3rd 공격수 로이 마카이가 라리가 피치치 2회 수상자였고, 제4선발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피에르 판호이동크도 비록 빅리그 커리어가 하셀바잉크보다 부족했고 팀을 수없이 옮겨다닌 저니맨이었음에도 매년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보여준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국대 주전 경쟁은 엄청나게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브라질의 공격수 마르시오 아모로소가 있다. 이 선수는 98-99 세리에 A 득점왕과 01-02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외계인 에 밀린것도 모자라 브라질에서 개인기 만큼은 최고라고 평가받았던 데니우손에게 마저 밀려 아예 2002 한일 월드컵 국대에 뽑히지도 못했다.
1998년 5월 27일,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의 부름을 받고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는 이날 카메룬과의 평가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날 네덜란드는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1998년 6월 1일, 하셀바잉크는 파라과이를 상대로 출전하여 데뷔골을 기록하며 팀의 5:1 승리를 이끌었고 며칠 후 나이지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팀의 5:1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1998 월드컵에서 스쿼드에 포함되었지만 당시 데니스 베르흐캄프,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피에르 판호이동크 등 쟁쟁한 스트라이커들이 네덜란드 국대에 즐비했고 윙어에서도 부데베인 젠덴, 마르크 오버르마르스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어서 선발 출전은 요원했고 벤치에서 교체출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월드컵 개막전에서 공격진이 제대로 몸이 풀리지 않은 덕분에 그가 선발 출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 기회를 날려버려 결국 0:0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고 결국 후반 65분에 베르흐캄프와 교체되었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들이 대한민국을 5:0으로 박살내고 있는 동안 벤치에서 지켜봐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후 그는 종종 교체 선수로 출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네덜란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4강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전에서 패한 후 최종순위 4위를 거두었다.
이후 하셀바잉크는 국가대표팀에 가끔 뽑혔지만 별다른 출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1999년 8월 18일에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선발 출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0:0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6개월 후, 그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여 10분을 뛰었고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도 출전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대표로서는 그다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UEFA 유로 2000에서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했다.
2000년 6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루이 판할은 하셀바잉크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했다. 하셀바잉크는 2000년 11월 15일 스페인과의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그는 스페인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와 싸우는 바람에 경기 막판에 퇴장당하고 말았다. 2000년 3월 24일 안도라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5:0 승리에 한몫을 했고 4일 뒤에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페널티 킥을 넣었다. 그후에도 그는 꾸준히 출전하여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덜란드는 2002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2002년 1월, 딕 아드보카트가 네덜란드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하셀바잉크는 팀의 주축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2002년 9월 7일에 벨라루스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고 네덜란드는 이 승리를 계기로 UEFA 유로 2004에 진출했다. 이후 하셀바잉크는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4. 플레이 스타일



빠른 스피드와 유연함을 장착한 전형적인 골게터 타입의 선수였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전매특허인 빨랫줄 중거리슛팅과 익살맞은 토끼춤 골세레머니. EPL을 대표했던 캐논 슈터중 하나로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었다.

5. 감독 경력



5.1. 로얄 앤트워프 시절


[image]
2009년 10월, 하셀바잉크는 남부 컨프런스리그에 소속된 Woking FC의 코치로 부임하여 코치 수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첼시 U16팀 코치로 부임했고 나이키 아카데미에서 코치 수업을 받아 UEFA A 라이선스를 확보했다. 그는 2011년 6월 부터 2013년 1월까지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코치로서 일했고 팀 감독이 경질되자 그를 따라 노팅엄을 떠나 한동안 야인 생활을 했다.
그러던 2013년 5월, 하셀바잉크는 벨기에 2부리그 소속 팀인 로얄 앤트워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2년 내지 3년간 발전시키겠다"라고 선언하고는 어린 공격수들 위주로 교육시켜서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렸다. 그는 많은 어린 선수들을 팀에 영입했는데, 그중에는 잉글랜드 U19 국가대표팀에서 뛴 존 보스톡도 있었다. 그는 2013-14 시즌에 앤트워프를 7위에 안착시켰다. 하지만 보드진은 이 성적은 그가 영입하느라 들인 영입자금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는 그해 5월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5.2. 버튼 알비온 시절


[image]
2014년 11월 13일, 하셀바잉크는 잉글랜드 4부리그 소속 클럽인 버튼 알비온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이끌고 좋은 성적을 거뒀다. 2015년 1월에는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아 1월 이달의 감독상 유력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달의 감독상은 노스햄튼 타운의 감독 크리스 와일드가 수상했다. 그후에도 버튼은 하셀바잉크의 지도하에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4월 18일 모컴 FC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팀 역사상 최초로 3부 리그 승격을 달성했으며 2주 뒤엔 캠프리지 유나이티드를 3:2로 제압하고 4부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image]
4부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선수들을 향해 샴페인을 뿌리는 하셀바잉크.
이후 하셀바잉크는 3부리그에서도 승승장구했고 2015년 12월 무렵엔 버튼을 1위에 안착시켰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주목하고 있던 QPR은 12월 4일 크리스 램지를 해고한 뒤 그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5.3. QPR 시절


[image]
하셀바잉크가 QPR로 부임할 무렵, 팀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QPR은 지난 시즌 해리 레드냅이 사임한 후 표류했고 크리스 램지 수석코치가 새 감독으로 선임됐으나 결국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되었다. 보드진은 이후에도 램지를 계속 신임했지만 램지는 팀의 분위기를 전환시키지 못했고 결국 QPR은 13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QPR은 선수 영입 급료 지급 과정에서 막대한 액수의 빚을 져야 했고 급기야 FFP 징계를 받을 지경에 놓였다. 이에 보드진은 램지를 해고하고 하셀바잉크를 새 감독으로 선임하여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하셀바잉크는 부임 이후 번리와의 첫번째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그의 팀의 집중력이 매우 떨어져 있으니 선수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그는 영국 축구 리그에서 몇 안되는 흑인 감독이다. 토크스포츠는 흑인 감독으로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무런 부담감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직업을 수행할 자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전의 클럽에서 매우 잘했고 나는 이 자리를 수행할 작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클럽도 저에게 기회를 준 거고요. 저는 흑인이고, 이건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흑인인 게 자랑스럽고 이걸 변화시키지 않을 겁니다.

2016년 1월 16일 현재, QPR은 7승 10무 9패로 승점 31점을 기록하며 17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6년 2월 아담 존슨이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선더랜드 AFC에서 방출되자 존슨이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를 즉시 영입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존슨의 범죄는 단순 성매매가 아닌 미성년자 강제추행이라는 중범죄였고, 존슨이 6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되면서 하셀바잉크의 바람은 백일몽이 되었다.
2016년 9월 텔레그라프의 보도에 의하면 자기팀에 선수를 넣어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이에 대해 조사를 진행중이다. 해당 매체는 함정 취재 형식으로 위장 에이전트를 투입했으며, 이에 보기 좋게 걸려든것. 함정 취재 중에도 하셀바잉크는 다른 에이전트와 뒷거래를 하는 정황마저 포착되어서, 빼도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하셀바잉크를 둘러싼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팀도 중하위권에서 부진하자 결국 QPR은 2016년 11월 5일 하셀바잉크를 경질하였다. 하셀바잉크는 QPR에서 47경기를 치렀고 14승을 거뒀다.

5.4. 노스햄튼 타운 FC


2017년 9월 4일, 4연패로 EFL 리그 1 최하위로 시즌을 시작한 노스햄튼 타운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3년 계약을 맺었다. 하셀바잉크의 노스햄튼은 리그 최다 실점과 최악의 득실차를 기록했고, 결국 9경기 4무 5패의 부진을 겪으며 강등권을 벗어나지 못한 팀은 2018년 4월 3일 하셀바잉크를 경질하였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1] 제럴과 플로이드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식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을 적용시키지 않는다.[2] 다만, 아스날 9번이 임팩트가 더 큰 데다 첼시에는 '''7번의 저주'''라는 더 큰 저주가 있었다. 아드리안 무투안드리 솁첸코같은 선수들이 7번을 달고 보여준 막장 퍼포먼스는.... 그나마 7번은 하미레스은골로 캉테가 저주를 완전히 깨부수는데 성공했다.[3] 사무엘 에투는 아예 29번을 달고 뛰었다.[4] 한국과의 월드컵 경기때문에 엄청나게 까이는 선수지만 이 당시의 그는 리그에서 34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하고 유로파컵에서도 9경기 1골을 기록하는 등의 준수한 성적을 냈으며, 뛰어난 스피드와 탄탄한 몸싸움, 매서운 골결정력을 갖춘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스트라이커였다.[5] 당시 이 경기날은 반데사르의 생일이었으며, 맨유의 1000호골이 누구일까로 큰 관심을 모았던 경기였고, 전문가들 역시 맨유가 무난하게 이기는 경기로 전망했었는데 이날 반데사르는 상대팀 선수들에게 생일빵을 제대로 맞았으며(...), 경기가 다 끝나갈때 호날두가 헤딩골로 1골 만회해서 1000호골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충격적인 참패에 묻혀서 귀신같이 잊혀졌다(...) 맨유의 흑역사이자 호날두에게 있어서도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의 경기[6] 한국 축구팬들은 네덜란드 국대 5순위 스트라이커였다고 농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