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빈양문
1. 소개
昌慶宮 賓陽門
창경궁 명정전의 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閤門) 역할을 하였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 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 빈양문은 외전 일대와[1] 내전 구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합문을 두기 적절한 장소였다.
명정전의 서쪽[2] 에 위치해있으며 남쪽으로 숭문당과 붙어있다.
‘빈양(賓陽)’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는 뜻이다.
2. 역사
정확한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기록 상 빈양문이 처음 언급되는 시점이 1616년(광해군 8년)인 것을 보아 이 무렵 진행되었던 창경궁 중건 공사 때 처음 지어진 듯하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불탔다가 1633년(인조 11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주로 임금이 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 장례 때 망곡례[3] 를 행하고#, 발인할 때 재궁(梓宮)[4] 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3년 뒤 복구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릴 때 같이 철거되었다. 8.15 광복 후 1984년의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문(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 판으로 마감하였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하였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5] 으로 입혔다. 바닥엔 전돌이 깔려있다.
4. 여담
- 합문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현직 관료가 아니면 합문이 어딘지를 잘 몰랐다. 이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가 창경궁에 머물 때 한 신입 사관이 창덕궁의 합문인 협양문에서 왕을 기다렸다. 하지만 임금이 거기서 나올 리 없었고, 뒤늦게야 정조가 창경궁에 있는 것을 알고 창경궁의 합문인 이곳 빈양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건너갔다고 한다.(...)##
5. 매체에서
- 빈양문 본채가 나온 적은 별로 없다. 대신 복도각이 자주 등장하였다. 특이하게 고려나 신라 왕궁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용의 눈물》에서 개성의 수창궁 일부로,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서라벌 궁궐으로 등장했던 것. 지나가는 배경으로 나왔다.
[1]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 구역.[2] 명정전은 동향했기에 뒷면은 서쪽이 된다.[3] 望哭禮. 시신이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곡하는 예식.[4] 왕실에서 쓰는 관을 말한다.[5]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