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문정전
1. 소개
昌慶宮 文政殿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 이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2. 역사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 창건 때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창경궁을 놀이공원 창경원으로 만든 후, 1930년대에 헐었다. 1983년에 창경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후 1984년에 발굴 조사를 했고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정문
4. 구조
- 보통 편전은 정전의 북쪽에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복궁 사정전은 근정전의 정북방에, 창덕궁 선정전은 인정전의 동북쪽에 있고 경희궁 자정전 역시 숭정전의 북쪽에 있다. 하다못해 편전이 따로 없는 덕수궁의 경우에도 편전 역할을 하던 여러 건물들이 (서편에 있든 동편에 있든)위도 상으로 중화전보다 북쪽에 위치해있는데 창경궁의 경우는 명정전의 바로 남쪽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정전들은 남향이지만 명정전은 동향이기 때문에 두 건물이 서로 토라져 등돌린 듯 마냥 틀어져 있다.
- 1530년(중종 25년)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의 혼전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혼전/빈전[1] 의 기능을 주로 맡아 사실상 편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이는 1781년(정조 5년)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창덕궁과 경희궁에는 모두 선정전과 자정전 등의 편전이 있으나, 창경궁에는 편전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정전인)명정전을 편전으로 통용하여 왔다고 하였다.’라는 대목#에서 정조 시기에는 이미 문정전을 편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식이 혼전으로 굳어지면서 문정전의 정문인 문정문 밖에 있던 도총부와 승정원 · 홍문관 등의 여러 관청이 이전되었다. 임금의 업무를 돕기 위해 편전 근처에 있던 관청들인데 이 일대가 혼전의 부속 시설로 활용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이와 함께 정면에 새롭게 복도각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란 의미를 갖는다. 복도각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고 1986년 문정전 본전이 복원될 때 함께 지어지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른다. 참고로 <동궐도>를 보면 똑같은 기능이었던 창덕궁 선정전과 달리 복도각에 벽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내삼출목, 외이출목에 다포 양식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바닥은 마루이기 때문에 주로 늦봄에서 초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3] 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였다. 옥좌는 원래 경복궁 사정전처럼 단 위에 있어야하나 복원할 당시 재현하지 못했다.
5. 여담
- 편전이긴 하지만, 정작 왕들이 정사를 돌보거나 경연을 한 경우는 많지 않았고 여러 잔치들을 이 곳에서 많이 열었다. 연산군이 주로 연회를 즐겼고, 1517년(중종 12)에 궁궐 잔치 중 하나인 진풍정(進豐呈)[4] 이 열리기도 하였다. 문정전을 편전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임금은 인조이다.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으로 창덕궁이 몇 번 불타자(...) 창경궁 문정전을 편전으로 사용했던 것.
5.1. 사건사고
2006년 4월 26일 창경궁에 들어온 만 67세의 한 노인이 문정전 문짝에 불을 지르다가 체포되어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 이 때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2년 여 뒤 대형 화재사고를 일으키니... '''바로 숭례문 방화 사건의 범인 채종기였다.''' 문화재 연쇄 방화범으로 알려졌다. 숭례문 화재 때에는 문화재 보호법 위반 및 문화재 방화 혐의로 구속되었고 징역 10년 형을 받아 복역했으며 2018년 2월에 만기 출소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 옆에 있던 소화기로 신속하게 진화해서 문짝만 살짝 탔을 뿐 건물 전체는 무사했다. 목조 건물은 심각하게 화재에 취약해서 5분 안에 불을 못끄면 크게 번질 수 있다.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날 뻔 했던 것. 자칫 잘못했다간 바로 옆의 명정전까지 소실될 뻔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궁 평생 무료 입장권'을 줬다고 한다.#
6. 기타 (매체 등에서의 활용)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초 이전에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 특히 17세기 이후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자주 나왔으나 스쳐가는 배경으로 등장해 존재감은 없다. 그나마 비중있게 등장한 작품은 1989년 MBC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과 1995년 SBS 《장희빈》. 《한중록》에서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모습을 '''실제 현장'''인 이 곳 뜰에서 촬영했고 《장희빈》에서는 희빈 장씨가 중전이던 시절 중궁전 외곽의 일부로 간간히 나왔다.[5]
그리고 특이하게 고려나 신라 왕궁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용의 눈물》에서 개성의 수창궁 일부로,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서라벌 궁궐으로 등장했던 것. 물론 여기서도 지나가는 배경으로만 나왔다.(...)
[1]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2]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3]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4] 진연보다 성대한 잔치로, 글자 그대로 풀면 (임금이나 왕후 등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올리는 일을 뜻한다. 참고로 한정식 음식점 진풍정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5] 중궁전 외곽 메인은 창덕궁 대조전의 뒷뜰인 함원전에서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