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관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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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헌
昌德宮 觀物軒
창덕궁 성정각 동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1. 이름과 현판


'관물' 뜻은 ‘만물(物)을 보고(觀)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로, 중국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의 〈관물편〉에서 인용했다.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이는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다.#
그런데 정작 현판글씨는 관물헌도, 유여청헌도 아닌 ‘집희(緝熙)이다. 1864년(고종 1년) 1월에 13살[1]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의미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소년 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듯 하다. 어릴 때 써서 그런 지 현판 글씨 치고는 서툴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경희궁동궁 중 아예 정식 이름이 집희당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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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직접 쓴 '집희(緝熙)' 현판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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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서 묘사한 관물헌 일대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 때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

이후 효명세자 역시 이 곳에서 경전역사공부했고#, 헌종은 몸이 불편할 때 여기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고종도 즉위 초 많이 사용했으며, 섭정이던 흥선대원군에 들어올 때 주로 이용했다. 1874년(고종 11년) 3월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여기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는 급진개화파의 본거지로 쓰였으며 그들에 의해 고종명성황후가 잠시 머물기도 했다. 개화파가 이 곳을 고른 이유는, 창덕궁 내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고, 또한 좁아서 청나라 군대가 와도 방어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일제강점기덕혜옹주가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까지 어머니 귀인 양씨와 함께 이 곳에서 살았다.

3. 구조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 서에 이 각각 2칸 씩 있고 가운데에 대청이 2칸이며, 툇간이 남, 북면 가장자리에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동쪽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가퇴를 달았고, 서쪽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 칸을 물려 다락을 달았다. 단 동쪽 가퇴와는 다르게 전면을 나무 으로 막았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이며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단청은 모로단청[A]으로 하여 절제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은 뒤 그 위에 취두만 올리고 용두잡상은 놓지 않았다.



[1] 만 11세.[A]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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