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성정각
1. 소개
昌德宮 誠正閣
창덕궁의 동궁으로, 왕세자의 공부방이었다. 희정당의 동남쪽에 있다.
이름은 《대학》에서 유래하였으며, ‘성의(誠意)’, ‘정심(正心)’에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즉 '성심성의껏(誠) 바른(正)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2. 역사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모르나 《승정원일기》의 이 기사를 볼 때, 숙종 시기에 창건했으며, 1697년(숙종 23년) 《승정원일기》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어 그 이전에 건립한 듯 하다.#
그러나 영조부터 고종까지 주로 세자보다는 왕들이 많이 활용하였다. 용도는 보통 경서를 읽고 공부하거나, 신하들을 만나는 것이었다.[1]
대한제국 시기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순종의 황태자였던 의민태자가 일본에 유학 가기 전까지 여기서 머물렀다.[4]
이후 일제의 영향으로 창덕궁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궐내각사 구역에 있던 내의원을 성정각으로 옮겨왔다.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때는 잠시 순종황제 내외가 머물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동안 비공개 구역이었다가 2000년대 초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ㅓ’ 자 형태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은 뒤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올리고 잡상은 놓지 않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쇠서[5] 를 두 겹 낸 이익공 양식이다. 기둥 사이에 화반[6] 을 놓았고, 단청은 모로단청[A] 으로 하여 절제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 제일 서쪽 1칸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남쪽 전면이 밖으로 나온 툇마루이며, 툇마루 동쪽에는 아래 후술할 성정각에 딸린 누각인 보춘정(희우루)으로 가는 나무 계단이 있다. 이를 제외하고 동, 서, 북쪽엔 툇간이 따로 없다. 제일 서쪽의 정면 1칸, 측면 2칸은 온돌방으로[7] , 그 다음(동쪽으로) 1칸은 대청으로, 그 다음 2칸은 다시 온돌방으로, 그리고 그 다음 1칸은 책을 보관하는 서주(書廚)로 꾸몄다.
- 동쪽의 온돌방은 공간이 전부 트여있고 문도 분합문으로 달았다. 분합문은 문짝을 위로 올려 걸개에 걸 수 있는 문이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대청과 연결해 공간을 넓게 활용하였다. 방 내부는 천장과 벽에 흰 벽지를, 바닥에 장판을 깔았는데, 천장에는 특이하게 '우물 정(井)' 모양의 틀을 달아놓았다. 반면, 서쪽의 온돌방은 벽지를 바르지 않고 장판만 깔았다.
- 《동궐도》를 보면 넓은 월대가 있었고, 월대 서쪽의 가장자리와 기단의 동남쪽에 남북축으로, 그리고 마당 한복판에 붉은색 나무 판장을 놓았으나 지금은 없다. 그리고 성정각 본채 서편에 존현문(尊賢門)이란 문이 있었으나 이 역시 현재는 없으며 월대도 사라져 지금은 그저 장대석을 3단 쌓은 기단만 볼 수 있다.
4. 부속 건물
4.1. 보춘정(희우루)
昌德宮 報春亭(喜雨樓)
성정각의 동쪽 누각이다. 보춘정 현판은 남쪽 면에, 희우루 현판은 동쪽 면에 있다.
'보춘(報春)' 뜻은 ‘봄(春)이 옴을 알린다(報)’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기에 동궁에 속한 건물의 이름으로 쓰인 듯하다.
'희우(喜雨)' 뜻은 ‘비(雨)가 내려 기쁘다(喜)’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 희우루지(喜雨樓志)를 보면, 1777년(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할 때와, 완성 후 임금이 처음 행차할 때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희우(喜雨)’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총 3칸 짜리 누각으로, 아랫 부분에 사다리꼴 모양의 긴 화강석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누하주[8] 를 세웠다. 누하주 위에 청방을 설치하고 장귀틀[9] 과 동귀틀[10] 을 걸어 마루를 구성한 뒤 2층을 세웠다.# 2층의 문은 분합문으로 설치하고 바깥에 난간을 둘렀으며 내부는 전부 마루이다.
성정각과 붙어있으나 성정각의 방과는 통하지 않으며 남면의 툇마루에 달린 계단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동궐도》를 보면 원래 1층에도 벽과 창, 문이 있어 별도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듯 하나 현재는 사라졌다.
4.2. 관물헌
4.3. 동남측 부속 건물
성정각 권역 동남쪽에 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작한 《동궐도형》을 보면 'ㄱ' 형 건물인 양성재(養性齋)가 있었으나 지금 모습과 많이 달라서 같은 건물로 보기엔 힘들다.
두 현판이 걸려있다. '보호성궁(保護聖躬)'과 '조화어약(調和御藥)'이다. '보호성궁'은 '성궁(聖躬, 임금의 몸)을 보호(保護)한다', '조화어약'은 ‘임금(御)께서 드시는 약(藥)을 만든다(調和)’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할 때 건 듯하다.
잘보면 '성궁(聖躬)'과 '어(御)'자가 다른 글자보다 약간 높이 있다. 왕을 상징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5. 여담
- 궁궐의 대부분 구역이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성정각 일원은 봄 꽃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2019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궁궐과 조선왕릉의 봄꽃 명소 6선’을 꼽았는데 그 중 이 일대가 포함되어있다.[11]#
- 2010년대 초부터 봄마다 궁궐 내 전통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창덕궁 내의원 체험’ 행사를 연다. 비록 조선시대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종이 살던 때에 실제로 내의원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 관련 행사를 하는 듯 하다. 실제 한의사들이 한복을 입고 관람객들을 무료로 진료해준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위에 언급했듯 한 때 내의원이어서 그런 지 조선 사극에서 내의원으로 많이 등장했다. MBC 드라마 《허준》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 궁궐 촬영이 힘들어지면서 실제 성정각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을 촬영할 때, 용인대장금파크에 성정각과 그 일대를 재현한 동궁 세트를 지었다. 자세한 모습은 이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자.
[1] 특히 정조 이후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1782년(정조 6년) 새로운 동궁 중희당이 상당한 규모로 세워져, 세자의 의례 거행과 일상생활을 거의 그 곳에서 다 했기 때문이다.[2] 머물 주.[3] 곳 처.[4] 1907년(융희 1년) 12월 1일에 발행된 잡지 《서우(西友)》 13호에서는, 성정각을 ‘황태자 전하의 주(住)[2] 하시던 처(處)[3] 요’ 라고 설명하였다.#[5] 소 혀 모양의 부재.[6] 공포 대의 기둥 사이마다 상하에 위치한 도리 방향의 긴 부재 사이를 받쳐주기 위해 사용하는 부재.[A]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7] 《동궐도형》에서는 대청으로 묘사하였다. 지금처럼 바뀐 시점은 모르나 아마 일제강점기에 내의원으로 사용할 때 변형된 듯 하다.[8] 樓下柱. 말 그대로 누각 밑에 있는 기둥.[9] 우물반자를 구성하는 데 쓰이는 긴 각목.[10] 우물반자에서 장귀틀 사이에 짧은 나무를 끼워 대는 것. 또는 그 짧은 나뭇쪽.[11] 나머지는 경복궁 교태전 일곽, 창경궁 옥천교 일대, 덕수궁 대한문과 석조전이며 능, 원, 묘 중에서는 융건릉과 덕혜옹주 묘(홍유릉 구역) 산책로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