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1. 개요
이날 광장이 보여준 압박의 밀도는 역사에 기록될 만했다. 주최 측 추산 전국 232만명이라는 규모도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타협할 권리를 입법부에 준 적이 없다”[2]
라는 주권자의 분노는 입법부에 '''거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폭발 직전'''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6차 집회의 분위기는, 만일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한편에 치워두었던 저항권 행사가 선택지로 부활할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6차 집회 이후 국회에서는 “'''탄핵이 부결되는 날에는 촛불이 국회를 태워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시사인> 기사 제483호 "광장의 촛불은 6월항쟁 완결판" 중
2016년 12월 3일에 열린 6번째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촛불 시민들도 정작 촛불이 정치권에 어느 정도나 압박이 되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시민들 상상 이상이다.''' 헌정 중단이 올 수 있고, 유혈사태나 엄청난 국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새누리당 의원도 당연히 고민을 한다.
(중략)
-12월 2일 상정이 불발되고 12월 3일 촛불집회에 232만명이 나왔다.
너무 감사해서 큰절을 하고 싶더라. 비박계를 한 명 한 명 끌어내는 일이 원내 작업만으로는 너무 어려웠다. 청와대, 국정원, 여당 지도부가 전방위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누구누구 표 확보했다고 청와대에 계속 보고가 올라가고. '''그럴 때 그 촛불은 결정타였다. '''그날 이후로 표 계산에 여유가 생겼다.
우상호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다. 오후 9시 30분 기준 주최 측 추산 232만 명 참가로 '''사상 최초로 참가 인원 200만 명을 넘어선 최대 규모의 촛불 집회#'''가 진행되었다. 대략 서울에서 170만, 지방에서 6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하였다.[3][4]
누적 인원을 고려하지 않는 경찰청 추산 순간 최대 인원은 서울 32만 명, 지방 도시 총 합계 10만 4천 명 규모다. 창원에서는 경찰이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 위해 계수기도 끌어들였다.
'○차 범국민 행동'이라고 번호를 붙여 부르던 집회 이름이 이번에는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로 바꿔 지난 29일 박근혜의 3차 대국민담화에 대한 분노 표시임을 명확히 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주최 측에서는 분수대가 있는 청와대 앞 30m까지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집시법 11조의 금지규정[5][6] 에 따라 법원에서는 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범위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1월 29일까지 야간에도 청와대 앞 200m 밖에서 시위를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둘 다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가 허가했는데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전라도 출신 판사 놈이 허가를 내줬다"고 성토하고 있지만 정작 허가를 내준 판사는 경북 안동 출신에 안동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판사 임용 후 근무지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근무한 적도 없다.(대전→수원→서울)
원래 11월 26일 집회를 마지막으로 광화문에서 하는 대규모 집회는 예정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2일로 예정돼 있던 탄핵 소추안 처리 일정이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에 따른 새누리당의 입장 번복 및 국민의당의 망설임으로 늦춰지자 주최 측에서 11월 29일에 대국민 담화 직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 날 집회를 다시 진행할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일어나게 되었다. 3차 대국민 담화 이후 여당에서 4월 퇴진론 카드를 들고 나왔고, 야당들도 분열할 징조가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오히려 저번 때 보다 참가자가 늘어 박근혜 대통령의 무조건 즉각 하야, 혹은 국회의 탄핵 말고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국회와 정부에게 똑똑히 알려 주었다. 즉 '''이 집회를 계기로 비박계가 탄핵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고, 친박마저 반수 이상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하였다.'''또한 이날 집회는 서울 집중 집회가 아닌 지방 분산을 주안점으로 삼았는데도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나타나서 대통령과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우려를 제대로 보여 준 집회로 평가된다.
위에도 인용된, 원내에서 탄핵 교섭을 총지휘한 우상호 원내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탄핵 표결이 예정됐던 12월 2일 당시까지도 탄핵에 필요한 안정적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청와대의 로비가 집요했으며, 특히 박근혜가 던진 4월 퇴진 6월 대선 승부수가 비박계에 먹혀 들어가면서 25 ~ 40표의 찬성표가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원내의 확고한 탄핵지지세력 171명에 더해 가결을 위해선 최소 29표가 필요한 상황에서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 그런데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린 후부터 표 계산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으며, 탄핵 당일엔 최소 230표가 확보됐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촛불 시민들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6일 뒤인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1표, 무효 7표로 가결되면서 여당이 주장했던 4월 퇴진론을 박살 내고 탄핵안 가결에 큰 영향을 끼친, '''제6공화국의 역사를 바꾼 집회'''가 되었다. 거기다가 이후 국회의 탄핵소추안 부결 시 쿠데타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 집회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이날은 그야말로 역사에 보기 드문 희대의 대분기점이었던 셈.
2. 집회 중계
매주 주말집회 때처럼 종편에서는 매 시간 뉴스특보로 보도했다.
2.1. 주요 시위 장소
이 집회는 서울 도심 및 전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의도 일대에서도 집회를 하기로 확정되었다. 이는 새누리당 비박계가 탄핵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따로 당 차원에서의 집회를 하지 않았다.
2.2. 예정 루트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에 100m 앞까지 행진했다.''' 주최측에선 30m 앞까지 행진 루트로 신고했고, 법원은 경찰의 행진 금지 통고를 취소하되 집시법에 명시된 제한선인 100m까지만 행진을 허용했다. 시간은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로 제한됐다. 한국일보 하지만 실제로는 허용시간이 넘었어도 경찰은 해산방송 몇 번 했을 뿐 해산시도조차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집회 참가자가 늘어났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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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가자 추산
주최 측은 30분마다 추산인원을 집계한다.
- 오후 4시 40분: 주최 측 추산 40만 명
- 오후 5시 20분: 주최 측 추산 50만 명, 경찰 추산 15만 명 JTBC
- 오후 6시: 주최 측 추산 60만 명
- 오후 6시 30분: 주최 측 추산 90만 명(경찰 추산 21만 명), 전국 145만 명
- 오후 7시: 주최 측 추산 110만 명
- 오후 7시 30분: 주최 측 추산 150만 명(경찰 추산 32만 명), 전국 195만 명
- 오후 8시 30분: 주최 측 추산 160만 명, 전국 212만 명
- 오후 9시 30분: 주최 측 추산 190만 명, 전국 232만 명(경찰 추산 43만 명)
2일 방송된 궁금한 이야기 Y에 따르면 경찰측은 1평 즉, 3.3제곱미터에 5~6명이 올라간다고 가정을 하고 페르미 추정법을 사용·추산한 수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실험을 해본 결과 3.3제곱미터에는 그 3~4배인 16~20명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나왔다.
- 지하철 하차객수(73만 4529명)를 적용한 광화문광장 참가자 수 추산 : 약 188만 3400명.#
4. 시위 진행
- 이날 오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는 시위대가 대형 새누리당 깃발을 찢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한편 새누리당 당사 건물과 당사 외벽에 걸린 "국민여러분 죄송합니다. 조속히 국정을 수습하겠습니다" 걸개에 달걀을 투척하는 등 야유를 보냈다. 그리고 12월 5일 다름아닌 경찰들이 직접 동원되어 엉망이 된 당사를 청소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왜 새누리당 사람들이 아니라 경찰이 그걸 청소하느냐는 것이다.
- 오후 5시 30분경, 시위대는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한 인원을 철수시키지 않고 그대로 광화문과 함께 양쪽에서 본집회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청운효자동 일대는 5시반까지만 집회 허가가 되었기에 경찰과의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허가된 시간이 지나도 경찰에선 경고방송만 하고 폴리스 라인만 유지하고 있을 뿐 광화문까지 폴리스라인을 올리거나 적극적으로 시위를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인원이 늘어났다.[9]
- 오후 7시[10] 정각부터 1분간 소등을 하였다.
- 세계 각국에서 재외국민들이 박근혜 퇴진 시위를 열었다.
- 오후 7시 30분부터 행진이 시작되었다.
- 시민이 쓰러지자 경찰이 핫팩을 던져주기도 하였다. 쓰러진 시민은 무사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MBN
- 이날 YTN 생중계 영상에선 전대협 깃발이 보였다. 사실은 전대협 동우회 깃발이다.
5. 지역 시위
12월3일(토)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전국 일정
5.1. 수도권
고양시 일산동구 문화광장에서 백석역까지 이어지는 행진이 오후 2시부터 행해졌다. 고양시 국회의원과 최성시장이 동참하였으며 4시경 백석역에 도착한 시위대가 수도권 전철 3호선 열차를 이용해 광화문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오후 4시부터 동백동 동백호수공원에서 집회가 시작되어 오후 7시부터 동백동 한 바퀴를 도는 행진이 이루어졌다. 수도권의 베드타운인지라 거의 대부분이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였다. 워낙 아이들이 많다 보니 춥다고 자꾸 집에 가자고 하여 한두시간이면 촛불 참가자 전원이 교체될 정도로 인원 이동이 잦았다. 주최측에서 예상한 것보다 많이 참석했는지 6시경 촛불을 나눠줄 때 순식간에 동이 나서 새로 사러 가느라 진행이 딜레이 되었을 정도. 이날 참석 인원은 순간 최대 300명, 연인원 2천 명 정도라는 말도 있다.
오후 7시부터 평택역 광장에서 집회가 이루어졌다.
5.2. 강원
강원 전 지역에 있는 집회 참가자들이 김진태 의원 사무실이 있는 춘천에 집중하여 집회를 열었다.
춘천에서 2만 명이 넘게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참고로 춘천시의 인구는 약 28만 명이다. 숫자가 맞다면 인구의 7% 이상이 참여하게 되는 셈. 강원도 집회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YTN1YTN2 오후 6시에 주최 측 추산 1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또한 횃불을 든 대규모 시위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서 화제가 되었다.#
춘천에서 2만 명이 넘게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참고로 춘천시의 인구는 약 28만 명이다. 숫자가 맞다면 인구의 7% 이상이 참여하게 되는 셈. 강원도 집회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YTN1YTN2 오후 6시에 주최 측 추산 1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또한 횃불을 든 대규모 시위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서 화제가 되었다.#
5.3. 충청권
세종호수공원 무대섬에서 시위가 진행되었다.
오후 5시 충북도청 서문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는 청주대교~중앙공원~남궁병원~충북도청 서문 구간을 행진하였다.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만 명, 경찰 추산 6천 명이 참여했다.
평소에 매일 집회가 열리던 대전 둔산동 갤러리아 아트센터 앞에서 집회가 진행되었다.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7만 명이 참여하였다.
5.4. 호남권
광주 금남로에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청와대 전 비서실장 등 부역자들을 가둘 ‘쇠창살 감옥’이 등장했다. 광주에서 열린 촛불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주최 측 추산 15만 명[11] 의 시민들이 모인 금남로는 “박근혜는 당장 퇴진하라”는 구호로 가득찼다.
3일 90여개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주최로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6차 박근혜 퇴진 광주시국촛불대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이후 더욱 악화된 민심이 그대로 반영됐다.
주최측은 “오후 6시 추산 7만 명(경찰추산 12,000명)이던 참가자가 금세 불어나 오후 7시30분 쯤 10만 명을 넘어섰고 8시30분에는 역대 가장 많은 15만 명(경찰 추산 2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차량 통행이 통제된 광주 금남로 400m 구간을 가득 메웠다.
촛불집회에 앞서 오후 5시부터는 ‘촛불이 꿈꾸는 나라’를 주제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한 시민은 “박근혜 대통령은 가식만이 있다. 국민을 생각하는 척, 세월호 때에는 가슴 아픈 척, 대구 서문시장 화재 현장에서는 슬픈 척을 한다”면서 “이제는 80넘은 노인도, 어린아이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더 이상은 안 속는다”고 말해 큰 호응을 받았다.
[image]3일 90여개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주최로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6차 박근혜 퇴진 광주시국촛불대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이후 더욱 악화된 민심이 그대로 반영됐다.
주최측은 “오후 6시 추산 7만 명(경찰추산 12,000명)이던 참가자가 금세 불어나 오후 7시30분 쯤 10만 명을 넘어섰고 8시30분에는 역대 가장 많은 15만 명(경찰 추산 2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차량 통행이 통제된 광주 금남로 400m 구간을 가득 메웠다.
촛불집회에 앞서 오후 5시부터는 ‘촛불이 꿈꾸는 나라’를 주제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한 시민은 “박근혜 대통령은 가식만이 있다. 국민을 생각하는 척, 세월호 때에는 가슴 아픈 척, 대구 서문시장 화재 현장에서는 슬픈 척을 한다”면서 “이제는 80넘은 노인도, 어린아이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더 이상은 안 속는다”고 말해 큰 호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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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주최 측은 가로 3m, 높이 2m 크기의 쇠창살로 된 감옥을 준비했다. 감옥에는 박근혜와 부역자들을 감옥으로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렸다. 감옥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새누리당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가자 시민들은 한명 한명의 이름을 외치며 “당장 하옥하라”고 외쳤다.
대형 ‘소녀상’도 등장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소녀상에 청와대를 상징하는 영상을 투영하며 정부의 ‘한일 위안부 협정’을 비판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에 결국 오늘과 같은 사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증현 스님은 촛불 집회 시작을 알리는 대회사를 통해 “박근혜는 범죄자일 뿐이며 국민들은 새누리당에게 박근혜 퇴진 일정을 결정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면서 “질서 있는 퇴진이란 있을 수 없다. 즉각 퇴진과 탄핵만이 있을 뿐이다. 박근혜 퇴진은 국민들이 결정한다. 즉각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집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2개 대열로 나눠 1시간가량 금남로를 행진했다.
한편 이날 촛불 집회에서 주최측의 김영광 시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은 “오늘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탄핵을 지연시킨 정치인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는 게 좋게 비치지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천정배 국민의 당 전 공동대표 등 정치인에게 자유발언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의사와는 달리 참가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문재인 전 대표는 발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12]
대형 ‘소녀상’도 등장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소녀상에 청와대를 상징하는 영상을 투영하며 정부의 ‘한일 위안부 협정’을 비판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에 결국 오늘과 같은 사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증현 스님은 촛불 집회 시작을 알리는 대회사를 통해 “박근혜는 범죄자일 뿐이며 국민들은 새누리당에게 박근혜 퇴진 일정을 결정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면서 “질서 있는 퇴진이란 있을 수 없다. 즉각 퇴진과 탄핵만이 있을 뿐이다. 박근혜 퇴진은 국민들이 결정한다. 즉각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집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2개 대열로 나눠 1시간가량 금남로를 행진했다.
한편 이날 촛불 집회에서 주최측의 김영광 시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은 “오늘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탄핵을 지연시킨 정치인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는 게 좋게 비치지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천정배 국민의 당 전 공동대표 등 정치인에게 자유발언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의사와는 달리 참가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문재인 전 대표는 발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12]
목포 평화광장에서 개최되었다고 한다.
[image]연향동 국민은행 앞에서 개최되었다. 집회 참가 인원은 주최 측 추산 5,000명, 경찰 추산 1,500명이다. 이정현 현 새누리당 대표의 지역구인 만큼, 이정현이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날 새누리당 당사에는 '공범이당'이라고 적힌 현판이 붙었다.
[image]전주 객사 앞 관통로에서 개최되었으며, 주최측 추산 2만 명이 참석하였다. 촛불로 닭 삶는 퍼포먼스가 나오는 한편 발언 희망자가 너무 많아 1인당 발언시간을 3분으로 제한할 정도였다고 한다. 집회 후 한옥마을 앞 풍남문광장까지 행진한 참가자들은 만민공동회를 이어갔다고 한다.
[image][image]
시내 원예농협에서 개최되었으며, 주최 측 추산 6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관련사진
영등 2동 주민센터 앞에서 개최되었으며, 주최 측 추산 2,000명의 시민이 참석하였다.
[image]5.5. 영남권
오후 5시부터 중구 2.28기념중앙공원에서 행해졌다. 영남일보 기사
행진은 이제까지의 도심 일대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로축[13] 과 달구벌대로축[14] 의 2조로 나뉘어 동대구로 MBC네거리에 위치한 새누리당 대구광역시당 청사 앞까지 약 4km에 걸쳐 대규모로 행진한다. 안철수 전 대표가 집회에 참가했지만 국민의당이 2일 탄핵 표결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며 표결 자체를 무산시킨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의 야유를 받았다.# 오후 5시부터 본행사를 시작한다. YTN
당초 1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JTBC 보도에 따르면 오후 7시 기준으로 주최 측 추산 3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15] 오후 7시 30분 기준으로는 주최 측 추산 5만 명이 모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파란 고래가 등장하였다. 대구 새누리당사 앞에 몰려들어 피켓을 당사 구조물에 붙이고 간판을 변경된 간판으로 덮는 시위를 하였다. 또한 일부 시민은 서울 새누리당사와 마찬가지로 계란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영상 이 날 있었던 시민의 패러디
행진은 이제까지의 도심 일대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로축[13] 과 달구벌대로축[14] 의 2조로 나뉘어 동대구로 MBC네거리에 위치한 새누리당 대구광역시당 청사 앞까지 약 4km에 걸쳐 대규모로 행진한다. 안철수 전 대표가 집회에 참가했지만 국민의당이 2일 탄핵 표결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며 표결 자체를 무산시킨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의 야유를 받았다.# 오후 5시부터 본행사를 시작한다. YTN
당초 1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JTBC 보도에 따르면 오후 7시 기준으로 주최 측 추산 3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15] 오후 7시 30분 기준으로는 주최 측 추산 5만 명이 모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파란 고래가 등장하였다. 대구 새누리당사 앞에 몰려들어 피켓을 당사 구조물에 붙이고 간판을 변경된 간판으로 덮는 시위를 하였다. 또한 일부 시민은 서울 새누리당사와 마찬가지로 계란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영상 이 날 있었던 시민의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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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교체식포항 중앙상가 실개천 거리에서 오후 5시 30분부터 집회를 가진 후 8시 30분 경부터 거리 행진을 실시했다. 주최 측 추산 3천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구미역에서 오후 5시에 시작하였으며 오후 7시에 구미역 건너편 역전로에서 행진이 시작되었다. 약 5~6시간의 시위 끝에 해산하였다.
주최 추산 1만 명, 경찰 추산 4천 명 규모로 창원광장에서 오후 5시부터 문화제를 가진 후 6시 30분 경부터 행진을 시작. 새누리 경남도당이 있는 곳까지 행진 후 행사를 가지고 해산하였다. 이날 새누리당 당사에는 '공범이당'이라고 적힌 현판이 붙었다. 민중의소리
역시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앞에서 시위가 있었다. 문현대로[16] 쪽으로 행진하므로 교통체증이 있다. 오후 7시 기준 주최 측 추산 15만 명, 경찰 추산 2만 명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후 7시 30분 기준 주최 측 추산 20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서면에서 문현대로로 행진 출발할 때 워낙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고 행진 중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문현대로에서 새누리당기 찢기 퍼포먼스와 촛불파도 퍼포먼스를 하였고 문현대로가 보이는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호응하여 촛불을 켰고 사람들이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오후 8시경 부터 부산김해경전철 박물관역 근처에서 다양한 학생들이 일제히 모여 시위를 하였다.
주최 측 추산 2만 명 규모로 울산 롯데백화점 광장에서 오후 4시부터 문화제를 시작. 오후 6시 27분에 조PD 등장!하여고 `시대유감'과 `친구여'를 불렸다. 그뒤 오후 6시 35분쯤에 퇴장하였고 그뒤에는 촛불파도를 하였다. 오후 7시에 1분 간 촛불 소등이 있은 후 행진 시작. 행진하는 중간에도 자유발연대를 하였는데 주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었다. 박맹우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행진후 도로에 앉은 채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즉각 사퇴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성난 민심을 전앴다. 그뒤, 롯데백화점으로 돌아갔고 이날 박맹우 사무실은 스티커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5.6. 제주
- 오후 6시 제주시청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만 명, 경찰 추산 2천 명이 참여했다.
5.7. 국외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박근혜 퇴진 집회를 하였다
6. 반응
- 청와대 : 평소 집회가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원론적인 반응 이외에 별다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3차 담화 이후 더 커져버린 집회 규모에 당황했다는 기사가 났다.
- 새누리당 : 집회 당일 공식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았으나, 하루 뒤인 12월 4일. 새누리당의 공식 입장은 아직도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해 여야가 합의해야 한다. 로 시위 전과 전혀 바뀌지 않았다.기사 그러나 유승민과 김무성을 중심으로 한 비박계 의원은 '여야 합의가 안되면 탄핵 가결에 최선을 다하겠다.'란 입장을 표방하면서 비박 사이의 분열이 일어난 상황이다.기사 이후에는 아예 비박은 대통령이 4월 하야를 발표해도 탄핵에 찬성하겠다고 입장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결국 당내 과반 이상이 탄핵안에 찬성하여 박근혜는 권한정지가 되었다.
6.1. 한국 언론반응
6.2. 외신 반응 기사
- AP 통신 : "서울 도심에서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biggest protest)가 열렸고, 청와대 바로 앞까지 행진했다"
- 월 스트리트 저널 :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여전히 최저치를 기록했고, 임기가 끝나기 전 사임하겠다는 '깜짝 제안'을 했으나 야당은 탄핵 절차를 막으려는 박 대통령의 전술로 간주했다"
- 일본 NHK : "이번 집회에서 법원이 지금까지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불과 100m 앞까지 시위대의 접근을 허용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2주 연속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6주 연속 촛불집회가 열리는 등 퇴진 여론이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탄핵을 피하려면 큰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함
- 신화통신 :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인간 사슬(human chain)을 만들어 청와대를 포위했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잘못이 없다는 박 대통령의 3차 담화가 국민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 미대통령 당선인인 도널드 트럼프 측에선 박근혜 정부를 죽은 정부로 규정하고, 죽은 정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7. 기타
7.1. 친박 단체 맞불 집회
이 날 있었던 '''박근혜 탄핵 및 하야를 반대하는 3차 맞불집회''' 문서는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경과#s-1.4.
7.2. 그 외
- 탄핵안 12월 2일 표결 무산에 대한 분노의 확산으로 여의도에서도 집회가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새누리당 당사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시위를 하고 있으며 박사모 또한 맞불집회를 하고 있다. 2일 표결을 반대한 국민의당 당사에서는 시위가 열리지 않았으나, 박지원을 비롯한 국민의당 지도부가 촛불시위에 참가하려다 항의를 받기도 했다.
-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하여 집회가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며 더욱 커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 인파가 몰려 수도권 전철 5호선 열차가 광화문역을 무정차 통과하기도 했다.
- 미아가 다수 발생했다. 인파에 밀려 다른 사람의 손을 자신의 부모로 착각하는 경우로 추정된다.
- 집회를 마치고 가는 사람과 방금 도착해서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 방송차량, 노점상 등으로 인해 인도쪽이 굉장히 혼잡해졌다. 좌측통행이나 우측통행 같은 규칙없이 무질서하게 이동되다보니 충돌되는 부분이나, 다른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오는 골목 인근은 엄청난 압력에 의해 위험하다. 혹시 6시 이후 집회에 온 위키러는 무리하게 앞쪽에 가기보다 사거리쪽에 설치된 전광판쪽에 앉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상 6시부터는 이순신장군상 뒤쪽은 앉을자리도 설자리도 없어 여기저기 밀려다니다가 도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행진 시간이 되면서 사람들이 광화문 방향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는 것도 가능했다.
- 안전을 위해 보도통행 및 노점상 배치에 대해 주최측이 이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지만 참여인원이 갈수록 늘면서 인파에 휩쓸릴 수 있으니, 너무 어리거나 나이든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 종각인근과 청계천 광장까지 노점상들이 들어섰으며, 거의 축제처럼 자유롭게 행인들이 도로를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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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아이돌 덕후들로 구성된 응원봉연대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사진
- 성소수자들[18] 도 몇 주째 집회 참여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 날은 동성애 처벌법으로 악명높은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 서명운동을 진행한 뒤 집회를 시작했다. 헌데 그 위치선정이 광화문 앞이 아닌 종각역에 가까운 곳이었고, 그 여파로 광화문 청와대 포위 경로가 아닌 종로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게이바 밀집지역(낙원상가 일대)을 지나갔다. 낙원상가를 지나가며 특히 큰 호응을 받았고,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면서는 백남기를 살려내라라는 즉석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 무한상사 노동조합 깃발이 등장하였다.
- 6차 집회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나와 참여했다. 오후 3시 40분경에는 고 신해철씨가 속했던 그룹 N.EX.T가 무대에 올라 Lazenca, Save Us, '날아라 병아리', 그대에게 등을 불렀다. 오후 6시 30분경에는 한영애가 '갈증', '내나라 내겨레', 홀로 아리랑, 조율 등을 불렀다. 그 외에도 오광록, 김장훈, 박용우, 윤종신, 박신혜, 문정희 등 문화예술인들이 나와 자기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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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 시작 전에 경찰의 입장을 다룬 기사가 올라왔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은 경찰 관계자가 했다는 "청와대에 막대기가 앉아있어도 지켜야 하는 게 경찰의 숙명"이라는 표현.
- 다음주 12월 9일 탄핵안 표결 결과에 따라 시위의 양상도 크게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4일 새누리당 비박계가 이 날 집회의 영향으로 탄핵안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 각종 게임과 애니 패러디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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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에서 시위를 보기 위하여 관광을 오기도 하였다. 세계일보
- 이 날은 세계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해 대구에서는 장애인 단체 소속 장애인 여러명과 같이 행진하였다. 광화문에서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하던 장애인 농성자가 연단에 올랐는데... 희끗희끗한 수염과 머리로 힙합을 선보여 보는 이들 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 3차 대국민담화에 대한 반발심으로 '구속하라'는 구호의 빈도 수가 늘어났다.
- 이날(12월 3일) 촛불 집회 소식에 묻혔지만 박근혜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바로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10.26 사건 당시 사건의 목격자인 그 사람이다. 박정희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이, 그 딸인 박근혜가 쫒겨나는 가장 결정적인 집회가 열린 날에 사망했으니 역사의 우연이다. 김계원 본인도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최태민 가문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했단다.
8. 틀 둘러보기
[1] 몰락한 왕의 최후를 다루는 가사의 노래를 영상에 삽입한 것을 보면 정말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2] 당시 국회에서는 박근혜의 11월 29일 담화를 기점으로 국회가 협상 후 4월 퇴진론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박근혜가 퇴진한다는 약속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으며, 여야 협상은 필요 없고 오직 탄핵 표결만을 밀어 붙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3] 사실 기사마다 인원 수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232만 명보다 조금 더 많거나 적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참가 인원이 '''200만 명이 넘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4] 인구 대비해서도 150만 명이 참석한 6월 민주 항쟁은 3.6%와 비교해 4.6%가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와 참여율을 기록한 집회였다. 1987년 당시보다 인구가 23%가량 증가했지만 참석 인구는 57%만큼 증가하였다.[5] 주요 국가기관 및 외국의 외교기관 반경 100m 내에서는 시위가 금지된다.[6] 다만 외국 대사관은 이번 집회는 외국 대사관에 대한 집회가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휴일에는 11조 4항의 예외규정이 적용되어 근처에서도 시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화문 앞 미국 대사관도 정문만 경찰차벽으로 막은 것.[7]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있어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모든 사람을 뒤로 물리는게 좀 힘들 것 같아서 방치했다는 말도 있다. .[8] N.EX.T의 경우 2009년 노무현 추도식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 리더였던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바 있다.[9] 시위가 진행되면서 참가자가 늘어나 청와대 인근부터 사직로까지 인파가 빼곡해지면서 사실상 광화문 광장으로 복귀가 불가능해져 광화문 주최 측에서도 "청와대 대열은 내려오지 말고 그 곳에 있으라"고 제안했다.[10] 대통령이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있는 세월호 7시간을 의미함.[11] 광주인구는 16년 당시 150만으로 10%에 해당한다.[12] 당시 기사에서는 안희정 충남지사도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고 보도했으나, 정작 안희정 지사는 대전 둔산동 촛불집회에 참여 중이었음이 SNS, 기사, 목격담 등으로 인증되어 기자가 팩트 확인도 안하고 기사쓴다는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13] 공평네거리에서 직진→종각네거리→동신교→청구네거리→MBC네거리에서 우회전→새누리당 대구광역시 당사[14] 공평네거리에서 우회전→봉산육거리에서 좌회전→삼덕네거리→수성교→대구은행네거리→범어네거리에서 좌회전→검찰청, 법원→새누리당 대구광역시 당사[15] 참고로 대구는 박근혜의 유일한 선거구였으며 사실 상 정치인으로써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었다. 근데 대구마저도 이정도면 박근혜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16] 참고로 6월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이 문현교차로에서 찍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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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나의 조국!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촬영.[17] 인원을 의도적으로 세월호 참사 날짜에 맞춘걸로 보인다.[18]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가 주가 되고 몇몇 다른 단체나 대학 퀴어모임에서 같이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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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나의 조국!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촬영.[17] 인원을 의도적으로 세월호 참사 날짜에 맞춘걸로 보인다.[18]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가 주가 되고 몇몇 다른 단체나 대학 퀴어모임에서 같이 참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