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머니즘/비판
1. 개요
비판자들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1]
① 인간개량은 예상치 않은 위험이나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2]
② 자본 집약적 인간향상은 사회적 정의 (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다.
③ 인간개량은 후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
④ 인간개량은 삶과 관련된 중요한 인간적 가치를 위협하거나 파괴한다
그 외에 종교적인 이유로도 비판이 가능하나, 이는 일부 비판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서술이므로 별개의 문단으로 다루기로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인 이유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비판자들은 자본 집약적인 기술 개발 때문에 기존 사회의 모순이 확대될 수 있으며, 인류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극심하게 퇴화하거나 뒤틀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비판자들의 입장에서 낙관적 특이점론자[3] 들은 사회가 지금 어떤지, 현실이 어떨지를 고려하지 않고 원치 않는 변화와 도태를 강요할 뿐이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비판론은 크게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 비판하는 측면과 윤리적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하는 측면, 두 가지로 나뉜다.
낙관이 일상화된 영미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작으며, 굉장히 많은 수의 지지자를 찾아볼 수 있지만, 유럽 대륙권에서는 상당히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물론 지성인들 중에서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명한 논객들 중 두어 사례만 들자면 프랜시스 후쿠야마나 위르겐 하버마스가 트랜스휴머니즘 비판론자이다.
비판자들은 대개 생명공학에 얽힌, 다른 떡밥들의 연장선상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을 논의하는 경향이 있으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도 보다 회의적 내지는 도구적인 관점에서만 수용하는 편이다. 또한 트랜스휴머니즘이 보여주는 유토피아가 단순히 낙관주의적인 희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고 경계하는 편. 물론 이에 가장 격렬히 반대하는 전통적 종교계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또한 부주의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범죄 발생이나 사회적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옹호와 비판의 구체적인 공방에 대해서는 복제인간 항목의 해당 단락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외의 문제점으론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처지의 최소 수준[4] 을 낮출 수도 있고, 얄량한 기준을 잣대로 환경이 아닌 인간에게 변화를 강요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있다.[5]
그리고, 장비나 시설, 도구로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을 굳이 몸에 포함할 이유가 있는가? 과연 향상도 수리도 아닌 개·변조를 꼭 허용해야만 할 이유가 생길까 하는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할 수 없는 한, 특수 목적을 벗어난 남용은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나중에는 그냥 개인의 도구화와 무한경쟁의 폐해가 커지는 결과로 끝날 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그래왔 듯 인류 사회가 문명을 압도하기 위해선 인간이란 존재의 복잡성이 큰 폭으로 늘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마저 언제까지고 무시될 순 없겠지만 너무 이르거나 해선 안되는 짓을 할 위험성이 아주 크기에 사람들이 떠올릴 때 걱정이 드는 것이다.
차라리 대체제를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몸 말고 옷이나 부착물에 적용하거나, 아예 필요에 따라 몸을 새로 만들어 임의로 쓸 수 있게 하는 등 다른 방법이 있겠고, 강제적인 발달 외에도 사람마다 보호자격으로 관리용 인공생물을 부여하는 것도 괜찮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의도로 기술의 활용을 우회하는 기법은 현대 들어 흔했다.
그리고 본질을 해쳐가면서까지[6] 도구와 접붙이기보단 사람의 능력과 특성을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훨씬 더 낫고, 인류 발달에 보태기에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기계가 유기체보다 오히려 더 다양하고 맞춤형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미래에 조작이 이뤄지면 기형투성이 괴물이 현생 인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거라며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포스트 휴먼으로 가는 도중 거쳐야 할 변화가 위험하다면 막는 것이 맞는 일이지만 일단 기술의 발달이 많은 선택지를 가져다 준다는 점 자체를 부정해선 안된다.
우월성과 완벽성에 대해 많은 고찰이 이뤄지지 않았고, 섣불리 파고들려다가 우생학을 비롯해 선민사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친밀히 접하면 종국에는 폭력의 정당화에 이어 전쟁으로 치달아가게 되어 평등과 사회 안정이라는 대전제에 위배되는 사고가 피어날수 있기에 공적으로 낙관하며 다루기엔 아주 제한된 분야이다.
결론은 기술이 개발의 주체인 인간에게 돌아와 인공지능, 인공생명체 등의 형태로 어느 정도 자립하려 듦에 따라 먼 미래에 살아남을 것이 과연 우리 인류인지, 아니면 인류가 멸종한 뒤 몇몇 사상과 이득에만 집착한 기계, 무생물로 분류될만한 괴상망측한 것들일지가 갈릴지도 모르며, 그런 처지에 지금 불안한 사람 누구나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위험하고, 무작정 낙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인간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
가장 큰 논지는 사회 합의에 의한 무한 경쟁이 이젠 더 이상 인간의 주변 환경을 약자에게 처참하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 자체를 점거해 뜯어고칠 수 있는 지경에 다달았다는 사실이다.
좋게 쓰일 수 있는 기술들이지만 뒤따르는 철학적, 도덕적 오류와 악용이 없을 것이라 단정하거나 기술 발달의 결과로 꼭 인간성이 해체되고 가볍게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판단한다면[7] 그런 기술 개발은 독립된 지성체이자 지배종족으로서의 인류의 생존, 그리고 인간으로서 특별하게 대해져야만 하는 개인의 존재와 그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시간 관념에 대해 재고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예측 치안 기술의 발달에 따라, 과연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계도 이외의 영원한 처벌이나 금지를 벌여야 하는지도 의문을 가질 만하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재조명도 활발해야 한다. 초인본주의 때문에 국가권력이 약화되어 위험 앞에서 더이상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개개인이 주도하는 자율적인 임기응변이나 응급처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여러 문화나 관습 자체에 집착하는 자세를 떠나 인류를 발전시켜 해방하겠단 태도와 헷갈리면 곤란하다. 대책이 없어서 도리어 낙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초인본주의는 그런 바람직한 것과 서로 관련이 없이 인간이란 존재에서 그냥 '''벗어나겠단 말'''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설령 그런 문화와 체제에 함몰되더라도 인간이란 종이 갖춘 기준을 포기하면 상관없다는 사상이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트랜스' 휴머니즘이 아닌 그냥 인본주의를 개진하자는 요구가 주장될 수 있다.
이상적인 조건을 생각하자면 지상에 낙원을 불러오지 않을 개념은 없다.
AI에 의해 인간의 탐욕을 관리함으로써 트랜스휴머니즘을 성공적으로 도입하자는 방안에 대해서는 이게 반대쪽으로 편향된 급진적 생태주의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8] 도 있고, 너무 과격하다는(이 방향으론 각종 결함과 모순을 피할만한 세련된 우회기법을 찾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특정 기술이 생긴 뒤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을 벗어난 자들에게 좋은 세상이 나타날 거라는 환상을 꿈꾸는 등 막연한 향상심에만 눈을 돌리는 극단적 옹호주의자들의 주장은 위험하다.
사람은 진정 인류를 벗어나 이념화 될 수 없고, 남의 눈에 비치는 것이 전부인 상징일 뿐이어서도 안된다.
옹호론에서 말하는 복지주의적 접근은 비판론에서 온전히 납득하지 않는다.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자본 축적과 공적 혁명의 상상이 사실 그렇지 않듯 인류 사회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고, 악의를 품으면서도 그것을 선의로 숨길 수 있는지는 과거의 사건 사고를 살피면서 우리 모두가 아주 잘 알 수 있다.
2. 부작용
옹호자들은 기술 적용에 대한 통제로 하여금 인간 향상에 따르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의 발전 혹은 적용을 '''시장논리에 무작정 맡기는 것이 아닌''' 정부나 시민사회로 하여금 감시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자는 것이 주된 요지이다. 이를 통해 특정 개인 혹은 이익집단이 기술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 사회의 공공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을 시행했을 때 인류나 개개인은 통제하기 힘든 각종 위험에 처할 것이다. 누구도 안전이 완벽할 것이라고 보증하지 못 한다. 당장 인류가 보강하는 식이 아니라 기계적 원리로 대체되면 기존의 몸과 추가된 부속의 기능이 잘 합쳐지지 않고 오작동하는 일이야 사라지겠지만, 기존에 기계를 사용하며 겪던 거의 모든 문제점을 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통신망을 통해 외부와 신경을 연결시킬 수 있는 기계적 호환성을 확보한다면 기존의 통제 및 관리가 가능하던 다른 기술적 성과처럼 취약점에 노출될 수 있다. 이는 세뇌, 정신 조작[9] , 기억 조작[10] 등 자유의지를 말살하여 철학적 좀비를 만들거나 '운명'을 뒤트는 종류의 신종 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 이런 범죄는 증거 인멸, 증거 조작 등을 통해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거나 범죄자를 무죄방면하기 위해 쓰일 수 있으며, 민주주의도 위협하게 된다. 더 심할 경우 국가가 주도적으로 이런 범죄를 저질러서 개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시도할 때 남의 의지에 휘말리거나 한 번이라도 잘못되면 그대로 쇠퇴하여 특정한 가능성을 잃은 채 알아채지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노봇과 인공지능을 사람들이 다룰 수 있으면 설정을 벗어난 기계의 반란(혹은 권리, 동등성 주장)과 나노봇을 통해 반응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흔적도 없는 인성조작이 가능하다. 그 외에도 기존의 범죄 검증 수단이 첨단기술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범죄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속내를 알 수 없다면 그건 비밀 장부 등을 '기억'하는 데 아주 효과적일 것이다.
충분한 힘을 가진 자들이 그들 죄값을 치르지 않으려고 모자란 이를 부패시키는 것도 넘어 사람을 무시하고 인과를 없애며 존재의 무결성도 만끽할 수 없게 된다면 '정의'가 올곧을 수 없다.
옹호자들은 보안에 투자하면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보안을 신경쓰면서 호환성을 축소한다면 여전히 무능력할 수도 있고, 돈이 모자라는 사람은 안전장치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해 신종 범죄 위험에 있어서도 불평등해질 수 있을 것이며, 방어자가 완벽하지 않다면 순간적인 공격만으로 큰 재난을 불러올 수 있다.
방어의 완벽함을 보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공격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의 허용[11] 를 주장해선 안 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사회의 진실 검증을 위한 모든 수단이 힘과 세력에 의해 무효화될 수 있다.
또, 기존에 보장되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나 기업이 시야나 기억 공유를 요구하는 것은 범죄 조사 등의 목적이 있더라도 프라이버시 논란을 일으키며, 이런 분야의 기술 개발은 다시 인류 자체를 자원으로 보고 침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다. 뇌 백업도 문제이다. 해당 정보가 '나의 사본'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의 채취 혹은 조작이 비밀 장치 등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 이뤄질 수도 있으며 실시간으로 대체되거나 편집되어, 부활 혹은 복원된 자기 자신이 이전의 자기 자신과 비교해 여러 면에서 결여 및 수정되어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으로 도입될, 사람을 벗어나는 변화가 없어도 첨단 기술을 이용하면 현재보다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반면 트랜스휴머니즘은 통제할 수 없는 위험, 발생시 인체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한다. 자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에 의한 위험인 것이다. 특히 기존에 지켜지고 있던 인간성은 그에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하므로 낙관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이익이 매우 크다 해도 반드시 위험이 더 작을 것이라고(기존의 것을 갉아먹는 게 아니라 새로 산출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비판적 관점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불법화하더라도 인류가 존속하는 데는 지장이 없고, 오히려 안전한 것이 확실하지 않은 길을 열어두는 것이 끔찍한 일들을 양산한다며 부적절한 것으로 본다. 낙관론자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허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비판적 관점에서는 낙관주의자들의 주장이 이뤄지는 과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고 이상적일 수도 없으므로 과격한 문화 지체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본다. 따라서 철저히 엄격하고 강력한 윤리 기준을 확보하는 일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과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자유를 방종으로 만드는 일 없이, 그저 속임수에 말려드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가 선의지로 진정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3. 불평등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해 생겨나는 새로운 범죄와 인권탄압,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인간성의 침식으로 인해 불평등[12] 과 경쟁[13] 이 커질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불평등이 트랜스휴머니즘과 결합하면 인간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권력을 갖춘 개인의 영달, 기득권 유지만을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벌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개개인의 평등하고 동등한 사유를 지키려는 시도가 곡해되고 가진 자들의 입맛따라 맞춰진 왜곡된 세상의 모습으로 개인을 옥죄고 없는 것마저 스스로 자조하며 내놓게 될 수 있다. 가령,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산계층이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원을 착취당하는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다양성이 모자라 누구나 모사가 가능해 존재 자체의 신뢰성이 떨어져 사회적으로 입지가 좁은 것보다 못하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그냥 없는 것 취급이 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 도입 여부에 따라 지적 능력이 차이날 경우 지적장애와 천재 이상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대상이 '미물 급'이 되면 보호하겠다고 자유를 박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심할 경우 인류와 기타 생물종, 물건 등의 위계 역전이 일어나 무산계급이 다른 것보다 열등하게 취급될 수 있다. 최악의 사태에선 공작으로 인해 인류 대다수가 아무것도 모르고 정신적/신체적으로 말살을 맞이할 위험성도 커진다.
개개인의 평등하고 동등한 사유를 지키려는 시도가 곡해되고 가진 자들의 입맛따라 맞춰진 왜곡된 세상의 모습으로 개인을 옥죄고 없는 것마저 스스로 자조하며 내놓게 하는 상황이 당장 현실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잣대마저 통과해 반영될 위험성이 있는 미래 사회에서 벌어질 일들은 비판적 관점에서는 무한한 가능성 따위가 절대 아니라 그저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으로 보인다.
신체를 직접 개조하고 조작하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옹호론자들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여태까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켜온 수많은 기술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인간의 지적 능력 향상에 기여해 온 문자같은 기술과, 뇌에 대한 생체적 조작을 통해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무슨 중대한 차이점이 있냐는 것. 뇌에 대한 생체적 조작이 사회적 불평등을 불러오고 결국 기득권층만이 그 혜택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문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당시 기득권층들만의 전유물이었다는 것과 현재는 인류 모두의 의사소통 능력과 지적 능력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논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먼 옛날 식량이 모자랄 땐 그나마 납득할 수 있었으나 지금 사람들은 어찌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고, 불평등에 휩쓸리는가?
사회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힘센 자는 좋은 면을, 약한 자는 나쁜 면을 택하게 된다. 이런 것이 해결 안 된 상황에서 사실상 지금 시대의 인류마저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나누어 서로 물어뜯고 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해결책을 도모하지도 못한다면 문제가 크다.
결국 기술은 인간과 인류를 위해 발달해야 한다는 말이자 모두를 행복하게, 최선을 넘어서 절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라들 사이에 심한 간극이 생길 것이다. 각 나라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서로 영향을 받거나,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국민이 사는 환경이 지옥과 같을 수 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건 우리가 지금껏 해온 건 사람들은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욕망을 펼치지 못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적 사항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일구어온 것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회를 이끈 인간과 인류를 둘러싼 환경에 가해지는 조작은 좋게든 나쁘게든 우리 본질 자체를 바꿔 평범한 방법으론 아예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상황에 따라 양심적으로 이를 거부할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전자화폐가 가치를 만들듯, 일단 방법 자체에 문제[14] 가 있어도 충분한 수가 그 방법을 이용한다면 안 쓰고는 버틸 수가 없다!
모두가 한날 한시에 동등하게 포스트휴먼이 되면 그에 뒷따를 불평등이 없겠지만, 현 사회 실정상 이것이 불가능하고 트랜스 휴먼, 포스트 휴먼이 되더라도 격차는 경쟁 및 이기심과 함께 유지될 위험성이 있다고 여기므로 인류와 그 정의를 개조하려는 의지들을 현실에 불러와선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치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면, 개인에 대한 존중으로 받아들여질 혐오스러운 인류 본성과 맞물려 약자가 지속적으로 은밀하고 강력한 폭력에 노출되고 도를 넘은 탄압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막연한 낭설이 아니라 (아직까진 트랜스 휴머니즘을 직접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내지 구성원과 강력한 계약으로 묶인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저항권이 보장되지 않는) 권력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지금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다.
4. 인간 본성
비판론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옹호가 종차별적인 사고라는 초인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이 세상에 우리가 위할 것은 우리 밖에 없는데, 종 차별을 한다고 문제가 생기는가? 개인적 이기심과 똑같이 본능인데, 종적인 이기심을 부리면 또 어떤가? 맹목적이고 극단적으로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생각은 지금껏 우리 사회를 해쳐 왔으며, 인류에게서 자아존중감을 빼앗아, 인류에서 분리되어 모든 문제가 없다고 느껴질 뿐인, 또다른 모순으로 점칠된 주체에 갖다 붙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신뢰를 배반했다.
인류를 먼저 돕고 살피는 시야가 인류의 환경 개척과 인권 향상 추구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나쁜 면과 좋은 면을 진정 갈라놓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상정하더라도, 그것이 정신적이고 존재론적인 '거세'가 아니란 보장은 있는가? 만일 우리의 공격성이 말소되었다면 우리 동족 이외의 다른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남을 밀어내 제외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골라 지금처럼 편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질투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15]
물론 사람을 벗어나 이런 기작을 없애거나 바꿀 수 있겠지만, 그 수정된 사고 체계에서 산출된 것이 기존의 것과 같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약속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극심한 분리와 부작용이 심지어는 악용되었을 때, 우리는 생겨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가? 현재에서 이어져 변질될 수 밖에 없는, 사회 전체에 파고들어 인류를 병들게 만드는 권위주의적 체계에서 생산된 수많은 수단이, 항상 최선의 과정을 거쳐서 이상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정 믿으라는 말인가?
사회는 개인이 모여서 만든다. 개인이 바뀌었을 때, 사회가 이상적이라는 보증따위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치우친 사태에서 일어난 참사를 보아왔다. 사회라는 기계를 이루는 부속이 최고급이고 모두 똑같더라도, 그것이 어느날 완벽하게 끼워맞춰질 수 있는가? 갑자기 우주 밖에서 누군가가 개입해 이상적인 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운명론적 계시를 믿지 않는 한, 검증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확신도 받지 못한 수단에 인류의 미래를 맡기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개인에 대한 향상이 꼭 모두 모인 종족 전체에 대한 향상을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들이 한순간에 승천하여 천국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권위를 추방할 수 있는가? 찬란한 문명과 뛰어난 기술이 자유롭게 풀리면서도 악용되지 않을 수 있는가? 타자에 의해 자아에 대한 개입이 일어나는 것을 시도 수준에서 막고, 우리 위에 무언가가 위치하는 것을 인류에 대한 정복과 완전성을 확보하려는 굳은 심지 따위로 막아낼 수 있는가? 혹시 대다수의 위에 누군가가 위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인류가 완벽하지 않은 것이 맞다. 하지만 인류 이후에 태어날 진보된 것이 완벽하리라고 확정할 수 없다. 모든 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그 힘에 의해 마지막에 남는 것이 합의되지 않은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다는 걱정에 대해선 어떻게 답할 것인가? 싸워서 남의 권한과 생명을 빼앗는 것이 자기자신에게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상황을, 스스로의 삶을 위해 투쟁하기를 인정하는 자들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또한 이렇게 인류를 규격화된,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다 보면 기존의 관점들이 변질 [16] 될 수도 있다. 개인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된다면 환경과 사회를 개선하기보단 스스로를 바꾸는 것에 매달려 인문주의 기조가 침체되고 사회상이 힘과 자본의 강요에 의해 항거가 거의 불가능하도록 기형적으로 변할 수 있다. 기존에는 개인을 전체에 맞추기 위해 환경을 장악해야 했기에 잘 통제된 환경에서는 집단을 형성하지 않은 개인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별로 없었다면, 이들의 미래상에서는 기술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현실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시와 인식을 모조리 피할 수 있는 정예, 다수가 아닌 소수, 공동체가 아닌 개인 수준에서 심지어는 태생에 관여하지 않고도, 개개인을 구성하는 요소를 파해쳐서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판에 박힌 운명론적 길을 설정하거나 피해자가 깨트릴 수 없는 틀을 만들어 기계 만지듯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자신 입장에선 안 그럴 것 같다고? 인류에겐 한계가 있다. 인류 본성에 대한 개척이 끝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해 인간성[17] 을 넘어서 정체성마저 잃어 몰개성하게 통합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를 남에게 적극 권장하거나 '인류 도태론'을 펼치는 자들이 인간임을 포기했다고 본다. 비판론자들은 본질을 지키고 인류를 보조할 '도구'를 만듦으로서 안전을 추구하고자 한다.
누누히 말하지만, 반대론자들도 인류를 더 낫게 돕는 일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론자들이 기술을 쓰지 않는 반지성주의자라는 인식은 잘못되었다.
인류 개선 계획안이란 대의를 사업 삼는다면, 모든 문제에 대해 미리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이끌도록 하지 못할 시 그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져선 안될 것이다.
사회는 분명히 공유되는 본능을 보호하나, 공유되지 않는 본능을 배척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공유되는 본능을 훼손하거나 지우려 든다면 기존에 모여서 생활하던 인류는 사라지고 다시 되찾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기만 하는 미래의 기회를 위해 현재를 잃는 것이지 않은가?
5. 종교
비판론자들 중에선 트랜스휴머니즘을 비롯해 생명공학자를 '전지전능'한 설계자의 입장에 놓으며 현실에서 반발을 떼어놓고 생각하고자 하는 태도의 확산이 기술 및 극소수의 깨달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신과 신관 내지 교주의 자리에 놓은, 흔하디 흔한 사이비 종교의 준동과 같을 뿐이라는 사람들이 있다.[18] 기본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비웃으며 인류란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자기네들을 따르지 않으면 우매하고 아무것도 모르며 뒤쳐진 군중, 따르면 진정한 사람이자 현명한 가치의 주도자라고 띄우는 것이 지나친 흑백논리라는 이야기이다. 당연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또한 당연한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된다면 강자가 약자를 탄압할 권리를 합리적이라고 여기면서 스스로 진리를 찾는 구도자라고 일컫는 것과 다를 바가 무언가?
기성 종교의 강경파들은 기존의 믿음에 도전하는 것이 신께서 내리신 생명의 존엄성마저 앗으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한다.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신앙[19] 을 바탕에 둔 억압은 당대에도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들 논리 체계 안에서조차 충돌을 낳았다는 지적도 있다.
반대 측 역시 그 시점에 고착되지 않으며 찬성 측과 마찬가지로 발달하기에 영 뜬금없이 미신을 믿는 종교를 허수아비로 내세워서 오명을 씌운 채 공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반종교주의로, 옹호론자 스스로를 그들 집단 내에서 떠도는 의견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증오와 함께, 이념을 향한 지지만을 위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논리적 결함일 뿐이다.
6. 옹호론에 대한 평가
문명의 발달로 인류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누리는데 새로운 수단이 마련되어 도움받을 것이라는 점에는 양측 모두 서로 이견이 없지만, 한계 극복을 운운하는 자세 등 인류를 틀에 박힌, 벗어나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적어도 지금은 전혀 옳지 않다고 본다. 기술이 하는 일이 어떻고, 그 기술을 쓰는 것이 생명 존엄성, 평등을 저해한다고 해도 따지지 않고 일단 도입하기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비판자들의 입장에서는 옳지 않은 일이다.
낙관적인 이식물 개념을 받아들이는 신중한 옹호자들이 인류를 직접적으로 진화시켜서 사회에서 독립되도록 만들어야만 이상향을 이룰 수 있다는 논조[20] 로 자주 소리를 내어도, 그 역할이 도구로 대체되거나 이식된 부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해선 안된다.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사람의 권리로 보는, 인류 친화적이지 않은 생각이 선택권 역시 박탈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자유를 미신으로 취급해 인류를 기계나 물건 다루듯 하거나 단순한 세포 군집으로 취급하는 것은 분명 틀리다.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겪는 거의 모든 갈등과 한계, 그로 비롯된 문제들은 언젠가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투입을 하면 원인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기술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기술이 다른 방법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해친다면, 옳지 않다.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의 전망을 그리더라도, 지금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 그런 기술들이 '이상적으로' 아무런 심각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전면 보급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사회가 사람에 맞게 다듬어지면서도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을 알지 못해 소요가 발생했다면, 이걸 도입하면 사람을 사회에 끼워맞춰서 사소한 문제들을 다수 때려잡을 수 있다는 말은 맞다. 지금 악용되는 것들도 철저하게 학문과 연구결과에 의거해 제한적으로 서로 고려되어 쓰인다면 문제를 없애는 또다른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고통부터 세뇌까지, 사회를 유지하고 대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믿음에 경도되지 않은 채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모든 수단이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만큼 다듬어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말로 효과적이라 하더라도 악용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에 책임을 지거나 미리 알아채고 막을 수 있을 만큼 격차가 벌어진다면 그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옹호자들은 전지전능한 초지능이 모든 것을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관리하면 될거라고 믿지만, 그런 것을 누가 만드는가? 인공 지능에 의해 인간의 탐욕을 관리함으로써 트랜스휴머니즘을 성공적으로 도입하자는 방안에 대해 옹호자들은 그런 이상향에 대한 예상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안정한 것이 확실시되지도 않은 희망만이 옳다고 믿으며 그렇게 상대편을 압도해야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일단 변화 이전과 이후의 존재적 동일성의 흠결없는 유지가 그 과정에서 온전히 보장된다면 인류 구성원 대다수를 능률적이게[21] 바꾸기에는 효과적이란 건, 반대측에서도 완전히 인정하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나, 비판자들은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안전하게 가능한지부터, 사람이 닿을 수 있는 바닥과 고통, 그런 끔찍한 활용례의 확장까지 문화적 지체와 온갖 갈등, 문제들을 인류 본연의 열등성이라고 일컬어 그 반대편에 이상향을 나타내는 것의 정의로움 따위를 부정한다.
옹호론자들은 생명공학과 그 전지전능성을 믿는 기조에 따라 인류에 대한 적극적 기술 도입과 함께 남들은 따라올 수 없는 발빠른 발전을 도모해도 항상 최선의 선택이 이어지며 각종 방법을 이용해 '모두에게 필요한 수준의' 본성만큼은 꼭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과학기술과 그것을 이끄는 자들이 모든 면에서 올바르다고 주장하지만,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다른 생물들과 공유되지 않는 필요한 본성의 수준이란 누가 정하는가? 딱 정해서 진심으로 아무런 불만도 터져나오지 않는 기준이 성립했다 하더라도 그 기준의 헛점을 파고들어 위정자와 압제자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고, 모두가 지나치게 다르게 구분되면서도 서로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상황에서는 공통된 기준이 세워질 수 없기에, 필연적인 반목과 차별이 생겨나지 않겠냐고 간단히 되물을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비판자 측과 비슷하게 종교적인 결속 및 서열을 정하는 본능에 의거했으므로 그 야성이 억제될 수 없고,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자의에 따라 후손으로 같은 인류가 아닌 더 이질적인 존재를 남기며 인류를 해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이 강요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된다.
옹호자들의 입장에선 '스스로' 모았다고 생각되는 힘에 의해 오직 기술과 힘으로 일어나리라고 여기는, 그들만의 책임감과 정의를 갖춘 '우월한' 신인류가 사람이란 개념의 완벽한 후계자를 자처하며 생명과 새로 세상과 존재의 가치를 정의지을 미래만이 있을 것이고, 비판자들은 이런 사고관에서 반사회적 범죄자들의 재결집을 연상한다.
[1] 논문 읽기 [2] 또한 기술을 적용한 결과가 적용받는 개인의 입장에서 꼭 향상인 것은 아니다.[3] '근시일 내'에 '안전하게' 특이점이 도래할 거라고 믿는, 막연한 향상심, 기술, 자본과 물질을 인류보다 높이 두려는 행위를 하면서 그저 조심하면 된다고 주장하는[4] 감정과 상태, 본능을 바꾸고 가짜 기억을 심는다든가, 효율을 따져 인간을 독립생명체가 아닌 그저 정보, 자료, 기록물로 만들고 기계 안에 넣어 조작이 쉽게 한다든가. 아예 인간 객체와 똑같은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 시뮬레이션을 할 수도 있다. 동의를 받더라도, 이뤄져선 안되는 함정 수준이다. 이 밖에도 스스로 이상을 낮춰 인간보다 낮은 존재로 떨어진다든가. 온종일 마약에 취해 지낼 수도 있고, 거꾸로 다른 종이나 물건이 인간만큼 뛰어나지게 바꿀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것 같은 기술들이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안다면, 일찌감치 제한을 걸어둘 필요가 있다. 지금 누가 하류층으로 떨어져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일단 입지와 존재의 격을 낮추는 것이 평범한 선택지가 되고 나면 누구든 더 자주, 확실히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5] 옛날에는 채찍질을 당하면 몸이 망가지기 때문에 무척 잔악한 처벌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안 다치는 채찍으로 때리는 법이 개발되었고 치료도 가능해서 몇몇 나라에서는 보기 쉬운 형벌로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그 특성상 피해를 주장하기 어려운 정신적 타격이 그저 허깨비처럼 여겨진다면? 복구할 수 있는 것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면? 도의적 책임을 아무에게도 물지 않는다면? 누구를 죽였다가 되살려도 괜찮다 여겨지며 그걸 막거나 싫어하는 사람들만 멍청이 취급받고 기억과 흔적만 남기지 않는다면 사람을 복사해서 마음껏 가지고 놀아도 죄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6] 예를 들자면 컴퓨터, 특히 에커트 구조 프로그램식 체계에의 직접적인 연결 및 활동으로 인한 자아와 정체감의 해리와, 인간 뇌신경에서 파생된 지각력을 띄는 구조들의 도구로의 이용 등[7]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생산으로 인간 가치의 하락, 지각 활동을 규격화된 시뮬레이터로 모방 및 해당 기록을 저장하는 것으로 존재의 연속성을 무시해 엄연히 하나의 생명인 개인을 그저 위험에 처해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의 기계화로 정신과 프로그램 간의 차이가 사라지고 특정 방향으로 탐지나 거부가 불가능한 전체 인격 편집이 강요될 수 있는 등. 반대로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옳게 쓸 때에 발생하는 이점들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겠다.[8] 능력위주로 모든 가능성과 자유, 안위, 대우의 가부를 따지고 심지어는 본능에 포함된 힘 자체를 조작하여 빼앗을 방법이 생기기에 합리의 이름으로 광기가 확산되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걱정. 쉽게 말해 좋은 점을 오히려 없앨 수도 있고, 지금 나빠 보이는 사항은 야만성으로 규정된 것의 반대편에서 인류 구성원에 대한 혐오와 함께 강자가 생각하는 진리의 잣대에 편입되어 그런 과정이 강제되거나 그에 준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사람은 동물 취급에 짐승을 신인류 취급하며 과거와 역사를 입맛따라 은폐할 수도 있다. 대격변이 동반된다고 상정한다면 예측은 여러모로 극과 극으로 나뉜다.[9] 예를 들어 감정을 일으키는 호르몬 수치를 조정해 감정을 조작한다. 더 나아가 뇌 기능을 억제하거나 사고력을 제한하는 식의 억압이 가능하다.[10] 기억을 짜깁기하고 끼워넣어서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가 한순간에 이런 과정과 이상한 낌새의 존재 자체를 알아채지 못하게 다시 기억을 대체할 수도 있다.[11] 창을 갈고닦을 권리[12] 차별의 극단화[13] 강제로 경쟁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 도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14] 죽였다가 되살리는 방법이거나, 억지로 일부를 파괴해 기술을 수용한다든가.[15] 사랑과 질투를 유발하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으로, 서로 같다.[16] 나쁘게 뒤틀려 악용[17] 기존에 인류가 지켜왔던 본질과 본성. 예를 들어 인간의 존엄성, 인권, 인류애, 동족으로서 얻는 평등, 인문주의, 정신적-문화적 가치. 많은 사람들이 인간성에 대해 온전하게 전해져와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해로운 본능이란 것 역시 사람마다 기준점이 다를 수 있다.[18] 근래에 들어 사이언톨로지는 물론이고 옴진리교에서도 약물과 함께 다른 수단을 통한 군사적 세뇌 요법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소리가 있다. 비슷한 성향을 띄는 종교관으로는 지적 설계를 꼽을만하다.[19] 그 자체로 나름 인간 본성에 대한 교조[20] 혹은 앞으로의 기술 활용에는 과격하게 느껴지더라도 이식물이 필요할 것이라는 주장[21] 자유지상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를 정말로 책임감 있게 챙길 수 있거나, 편법으로 범죄 혹은 인권유린을 저질러도 남들에게 욕을 안 먹을 만큼 숨기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