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스 워드
1. 개요
미국의 前 미식축구 선수, 방송인. 지도자.
방송활동을 접고 2019시즌부터 NFL 뉴욕 제츠의 풀타임 오펜시브 어시스턴트 코치, 와이드 리시버 코치로 사이드라인에 돌아왔다.
2. 출생 및 성장
주한미군인 아버지 하인스 워드 시니어와 용산 미군부대 인근 미군부대 클럽의 가수 김영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20살, 어머니는 25살로 여러 정황상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첫 돌이 지나기 전에 급작스럽게 부모와 같이 미국으로 넘어가 애틀랜타에 자리를 잡지만, 1년 후 독일로 다시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와 어린 워드만 미국에 남게 된다. [3]
원하지 않는 미국행에 영어도 전혀 모르는 26세의 애 딸린 여자가 미국에서 혼자 생활을 영위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니 김영희는 트레일러 파크에서 청소부로 지내면서 아이를 길렀다. 하지만 1년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루이지애나주에 살던 자기 어머니에게 아들을 데려갔다. 졸지에 외톨이로 전락한 김영희는 아들을 되찾고 자기 삶까지 제대로 굴리려고 산전수전을 겪었다. 워드가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어렵게 친권을 되찾아 워드를 기른다. [4]
실제로 KBS 스페셜로 방영될 만큼 김영희가 하인스 워드를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유명하며, 워드 본인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기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김영희 씨는 애틀랜타 인근 초등학교에서 일하며 아들과 아들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한다.
다만 이런 경험 때문에 워드의 어머니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하인스 워드가 어렸을 때 한국어나 한국 문화를 가르친 적이 없으며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꺼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 미군 병사와 결혼해 애 딸린 여자가 당시 한국의 집안 및 사회에서 받았을 시선은 말 안 해도 비디오인 것. 다행히 워드의 설득 및 재단 활동에 참여하면서 조금은 누그러졌다고.
3. 미식축구 입문과 아마추어 시절
성실하게 자란 하인스 워드는 운동에 재능을 보이며 고교 때는 주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선수로 성장, 졸업반 때는 고교 주전 쿼터백으로 1,500야드 이상의 패싱과 1,000야드 이상의 러싱을 기록했고, USA Today 등에서 고교 올 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된다. 이런 그에게 당연히 여러 미식축구 명문 대학들이 장학금 제의를 해왔고, 메이저리그의 플로리다 말린스까지 드래프트 지명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미식축구로 집에서 가까웠던 SEC의 조지아 대학교에 진학했다.[5]
대학 풋볼 입성 첫 두 해 동안 워드는 입학 당시 포지션이었던 쿼터백 주전 자리보다는 빨리 1군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포지션을 왔다갔다 했다. 1학년 때는 주전 러닝백 터렐 데이비스의 부상으로 러닝백과 와이드 리시버를 번갈아 뛰었으며 2학년때는 로버트 에드워즈에게 러닝백 자리를 내주고 리시버로 뛰다가 주전 쿼터백의 부진으로 인해 대체 쿼터백으로 나서서 시즌 종료 때까지 다시 주전으로 뛰었다. 피치볼에서 413야드 패싱으로 학교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열심히는 했으되 결과는 신통치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6]
3학년이 되자 워드는 자신의 재능을 집중하기 위해 리시버로 포지션을 굳힌다. 1996년 팀은 5할 승률도 못했지만 워드 본인은 52번 패스를 잡아 900야드를 전진했고 러싱으로도 26번에 170야드를 달리며 팀의 핵심 공격 무기로 완전히 이미지를 굳혀버린다. 이어서 4학년 자신의 대학 풋볼 마지막 시즌이 되자 워드는 팀의 에이스로 매 경기 두명의 집중마크를 당하면서도 그는 55개의 패스 캐치, 6개의 터치다운를 잡으며 컨퍼런스 올스타로 뽑히는 한편, 그 해 리시빙+러싱+리턴 합계 3,870야드 토털 전진으로 모교 선배이자 그 유명한 허셸 워커[7] 에 이어 학교 역대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하인스 워드는 워낙 여기저기에서 뛰다 보니 와이드 리시버 경력이 상대적으로 일천하며 리시버로서 특출한 강점이나 평균을 약간 밑도는 신체 조건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정상급 리시버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보통 웬만한 대학 미식축구 스타 선수들, 특히 선수 생명이 짧은 NFL에서 신체 능력으로 먹고 사는 리시버들이 3학년까지만 뛰고 프로로 전향하는 것과 달리 4학년까지 채우고 드래프트에 나온 것도 대학을 갔으면 졸업장은 꼭 받으라는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한 이유가 크지만, 리시버로서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점도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평가가 이후 리그 정상급 리시버로 활약했던 그의 프로 커리어에 비하면 낮은 평가였다는 것이지, 드래프트 탑 5 리시버 재목으로 평가되어 2 라운드 정도에서 지명 될 재능으로 인정받고는 있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직전 어린 시절 다친 십자인대 손상문제가 뒤늦게 발견되면서 선수 가치가 추락, 결국 3라운드 가장 마지막인 전체 92번으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지명되었다. 여담으로 드래프트 동기로는 그 유명한 쿼터백 페이튼 매닝, 와이드 리시버 랜디 모스 등이 있다.
4.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슈퍼스타
프로 초창기에 워드는 대학 초기처럼 포지션이 확고하지 않았다. 당시 헤드코치 빌 카워[8] 는 그를 전천후 유틸리티 백업선수로 생각했기 때문에 스페셜팀에서만 주로 출장하고 리시버로는 선발 출장 없이 단 15개의 캐치에 246야드만 전진했다.
그러나 연습 때는 항상 열심히 운동하는 태도와 필드에선 플레이 하나하나에 열성적이고 몸을 사리지 않는 터프함으로 코칭 스태프와 동료들의 호감을 산 하인스 워드는 다음해인 1999년에 주전으로 발탁됐다. 99년 14경기에 나온 그는 61번 패스캐치에 638야드, 7터치다운로 급성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주전 쿼터백의 삽질로 팀의 패싱 공격은 리그 뒤에서 2등, 팀은 6승10패로 전년보다 더 나빠진 결과를 얻게된다.
사실상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주전 와이드 리시버로 자리를 굳힌 하인스 워드는 드래프트 1라운드로 들어온 후배 트로이 에드워즈, 플렉시코 버레스[9]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차례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간판 와이드 리시버 자리를 유지한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하인스 워드는 처음으로 시즌 1천 야드를 돌파했고 NFL의 올스타게임인 프로볼에도 선정되었다. 이로써 전국구 스타 등극.
본인의 성장과 팀의 성장이 맞물리며 스틸러스는 강팀이 되었지만 그 위에는 더 강력한 톰 브래디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버티고 있어 번번이 슈퍼볼 문턱 앞에서 좌절, 슈퍼볼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인스 워드와 벤 로슬리스버거를 중심으로 전력을 끌어올린 스틸러스에게 기회는 빠르게 찾아오게 된다. 2005년 정규시즌 69 패스캐치에 975야드를 거둬들였고, 11개의 터치다운를 잡아내며 팀의 1번 리시버 역할을 수행해 팀의 통산 최다 패스 캐치 기록을 갈아치운 그의 활약속에 스틸러스는 최하위인 6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지구 라이벌 신시내티 벵갈스, 시즌 최고의 연승기록을 세웠던 페이튼 매닝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덴버 브롱코스를 전부 원정에서 물리치며 '''6번 시드의 기적'''으로 40회 슈퍼볼에 진출했으며...
슈퍼볼 XL에서 시애틀 시호크스를 만나 전반 종료 직전 3rd and 28에서 잡아낸 결정적인 리시빙으로 7-3 리드를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냄과 동시에 4쿼터에는 리버스로 공을 넘겨받은 앤트완 랜들-엘로부터 팀 승리에 쐐기를 박는 43야드짜리 TD 패스
바로 이 장면
를 멋지게 잡아내며 터치다운. 5번 패스캐치, 123야드, 터치다운 1개로 커리어 첫 우승과 함께 슈퍼볼 MVP(아시아계 최초)로 선정되는 겹경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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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제이든과 함께.
5. 한국 방문, 그리고 두번째 슈퍼볼 우승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게임이 된 슈퍼볼이 끝나고, 이미 한국에서도 그가 최고의 활약으로 승리한 슈퍼볼이 중계되어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하인스 워드는 자신이 태어난 한국을 1살 때 이후 처음으로 다시 찾았다.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에서 '어머니의 나라'에 돌아온 그는 온 국민의 관심속에 청와대까지 초청될 정도로 큰 대접을 받았고 명예서울시민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하인스 워드는 한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혼혈아동을 위해 백만달러란 거금을 기부하였으며 이 방문은 한국에서 혼혈아의 사회적 위치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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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
최전성기에 슈퍼볼을 거머쥔 이후 30대에 접어들면서 하인스 워드 본인도 점점 체력문제와 잔부상으로 개인 기록은 조금씩 떨어졌으며 팀의 주전 쿼터백 벤 로슬리스버거의 오토바이 사고로 팀이 내홍을 겪으며 다음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하지만 여전히 74 패스캐치 975야드 전진으로 A급 리시버의 자격을 유지했던 그였다.
2007년 계약문제 등과 개인 스케줄[10] , 그리고 30줄의 나이로부터 발생한 무릎부상으로 인해[11]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연속경기 출장 기록도 끊어지고 71캐치 732야드, 7터치다운이라는 줄어든 성적표를 받아든 하인스 워드는 결국 1번 리시버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대망의 2008년. 팀은 쿼터백 벤 로슬리스버거의 괴물같은 부상복귀와 트로이 폴라말루, 제임스 해리슨을 앞세운 무시무시한 수비로 지구 1위를 기록해 다시 슈퍼볼에 도전했다. 2년 연속 리그 수비 1위의 위용을 앞세워 정규시즌 12승4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샌디에이고 차저스와 볼티모어 레이븐스를 연파하고 43회 슈퍼볼에 진출, 슈퍼볼 이전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슈퍼볼 출장이 의문시되던 언론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선발 출장해 첫 드라이브에서 38야드짜리 패스를 잡으며 커트 워너가 이끄는 애리조나 카디널스의 수비진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대각의 산토니오 홈스의 견제를 끌어주었다. 결국 난타전 끝에 40회 때의 주연이 아닌 조연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개인 통산 2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한다.
2007년의 무릎부상으로 인한 부진으로 한물 갔다는 평을 받은 워드는 이해 1천야드를 다시 넘기며 완벽히 부활, 전성기의 화려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선수경력 10년을 넘기는 백전노장의 여유를 과시하며 2009년에도 또다시 1천야드를 넘겼고 피츠버그 스틸러스 통산 최다 리시빙야드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2010년 시즌에는 마이크 월러스, 엠마뉴엘 샌더스, 안토니오 브라운 등의 신예 와이드 리시버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리더이자 멘토,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면서 755야드에 TD 5개로 전년도보다 기록은 줄었지만 팀은 빅벤의 4경기 징계에도 불구하고 12승 4패로 AFC 2위를 차지해 숙적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뉴욕 제츠를 꺾고 45회 슈퍼볼에 진출했다. 그러나 애런 로저스의 그린베이 패커스에 패배했다. 하인스 워드는 이날 경기에서 3:21로 뒤지던 2쿼터 종료 직전 3번 연속 패스를 받아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터치다운을 성공시키는 등 총 7회 패스 캐치 78야드 전진 1터치다운으로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현재 스틸러스의 리시빙 관련 통산 기록은 거의 그가 다 경신했으며, 명예의 전당 입성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12] 그야말로 피츠버그의 살아있는 전설.
6. 씁쓸한 방출과 은퇴
그러나 36세의 나이에 2012시즌을 준비하는 하인스 워드의 높은 연봉을 스틸러스가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스틸러스는 이미 샐러리 캡 한계를 천만달러 이상 넘긴 팀이라 무조건 연봉을 줄여야만 하고, 가장 중요한 팀의 퍼스트 타겟인 마이크 월러스가 자유계약선수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장들을 방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인스 워드는 한국 시간 2012년 3월 1일 팀에서 방출되었다. 14년간 한 팀에서 활약한 프랜차이즈 레전드 치고는 씁쓸한 결말. 더 안습인건 같은 해 드래프트되어 똑같은 신세가 된 NFL 최고의 쿼터백 페이튼 매닝 때문에 이 소식이 완전히 묻혀버린 것. 지못미.
2012년에도 하인스 워드는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 원했으나, 결국 36세의 노장 와이드 리시버에게 새 팀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고 하인스 워드는 스틸러스 레전드의 자존심상 다른팀에서 커리어를 연장하는 길을 포기하고 현역 은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이후 오랜 세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던 경험, 그리고 오랜 방송 경력과 아래 언급된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인연으로 NBC의 선데이 나잇 풋볼을 통해 해설자로 데뷔하였다.
7.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
2017년 하인스 워드가 미식 축구 명예의 전당 후보로 처음 올라왔다. 문제는 Semi, Senior 투표 단계를 통과해야 최종 후보자로 등록될 수 있는데 워드는 2020년까지 4년 동안이나 Semi 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거기다 2020년부터는 경쟁자도 엄청늘어(무려 워드를 제치고 senior까지 간 선수만 35명이다!) 사실상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현지 매체에서도 명예의 전당감은 아니라는게 중론이다.# 대표적으로는 커리어 개인 스텟이 리그 평균보다 좀 나은 수준이라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참고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난이도는 MLB 명전보다는 훨씬 쉽고 NBA/농구 명예의 전당보다는 살짝위인 수준이다.
8. 플레이 스타일
스피드 중심의 와이드 리시버이지만 그의 뛰어난 작전수행능력은 어떠한 플레이라도 가능하게 만들며 쿼터백에겐 확실한 패싱 타겟이 된다. 필드를 가로지르는 플레이나 짧은 패스 전술에서는 거의 최상급으로 꼽아도 손색 없는 작전 수행 능력을 보여왔고 쿼터백이 곤란에 빠졌을 때 근거리로 루트를 찾아 패스를 받아내는 것 역시 그의 장기. 무릎을 몇 번 다치고 나이가 들면서 롱패스 쪽은 조금 애로사항이 있지만, 작전수행능력 만큼은 NFL에서도 최정상으로 꼽힌다.
또한 NFL에서 가장 블로킹을 잘하는 와이드 리시버로 선정될 만큼 허슬 플레이에 능하다.[13] 특히 자기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로 절대 물러서지 않고 블로킹이나 캐칭, 러닝 등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다.
거기다 그것이 굉장히 지능적이고 가차없기 때문에 '''NFL선수들이 선정한 최고의 더티 플레이어로 찍히기도 했다.''' 같은 지구 라이벌 팀, 특히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신시내티 벵갈스의 수비수들은 '''하인스 워드라면 언제든 걸리면 죽이겠다'''고 이를 간다. 실제로 2008년 시즌에는 지구 라이벌 벵갈스와 경기중 신인 라인배커 키스 리버스[14] 를 교묘하게 후방에서 처박아서 시즌 아웃 부상을 입혔지만 반칙으로 걸리지도 않고 이후 징계도 받은 적이 없다. 영상으로 보기. 이 때문에 NFL에서는 2009년부터 '''볼 없는 곳에서 양팀 선수들이 측면, 후방 블로킹을 금지하는 룰을 만들었고,''' 이를 '''하인스 워드 룰'''이라고 말한다. 또한 레이븐스의 전설이자 역대 최고의 세이프티 중 한명인 에드 리드를 경기 중 그대로 들이받아 뇌진탕 증세로 실려나가게 했던 적도 있다. 영상으로 보기. 오죽 심했으면 2008년 당시 Monday Night Football에서 스틸러스를 상대하게 된 라이벌 레이븐스 수비수들이 하인스 워드를 때려잡으려고 현상금을 걸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15]
실제 경기를 보면 하인스 워드는 경기 초반에 자기에게 따라붙는 수비수들을 절대 그냥 안 넘긴다. 초반에 기싸움 하느라고 그냥 지나갈 거 한 번 툭 치고 지나가고, 지나가면서 트래쉬 토크라도 하면 같이 트래쉬 토크하고 멱살잡이도 대놓고 벌인다. 그러다가 다음 스냅에서는 합법적인 블로킹으로 냅다 처박아버린다. 상대가 과열양상이라도 절대 기죽지 않고 맞불을 놓으며 '''상황 종료되면 씨익 보이는 썩소'''는 상대 선수와 관중들을 빡치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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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16]
그 외에도 이런 거친 플레이와 지능적인 플레이에 관련된 자료가 많다. 물론 거기서 유발된 시비도 말이다. 대단한 것은 수비수 포지션의 덩어리들과 시비가 붙어도 기 한번 안 죽고 맞대응 한다는 게 대단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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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건 쿵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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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 다문화사회에 끼친 영향
2004년 슈퍼볼 우승 이후 한국에 오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혼혈아동 복지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꾸준하게 활동해왔고 매년 별다른 홍보없이 내한해 하인스 워드 재단의 업무와 다양한 방면의 복지사업을 전개하는 등 한국과 한국 사회의 혼혈인 처우개선에 성심성의껏 나선다. 어머니 이름을 같이 딴 '영희 워드' 재단으로 한국 및 미국 혼혈 아동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재단으로, 정기적으로 피츠버그에서 혼혈 아동 초청 행사를 열고 아동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원한다.
또한 어머니 김영희씨의 일가에도 인사를 드리는 등 개인의 효심[17] 또한 여전히 지극하다.
10. 연예 활동?
원래부터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대표 선수로 지역내 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피츠버그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호스트로 출연할 정도로 방송에 자주 나왔던 하인스 워드는 본격적으로 연예프로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름 아닌 NBC의 인기 TV시리즈 댄싱 위드 더 스타 12시즌 출연. 하인스 워드는 전문 댄서인 킴 존슨과 하인스킴 페어로 출연해 2011년, 12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3에서 우승한 에밋 스미스에 이어 미식축구 선수로써는 2번째로 우승했다.
그 이전엔 내한했을 때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2008년 5월에는 드라마 온에어에서 에이든 리(리키 김 분)의 친구로 까메오 출연했다. 온에어 제작사 PD와 하인스 워드 측 관계자의 친분으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선수 은퇴 후 NBC에서 방송인으로써 활동 중이며, 2011년 8월에는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동료들과 함께 영화 속 미식축구팀인 고담 로그스(Gotham Rogues)의 선수 역할로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까메오로 출연했다.[18] 헬멧을 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무너진 경기장을 바라보는 뒷모습에서 선수복에 박힌 'WARD'(워드)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백넘버 역시 워드가 현역 시절에 썼던 86번.
2013년 2월에는 드라마 워킹 데드 시즌 3 - part 2 9회에서는 좀비로 까메오 출연했다. 티독(T-Dog)역을 맡은 아이언 E 싱글턴(IronE Singleton)과 친분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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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마우스의 팬이다. 위쪽에는 한글로 하인스 워드라고 문신을 새겼다.
의외로 소싯적에 야구도 꽤 한듯. 그런데 1994년 MLB 드래프트에서 73라운드 전체 1,646번으로 플로리다 말린스에 지명됐다. 그러니까 드래프트 거의 끝물에 지명됐다는 얘기. 미국의 운동 유망주들은 보통 한 가지 종목만 하지 않고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중 두세가지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식축구와 야구 중 고민하는 이야기는 의외로 종종 있는 얘기다. 보통 요구하는 운동 능력이 풋볼과 야구가 가장 비슷한 편이고 야구는 상대적으로 체력적 부담이 적은 스포츠이기 때문에 겸업하기 용이해서 이 두가지를 가장 많이 겸업하는 편. 보통 피지컬이 좋은 경우 풋볼을 많이 택하고 야구는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과 중남미 출신들과의 경쟁 때문에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집 자식들이 많이 택한다. 흑인이 80%인 NFL이나 NBA에 비해 MLB에 백인이 훨씬 많은 이유가 이것. 물론 천조국이기 때문에 보 잭슨처럼 프로에서도 두 가지 다 겸업하는 몬스터들도 있다.
하인스 워드가 주목받던 시절에 EA코리아에서 매든 NFL 06의 XBOX360버전을 정식발매한 적이 있었다. 당시 EA 코리아는 NFL 시리즈의 정식발매를 중단한 상황이었는데 하인스 워드가 방한한 기념으로 정발했다고 한다. 훗날 매든 NFL 08도 정발했는데 이것 역시 하인스 워드와 엮어보려한 흔적이 보인다.
1998년 개정된 국적법 시행 이전 외국인 아버지, 한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경우 부계혈통주의에 따라 해당자를 한국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부모 간 친권다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인스 워드는 이중국적과는 무관하게 출생시부터 미국인(단일국적)이다.
홍보 없이 자주 한국에 오는 편이다. 2010년 5월에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제주도를 여행차 방문했다가 제주홍보대사자리를 받은 적도 있다. 관련기사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캡틴이었던 만큼 지역내에서도 유명인사이자 대표로 대외활동을 많이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지난 2009년 피츠버그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의 때는 피츠버그시 홍보대사로 참가해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하기도 했다.
무한도전에서도 그를 위한 특집을 준비했었지만,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치료를 해야했기에 막바지에 출연을 고사했고 정준하가 '''준하'''인스워드로 분장해 특집을 대체했다.
NFL에서 데뷔하던 초창기에 하인스 워드의 아버지가 거의 거지꼴 다 돼가지고 하인스 워드의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내심 그래도 아들이고 하니 돈이라도 좀 쥐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찾아온 거 같은데 하인스 워드가 바로 내쫓아버렸다. 미국에서는 친권을 포기한 이상 아버지라는 이유로 아들 내외에게 뭔가를 요구할 법적 근거따윈 없고, 하인스 워드도 아버지에게 '나를 키워주신 분은 어머니' 라면서 대번에 나가라고 일갈했다는 스토리이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선정한 美 대통령 직속기구인 '대통령 아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10월 12일에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철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수영 3.9㎞, 사이클 180.2㎞, 마라톤 42.195㎞ 등 총 226.295㎞를 13시간 8분 15초에 끊어 전체 선수 중 1680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대회는 코스가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12. 사건사고
2011년 경 이혼했다고 한다.
2011년 7월 9일에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때 댄싱 위드 더 스타의 파트너였던 킴 존슨과 동승한 상태였는데, 이미 그전에 이혼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체포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동영상을 통해 공개된 것. 속된말로 경찰과 기자들 상대로 협상(플리바겐이라고 한다.)을 하는 듯한 워드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2014년에 스틸러스의 홈구장인 하인즈 필드에서 15살 차이인 린지 골겔러스(Lindsey Georgalas)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13. 그가 남긴 명언들
'''"너는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듣지 마세요. 인종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자기 꿈을 믿으세요.'''
'''"전 세계가 슈퍼볼을 지켜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절반이 한국인인 만큼 한인사회를 대표해 최선을 다하겠다."'''
'''"내 몸에 한국인의 핏줄이 흐른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팔뚝에는 서툰 글씨체로 하인스 워드 라는 한글 문신)[19]
을 새겨놓은 것에 대한 각종 언론의 질문에 답한 말
'''"동료의 패스가 좋았고, 나는 그저 달렸을 뿐이다."'''(2006 수퍼볼 MVP 수상소감)
'''"저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늘 부정적인 사람도 있어요. 왜 슬퍼하죠. 전 뭘 하든 즐기면서 살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나요."'''
'''"풋볼을 포기하고 싶을 때는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쏟았으며 그것이 오늘의 나이다."'''
'''"나의 미식축구 인생은 어머니 인생입니다.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열심히, 긍정적으로 살면 좋은 일들이 생깁니다."'''
14. 연도별 기록
[1] 아버지는 아래 참조[2] 그 곳에 지금은 폐원되고 없는 이대동대문병원에서 태어났다. 이대동대문병원이 폐원되기 전, 방문한 적이 있다.[3] 그나마 미국으로 넘어간 이 케이스는 매우 나은 케이스인 게, 당시 미군부대 인근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미군과 사귀다가 애가 생기자 바로 본국으로 튄 미군들에 의해 버려져 목숨을 걸고 위험한 낙태행위를 하거나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등의 케이스가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낳은 후에도 당시 한국사회의 혼혈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안 좋았기 때문에 직접 키우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고아원에 버려진 케이스도 상당히 많다. 그로 인해 인구 10만 가량인 동두천시에만 보육원이 두 곳이나 있다. 국내에서는 가수 인순이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인순이의 아버지였던 군인은 인순이의 어머니가 임신하자 나몰라라 하고 미국으로 튀었다. 또, 이렇게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미국으로 간신히 돌아가 정착한 케이스로 뉴욕 닉스의 가드 알론조 트리어의 어머니(미국명 마르시에 트리어, 한국명 추영옥)가 그렇다. [4] 당시 한국 여성 중에는 사귀던 미군의 달콤한 말만 믿고 미국까지 따라간 케이스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정식으로 결혼한 케이스는 매우 드물며, 다른 한국인 커뮤니티에서도 차별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결국 미국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는 피를 토하는 고통과 운 덕분에 미국 사회에 정착하고, 친권을 되찾는 데에 성공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채 미국에서 죽거나 지금도 홀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워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많은 한국-미국 혼혈아들은 자신을 키워준 부모 외의 다른 가족들과는 연을 끊고 사는 경우가 많다.[5] 대부분의 고교 졸업생들은 자기 주의 명문팀을 선호한다. 조지아 대학교는 대학 풋볼에서 알아주는 팀 중 하나이다.[6] 당시 하인스 워드가 경쟁하던 러닝백 주전이었던 선배 터렐 데이비스와 로버트 에드워즈는 모두 NFL에서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거뒀지만, 둘 다 심각한 부상으로 커리어를 접은 비운의 선수들이었다. 특히 터렐 데이비스는 하인스 워드의 데뷔해인 1998년에 NFL MVP에도 선정된 적 있는 레전드 러닝백이 될 뻔했던 비운의 슈퍼스타였다.[7] 요즘 사람들에겐 47살 나이에 스트라이크포스에 참전한 괴짜 MMA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조지아대학 재학시절 대학 최우수 선수에게 주는 하이즈먼 트로피를 수상했고 NFL에서도 두 번이나 리그 베스트팀에 선정된 슈퍼스타 러닝백이었다.[8] 피츠버그의 레전드 헤드코치이자 現 NFL네트워크 해설자[9] 42회 슈퍼볼에서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게 종료 16초전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잡아낸 주인공. 그러나 최근 뉴욕에서 불법총기 사고를 저지르며 NFL에서 퇴출되었다가 2012년 스틸러스 주전들의 줄부상 크리덕에 스틸러스와 1년 계약을 맺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10] 피츠버그 지역 내 소식과 스틸러스 관련 소식을 다루는 라디오 DJ였다. 까놓고 말하면 엔터질.[11] 사실 워드는 어릴 때 무릎인대 파열 부상을 당하고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12] 객관적으로 보자면 보더라인(경계선) 명예의 전당 후보이다. 의외로 명예의 전당은 와이드 리시버에게 박한 편. 언젠가는 들어갈 수 있겠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크리스 카터가 6수만에 들어간 것만 봐도...[13] 일반적인 와이드 리시버들은 라우트 러닝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블로킹을 자주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스틸러스의 스킴이 그러하기도 했고 워드 자체가 거친 플레이를 즐기기도 했다.[14] 당해 벵갈스가 1라운드 전체 9위로 뽑은 라인배커인데, 이때 태클을 잘못 맞고 시즌 아웃. 이후 몇몇 팀을 옮겨다니다가 2015년 30살의 나이에 현역 은퇴했다.[15] 당시 레이븐스 수비의 핵심이던 터렐 석스의 말이다. 하인스 워드와 당시 루키 러닝백이던 라샤드 멘덴홀 선수에게 걸었다고 밝혔다.[16] 이런 이유로 선수들에게 적대되고 있지만 그는 항상 필드 안팎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스마일 가이로도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터프를 넘어 성질 더러운 녀석들 천지인 풋볼 세계에서 그는 필드 밖에선 매너와 리더십을 갖추고 긍정적이고 즐겁게 운동하는 선수로 높게 평가받는다.[17] 워드는 어린 시절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어머니를 보며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한 번은 고등학교 졸업 파티 때 파티복 구입으로 100달러가 조금 넘는 돈이 필요했고, 어머니가 그 비용을 주기로 했지만 자신은 극구 말렸다고.[18] 풋볼 경기장은 피츠버그의 하인츠 필드로, 상대 팀에서 킥오프를 하는 레이븐스탈(Ravenstahl)은 실제로 피츠버그 시장이다.[19] 기타 항목에 올라와 있는 문신 사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