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일본을 공격한 사례

 

1. 개요
2. 목록
2.1. 실현
2.1.1. 남북국시대
2.1.1.1. 신라구 해적의 일본 약탈
2.1.2. 고려시대
2.1.3. 조선시대
2.1.4.1. 정부 차원의 테러시도
2.2. 미실현
2.2.1. 신라시대
2.2.1.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
2.2.2. 조선시대
2.2.2.1.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내 일본 정벌 움직임
2.2.2.1.1. 임진왜란 이전
2.2.2.1.2. 임진왜란 이후
2.3. 불확실
2.3.1. 삼국시대
2.3.1.1. 고구려
2.3.1.1.1. 고구려왜국 변경 약탈
2.3.1.2. 백제
2.3.1.2.1. 백제가 '소가'와 '모노노베' 양측 가문의 전쟁에 개입했다?
2.3.1.2.2. 백제의 큐슈진출 시도
2.3.1.3. 신라
2.3.1.4. 우산국
2.3.1.4.1. 우해왕 설화
2.3.2. 남북국시대
2.3.2.1. 백제유민의 미야자키 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 현 침공 기록
2.3.2.2. 통일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2.3.3. 고려시대
2.3.3.1. 고려의 큐슈 침략
3. 같이보기


1. 개요


보통 한국사에서 한국일본한테 공격당하기만 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의외로(?) 한국이 일본을 공격한 적도 있다. 비록 한국 고대사의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교차검증이 힘들어 진위가 의심되는 사건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을 침공하기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했으며 한반도 국가는 가진 국력에 비해 어느때나 이중전선을 강요 받았으므로 타국에 대규모 원정을 가하는것이 쉽지가 않았으며 이는 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의 요동정벌 시도에서도 고려는 왜구와의 이중전선을 강요받았고 전력을 온전히 집중할수 없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 되기도 했고 실제로 이성계군이 원정을 간 사이 대비를 했음에도 왜구들이 개경 바로 밑 고을들을 쓸어버리고 있었고 이는 회군에 참여한 정지 장군이 토벌하고 나서야 끝났다.

2. 목록



2.1. 실현



2.1.1. 남북국시대



2.1.1.1. 신라구 해적의 일본 약탈

9세기 초부터 신라 출신 해적들의 일본에 대한 여러 차례의 대규모 침략들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구 문서를 참조. 어쩌면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에 나오는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이 모두 다 사실이라고 가정 할 시에 신라가 일본을 자주 침공하였기 때문에 이 신라구들 역시 일본의 지리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일본 여러 지역들을 자유롭게 침략한 것일지도 모른다.

2.1.2. 고려시대



2.1.2.1.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2.1.2.2. 대마도 정벌



2.1.3. 조선시대



2.1.3.1. 대마도 정벌



2.1.4. 대한민국



2.1.4.1. 정부 차원의 테러시도

대한민국은 일본을 공격한 적은 없지만, 일본 내에서의 테러 미수사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이고, 하나는 박정희 정권 당시의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다만 이 두 사건은 양국간의 정식 교전과 같은 전쟁 상황은 아니고, 테러시도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경우는 일본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한 테러는 아니나, 일본 내에서 벌어진 활동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스스로에 대한 주권 침해로 인식하였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김대중 납치 사건 항목 참조.

2.2. 미실현



2.2.1. 신라시대



2.2.1.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

은 왜인이 쓰시마 섬(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미사품'''은,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대마도 침공 계획은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후 풍도에서 왜군을 격파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2.2.2. 조선시대



2.2.2.1.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내 일본 정벌 움직임


2.2.2.1.1. 임진왜란 이전

1591년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1년전에 겐소(玄蘇)는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가도정명[1]의 의사를 조선에 밝혔고, 당시 재야에 있던 뒷날 의병장이 되는 조헌은 3일간 지부상소[2]를 올리며, 비왜책을 선조에게 바쳤는데, 그 내용에는 사신으로 온 겐소와 대마도주 평의지를 베고, 일본이 공격해오기 전에 허점을 노려 수도(교토)를 공격하고, 대마도에 항복을 권고하라는 다소 공격적인 비책이 담겨 있었다. 이는 조헌이 십만양성론을 주창한 서인의 대표적 대일주전론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였던 사실과 무관치 않다. 당시에 이러한 계획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대의 문헌인 심노숭의 '자저실기'에서는 도리어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2.2.2.1.2. 임진왜란 이후

1598년 12월 노량해전으로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도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하였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도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변사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이 손실이 커서 병력이 부족하고, 황신의 견해와 달리 대마도 일본 본토에서의 구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우의정 이덕형은 명군과 상의했는데, 명군 역시 점령 후에 지켜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황신이 봤을 때와 달리 전황이 달라져서 대마도에 방어 병력을 두었을거라며 역시 난색을 표하고, 점령 후 수성이 아닌 단순 응징차원의 공격이라면, 선 정탐 후 움직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록의 기록 상, 조정차원에서 논의한 기사가 없기에 그 사이에 진행되던 명군의 철군이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앙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항왜 소운대를 일본에 첩자로 보낸다거나, 정벌 목적의 정탐 움직임은 있었던 정도였다. 다만 지방 차원에서는 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1599년 4월에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김경립 등 10인을 시켜 일본 내에서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전과를 기록하며, 정탐한 결과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대마도에서 조명연합군의 응징 공격이 두려워 겁을 먹고 성을 쌓고 밤낮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는 보고 내용으로 보면,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한 방어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김응서는 이 치계(보고서)에서 명군에 통보해서 같이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마무리지었으나, 실록에서는 이 치계에 대해서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김응서 부대의 작은 전과는 민간에도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소설 임진록에서는 일본을 응징한다는 가상 이야기에서 김응서가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2.3. 불확실



2.3.1. 삼국시대



2.3.1.1. 고구려


2.3.1.1.1. 고구려왜국 변경 약탈

야마토의 왜5왕 정권이 중국 남조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구려가 무도하여 '변예'를 약탈했다고 나와있다. 여기서 변예는 변방 정도로 해석되는데, 문제는 고구려가 변예를 약탈했다고 하는 것을 두고 1) 야마토가 백제를 자국의 변경으로 인식해서[4]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것을 곡해하여 자국의 변경을 약탈했다고 한 것인지, 2) 말 그대로 일본 열도 변경을 약탈한 것인지 해석이 좀 갈린다.

2.3.1.2. 백제


2.3.1.2.1. 백제가 '소가'와 '모노노베' 양측 가문의 전쟁에 개입했다?

백제사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이도학 교수의 주장. 다만 기록이 등장한 시기가 좀 늦어서...

2.3.1.2.2. 백제의 큐슈진출 시도

군사적인 공격은 못했지만 어쨌든 백제큐슈에 거점을 확보하려 한 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왜국과의 충돌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점령은 택도 없고 백제계 관료인 니치라팀킬로 실패로 끝났다. 다만 삼국사기 등 한국사서에 관련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3.1.3. 신라


2.3.1.3.1. 신라의 일본정벌 관련기록들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조.

2.3.1.4. 우산국


2.3.1.4.1. 우해왕 설화

우산국의 왕 우해왕에 대한 설화에 따르면 우해왕이 대마도를 공격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한 우해왕의 왕비는 당시 대마도를 다스리던 사람의 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설화 단계에 머물러 있다.

2.3.2. 남북국시대



2.3.2.1. 백제유민의 미야자키 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 현 침공 기록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서 전해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부여풍(扶餘豊)[5]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왕'''이라고 자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하였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718년 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과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3.2.2. 통일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에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해동제국기

또한 일본 육국사 중 하나인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870년 2월 12일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개인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당시 신라 경문왕 정권이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대마도 정벌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 발발까지 20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혔고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기지였을 수도 있다.

2.3.3. 고려시대



2.3.3.1. 고려의 큐슈 침략

일본의 역사서 백련초(百練抄)의 기록에는 고려큐슈를 침입해서 공격한 기록들이 나온다.
997년 고려에서 3통의 서신을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고 쓰시마큐슈 지방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 일로 고려가 일본 큐슈지역을 침입했다고 기록
다른 기록에서는 '고려군 병선 500척'이 침공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큐슈의 다자이후(太宰府: 태재부)가 일본 조정에 급보로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이 일로 고려가 큐슈지역을 침략(무력시위)했으며, 이에 일본이 고려의 요구에 응하여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에 상품을 싣고 김해에 와서 공물을 바치려고 하자, 고려에서는 위신을 고려해 공물을 세자에게는 허용하나 에게는 불허하고, 비밀 누출을 우려해 해로로만 개경에 오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련초(997년)의 10월 1일조에 고려인이 큐슈에 침입한 기록

이 때 고려인들은 큐슈에 와서 민가를 태우고 재산을 수탈하고 남녀 300명을 납치해갔다.

-(백련초 토쿠3년(997년) 10월 1일조)-

백련초(1001년)의 또 다른 침략 기록

규슈 지역에서 고려국인이 그 지역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피해규모가 치쿠젠, 치쿠고, 사츠마, 이키, 쓰시마에 이르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납치 당하고 죽었다.

-(백련초 토쿠7년(1001년)의 기록)-

이처럼 기록에 따르면 고려는 17년간 일본에 통상을 요구하고 무력으로 침입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는 고려 목종 재위기에서 현종 재위기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 거란의 3차 침입귀주대첩이 있었기에 국방적 측면에서 고려군의 명성은 전대륙적인 수준이었고, 고려군의 실전 경험적 측면에서도 최고급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긴 하다. 그러나 고려사고려사절요등의 한국측 사서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3. 같이보기



[1]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2]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리는 행위로,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쳐달라는 간곡한 상소[3] 관련 조선왕조 기사[4] 임나일본부설 항목에도 나오지만, 일본은 중국의 남조에 대고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 이라는 거창한 작위를 요구했다. 한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왕이라는 의미인데, 실제 지배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영토를 두고 자신의 땅이라고 허세를 부린 것. 참고로 남조에서는 저 관직을 수여할 때 백제 부분은 제외하고 줬다. 다른 지역은 자신들도 잘 모르는 땅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백제만큼은 중국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교류한지라 일본보다도 더 가깝게 지냈기 때문.[5]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