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마누엘 판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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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출신의 전설적인 F1드라이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46%라는 경이로운 그랑프리 승률을 자랑하고 있고 유일하게 시즌 도중 팀을 바꾸면서 챔피언이 된 드라이버이며 역대 최고령 챔피언이기도 하다. 또한 미하엘 슈마허가 2003년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F1역사상 최다 챔피언(5회)과 최다연속 챔피언(4연속) 기록[3] 을 가지고 있던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판지오와 계약하는 것은 가장 쉽게 그랑프리를 우승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식으로는 판지오가 아니라 판히오가 맞지만, 이탈리아계 성씨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어식으로 판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선수 경력
2.1. 데뷔 전
1911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에서 태어난 판지오는 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레이스에 꾸준히 참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의 각종 레이스가 중단되고 자국인 아르헨티나 역시 레이스를 금지시켰지만 판지오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고 1945년 종전 후 유럽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레이스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2.2. 초창기 커리어 & 첫 챔피언
이후 알파 로메오[4] 소속으로 F1에 데뷔하게된 그는 1950년 포뮬러 원으로 재편된 그랑프리 시리즈 2라운드인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폴투윈[5] 을 차지하면서 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해 다 잡았던 초대 F1 챔피언을 몬자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기어박스 폭발로 리타이어 하며 영광의 초대 챔피언 자리를 주세페 파리나에게 내주고 만다.
다음해인 1951년 판지오는 프랑스, 영국, 독일 그랑프리에서 각각 1위, 2위, 2위를 기록하면서 산뜻한 출발을 하였으나, 이번에도 몬자에서 리타이어 하며 라이벌 알베르토 아스카리와 챔피언십 포인트 동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인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지난해 놓쳤던 챔피언 자리를 가져가게 되었고 이렇게 그의 F1커리어는 술술 잘 풀려나가는 듯 하였으나...
2.3. 슬럼프의 시작
1952년 알파 로메오는 F1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판지오는 마세라티로 이적했다. 당시 마세라티는 초대 챔피언인 주세페 파리나가 있었기에 파리나, 판지오 콤비는 시즌 전 부터 엄청난 기대를 모았고 당시 라이벌인 아스카리가 속해 있던 페라리와 함께 양강 구도를 형성할 거라는 예측이 난무했었다.
그러나 항상 그의 발목을 잡던 몬차 서킷에서 대형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결국 판지오는 1952년 시즌을 포기했고 F1은 페라리와 아스카리의 천하가 되었다. 팀메이트이자 초대 챔피언인 파리나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주며 마세라티에서 방출됬다.
1953년 시즌 돌아온 판지오는 마세라티의 차량으로 분전하지만 시즌 초반 3전은 내리 페라리의 아스카리가 우승했고 판지오 자신은 모두 리타이어 하면서 챔피언십 포인트에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후의 그랑프리에서 연거푸 2위를 차지하면서 페이스를 끌어올렸고 마지막 그랑프리이자 그에게 언제나 상처만 주었던 몬차에서 우승하며 악연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 3전을 내리 리타이어한 것이 컸는지 챔피언은 디펜딩 챔프였던 아스카리에게 돌아갔고 마세라티에게 이물감을 느낀 판지오는 당시 새롭게 참여하는 메르세데스 F1으로 이적하게 된다.
2.4. Pax Fangiona
1954년 메르세데스 팀으로 이적을 준비하던 판지오에게 다소 황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벤츠가 차량제작이 안돼서 지곤조기를 시전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마세라티에서 2번의 그랑프리를 뛰게 된 판지오는[6] 자국 아르헨티나와 벨기에에서 그랑프리를 우승하고 드디어 완성된 메르세데스 W196을 타고 프랑스 그랑프리에 나서게 된다. 결과는 대성공. 세 개의 그랑프리를 남겨두고 일찌감치 챔피언을 확정하면서 더블 챔피언에 자리에 올랐고 이는 판지오의 시대 'Pax Fangiona'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다음해에도 메르세데스 차량으로 시즌 6번의 그랑프리에서 4번을 우승하는 학살극을 벌이면서 최초의 트리플 챔피언의 자리에도 오른다. 당시 메르세데스팀에는 영국이 낳은 최고의 드라이버 중 한명인 스털링 모스와 함께 팀을 이끌었으나 모스 또한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한창 물이 오른 판지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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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지오와 모스의 메르세데스 차량.
그러나 1955년 메르세데스가 르망24시에서의 사고로[7] 모든 모터 스포츠에서 철수를 결정.[8] 판지오는 결국 페라리로 이적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이적때문인지 모나코에서 리타이어 하는 등 시즌 초 부진에 빠지지만 중반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레이스에서 판지오의 차량에 이상이 생기며 리타이어할 위기에 빠졌으나 팀메이트 피터 콜린스가 자신의 차량을 판지오와 공유해주며[9][10] 경쟁에서 승리 사상 최초의 4회 챔피언에 오르면 그의 시대를 입증한다.
다음해 마세라티로 돌아온 판지오는 또 한번 학살극을 시현하면서[11] 라이벌이었던 스털링 모스를 또 한번 제치고 통산 5회 챔피언이라는 대 기록을 남기게된다. 당시 판지오의 나이가 46세! 2012년 현재 F1 최고령 선수인 미하엘 슈마허의 나이가 44인걸 생각하면 엄청난 기록이라 할 수 있다.[12]
2.5. 은퇴 그 후
1957년 5회 챔피언을 달성한 후 다음해 은퇴한 판지오는 벤츠의 아르헨티나 법인의 사장을 지냈고, 사장직 은퇴후에는 "종신 명예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13] 또한 은퇴를 선언한 1958년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군에 납치(!)되는 일도 겪기도 했다. 그후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F1그랑프리에 종종 나타나 후배 드라이버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등의 역할을 맡기도 하다가[14] 199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은 국가적인 예우를 갖춰 진행되었으며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치뤄졌다.
판지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커리어 초창기부터 여러 여자들을 사귀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몇몇 여자들을 임신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되어, 오스카르 에스피노사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판지오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판지오의 시체에서 추출한 DNA 감별을 통해 에스피노사는 판지오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이후 루벤 바스케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기도 판지오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데 바스케스 역시 판지오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여담으로 카본파이버 슈퍼카인 파가니 존다로 유명한 파가니의 아르헨티나 출신 창업자 호라치오 파가니를 벤츠와 연결시켜 준 장본인이 판지오이며, 이 때의 인연으로 파가니에서는 벤츠에서 고성능 엔진을 공급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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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4일에는 구글 로고가 그의 탄생 105주년을 기념하는 디자인으로 장식되었다.
3. 각종 기록들
초창기에 기록했던 그랑프리 최다승 기록이나 최다 챔피언은 미하엘 슈마허가 많이 깨트렸으나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있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 최다 승률(46%, 52회 그랑프리에서 24회 우승)
- 최다 폴 포지션 퍼센트(55.8% 52회 그랑프리에서 29회 폴 포지션 기록)[15]
- 최다 프론트 로우[16] 퍼센트(92.31% 52회 그랑프리중 48회(!))
- 역대 최고령 챔피언(만 46세 41일)[17]
- 가장 많은 팀에서 우승한 챔피언(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메르세데스, 페라리)
3.1. 판지오의 서킷 별 우승 목록
[1] 사진 윗줄 왼쪽부터 1976년 챔피언 제임스 헌트, 1969년, 1971년, 1973년 챔피언 재키 스튜어트, 1967년 챔피언 데니 흄, 아랫줄부터 1981년, 1983년, 1987년 챔피언 넬슨 피케, 후안 마누엘 판지오, 1988년, 1990년, 1991년 챔피언 아일톤 세나, 1959년, 1960년, 1969년 챔피언 잭 브라밤 이 일곱명이 챔피언을 19번을 했다.[2] 레이싱으로 세운 업적으로 왕실 기사작위를 받은 전설적인 영국인 드라이버. 비록 챔피언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으나 알베르토 아스카리와 함께 판지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무관의 제왕이라 불린다.[3] 이 기록은 현재 미하엘 슈마허, 제바스티안 페텔, 루이스 해밀턴도 보유하고 있다.[4] 지금이야 알파 로메오를 떠올리면 고성능 세단 및 해치백 브랜드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지만 이 회사의 시작은 2도어 스포츠카였다. 초창기 모터스포츠와 인연이 매우 깊은 브랜드이며 후술하겠지만 F1의 역대 초대 챔피언이 바로 알파로메오 차량을 탄 파리나였다. 페라리의 설립자 엔초 페라리가 바로 여기 소속의 드라이버였다.[5] 폴 포지션을 획득하고 그 경기에서 우승하는 것.[6] 1954년시즌에는 미국에서 열리는 인디500 레이스가 시즌 2라운드로 진행되었으나 판지오를 포함한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이 개최지까지 가기가 힘들다며 줄줄이 불참 선언을 했다. 애초에 예나 지금이나 인디 500 자체가 F1보다도 오래된 미국만의 레이스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인디 500 출전자들은 대부분 미대륙 출신인들이었고 유럽에서만 주로 활동하는 F1 드라이버들은 굳이 인디애나폴리스까지 안 가는 게 보편적인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그렇게 1950년부터 F1 캘린더에 포함되었던 인디 500은 1960년을 끝으로 F1 캘린더에서 완전히 빠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이 발달하며 1960년대 이후에 오히려 인디 500에 참가하는 F1 드라이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게 되기도 한다. 아예 역대 최초의 비(非)미국인으로서의 우승까지 해 버린 짐 클락이 대표적인 예시.[7] 차량이 관중석으로 날아가 관중들을 덮쳐 관중 80여명과 드라이버가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있었다. 사고영상 - 약혐주의[8]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메르세데스인지라 여러 곳에서 대회참가를 유혹했지만 사고의 충격이 컸던 메르세데스는 끝끝내 참가를 거부하였다. 메르세데스가 모터스포츠에 정식으로 다시 뛰어든 것은 1988년 르망24시에서였고, F1에서는 맥라렌 엔진공급사로서 1995년에 복귀하였다. 한동안 엔진공급사로만 활동하던 메르세데스가 직접 레이싱 팀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였다. 사고로 인한 충격과 그에 대한 책임으로 반 세기를 날린 셈.[9] 당시는 차량제작이 지금같지 않아서 드라이버들끼리 차량을 공유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10] 당시 콜린스는 판지오가 리타이어할 경우 자신이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이런 신사도를 발휘했다.[11] 아르헨티나, 모나코, 프랑스, 독일에서 우승 두번의 이탈리아 그랑프리(몬자, 페스카라)에서 준우승[12] 다만 50년대에는 40대 드라이버가 그리 드문 편은 아니었다. 초대 챔피언이었던 파리나도 우승 당시 44세였고 심지어 1951시즌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루이지 파지오리의 나이는 53세였다.[13] 실제로 판지오 본인도 드라이버 커리어에서 최고의 차량을 벤츠 차량이라고 말해왔으니 이런 직함도 줄만하다.[14] 아일톤 세나가 가장 존경했던 드라이버가 바로 판지오였다.[15] 80여회의 폴 포지션을 따낸 그 숏런 최강자인 루이스 해밀턴도 아직 깨지 못한 기록이다[16] 그리드의 1, 2번 그리드[17] 차량의 속도가 매우 빨라져 육체적 부담이 초창기의 F1과는 비교도 안 되게 늘어난 현재를 보면 앞으로도 절대 깨지질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드라이버 연령대도 옛날에는 40~50대, 심지어는 58세의 나이로 대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고령의 드라이버가 많았지만 지금은 10대의 나이로 데뷔하기도 하고, 30대 후반만 되면 은퇴가 가깝다고 할 정도로 매우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