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1998년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1군 작전-외야코치직을 신설하는 등 1998년도 1,2군 코치진 구성 및 직무개편을 11월 6일 단행했다.
작전-외야코치에 최정우 前 루키군 책임코치를, 또 2군 투수 및 수비코치에 정삼흠, 민경삼 등 前 1군 코치들을 임명했으며 2군 수석코치를 맡았던 이광은은 루키군 책임코치로 보직 변경됐다.
LG는 이번 개편에서 1군 작전-외야코치직을 신설하는 대신 1군 수비코치와 2군 책임코치직을 각각 없애는 등 기존의 1, 2군 통틀어 16명으로 운영되던 코치진 인원을 15명으로 줄였다.
1.2. 선수 이동
투수 이상훈이 임대형식으로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였다.
12월 26일 내야수 송구홍과 투수 이병석을 내주고 투수 김동호와 박철웅을 받아들이는 해태와의 2대2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롯데에서 방출된 김종헌을 영입했다.
1.3. 신인 선수
OB와의 주사위 대결에서 밀려 1차 지명으로 고려대 내야수 김동주 대신 선택한 연세대 포수 조인성이 포수 최고 계약금인 4억2천만원[2] 의 계약을 체결하며 입단했다. 고졸우선으로 휘문고 외야수 박용택, 신일고 외야수 안치용, 배명고 내야수 정현택을 지명했다. 이 중 정현택만 입단했고, 박용택과 안치용은 LG 외야에 자리가 없기 때문에 각각 고려대와 연세대 진학을 선택했다.
2차 지명 1순위로 경희대 투수 김경태를 지명했다. 2순위부터 12순위까지 동아대 외야수 박선규와 대전고 투수 서승화[3] , 인천고 내야수 김용우[4] , 경남고 투수 김성준[5] , 배재고 투수 변인재[6] , 중앙고 외야수 신상호, 충암고 내야수 김세중, 광주일고 투수 김광우, 인천고 포수 이상우, 제주전문대 외야수 이기중[7] , 청주기계공고 내야수 추승우[8] 를 지명했다.
1.4. 외국인 선수
1997년 11월 13일 미국에서 열린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투수 마이클 앤더슨과 외야수 주니어 펠릭스를 지명했다. 그러나 펠릭스와는 연봉 협상 때문에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1.5. 기타
차동철, 김건우, 신동수, 김도완(이상 투수), 송인호, 오규택(이상 내야수), 노찬엽, 이정준, 윤인수(이상 외야수) 등 9명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다.
1998년 1월 5일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에서 LG로 옮긴 투수 박철웅이 교통사고로 목뼈를 다쳤다.[9][10]
서용빈은 개막 직전 교통사고로 턱뼈 부상을 당했다.[11]
2. 정규시즌
2.1. 시즌 전 전망
2.2. 4월
2.3. 5월
2.4. 6월
2.5. 7월
2.6. 8월
2.7. 9~10월
2.8. 상대 전적
- 분류 기준
- 남색은 압도(승률 ≥ .800)를 뜻한다.
- 청색은 절대우세(.650 ≤ 승률<.800)를 뜻한다.
- 하늘색은 우세(.550 ≤ 승률<.650)를 뜻한다.
- 녹색은 백중세(.450 ≤ 승률<.550)를 뜻한다.
- 오렌지색은 열세(.350≤승률<.450)를 뜻한다.
- 적색은 절대열세(.200≤ 승률<.350)를 뜻한다.
- 갈색은 압살(승률<.200)를 뜻한다.
2.9. 수상 및 기록
- 개인 기록
- 팀 기록
2.10. 선수별 개인기록
3. 총평
NPB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난 마무리 이상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외국선수 마이클 앤더슨을 영입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서용빈이 개막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시즌 전체를 날리며 전력은 작년보다 낮게 평가되었고 그러한 평가대로 힘든 페넌트레이스를 거쳤다. 팀순위는 3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게임 내용에 있어서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1998 프로야구를 독주한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11승7패로 유일하게 상대전적에서 앞섰지만 다른 팀들과의 상대전적은 좋지 않았다. 절반에 해당하는 삼성, OB, 해태, 한화에 상대전적 열세를 기록해 시즌 내내 고전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반면 주니어 펠릭스와 서용빈이 합류한 포스트시즌에서는 선전을 하여 4위 OB, 2위 삼성을 차례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냈다. 비록 현대에게 2승 4패로 분패하고 말았지만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의 의의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전력보강이 없다면 다음해에도 이처럼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을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LG의 한계는 분명했다.
시즌 전 전문가들의 예상은 잘해야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다. 직전 시즌의 준우승 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상이 나온 것은 신장염으로 1년 만에 복귀한 김재현과 신인 조인성 이외에는 눈에 띄는 전력의 보강이 없었고 마무리 이상훈의 일본 진출로 투수력이 더욱 약해졌다는 것, 게다가 2년차인 임선동도 스프링캠프에서 어깨에 이상 징후를 보였다는 것 때문이다. 주전 1루수로서 내야 수비의 핵심이었던 서용빈마저 교통사고로 인한 턱부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이러한 예상은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정도가 더욱 심했다. 이상훈의 마무리 공백을 나름대로 잘 메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마이클 앤더슨은 구위가 약하고 제구력 불안으로 인해 21세이브 기록에도 불구하고 7패라는 많은 패전 수에서 볼 수 있듯 벤치의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다.[14] 또한 기대했던 임선동이 극심한 부진으로 일찌감치 선발진에서 제외 되었다.
잠실에서 현대와 치른 개막 2연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LG는 곧바로 청주에서 한화에 3연패를 당했다. 9-10, 3-4의 1점차로 패하며 시즌 전 지적된 마운드 불안이 현실로 나타났다. 믿을 만한 선발투수가 김용수, 최향남, 손혁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LG의 아킬레스건이었다. 5월 5일 잠실 OB전에서 조인성의 극적인 동점 쓰리런으로 4-3으로 승리하며 잠시 2위 자리까지 올랐던 LG는 5월 6일부터 14일까지의 6연패로 공동 6위까지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천보성 감독의 경질설이 나돌 정도로 LG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는듯 했다. 그러나 부상에서 회복된 김재현이 이후 3경기에서 결승타를 쳐내는 눈부신 활약으로 위기를 빠져 나왔다. 승률 5할에서 왔다갔다하는 적절한 승부로 3위의 성적을 지켜나갔고 7월까지 이 페이스는 계속되었다. 5할 승부 작전은 어쩔 수 없었던 LG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약한 마운드는 차명석, 송유석, 김기범 등 중간 계투진의 역투로 버텼고 나머지는 강한 팀타격으로 메웠다. LG의 트레이드마크인 신바람 야구, 무서운 집중력으로 연타를 쳐 내며 버텼던 것. 김재현, 김동수, 심재학, 유지현, 이병규가 버티고 있던 타선이 적절할 때 터지며 부족한 마운드의 공백을 잘 커버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불안하나마 3위와 5할 승률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LG는 7월말 또 다시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7월 20일부터 25일까지의 5연패가 그것. 쌍방울과 한화에 순위가 5위로 밀리며 포스트시즌 진출이 불투명해 보였다. 서서히 포스트시즌 진출팀이 가려지고 있던 시점에서 내려앉은 5위의 성적으로 팀전체에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LG는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해냈다. 8월 7일에 다시 3위 자리를 찾았고, 이후 뒤늦게 메이저리그 6년 경력의 강타자 주니어 펠릭스를 영입하여 전력보강을 꾀하게 된다. 계약금 없이 월봉 1만5000달러에 단기계약한 펠릭스는 8월 17일 입국하여 19일 인천 현대전에 첫 출전하며 후반기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LG는 8월 중순 이후 단 한 차례도 순위변동 없이 3위의 성적을 유지하며 페넌트레이스를 63승1무62패로 5할에서 1승 앞선채 마감했다.
페넌트레이스의 부진은 플레이오프에 들어와서 달라졌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린 것. 1990년대 포스트시즌 단골로 경험이 풍부했던 LG 선수들은 신바람 야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먼저 같은 덕아웃을 쓰는 4위 OB와의 준플레이오프. 3전 2선승제로 치뤄진 4위 OB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승을 거두며 LG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삼성에게 정규시즌 7승 11패의 열세를 보여 어려운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LG처럼 마운드에 큰 약점이 있던 삼성은 기세가 오른 LG에게 해볼만한 상대였다. 대구에서 열린 1, 2차전을 모두 역전승한 LG는 잠실에서 열린 3차전만 패한 뒤 4차전 2-4로 뒤지고 있던 7회말 주니어 펠릭스의 역전 3점 홈런으로 분위기를 바꾼 뒤 7-5로 게임을 이겨 3승1패로 삼성을 꺾고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신바람의 야구는 여기까지였다. 페넌트레이스 최다승 타이기록을 세우며 최단기간 1위로 선착, 일찌감치 한국시리즈를 준비해 온 현대를 LG가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리즈 전부터 조인성과 신국환이 부상으로 이탈한[15] LG는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신국환의 공백을 잘 메워줬던 손지환마저 부상으로 잃었다. 박종호를 트레이드로 내준 것이 뼈아프게 작용했다. 해태와의 1997년 한국시리즈와 너무도 비슷했다. 현대의 강력한 원투펀치 정민태와 정명원에 막혀 인천에서 열린 1,2차전을 모두 내준 LG는 손혁의 호투로 1승을 거두지만 이후 4차전 정민태에게 패배, 5차전 가까스로 6-5 1점차 승리를 기록하며 2승3패로 벼랑 끝에 몰렸다. 결국 인천에서 열린 6차전마저 2-5의 스코어로 내주게 됨으로써, 2승 4패로 2년 연속 준우승의 쓴맛을 보아야했다.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 이룩한 준우승은 우승 못지 않은 값진 결과였다.
[1] A B 페넌트레이스에서는 3위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2위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한국시리즈 진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으나 준우승으로 최종 순위는 2위.[2] 기존 1997년 진갑용의 3억8천만원[3] 동국대 진학[4] 연세대 진학[5] 상무 입대로 2000년 계약[6] 미계약[7] 현 문제있는 그 심판 맞다. 상무 입대 후 2000년 입단[8] 성균관대 진학[9]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광주에서 서울로 가던 중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마주오던 승합차와 정면충돌해 사고를 당했다. 함께 가기로했던 김동호는 혼자 출발하여 사고를 면했다.[10] IMF 금융위기로 재정난에 빠져있던 해태 구단은 이에 대해 보상해주고 외국인타자 숀 헤어와 계약하기 위해 현금을 받고 안상준을 LG로 보냈다.[11] 포스트시즌에 돌아오지만 신체검사 재검을 신청하여 턱뼈골절로 5급 판정을 받아 병역면제를 받은 사실로 인해 병역비리로 구속되면서 1999 시즌을 날리고 말았다. 서용빈의 커리어가 꺾이게 된 사건이었다.[12] 팀 최초[13] 팀 2번째[14] 후반기 승부처에서 김용수가 마무리로 투입될 때가 많았다.[15] 신국환이 이탈한 진짜 이유는 병역 관련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