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야구)

 



김동수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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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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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0
1994
2003
2004

프리미어 12 우승 코치
2015

[image] 1984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image] 1985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s-2 MVP

1984,1985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박준태
(광주제일고등학교)

김동수
(서울고등학교)


권순구
(군산상업고등학교)




1990 KBO 리그 신인왕

보유 기록
7개
통산 최다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김동수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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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12번}}}
김진우
(1989)

김동수
(1990~1991)


나진균
(1992)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2번}}}
백인천
(1990~1991)

김동수
(1992~1999)


장재중
(2001~2003)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번}}}
진갑용
(1999)

김동수
(2000~2001)


임재철
(2002~2003.4.24.)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2번}}}
장재중
(2001)

김동수
(2002)


한승진
(2003~2004)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번}}}
김필중
(1998~2002)

김동수
(2003~2007)


팀 해체
{{{#fff [[키움 히어로즈|우리 /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2번}}}
팀 창단

김동수
(2008~2010)


조재호
(2011)
{{{#fff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0번}}}
강병철
(2008)

김동수
(2010~2014)


손혁
(2015~2016)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80번}}}
김무관
(2012~2014)

김동수
(2015~2017)


세리자와
(2019~2020)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92번}}}
김민호
(2013~2014)

김동수
(2019~2020)


장재중
(2021~)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80번}}}
세리자와
(2019~2020)

김동수
(2021~)


현역



<colbgcolor=#c30452><colcolor=#fff> LG 트윈스 No. 80
김동수
金東洙 / Kim Dong-Soo

생년월일
1968년[1] 10월 27일 (55세)
출신지
[image] 서울특별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0cm, 85kg
학력
화곡초 - 강남중 - [image] 서울고 - [image] 한양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지명 (LG)
소속팀
[image] LG 트윈스 (1990~1999)
[image] 삼성 라이온즈 (2000~2001)
[image] SK 와이번스 (2002)
[image] 현대 유니콘스 (2003~2007)
[image] [image] 우리-서울 히어로즈 (2008~2009)
지도자
[image] 넥센 히어로즈 1군 배터리코치 (2010~2014)
[image] [image] LG 트윈스 2군 감독 (2015~2017)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배터리코치 (2017)
[image] LG 트윈스 QC코치 (2019)
[image]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2020)
[image]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21~)
프런트
[image] LG 트윈스 스카우트 총괄 (2018)
응원가
LG 시절 : - We Will Rock You[2]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4회 (1990, 1994, 2003, 2004)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7회 (1990, 1993~1995, 1997, 1999, 2003)
신인왕 (1990)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3. FA
3. 지도자 경력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현대 유니콘스, 히어로즈의 야구 선수.
KBO 리그 역사상 이만수, 박경완과 더불어 3대 포수로 불릴 정도로 꾸준했고, 좋은 성적을 기록한 포수. 1980년대는 이만수, 1990년대는 김동수, 2000년대는 박경완의 시대라 불렸다.[3] 등번호는 백인천이 감독으로 있었던 1990~1991년까지는 12번, 1992년 이후로는 어느 팀을 가더라도 계속 2번.
최고의 투수 리드로 정평이 나 있었고 타격도 수준급이었으며, 넓고 깊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 덕에 홈런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팀내 홈런왕에 오른게 4차례일 정도로 장타력이 출중했다. KBO 포수 200홈런[4] 기록 보유자 5인 중 한 명.
소속 팀의 우승과 인연이 깊다. 서울고 - 한양대 시절에도 각종 아마 대회에서 밥먹듯이 우승을 했고 프로에 데뷔한 첫해였던 1990년부터 신인왕과 함께 소속팀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이후 1994년에 다시 LG의 우승, 현대에 이적하고 다시 2003, 2004년 2차례의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주도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한양대 재학시절(1986~1989)에는 우완 정민태(88학번)와 좌완 구대성(89학번)을 리드했고, 서울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당시에는 대학생 선수들이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의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시기라서 국가대표 주전 포수로 타대학의 국대급 투수를 다양하게 리드한 경험이 많다.

2.2. LG 트윈스 시절


[imag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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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차 지명을 받아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1990년 데뷔 시즌에 심재원, 서효인 등 쟁쟁했던 선배들을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했고, 한국시리즈 직행이 걸린 OB 베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기홈런을 터뜨리며(1대0 승리) LG 트윈스의 창단 첫 페넌트레이스 1위를 이끌었다. LG 트윈스는 그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룩했고, 김동수는 포수 출신, 우승 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프로야구 사상 포수로는 처음으로 데뷔 첫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LG는 MBC 청룡 시절부터 팀의 핵심 포수였던 심재원을 은퇴시키며 김동수 원탑 체제로 개편을 단행하였으나 정작 김동수는 1991년 시즌에 2년차 징크스와 허리 부상까지 겹쳐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1991년 시즌 종료 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1992년 시즌 20홈런을 때려내며 부활, 1993년 시즌 역시 투고타저시대에 비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2번째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5], 이 때 부터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 등을 제치고 최고의 포수 반열에 오른다. 1994년 시즌은 방위 복무로 인해 홈 경기인근 수도권 원정 경기밖에 출전[6]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두번째 우승반지와 3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저 때의 골글은 태평양의 김동기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단 2표 차이로 결과가 갈렸다. [7]
1995년 시즌 중 방위병 소집 해제로 복귀하였고 이상훈-김기범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팀을 전반기 1위로 이끄나 8월부터 시작된 OB 베어스의 대약진과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의 전략미스[8]등의 악재가 겹치며 시즌을 2위로 마감, 이어진 포스트 시즌에서 공포의 소총부대를 구성한 롯데 자이언츠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하며 2연속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고 김동수는 4번째 골든 글러브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1996년에는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득점권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8월 초에 50타점을 기록하며 전체 타점 순위 상위권에 들었을 정도였으나 8월 초반 이후 시즌 종료까지 타점을 기록하지 못하는 엄청난 부진을 보였고 팀은 7위[9]에, 골든글러브 역시 포도대장으로 불리며 주가를 올린 박경완에게 빼앗기며 체면을 구겼다.
1997년에는 임선동, 전승남, 손혁 등 신인급들이 많은 투수진을 훌륭하게 리드하고 시즌 초반 심재학의 부상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 주는 타격까지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서 활약하며[10]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며 1996년에 박경완에게 빼앗겼던 골든글러브를 다시 탈환하며 5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타격은 타율은 낮았지만 17홈런을 때리며 맹활약
1998년 역시, 공수양면에서 활약하였는데, 7월 25일 경기에서는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였던 정민철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뽑아내어 대기록 작성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타율 2할 8푼, 홈런 20개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누수가 많았던 투수진을 잘 이끌어 코리안 시리즈 진출까지 시키는 등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골든글러브의 영광은 당시 제1차 현대왕조를 세운 박경완에게 밀려 연속 수상에는 실패하였다.[11]
그리고 1998년 이후 김동수가 신인 시절 때 선배 포수 심재원 등을 밀어냈던 것처럼 당시 신인이었던 조인성을 차기 주전 포수로 밀어주려는 LG 구단과 김동수 간의 신경전이 펼쳐지게 된다. 이 때 틀어졌던 양자간의 관계는 1999년 시즌 중 트레이드 문제[12]가 터지면서 끝장이 나게 되는데, 이런 어수선한 상황과 팀에서 의도적으로 출전을 줄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동수는 1999년 6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3. FA


1999년 시즌 종료 후 첫 FA 제도가 시작되었고 조인성을 밀어주긴 하되, 안정된 베테랑 백업으로서 당장은 김동수가 필요했던 LG는 김동수와 계약을 맺기 위해 그에게 연락하였으나 김동수는 우선협상 기간 동안 하와이로 출국하여 연락을 끊고 만다. 이에 당황한 LG 구단은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KBO 이사회를 소집하여 FA제도의 폐지를 시도하였으나 나머지 구단의 반발로 무산되고 LG구단은 이 자리에서 포수가 필요했던 삼성 구단에서 김동수와 계약하기 위해 일부러 김동수에게 잠적을 권유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삼성 구단과 언쟁을 벌이게 된다.[13][14] 이런 논란 속에 원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이 끝난 바로 다음날 귀국 후 삼성과의 계약이 발표되었다. 이때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LG 팬들에게는 배신자의 이미지가 남게 되었고, LG 프런트는 보복으로 투수 김상엽을 보상선수로 지명했다. LG팬 입장에서는 우선협상 기간동안 내내 아예 한국에 없었고 타구단 협상기간이 되자마자 돌아온 당일 삼성과 계약했으니 썩 좋게 보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
배신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지만, LG 시절 김동수의 전성기는 이만수의 뒤를 이은 유일무이한 포수 본좌였다. 그의 독주체제가 구축된 1993년을 기점으로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임수혁이도형은 잠시 반짝하다가 주저앉았다. 1990년대 말에 두각을 나타낸 박경완이나 진갑용은 전성기가 2000년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최고의 포수는 김동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15] 또한 2018년 현재까지 LG의 우타자들 중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린 타자로, 그를 능가할 만한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6]

2.4.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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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즌, 의욕적으로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서 첫 시즌을 맞이하게 되나 부상과 부진, 그리고 조범현 당시 배터리코치와의 불화 등으로 인해 타율 0.205, 11홈런 30타점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며 FA로 영입된 포수였음에도 진갑용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된다.
2001년 역시 다를게 없어서 서브 포수로 완전히 전락하고 말았으며, 같은 FA 선수였던 홍현우, 이강철, 김기태 등도 함께 부진하면서 한때 FA 무용론까지 일었을 정도였다. 진갑용이 시즌 후반 부상을 당하며 한국시리즈에 주전 포수로 출장하였지만,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패배를 막지 못했다.

2.5.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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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즌 후 6:2 현금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기게 된다.[17]
SK에서도 주전포수가 아닌 강성우, 양용모와 같이 돌려막는 서브 포수에 불과했으며, 성적도 역시 백업포수의 성적을 기록하며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팀 포수로 홈런을 많이쳤다. 여담으로 SK의 문학구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2002년 시즌이 끝난 후 SK의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조범현 감독은 FA 최대어인 박경완을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김동수를 방출하였다. 박경완의 FA 이적으로 포수진에 공백이 생긴 현대 유니콘스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고, 곧바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 결과적으로 박경완과 팀을 맞바꾼 셈.

2.6.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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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시즌을 마치고 SK에서 방출되어 은퇴위기를 맞은 김동수는 코치 자리도 고려하고 있었으나, 2003년 1월 현대 유니콘스의 영입 제의를 받은 후 연봉 1억에 계약을 맺으며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박경완의 공백을 강귀태와 대학리그 포수 최대어였던 이택근으로 메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김동수는 백업포수, 그리고 대타 요원으로 쓰여질 계획이었고, 실제로 시범경기와 시즌 시작 후 4월까지 김동수는 벤치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전 포수였던 강귀태가 개막 후 2경기만에 부상을 당하고 이택근의 포수 수비가 시망 수준으로 드러나자, 바로 주전 포수로 복귀했다. 5월부터 안정된 수비는 물론 높은 타율을 기록하면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을 방출한 SK를 상대로 활약하며 현대 유니콘스의 3번째 우승을 견인하였다. 유일하게 3할을 친 것과 마지막으로 골든글러브를 받은 것도 이 시즌의 일.
2004년 시즌, 초반에는 극도로 부진에 빠진적이 있었으나. 시즌 중반무렵부터 서서히 치고오르기 시작하여 팀의 주전포수로 역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2연패에 공헌하였다. 타석 수에 시합 수가 적었던 것은 체력 안배 차원에서 강귀태와 7:3 비율로 출장하였기 때문.
2004년 시즌이 끝난 후 FA 권리를 행사하여 2번째 FA가 되었다. 원소속팀 현대에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2년 10억을 요구하였으나 현대 쪽에서는 김동수의 나이를 고려하여 2년 계약을 거부, 우선협상이 결렬되어 시장이 나가게 되었다. 당시 포수난에 시달리고 있었던[18] 롯데 자이언츠쪽에서 김동수 영입에 나설 계획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나 롯데 측에서도 김동수의 나이와 영입 시 보상 선수를 내줘야하는 점에 부담을 느껴 영입을 포기했다. 1월 중순까지 팀을 찾지 못하며 FA 미아가 되어버렸고 결국 현대와의 기나긴 협상 끝에 2년 6억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마친다.
2005년 시즌 안정된 수비와 5월 22일 경기에서 3연타석 홈런을 때려낼 정도로 죽지 않은 장타력을 과시하였으나 시즌 중반 부상으로 이탈하여 타율 0.219에 10홈런을 기록하여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2006년 시즌에선 작년의 부진을 만회하며 작년 7위였던 팀을 2위로 이끄는데 공헌하였고, 07년 시즌 역시 구단 매각설로 팀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도 동요없이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어찌보면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 시절 부터 신바람 엘지의 주역으로 태-현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엘지맨 이었지만 현대의 마지막 황혼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2.7.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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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0일 은퇴식에서.[19][20]
히어로즈로 팀명이 바뀐 이후 2008년 9월 23일에 두산 베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3번째이자 포수로는 최초로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 시즌부터는 플레잉코치가 된다. 2009년엔 한 때 4할을 치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 후 타격감이 좀 떨어졌고 노쇠화와 더불어 선수로 뛰기는 하지만 사실상 코치와 다름없는 플레잉코치라는 자리에 있다는 점 등 출장 자체가 많지 않았다.[21] 2010년부터는 선수 생활을 접고 코치로 완전히 전향. 5월 30일 목동 LG 트윈스[22]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은퇴식을 가졌다.
통산 성적은 2,039경기 6,940타석 5,915타수 1,556안타 202홈런 871타점 56도루 타율 .263 출루율 .346 장타율 .423이다. 공수 양면에서 수준급의 기량을 지녔고 삼성 시절의 부진을 제외하면 수비부담이 큰 포수 치고는 상당히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역대 최고의 포수를 꼽을 때면 빠짐 없이 거론된다.

3. 지도자 경력



3.1. 넥센 히어로즈 시절


[image]
2009 시즌이 끝나고 은퇴한 그는 LG의 1군 배터리코치로 옮길 뻔했으나, 김시진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히어로즈에 남았다. 당시 기사
2010년부터 넥센 히어로즈의 1군 배터리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히어로즈 선수 시절의 인기와는 다르게 그의 은퇴 이후 그를 대체하고 있는 포수들의 성장세가 부진하자, 히어로즈 팬들은 그의 배코 능력에 의구심을 표시하였다. 2010년 이후 주전 포수로 거론되던 강귀태, 허준, 유선정, 박동원이 모조리 폭망... 다만 강귀태는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노쇠화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김동수 코치와 연관시키는 건 무리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햇병아리였던 박동원은 상무 입대 전에 1군 7경기에만 나왔을 뿐. 허준 역시 전형적인 2군급 포수라는 점에서 김동수 코치를 탓할 문제라고 볼 수 없다.그리고 허도환을 발굴해 영입한 후 공 받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 사람이 김동수 코치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 때 배터리코치로 참가하기도 했다.
2014년 비니 로티노의 포수 훈련을 도와 주어 포수로 선발 출전해 호성적을 거두게 하였고, 김동수가 공들여 육성했던 박동원이 7월부터 놀랍게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 넥센 포수들의 부진이 김동수 코치 때문이 아니라 선수들의 재능이 부족한 탓이 아니었던가 하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박동원은 상무 복무 시절에도 김동수와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였으니...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최형우가 포수 사인을 알고 쳤다고 발언하여, 욕을 먹었다.

3.2.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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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2014년 11월 12일 친정 팀인 LG의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초 배터리코치로 영입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 조계현이 떠나서 공백이 생긴 2군 감독으로 최종 보직이 결정됐다.
그러나 잘 하고 있을줄만 알았던 김동수는 엠엘비파크의 썰쟁이들의 말에 의하면 투수 혹사는 김성근 급이고 고우석을 3연투를 시키는 상식밖의 기용을 했으며 선수들을 폭압적으로 윽박지르고 강압적으로 대한데다 2군 코치들 전체와 감정싸움까지 벌였다는 썰등 현장에서 아주 평가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에 자기가 차기 감독이라도 대놓고 2군 코치들에게도 고압적으로 대했다고 하니...커뮤니티의 썰이라는건 걸러들어야겠지만 결과적으로 한시즌만에 물러난걸 보면 문제가 있기는 있었던듯. 출처1(삭제됨) & 출처2
2017 시즌 후 류중일 전 삼성 감독이 LG로 부임하고, 양상문 감독이 단장으로 가고, 송구홍이 단장에서 2군 감독으로 좌천되면서 해고된다는 썰이 있었는데, 결국 썰대로, 류중일의 감독 선임, 양상문의 단장 선임, 송구홍의 2군 감독 좌천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해고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다만 류중일 신임 감독, 유지현 신임 수석코치와는 한양대 선후배 관계고, 신임 감독이 WBC 대표팀에서도 코치로 썼었던 만큼 1군 코칭스텝에 합류할 가능성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고[23], 혹은 본인이 자존심을 버리고 그냥 2군 코치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사실 넥센에서 LG로 이적해 올 때도, 당시 넥센에서도 평가가 굉장히 좋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이번에 LG에서 밀려나면 재취업이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24] 결국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인다.[25]
그리고 스카우트팀으로 전보되었다는 카더라가 돌았고, 전국체전에서 모교인 서울고의 경기를 관전 중인 모습이 포착되었었는데, 이후 2017년 11월 14일 정식으로 오피셜이 뜨면서 새롭게 신설된 스카우트팀 총괄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확정 되었다.
2019 시즌부터는 퀄리티 컨트롤 코치로 옮기기로 했는데 차명석 단장이 새로 만든 자리로서 코치진에 포함되는 건 아니고 프런트에 가까운 역할. 엠팍의 일부팬들은 전력 분석하다가 성격 드러내고 선수들 갈구진 않을까 걱정하는 중(…).
2020시즌에는 주니치 드래곤즈로 연수를 떠난 이종범의 후임으로 2군 타격코치에 부임했다. 타격코치로는 이천 트윈스가 퓨처스리그 대부분의 타격지표를 싹쓸이해 성과를 냈다.
류지현 1군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함에 따라 수석코치 승격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20년 11월 18일 수석코치에 선임됐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

3.3.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배터리코치


1차 엔트리 발표 때 배터리 코치로 발표되었다.

4. 여담


  • 드라마 부활 14회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동 드라마에 출연하였던 탤런트 함석훈[26]과 친분이 있어 촬영하게 되었다고.
  • 2006년 벤치클리어링 유망주에게 분노의 싸대기를 날리기도 했다. 안영명이 김동수의 등짝으로 날아가는 공을 2연속으로 던졌다. 한 번이면 모르겠는데 2번째 같은 코스로 공이 날아가니 진실은 던진 당사자만이 알겠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던 상황. 그리고 마운드로 달려나가던 김동수는 너무 흥분했는지 도중에 넘어져서(…) 더 격하게 반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자 벤치에 있던 회장님에게 플라잉 니킥을 등짝에 맞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된다.[27]
[image]
당시 양 팀을 대표하던 최고참선수 둘이 가장 뜨거운 파이팅을 선보인 장면이 인상적.
  • 이병훈 해설위원이 사사구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MBC, LG 시절에 함께 선수 생활을 했을 때의 일화로 일 년에 홈런을 한 자릿수밖에 치지 못했지만[28], 그게 전부 다 잠실구장 XX존[29]으로 빨려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승타, 결승득점 등으로 받는 보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선수도 김동수라고(…).
  • 외모만 보면 마냥 순할거 같은 사람좋은 인상이지만 실제 성격은 딴판으로써 야구계에서도 성깔이 격렬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벤치 클리어링때마다 상대투수를 향해 달려드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 OB 베어스 시절 류택현에게 사구를 맞고 힘이며 성깔이며 어디가도 안밀리는 타이론 우즈의 태클에 그대로 고꾸라진 굴욕도 당했다. 류택현이 그후 LG에서 오랫동안 뛰면서 김동수에게 그때 자기가 동수형 때문에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을 정도(…).
  •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이 푼 일화에 따르면, 조용훈과 같은 방을 썼던 황두성, 정민태, 전준호 등이 모두 조용훈을 포기하자 김동수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고 한다.[30] 김동수가 아침 9시에 기상해서 커튼을 걷고 조식을 먹자 술 먹고 놀다가 새벽 3-4시에 잠드는 조용훈은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 코치 활동을 하면서 옆 사무실을 쓰는 두산 베어스의 코치나 프런트 등과 친하게 지낸다. 잠실야구장에서 같이 담배를 사거나 커피를 사서 마시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LG
110
352
.290
102
20
1
13
62
46
15
55
.463
.379
1991
90
255
.196
50
8
3
5
24
29
5
34
.310
.288
1992
121
381
.257
98
15
4
20
69
47
3
50
.475
.343
1993
115
372
.274
102
16
3
16
(4위)
56
47
7
47
.462
(5위)
.351
1994
95
316
.288
91
20
3
6
42
45
4
48
.427
.381
1995
108
334
.260
87
15
2
10
35
40
4
44
.407
.343
1996
108
330
.245
81
11
0
12
50
43
0
43
.388
.330
1997
121
394
.236
93
26
0
17
66
54
2
63
.431
.335
1998
118
408
.284
116
28
2
20
66
67
2
53
.510
.362
1999
104
334
.287
96
22
1
16
65
55
1
49
.503
.37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삼성
90
200
.205
41
9
1
11
30
23
0
35
.425
.319
2001
89
181
.276
50
11
0
5
30
18
0
26
.420
.36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2
SK
95
251
.243
61
10
2
11
32
28
1
31
.430
.323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현대
117
367
.308
113
15
1
16
68
48
3
53
.485
.390
2004
113
311
.251
78
13
1
2
31
38
2
45
.318
.342
2005
96
274
.219
60
4
2
10
30
24
2
25
.358
.283
2006
115
333
.279
93
12
0
5
40
38
3
37
.360
.348
2007
111
306
.278
85
18
0
4
39
22
2
27
.376
.329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우리
94
159
.239
38
7
2
1
23
15
0
16
.327
.305
2009
히어로즈
29
57
.368
21
6
0
2
13
14
0
10
.579
.456
<color=#373a3c> KBO 통산
(20시즌)
2039
5915
.263
1556
286
28
202
871
741
56
791
.423
.346

6. 관련 문서


[1] 다만 1968년은 주민등록상 나이고 실제는 1967년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학교 동기들은 1967년생들이다.[2] (we will we will rock you 부분에 맞춰) 동~수~동~수~ 김동수! 김동수! 동~수~동~수~ 김동수! 김동수! 이 응원가는 양준혁을 거쳐 최동수에게 이어지게 된다.[3] 조인성은 이름값에 비해 앞의 세사람과 비교할 만한 성적은 찍지 못했다. 2010년 이전까진 명성에 비해 실속 없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다. 강민호는 양의지보다 누적에서 아직 상당한 차이로 앞서 있다. 박경완의 노쇠화와 부상이 시작된 2008년 이후로는 강민호와 양의지가 양분하고 있는데 기록상 강민호의 전성기 이후 양의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두선수의 성적이 교차되고 양의지가 앞서나가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14~2016년이다.[4] 홍성흔처럼 지명타자를 오래 했더라도 주전 포수 활동 시즌이 한 시즌이라도 있는 선수에 한해 봐도 다섯 명뿐이다. 박경완-이만수-홍성흔-김동수-강민호.[5] 어느 정도였냐면 팀내 최고 OPS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 중 최다 홈런(16개)을 기록한다.[6] 방위병이 홈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95년의 일이며, 장거리 원정을 나가지 못했던 김동수의 공백은 김정민이 메웠다.[7] 김동수는 골든글러브 수상후보기준은 통과했으나 규정타석 미달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개념보다는 타율,홈런 그리고 규정타석 등이 중요한 척도였다. 김동수는 규정타수 미달이고 타격성적이 김동기에 못 미침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여 우승 프리미엄의 대표적 예가 되었던 것이다.[8] 9월에 너무 낙관을 한 나머지 1.5군급 라인업으로 자주 게임을 치루거나 이해 못할 배치를 많이 하였으며 이 때문에 9월 성적이 좋지 못하였다.[9] 진갑용에 대한 쟁탈을 위한 의도적인 져주기였다. 김동수 역시 9월 이후부터는 출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작 꼴찌를 한 팀은 전년도 우승팀인 OB였지만...[10] 다만 타격 부분은 7월 이후 급격하게 하락하였다.[11] 박경완 왈 "이게 우승 프리미엄이란 거에요 형!" 그런데 박경완도 업보(?)였는지 훗날 홍성흔에 밀려 골든글러브 수상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12] 부족한 선발투수 보강을 시도했다.[13] 이 사건으로 원래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LG와 삼성 구단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어 트레이드 논의는 커녕 사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이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해빙되었고, 2012년 말 LG가 FA 시장에 나온 투수 정현욱을 영입하고 3-3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완전히 풀렸다.[14] FA제도 도입 자체가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이 전력보강을 위해서 밀어붙인 결과였다.[15] 마구마구에서 김동수의 레전드 카드가 현대-히어로즈가 아닌 LG로 나온것은 1990년대 그의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14년 듀얼 레전드가 적용되면서 현대 버전 카드도 나왔다.[16] 스탯티즈 기준 WAR 역대 LG 선수 3위이자 전체 21위. 1위는 투수 김용수이며 2위가 좌타자 박용택, 참고로 4위도 좌타자인 이병규이다.[17] 삼성 - 김동수, 김기태, 정경배, 이용훈, 김상진, 김태한 ↔ SK - 틸슨 브리또, 오상민. 지금 보면 꽤나 메가톤급 트레이드처럼 보이지만 당시는 생각보다는 파급효과가 크지 않은 트레이드였다. SK는 빈약한 뎁스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삼성의 잉여자원들을 대거 영입했고, 삼성은 이미 국내리그에서 검증된 외국인 타자 브리또를 영입하며 동시에 유격수 자리를 메꿨고, 유독 삼성 전에서 강했던 좌완 오상민까지 얻었다.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삼성의 승리가 됐다.[18] 당시 롯데의 주전포수는 최기문이었지만,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다음 시즌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포수라고 있는게 최준석과 신인 강민호가 전부였다.[19] 사진 속의 김동수의 부인, 아들 딸 등 가족들을 제외하면 왼쪽부터 이숭용, 송구홍, 조인성, 서용빈, 유지현, 이병규이다.[20] 여담이지만 전광판에 올라와 있는 두 선발투수 김광삼고원준은 나란히 8이닝 무실점 호투로 예상치 못한 투수전을 이끌었고 이날 경기는 연장접전끝에 박병호(!!)의 적시타로 LG의 1대0 승리로 끝났다.[21] 2009 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의 1군 배터리 코치 제의를 받았고 사실상 영입 분위기까지 갔는데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이 송별회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수는 김시진 감독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국 히어로즈에 남았다. 물론 LG 트윈스를 떠날 당시 LG 구단과 불화가 생겨 좋지않게 떠난것도 작용했지만.[22] 히어로즈 구단이 LG의 레전드인 김동수 코치를 배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일정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23] 하지만 이것도 힘들어 보이는 게 기존의 김정민 1군 배터리코치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김동수가 1군 코치진 보직을 잡기도 힘든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신임 수석코치인 유지현이 본인보다 무려 4년 후배기도 하고.[24] 68년생으로 이미 1군 배터리코치와 2군 감독까지 해봤고 일본, 미국 프로야구와는 달리 한국의 야구계는 후배가 더 높은 직급의 감독이나 코치로 있을 경우 그 밑의 코치로 있기 힘든 게 현실이다. 현장 평가가 좋지 않다는 썰이 사실이라면 김동수가 프로 코치에서 밀려나면 갈 수 있는 데는 고교팀, 대학팀 코치나 해설위원, 전력분석원 등밖에 없고 그도 아닐 경우 야구와 무관한 일을 하면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는 것 뿐이다.[25] 새 2군 감독인 송구홍은 김동수의 1년 후배이다.[26] KBL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장내 아나운서로만 2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그 사람 맞다.[27] 정확하게는 김동수가 회장님의 니킥에 정통으로 맞은게 아니라 심광호의 블로킹과, 한화 이글스에서도 뛰었던 송지만이 엉겁결에 니킥의 희생자로 같이 엮였다. 그것도 말리러 나왔다가(…) 봉변 당해서 송지만이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 김동수 은퇴 기념으로 송진우가 달려나와 등에 플라잉 니킥을 갈긴다.[28] 이 부분은 이병훈의 오류. 김동수는 LG시절 부상이 있었던 91년과 방위 출전으로 잠실구장에서만 출장하였던 94년을 제외하고 모두 두자릿수 홈런을 때린 대표적인 슬러거 포수였다.[29] 당시엔 외야에 XX존이 있어서 이쪽으로 홈런을 치면 LG전자제품을 제공하거나 상금을 주기도 했다.[30] 나이는 19살 차이, 화곡초등학교 2회(김동수)-22회(조용훈) 선후배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