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사정문

 



1. 소개
2. 역사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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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문

1. 소개


景福宮 思政門
조선시대 궁궐경복궁편전 사정전정문이다. 1층 목조[1]으로 되어 있다.
이름은 당연히 사정전이란 뜻으로, 명칭 자체는 조선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하여 지었다. 정도전은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늘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고 설명하였다.
위치는 정전근정전북쪽, 사정전남쪽에 있다.
법전과 편전을 가르는 경계에 있은 만큼, 중요한 행사나 의례 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2. 역사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지어졌다. 조선 초기 경복궁을 그린 《경복궁 전도》를 보면 근정전사정전은 행각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이 당시 사정문의 남, 북으로 복도가 설치되어 있었던 듯 하다. 1429년(세종 11년)에 개수되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가 1867년(고종 4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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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정문
옆 사진과 같은 시기 사정문 안쪽

3. 특징


  • 조선의 5대 궁궐 중 정전 바로 정북방에 위치한 유일한 편전 정문이다. 창덕궁창경궁의 편전 정문인 선정문문정문은 정전의 측면에 있으며 경희궁의 편전 정문인 자정문도 정전 정북쪽이 아닌 서북쪽에 있다. 그리고 사정문의 정북방으로 편전 사정전과 의 침전인 강녕전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보아 경복궁 내 전각들이 정궁으로서 질서 있는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 위에 언급한 것처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단은 장대석 1벌대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춧돌은 원형주좌초석(圓形柱座礎石)[2]이고 기둥은 민흘림이 있는 기둥이다. 정면 기준 가운데 기둥 2개에 문고리가 달려있는데 아마 행사를 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공포는 간결한 초익공 양식이다. 구조는 1고주 5량가 형식으로, 대들보와 종보를 겹쳐 올렸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문짝나무이며 동, 서 양 측면의 역시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문의 바닥에는 박석을 끌었다.
  • 좌, 우 칸은 신하들이 다니게 하고 가운데 칸은 이 다니는 어칸(御間)으로 두었는데, 다른 궁궐 편전 정문과 달리 어칸과 양 옆 칸 높이의 차이가 크지 않으나 폭은 어칸이 조금 더 넓다. 각 칸의 인방 위에 안상의 모양대로 위, 아래 6개 씩 총 12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고[3] 그 위에 홍살을 놓았으며 가운데 칸 궁판에 현판을 걸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되어있다.
  • 단청은 모로단청[4]으로 칠하여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 궁판 위로 천장까지 그물 부시 [5]를 쳤는데 들이 와서 둥지틀지 말라는 의미이다.
  • 사정문 좌, 우의 행각을 창고로 사용하였는데 이름을 천자문 순서대로 지었다. 천자고(天字庫)부터 월자고(月字庫)까지 총 10개의 창고로 구성되어있다.


[1]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2] 주좌는 윗면에 기둥을 앉힐 자리를 따로 다듬어 돋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3] 윗 궁판의 경우, 5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4]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5] 한자어로서 '그물 부(罘)'에 '그물망머리 시(罳)'를 쓴다. 원래는 비단으로 그물을 쳤으나 현재는 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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