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어

 


1. 개요
2. 관련 연구
3. 계통
3.1.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의 계통 문제
3.2. 일본어와의 관계 논쟁
3.3. 현대 한국어와의 관계
4. 고구려어 어휘
4.1.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
4.2. 그 외 고구려어 어휘 모음
5. 같이 보기


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어 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계제어 항목
한반도 중부와 북부, 만주 일대를 거점으로 했던 고대 국가 고구려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컫는다.

2. 관련 연구


고구려의 정체성을 다룰 때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한국어 자체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언어 자료가 대단히 빈약하지만, 신라어향가나 기타 금석문이라도 좀 남아 있어서 그나마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는 반면에 고구려어는 그 자체로 쓰인 문장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에 관한 자료와 중국의 사료,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명, 지명 자료가 거의 전부이며, 1천 년이 지나 《세종실록지리지》나 《택리지》등에서 지명의 역사를 밝히는 대목을 참고해야 한다. 이것마저도 빈약한 수준이다. 광개토대왕과 관련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등에 간간이 보이는 이두식 표기를 통해 기본 어순 등은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와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를 포함한 한국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 밖에는 단어 비교 정도라 벽에 부딪히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의 권위자로 유명한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어(부여어계)을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로 보기도 한다. 보통 신라어를 현대 한국어의 근간으로 보는 편이지만 신라의 경우 그 지방 통제력이 고려와 조선 수준의 중앙집권 국가의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탓에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 시대 이후인 고려시대로 보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1] 실제로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에 조선의 한양 천도에 의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및 평안남도 남부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부여어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Peninsular Japonic'
이점에 대해서는 국내의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의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였으니[2] 중앙어가 지방에까지 완전히 퍼진 시점은 고려 건국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 보다는 신라어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고려왕조의 영역과 인구[3][4]는 9할 이상이 통일신라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고[5][6] 엄연히 신라 왕실 및 신라계 호족들도 고려 지배층에 골고루 편입된 데다 보현십원가정과정 등 통일신라의 언어 전통이 고려에도 이어지는 사례가 보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고구려어의 역할만 강조하는 것이 급진적인 의견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둘 모두 가설의 영역이며 최근에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가 제시한 논문이 구체적인 논증으로 인하여 더 크게 주목받는 상황이다.

3. 계통



3.1.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의 계통 문제


중국 사서에 일관되게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언어가 비슷하고 말갈, 읍루 등의 언어와는 뚜렷하게 다르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만주어 등이 포함된 퉁구스어족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 등에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서로 통한다'''고 기록되었고[7], 또한 역시 양서에서 신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 데에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과는 같은 언어를 쓰고, 따라서 고구려와도 소통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만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의 언어가 유사하다고 결론짓기에는 표상적 서술 외에 정확하게 어휘를 나타내는 기록이 너무 적어서, 학계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백제어가 이중 언어 체계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렇다면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류와 언어가 같을 것이며, 남쪽 마한계 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 기록과의 모순도 없으면서 신라인과 고구려인의 언어가 같지 않게 된다. 다만,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는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8][9]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대 한국어의 조상 언어, 혹은 한국어의 생성에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언어라고 본다. 반면, 일본중국 측 연구자들은 퉁구스어족설을 주장하는 일이 많다. 이리 주장이 나뉘는 까닭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역사와 정치에 기인한다. 물론 한국 학자들 중에서도 소수지만 남북 언어 이원설을 주장하는 학자[10]도 있다. 반면 북한 학계에서는 단일언어설을 주장하며 이를 강하게 비난하는 편이다.
이는 고구려의 시초라 볼 수 있는 주몽이 부여계통이었는데, 그 부여의 건국설화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부여 또한 북부 지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이 세운 나라로 여겨지고 있기에 부여 - 고구려 - 백제 - 왜(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 여기서 갑자기 일본이 들어가는 이유는 일본의 유물들의 양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 즉 조몬 문화에서 야요이 문화로 넘어가는 시기가 부여가 멸망한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으로, 야마토 정권의 시초가 부여 계통의 기마 민족이 나라를 잃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다 일본 열도에 닿아 세운 나라라는 주장의 근거로 쓰인다. 그리고 또한 앞의 학설이 아니더라도 백제, 가야가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야요이 문화권이 사실상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문화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에 비해 사료와 제례 의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었던 조선 초 세종 재위 15년(1433년) 기록에는 고대 한국의 삼국시대 언어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구절이 보인다.
세종 61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9월 12일(신묘)
예조에서 민속 노래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마련이 없음이 마땅치 않다고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악(聲樂)의 이치는 시대 정치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관습 도감(慣習都監)의 향악(鄕樂) 50여 노래는 모두 신라·백제·고구려 때의 민간 속어[俚語]로서 오히려 그 당시의 정치의 잘잘못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족히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이 되옵는데, 본조가 개국한 이래로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아악(雅樂)과 송(頌)의 음악이 이미 갖추어졌사오나, 오직 민속 노래들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마련이 없사오니 실로 마땅하지 못하옵니다. 이제부터 고대의 노래 채집하는 법[採詩之法]에 의거하여, 각도와 각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임을 막론하고 오륜(五倫)의 정칙에 합당하여 족히 권면할 만한 것과, 또는 간혹 짝 없는 사내나 한 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칙에 벗어난 것까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 내어서 매년 세말에 채택(採擇)하여 올려보내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습도감'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1475년 악학도감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존재한 음악의 실기를 담당하던 부서이다. '속어'는 말 그대로 일반사람들이 쓰는 속된 말을 뜻하고, '향악'의 원래 뜻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음악을 말하며 대개 한국 고유의 음악"을 뜻하므로, 당시 즉 15세기 중반의 공식관청에 신라 통일 이전 삼국의 언어(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보존되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또한 15세기의 조선 학자들이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말인즉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으니 조선의 학자들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같은 계통의 언어로 파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당시에 전대되던 50여 곡 이외에 15세기에 전국에 존재하던 삼국의 노래를 포함하는 속요를 채집하는 방안을 내었고, 세종이 그대로 시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 50여 곡 외에 더 많은 자료를 채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저 당시 '관습도감'에 존재하던 '향악 50여 곡'만 찾을 수 있어도 삼국의 언어(그것도 일반어)에 대한 작은 혹은 큰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어, 백제어의 계통 논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료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삼국 간 언어 차이보다는 고구려 내의 언어 차가 더 컸을 수도 있다. 고구려 자체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를 포괄하는 상당히 넓은 국가였던만큼 고구려어에도 다양한 사투리가 있었을것이다. 또한 다양한 북방민족들을 직, 간접적으로 통치하였고, 중원과 서역으로부터 이민유입도 있었기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고구려인 외에도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 사회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에 따라 중고한어와 그 방언들, 튀르크어족 계통의 언어, 소그드어, 토하라어, 거란어, 퉁구스어족 계통의 언어들, 북시베리아어 계통의 언어 등 수십여개의 언어들이 같이 쓰였을것이다. 또한, 교통, 통신이 열악했던 당시 특성 상 지금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발해사 전문가인 경성대학교 한규철 교수는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족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모두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가리키는 멸칭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어'는 수도인 평양성과 그 부근에서 사용한 고구려의 '서울말'이고 나머지 방언들은 '말갈어'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말갈어는 이후 여진어로, 만주어로 변모했다. 이 점으로 볼 때 삼국 간 언어보다는 오히려 고구려 내에서 방언 차이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3.2. 일본어와의 관계 논쟁


고구려언어의 계통에 관한 문제는 근대적 역사학이 들어온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에 시작되어 당시 일본 학자인 신무라 이즈루(新村出)가 고구려어의 지명에 관한 어휘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이래, 여러 가지 가설과 연구가 횡행하기 시작됐다. 이에 더불어 이들은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비교언어학에서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들 중 하나인 수사의 유사성을 내세웠다.[11][12]
수사
고구려어
한국 한자음
구결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3


mv

미쓰
5
于次
우차
u-ts
이투
이쓰쓰
7
難隱
난은
na-n
나나
나나쓰[13]
10


tv
토워
도오
하지만 위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량화현(良火縣)' 또는 '량화현(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어를 고증할 문헌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신뢰성 있는 자료를 취합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한 오류이다.
그리고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14]로 나누어져 있기도 하며 5의 '우차/이투'의 대응은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서로 맞지 않는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15]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게다가 이후 고구려어와 동계어인 백제어 목간이 출토되었고, 해당 목간에서 수사법을 현대 한국어와 비슷하게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위의 설은 거의 사장되었다.
또한 중요한 점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한반도 중부의 옛 고구려 지명이 반드시 예맥계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는 기본 전제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16] 오히려 한반도 중부의 옛 고구려 지명들은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은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고구려어가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언정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도 없다.''' 삼국(三國)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는 옛 중국의 기록이나 고조선삼한의 당시 한반도 북부지역과 남부지역간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일부 일본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맥계 언어와 한(韓)어의 관계를 아무 상관없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언어학에는 언어동조대라는 개념도 있다.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는 현재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일본서기 민달천황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조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4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17]이 있어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때문에 백제와 같은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있었다 해도 언어 계통 자체는 달랐을 거로 추정 할 수 있다. 즉,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어와 백제어 같은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18]
[image]
일부 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외국의 학자 중에 일본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라는 학자가 있다. 벡위드는 『고구려어 - 일본을 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라는 책을 통하여, 일본어와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이라는 동계로 놓고 한국어는 철저히 떼어놓는 주장을 했는데,[19]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과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입맛 대로 차용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20] 또한 일본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대차게 까였다. 한편, 일본어와 알타이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어족설을 만주~한반도에 거주하던 민족이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 영향을 끼친 증거로 보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한(韓)계의 신라어와 부여계의 고구려어를 분리해 놓고,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이기문 교수도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한일 양국어의 유사점은 고구려어 및 부여어계(부여·백제)를 매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에 대한 주장을 일본에서 주장하는 억지 주장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는 편이지만, 사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자들이 학계에 있기는 하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역시 일부 일본인 및 중국인[21]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됐든 고구려왜(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고[22], 유사점 말고 차이점도 많기 때문에 어떠한 주장도 현재로서는 증거 부족으로 기각될 뿐이며,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3. 현대 한국어와의 관계


부여어족을 신라어와 분리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학계, 특히 북한 학계에서는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로 보거나, 최소한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에 영향을 끼친 언어로 본다. 당장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어 포함 부여 계통의 언어들이 말갈 계통의 퉁구스어족과는 구분된다고 했고,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서로 통한다고까지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 부여계 언어가 과연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의 언어인가에 관한 문제는 계속 추측밖에 나올 수 없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 언어 자료가 너무 없다. 고구려어 어휘 약간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구려어의 거의 전부. 수사라고 알려진 것들도 확실하진 않고 그저 그러리라는 추정일 뿐이다. 이렇게 자료가 없으니 다른 언어와 제대로 비교해볼 수가 없다.
그렇긴 해도 기존의 금석문이나 이후로 발굴되는 목간들을 통해 의미 있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일단 광개토대왕릉비 같은 금석문은 변체한문으로 적혀 확실히 한국어와 어순 구조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백제어 수사가 적혔는데, 이들의 한자음 재구가 일본어 수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신라어 및 현대 한국어와 비슷해서 백제어와 같았다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사뿐만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어휘에서도 부여어족과 한(韓)어가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한자


鞬吉支/於羅瑕
居西干

발음


건길지 / 어라하
거서간

왕(王)

가이
긔 / 가


존칭 접미사

支(ki)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의 권위자로 유명한 러시아계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여러가지 연구를 통해 고구려의 관직명, 지명 등에서 한국어와 연관된 단어들이 보이며[23] 고대 한국어는 만주 지역의 민족들이 쓰던 언어가 점차 한반도로 남하하여 형성된 언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그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들이 일본어와 유사한 면이 보인 점에서 원래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계 언어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점차 고구려어가 남하하여 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를 밀어내고 한국어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원래 제주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탐라일본어인 타(田)+무라(村) 혹은 타미(民)+무라(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어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건 오히려 초기 신라어이며 이마저도 삼국시대 중후기를 거치며 삼국의 언어 모두가 유사한 모습으로 수렴하였다고 한다. 탐라라는 국명은 신라가 하사한 것으로, 본래 '탁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하지만 탐라국은 신라에 입조하기 전부터 이미 탐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백제 문주왕 2년(476년)이다. 탐라라는 이름 자체의 기원은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특히 보빈은 당대 실제로 사용되었던 고구려어를 더 정확하게 실증하기 위해 고구려어와 긴밀했던 말갈어-여진어-만주어(이하 만주어 라인)를 비롯한 퉁구스어족의 각종 언어들[24][25] 및 당대 중국어 등에 남은 고구려어의 흔적 등을 심도있게 연구하였는데[26], 그의 가설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은 퉁구스 제어와 같은 계통이면서 고구려어의 영향도 짙게 받았으므로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만주어 라인에서만 발견되는 단어를 비교분석하면 고구려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에서는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한국어의 영향으로 보이는 각종 언어적 특징이 다수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어는 한국어와 관계가 긴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27] 따라서 그는 고구려어, 일본어 동계 어족 설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며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들이 있다. 하지만 보빈의 전공과 연구실적상 벡위드의 주장보다 훨씬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벡위드도 보빈의 연구 결과를 일부 수용해 삼국시대 전기는 몰라도 후기에는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28]
보빈의 가설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존재했다. 김부식(고려시대)이 쓴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신라어가 일본의 아스카~나라 시대 6모음체계와 같다고 보고,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야요이인의 일본열도 이주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한다. 참고로 일본의 주류학계에서도 야요이인들이 대륙에서 한반도 전체를 거쳐 넘어갔냐 아니면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 남부만 거쳐 넘어갔냐(더 유력)의 논쟁이 있을 뿐이지, 적어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갔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대규모 인구가 기원전 항해기술로 남중국에서 동중국해를 거쳐서 일본열도로 스트레이트로 갔다고 말하기는 억지고[29] 소규모의 인구가 한반도 남부에서 벼농사를 통해 숫자를 불려서 일본열도로 건너갔다는 추론이 더 설득력 있다. 중국 기록에도 변한은 왜와 아예 붙어있다고 했다.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어의 고유어와 일본어의 고유어 모두 서로의 고대언어에서 차용한 것들이 있다. 한국어 내 일본어족 귀화어로는 '섬', '바다', '쌀' 등이 있다. 특히 양국 고유어 중에서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p-' 계열로 나타나면서 고대 일본어에서 'w-' 계열로 나타나는 것들은 거의 다 일본어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처럼 한국어 내의 일본계 귀화어의 수는 많지 않고, 반대로 중부~서부 일본어(특히 규슈 일대)에 들어간 한국계 귀화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는 고대 한반도에서 세형 동검 등의 문물과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남부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힘에서 압도해 쫓아내거나 흡수하거나 지배했기 때문으로, 대개 지배-피지배 관계에서는 지배층의 언어가 피지배층의 언어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가야이진아시왕 등 한반도 삼국 시대의 주요 지배층의 이름들은 실제로 고대 일본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이름들인 바, 한국어족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고 한다.[30] 얼핏 한반도 남부에 일본어족 화자들이 살았다는 가설을 보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떠올리기 쉬우나, 정작 보빈의 주장 및 역사적 연도를 따져 보면 임나일본부설보다 몇백 년 이상 앞서며, 그마저도 '''한국어족 화자들이 일본어족 화자들을 압도'''한 정황들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는 백만 광년쯤 멀어진다. 즉, 행여나 보빈의 주장을 어설프게 이용하며 임나일본부설을 들이미는 일빠넷우익이 있다면 친히 보빈의 주장을 인용해서 역관광시킬 수 있다.
근대에 와서 명확하게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는 여러 종족이 거부감 없이 뒤섞여 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하게 있던 일이다. 특히 삼한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곡옥, 청동거울, 세형동검, 고인돌 등 고고학적 교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빙하기 이후, 항해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고대시대에 대륙에서 일본열도로 대규모로 건너가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연안항해인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한반도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
여러 국가 형성 초기단계의 제민족 이동과정에서 (민족적인 의미의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한반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반대로 (민족적 의미의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고대 종족 또한 충분히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살았을 수 있다.[31]
언어학은 아니지만 형질인류학을 통한 분석으로는 중국 학회의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이 있다. 모용선비의 침략 때 부여인들이 대규모로 포로로 끌려가서(무려 1만여 명)[32] 선비족 땅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위의 링크는 바로 그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중국 학회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게시물이다. 결론만 말하면 유골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자료를 모아서 통계분석하면 부여인들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비족, 거란족과 같은 몽골계 종족의 인골과 여진족, 만주족과 같은 퉁구스계 종족의 인골의 자료는 여타 종족들의 인골의 자료와 비교하면 충분히 구별할 만큼 편차가 있다. 중국 학계의 형질인류학은 오랜 연구로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 다만 형질인류학적 연구는 표본이 부족하여 한계가 있다.[33]

4. 고구려어 어휘


대부분이 지명인데 한국어와 유사하다. 고구려어는 현대까지 내려왔다. 삼국시대 전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최고 관직명엔 '대보(大輔)', '좌보(左輔)', '우보(右輔)'등과 같이 '보'가 사용됐었다. 이 보(輔)는 고구려에선 봉상왕을 지칭하는 '상부(相夫)', 소수림왕을 일컫는 '구부(丘夫)', 명립답부, 중외대부 같은 부(夫)로 바뀌었다. 고구려어의 부(夫)는 종(宗)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고유의 한국어이다. 고구려어의 부(夫)는 오늘까지 '놀부', '흥부', '곰보', '울보', '뚱보' 등 한국어 인칭접미사로까지 직접적으로 사용된다.

4.1.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


  • k, t, p 등은 거센소리의 표기가 아니다.
표기
발음

백제·신라어
고려어
중세국어
현대국어

tara
山, 高
珍阿, 梁, 等良

달-(附), 따ㅎ(地)
양달, 다락

kuru

忽, 屈, 骨
○○○
골ㅎ(洞, 州)
골, 고을
加尸
kara

○○○
把敢大
갈-(耕), 가래
갈-, 가래
加支
kati
菁→茄
○○○
○○○
가디(茄)
가지
押, 岬
kusi
嶽, 串
菅, 古尸, 岬, 串
古尸
곶(串), 골(菅)
곶, 봉곳
加火
kapɐrɐ
中(←唐)
○○○
戞噴
가(中)
가운데
加兮阿
kakia

○○○
○○○
(닛-(連))
(잇-)
甘彌
kamamɐi

○○○
○○○
鷲, 黑鷹
○○○
甲, 甲比
kapa

○○○
○○○
(구무)
(구멍)
皆(次)
kəsi

居西, 居瑟, 吉支
○○○
항것(主), 긔자(王)
○○○

pa(ki)

○○○
○○○
보-(見)
보-
居尸
kasi

≠心音
○○○
가삼
가슴
𢈴
kaŋ
𢈴
○○○
○○○
○○○
(광(倉庫))
呑, 旦
tɐrɐ

○○○
○○○
○○○
○○○
木根, 斬
pərəki

○○○
○○○
블휘(根)
뿌리
木根, 斬
pərəki

○○○
○○○
버히-(斬)
베-
古斯
kusi(ri)

○○○
區戌
구슬(玉)
구슬
馬, 勿, 買
mərə/mɐrɐ/mɐi
水, 川
勿, 買
○○○
沒, 悶
믈(水), 물
骨尸
kurusi

○○○
○○○
곯-(膿)
곯-, 곪-
內, 奴, 惱
na/nu

○○○
○○○
나라(國), 누리(世)
나라, 누리
骨衣
kutə(rə)

居柒
○○○
거츨-(荒)
거칠-
功木
kumuku

固麻, 熊只, 甘蓋
○○○
고마(熊), 곰

滅烏
mɐraka

○○○
○○○
야지(駒)
망아지

aka
幼, 少
○○○
○○○
-아지
-아지

mɐrɐ

○○○

말(馬)

屈火
kupəre

屈阿火, 求佛
○○○
굽-(曲)
굽-
別, 平吏
pɐrɐ
平原
夫里, 火, 伐
○○○
벌(野)
벌, 벌판

nɐrɐsi

○○○
○○○
○○○
(나란하-)
今勿
kəmərə

今勿
○○○
검-(黑)
검-
乃勿
namərə

○○○
那勿
납(鉛)

內米
numərə

○○○
○○○
○○○
○○○

taka


○○○
둑(堤), 언턱
둑, 언덕
豉鹽
sirama

○○○
○○○
○○○
(시리-)
買尸
mɐiri

○○○
○○○
마날(蒜)
마늘
巴衣, 波兮
pakərə/paki

○○○
○○○
바회(巖)
바위
斤尸
kərə

○○○
乞, 根
글(文)

伐力
pɐrəkə

○○○

파라하-(綠), 프르-
파랗-, 푸르-
夫斯, 扶蘇
pasi/pasu

○○○
봇(樺)
○○○
於斯
nɐrɐsi

○○○
○○○
날ㅎ(斤, 刃)
날, 칼날

nɐrɐ
위치자리토씨
○○○
○○○
날/늘

沙伏, 沙非
sapə(rəkə)

所比
質背
싯븕-(赤), 새배(曉)
붉-, 새벽
沙熱
sanara

○○○
○○○
사날-(凉)
서늘하-

i
맺음법씨끝
○○○
○○○
-이
-이
密(三)
miri
龍(←玄)
密, 推, 彌知, 三
米立
미르(龍)
미르(龍)

suru

○○○
車衣
술위(車)
수레

sunərə

○○○
○○○
수리(端午)
수릿날
首泥, 述尒
sunərə

○○○
○○○
수늙(嶺)
○○○
¿安市, 安十
arasə

○○○
安良, 阿乙
알ㅎ(丸, 卵)

鳥斯含
tusikəmə

○○○
吐吉
톳기(兎)
토끼
於支
nɐrɐki

○○○
○○○
날개(翼)
날개
淵, 於乙
əri

○○○
烏沒, 五悶
우믈(井)
우물
肖巴
supa
酒(←豊)
述, 舒發, 舒弗
酥孛, 數本
수울(酒)

¡波旦, 波豊
patɐrɐ/patərə

波珍
把剌
바랄, 바다(海)
바다
於斯
əsi

○○○
○○○
엇-(橫)
엇-
金, 豉鹽
siru

○○○
○○○
쉬-(休)
쉬-
釗, 斯由
siru
金, 鐵
舍輪, 省良, 實於
歲, 遂
쇠(鐵)
쇠, 시루(熟鐵)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임병준)

4.2. 그 외 고구려어 어휘 모음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인들이 만선사관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어를 만주의 언어와 엮는 글이 올라온 경우가 많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에 입각한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한국 역시 민족주의 사학의 영향으로 고구려랑 한국을 과도하게 연관시킨다는 지적이 있으므로 그냥 참고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다만 특이한 점으로는 여러 언어들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튀르크어, 몽골어, 상고 일본어, 중세 일본어, 현대 일본어, 백제어, 신라어, 중세 한국어, 현대 한국어, 만주어, 퉁구스어, 여진어, 어웡키어(에벤키어) 등이 올라와 있다.

5. 같이 보기


[1]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고려조선의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음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만약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지방의 구 고구려, 백제권 지역들의 언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고려후백제가 탄생한 후삼국시대는 아예 개막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쪽의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 고려조차 초기에는 주현에나 겨우 현지 호족세력을 통제할 관원들을 보내는 수준이었다.[2]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3]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 신라 유민, 가야 유민, 개마국 유민, 옥저 유민, 동예 유민, 발해 유민[4] 고려시대 인구는 초기에는 400만명 정도였고 고려 중기 이후로는 전성기 시절 700만명에 달한 것을 제외하면 500~600만명 안팎이다.[5] 물론 '''9할 이상의 인구가 순수 신라인이란 얘기가 아니다.''' 통일신라 인구의 70% 이상은 구 고구려 유민, 구 백제 유민 등이 차지했을 것으로 보이고 그 중에 백제계가 가장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만 해도 120만명의 인구 중 최소 110만명 이상의 인구가 통일신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백제 인구 대다수는 일본보다는 한국의 왕조에 계승되었다. 조선 중기 야사집인 삼한습유기를 보면 김씨 성을 본관으로 삼는 성씨 중에 상당수가 고구려, 백제 유민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한국의 성씨에서 중국인의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 중에 알고보니 조상이 중국인이 아니라 고구려인, 개마국인, 옥저인, 백제인, 마한인, 신라인, 가야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나온다.[6] 나머지 1할은 발해 유민 인구(50만여명)를 말하는 것이다.[7]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8]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9]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10] 다만 남북언어 이원설 입장이라고해서 반드시 퉁구스어족설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현대 표준한국어와 제주어 수준의 차이였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한마디로 어족이 같아서 계통적으로는 가깝지만 서로 잘 통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11]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12] 이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저서에서 인용되었다.[13] 퉁구스어로 7은 'Nadan'이다.[14]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 → 삼척군(三陟郡)[15] 이에 대해서는 상대 특수 가나 표기법 항목의 サ행 파찰음설 참조. 대표적으로 千이 せん으로 옮겨진 것을 생각하면 된다.[16] 지명이 가진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런던(London)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서아시아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은 옛날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맨하탄, 퀘벡, 새스캐처원, 멕시코, 파라과이 등 아메리카의 지명들 역시 유럽 정복자들이 현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17]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18]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하며, 인도 아대륙이나 발칸 반도의 언어들, 현대 한국어현대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핀란드어가 이런 사례이다.[19]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차용 이외에는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다.[20]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라가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표기가 있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우리말을 한자로 적었을 뿐인 것도 몰랐으며 'n+r→ll'의 자음동화현상도 보지 못했다. 이 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인다.[21] 주로 만주계 중국인이다. 이들은 의외로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편으로, 중국 내에서도 비(非)한족 중에서는 '하나의 중국' 사상에 가장 크게 찬동하는 세력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주에 있었던 고대 국가들을 죄다 만주족(퉁구스계)의 역사이며, 중국사로 편입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사는 삼국 시대 기준으로는 신라로 축소된다. 다만 만주계 중국인들도 중화민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부정적이다.[22] 그러나 동류의식은 논박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 만약 고대 로마인들에게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고트족이 로마인들과 동류라고 말한다면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피꺼솟 할 것이다. 오히려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즉, 만약 정말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같은 어족이어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였다고 가정한들, 이는 오히려 그만큼 이 둘이 속한 어족 자체의 역사가 매우 짧음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학계에서는 동류의식과 무관하게 역사비교언어학적으로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는 완전히 다른 어족에 속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23]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 및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는 동일 계통의 단어이다. 일어서다는 한국어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24]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라인을 비롯해 더 북쪽에서 쓰이던 퉁구스 계통 여러 종족이 사용한 언어가 포함된 어족. 위 라인에 대해 첨언하자면 보통 말갈어→여진어→만주어 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본다.[2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보빈의 주장은 환빠들이 '''"고구려가 우리 역사니, 거란이나, 말갈족, 만주족 등도 전부 우리 민족이다!"''' 우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빈의 가설은 고구려어와 말갈어, 여진어 등은 잘해야 언어동조대 수준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분명히 한다. 다만, 언어동조대라는 점을 역이용해서 고구려어에서 차용한 듯한 어휘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이를 이용해서 고구려어의 기본적인 형태를 재구성했을 뿐이다. 굳이 근대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식민지 주민들의 언어가 식민제국 언어의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거란어와 만주어가 전자, 고구려어가 후자라고 볼 수 있다.[26] 놀랍게도 이러한 언어 중 거란어는 고대 고구려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거란족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민족은 다르지만 언어,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 해당연구[27] 대표적인 예가 만주어로 부처를 가리키는 푸치키(puciki). ~기 혹은 ~지를 통해 무언가를 존칭하는 형태는 고대 한국어에서 흔하게 쓰였는데, 퉁구스 계통 언어에는 이러한 존칭접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28] 위에도 적시했다시피 벡위드는 자음동화 무시나 무리한 한자음 재구 등을 통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저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벡위드는 중국티베트어족 언어들을 전공으로 공부하다가 중앙아시아 제어로 연구 분야를 확장해나간 경우이고, 보빈은 일본어 전공으로 시작해서 동북아 제어들로 연구를 확장시켜나간 경우이다. 적어도 일본어에 관련해선 보빈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29] 삼국시대 초기에도 아직 항해기술이 모자라서 얕은 황해를 건너가는 것도 힘들어 서해안과 요동반도의 연안을 따라서 중국과 교류했다. 낙랑군이 중국의 선진 문물의 매개지역으로서 삼한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중국과 직통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애써서 황해를 통과하는 직통 루트를 개발한 때는 고구려한테 털려서 한성과 서해안쪽을 잃어버린 이후이다.[30] 일본어에 비해 한국어가 역사언어학적으로 훨씬 따지기가 어려운데, 자료 부족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한다. 그래도 한반도~일본 열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언어 조사를 통해서 동질성이 나타나는 어휘들을 추리면 한반도 중심과 일본 열도 중심의 것들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추적해 확인할 수 있는 아이누어, 일본어 계열을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한국어 계열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한 추론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중국티베트어족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들 언어들은 한국어족보다도 역사언어학적으로 연구할 건덕지가 풍부해서 반박된다. 즉, 한반도~일본 열도의 옛 고유명사 중에서 일본어족으로로 보기 힘든 정체불명의 것들은 현재 전하지 않는 옛 한국어족 어휘이리라 잠정적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31] 보빈은 가야와 관계가 깊은 한국계 왕조가 일본 열도에 일정 기간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했으며 여기에서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인 시마가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했다.[32] 당시 의려왕도 자살했고 부여가 사실상 멸망했다고 여길 만큼 크나큰 타격이었다. 동부여가 이때 못 견디고 현 함경북도쪽 지역으로 대피해 떨어져 나간 분파인 듯하다.[33] 한반도 토양은 산성이라 유골이 부식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