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슈마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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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테르 슈마이켈은 덴마크의 前 축구 선수다. 그는 선수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로 활약한 월드클래스 골키퍼였다.
그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맨유는 피터 슈마이켈의 은퇴 이후 에드윈 반 데 사르를 데려올 때까지 뒷문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5][6]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슈마이켈은 1963년 11월 18일 덴마크의 글라드삭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덴마크 사람이었다. 슈마이켈은 아버지를 따라 1970년까지 폴란드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1970년 가족이 덴마크 국적을 획득하면서 그 또한 덴마크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는 1972년 8살의 나이로 지역 아마추어 축구 클럽인 회제-글라드삭스의 서브 골키퍼로 입단했다. 이후 회제-글라드삭스에서 2년 반동안 뛴 슈마이켈은 1975년 글라드삭스 히어로로 이적해 그곳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당시 글라드삭스 히어로에는 스벤 예지 한센 이라는 이름의 1군 코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유스팀에서 활동하는 슈마이켈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수시로 수뇌부에게 슈마이켈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훗날 그는 슈마이켈의 대부가 되어 그를 물신양면으로 지원해준다. 그러던 1981년 글라드삭스 히어로가 3부리그로 강등되자, 슈마이켈은 1군 멤버로 승격되어 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1군 경기는 IF Skjold Birkerød와의 매치였다. 이 경기에서 글라드삭스 히어로는 1:0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지역 신문지는 슈마이켈의 활약상을 높게 평가하는 논평을 남겼다.
그후 슈마이켈은 팀의 핵심 멤버가 되어 골문을 지켰고 덴마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연령별 축구 대표팀의 스쿼드에 소속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의 최고의 활약은 1983-84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펼쳐졌다. 당시 글라드삭스 히어로는 Stubbekøbing 와의 경기에서 패배하지 않아야만 강등을 면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슈마이켈은 이 경기에서 환상적인 선방을 연거푸 펼쳤고 글라드삭스 히어로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Stubbekøbing를 격파하고 잔류를 확정지었다. 경기가 종료된 후 슈마이켈의 대부인 한센의 딸 베티가 달려가 그를 껴안으며 함께 승리를 기뻐했다. 그후 두 사람은 커플이 되었다가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고 현재까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2.2. 브뢴뷔 IF
1984년, 피터 슈마이켈은 회비도브레 IF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에 30경기에 출장해 40실점을 허용했는데 이는 리그에서 5번째로 적은 실점 기록이었다. 하지만 회비도브레의 공격이 영 좋지 않아 14위에 그쳐 강등되고 말았다. 다행히 회비도브레는 한 시즌만에 우승을 차지해 1부리그에 복귀했고 슈마이켈은 이후 멋진 활약을 선보였으며 1986-87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노려봤지만 아쉽게도 브륀드비에게 밀려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브륀드비는 그의 활약상에 감탄해 1987년 그를 전격 영입해 주전 골키퍼로 삼았다.
슈마이켈은 브륀드비에서 훌륭한 경력을 쌓았다. 그가 브륀드비에서 뛴 다섯 시즌 동안, 팀은 리그를 4번 우승했다. 또한 1991 유로파 컵에서는 준결승전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준결승전에서 AS 로마에게 패해 결승전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슈마이켈은 이 유로파 컵에서 멋진 활약을 선보였기에 IFFHS(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가 주관한 "1991 세계 최고의 골키퍼" 투표에서 10위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슈마이켈이 1991 유로파 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는 걸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었다. 1991년 8월 6일, 슈마이켈은 50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맨유에 입단했다. 훗날 퍼거슨은 그를 영입할 때 사용한 이적료에 대해 "한 세기에서 가장 저렴한 거래"라고 묘사했다. 그를 데려오는데 쓴 이적료에 비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
슈마이켈은 처음에는 서브 골키퍼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지만 윔블던 FC와의 데뷔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퍼거슨의 눈에 들었다. 당시 윔블던 FC는 지저분하고 거친 플레이로 크레이지 갱이란 별명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날도 역시나 그런 모습을 마음껏 보여줬고 슈마이켈은 윔블던 공격수들의 팔꿈치로 찍기, 머리에 고의로 축구공 맞히기(...) 등 온갖 별의별 희한한 반칙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대의 무자비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주심을 부르며 묵묵히 골대를 지키는 침착한 모습을 보여줬다. 퍼거슨은 그야말로 맨유를 이끌 수문장으로 제격이라고 확신하고 이후 그를 주전 골키퍼로 중용한다.
1992-93 시즌, 슈마이켈은 22번의 클린시트를 달성하며 맨유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리그 우승은 맨유 역사상 26년만에 달성한 것이었으며, 프리미어 리그 개편 첫 시즌의 우승이었다.
하지만 그의 맨유에서의 생활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1994년 1월, 맨유는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3:0으로 이기고 있다가 그만 3:3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후 퍼거슨은 슈마이켈에게 엄청난 비판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슈마이켈은 퍼거슨이 "자신에게 끔찍한 소리를 해댔다"며 퍼거슨을 정면 비난했다. 이후 그는 몇 경기에서 선발 제외되다가 퍼거슨에게 사과하고 나서야 간신히 경기에 출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슈마이켈은 꾸준히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맨유가 1993-94 시즌과 1995-96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FA컵에서도 1994년과 1996년에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때 슈마이켈은 매 시즌 리그 30경기 이상을 출전해 꾸준히 안정적인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95-96 시즌에는 골키퍼로서는 2020년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하게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1996년 11월, 슈마이켈은 아스날과의 경기 도중 아스날의 스트라이커 이안 라이트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흑인을 모욕했다는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급기야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 바깥에서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후 슈마이켈은 인종차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언론은 FA에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FA의 조사결과 슈마이켈이 인종차별성 발언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고 결국 슈마이켈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선방들을 펼쳐 96-97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97-98시즌에는 리그 선두를 질주하다 시즌 막판 팀이 부진하며 아스날에 역전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맨유 선수단은 이것을 교훈으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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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2-1로 꺾고 난 뒤 얻은 빅 이어.''' 자세한 건 여기를 참고하시라.[7]
이렇듯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슈마이켈은 맨유의 레전드 골키퍼로 남았다. 그는 맨유에서 5번의 리그 우승(1992–93, 1993–94, 1995–96, 1996–97, 1998–99)과 3번의 FA컵 우승(1993–94, 1995–96, 1998–99), 한번의 리그 컵 우승(1991-92)을 달성했다. 특히 1999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캄 노우의 기적의 당사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며 빅이어를 획득했다. 이 시즌 트레블을 달성했다. 그는 맨유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8년간 활약하며 393경기에 출장했다.
그가 이적한 후에는 맨유가 마땅한 주전 골키퍼를 찾지 못해 반 데 사르가 오기 전까지 고생한다.
2.4. 스포르팅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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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슈마이켈은 36세가 되자 새로운 도전을 위해 포르투갈의 스포르팅으로 이적했다.
그는 이 팀에서도 역시나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스포르팅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1999-2000 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스포르팅 역사상 18년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그는 다음 시즌에도 활약하며 스포르팅이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후 2001년 6월, 슈마이켈은 스포르팅을 떠나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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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아스톤 빌라로 이적한 슈마이켈은 2001년 10월 20일 에버튼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EPL 역사상 최초로 필드골을 기록한 골키퍼로 기록되었다.
이후 슈마이켈은 한 시즌 동안 아스톤 빌라에서 활동하다가 2002년 계약이 만료되자 팀을 떠났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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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슈마이켈은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했다.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맨체스터 시티는 슈마이켈이 전성기를 보냈던 맨유의 지역 라이벌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맨시티 이적 이후 맨유와의 경기에 출전했을 때 게리 네빌은 슈마이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로 일관했다.[8]
그리고 얄궂게도 슈마이켈이 활약한 2002-03 시즌에서 맨시티는 맨유를 상대로 홈에서 3:1 승리를 거두었다. 원정에서 슈마이켈은 출전하지 않았지만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1무로 우위를 가져갔다.
맨시티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2003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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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마이켈은 1987년부터 2001년까지 129경기에 출전하여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국가대표 활약상 중 정점은 유로 1992다. 그는 이 대회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덴마크 축구의 국제 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다. 준결승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으로서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마르코 판바스턴의 PK를 막아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국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무수한 선방을 보여 준 끝에 끝내 조국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그는 이러한 활약으로 각종 상을 휩쓸며 1992년을 자신의 해로 장식했다.[9] 슈마이켈은 유로 1992에서의 맹활약으로 1992년에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3위를 차지하면서 골키퍼 사상 최초로 포디움에 든다.'''[10]
이후 슈마이켈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고, 덴마크는 8강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 선전했지만 3-2로 아쉽게 석패했다.
본인의 마지막 국대 메이저 대회 유로 2000에서는 주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조별리그에서 3전 전패, 무득점 8실점이라는 굴욕을 맛봤다. 이후 슈마이켈은 2001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4. 플레이 스타일
191cm 100kg의 거대한 신체, 강력한 어깨와 같은 피지컬적인 능력도 대단했고, 수비진 조율에도 상당한 강점을 보였다. 경기 내내 수비진들에게 꽥꽥 고함지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뛰어난 반사 신경과 날렵한 다이빙이 겸비된 그의 선방 능력은 당대 최고를 넘어 역대 최고를 논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가히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던 선수였다. 이러한 강점을 통해 1990년대를 대표하는 골키퍼가 되었고, 190cm를 상회하는 장신을 통해 공중볼 처리에도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어깨가 상당히 강해 페널티 박스에서 공을 던지면 하프라인을 넘어 상대 진영까지 연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역습 과정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또한 적절한 판단으로 앞으로 나와서 롱패스와 역습을 미리 차단하거나 추가 시간 세트피스 기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뛰어난 헤더 능력을 통해 통산 '''9골'''이나 기록하는 등, 현대의 스위퍼 키퍼까지 연상시키는 완벽한 골키퍼였다.
그가 시대를 앞서갔음을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있는데, 바로 플레이 영상이다. 1960년대의 레프 야신, 고든 뱅크스나 1970년대의 디노 조프, 제프 마이어, 1980년대의 리나트 다사예프나 피터 쉴튼 등의 플레이를 보면 지금의 골키퍼들이 플레이하는 모습과 조금 차이가 있다. 공을 던지는 모습이라든지, 다이빙 자세라든지... 그러나 슈마이켈의 플레이를 보면 확실히 현대의 골키퍼들과 비슷하다. 슈마이켈이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유로 1992가 열린 지 3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5. 평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은 '''1990년대 최고의 골키퍼이자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는다. 축구 역사를 통틀어 그와 비슷한 위상을 가졌던 골키퍼는 고든 뱅크스, 디노 조프, 제프 마이어, 피터 쉴튼, 올리버 칸, 잔루이지 부폰, 이케르 카시야스, 마누엘 노이어 정도를 꼽을 수 있고, 프리미어 리그 내에서는 그나마 페트르 체흐만이 그와 비슷한 위상을 가졌다.[11]
6. 기록
6.1. 대회 기록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1~1999)
- 프리미어 리그: 1992-93, 1993-94, 1995-96, 1996-97, 1998-99
- FA컵: 1993-94, 1995-96, 1998-99
- 풋볼 리그 컵: 1991-92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8-99
- UEFA 슈퍼컵: 1991
- FA 커뮤니티 실드: 1993, 1994, 1996, 1997
- 아스톤 빌라 FC (2001~2002)
- UEFA 인터토토컵: 2001
-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92
6.2. 개인 수상
- 덴마크 올해의 골키퍼: 1987, 1988, 1990, 1992
- 덴마크 올해의 축구 선수: 1990, 1993, 1999
- PFA 올해의 팀: 1992-93
- PFA 세기의 팀[13] : 2007
-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14] : 1995-96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15] : 2003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베스트 XI[16] : 2012
- IFFHS 세계 최우수 골키퍼: 1992, 1993
- UEFA 올해의 클럽 골키퍼: 1997-98
- UEFA 챔피언스 리그 10시즌 올스타팀[17] : 2002
- 베스트 유러피언 골키퍼: 1992, 1993, 1998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2
- FIFA 100: 2004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92
- 옹즈 드 옹즈: 1992
-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 2009
- 월드 사커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7. 은퇴 이후
슈마이켈은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방송인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영국의 공영방송 BBC의 축구 전문가로서 2005년까지 Match of the Day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덴마크 TV 채널인 TV3+에서 브라이언 라우드럽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경기 중계를 맡았으며 종종 BBC 축구 전문가로 출연해 축구에 관한 전문 지식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2007년, 슈마이켈은 그의 전 소속 클럽인 브륀즈비에 3350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하려는 사업가 그룹에 포함되었고 뒤이어 브륀즈비의 축구 디렉터로 부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브륀즈비 수뇌부와의 협상에서 타결에 실패함에 따라 슈마이켈의 브륀즈비 축구 디렉터 부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간간히 아들 카스퍼 슈마이켈의 경기를 보러 다니는 듯 하다. 레스터 시티의 경기에 자주 등장한다.
8. 여담
- 당시 맨유의 센터백이었던 스티브 브루스, 게리 팔리스터와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관계였다고 한다. 저 둘이 수비 못 한다고 슈마이켈이 뛰어 나오면서 호통 치면 둘이서 '골키퍼는 골대나 지키라'며 투닥거리는 식(...). 퍼거슨 감독에 따르면 이건 그라운드 위에서만 그런 거고 사적으로는 좋은 친구들이라고 카더라.
- 로이 킨하고도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킨이 슈마이켈에 대해 언급할때 늘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는 말을 붙인다. 이 둘은 1998년 프리시즌 기간에 한 호텔에서 진짜로 치고받으며 싸우기도 했다.[18] 다만, 사적인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을 뿐이지 킨은 항상 슈마이켈을 최고의 골키퍼였다며 극찬을 한다.
- 부자가 모두 축구선수인데, 아들인 카스퍼 슈마이켈도 골키퍼로서 레스터 시티 FC에서 활약 중. 14-15 시즌 준수한 활약으로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는 데 공헌했다. 15-16 시즌, 레스터 시티가 EPL 우승을 확정 지으면서 부자가 모두 EPL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자신이 29살의 나이에 5월2일날에 맨유의 우승을 확정 지었고 아들도 29살의 나이에 5월 2일 우승을 확정 지었다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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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 두 번의 기적을 경험하였다. 첫번째는 유로 1992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하면서 덴마크의 사상 첫 유로 및 메이저대회 우승을 이끌고, 두번째는 1998-99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트레블이 완성된 캄프 누의 기적이다.
9. 슈마이켈에 대한 헌사
'''1991년 8월에 50만 5천 파운드에 계약했을 때, 그 가격은 축구 역사상 가장 큰 할인가였다. 우리와 함께 한 시간 내내 그는 우리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바르셀로나에서의 완벽한 유러피언컵 우승도 그 증 하나다. 슈마이켈은 세계 최고의 골키퍼였다.'''
'''개인적으로 역대 골키퍼들 중 최고 한 명을 꼽는다면 페테르 슈마이켈이다. 간단히 말해 슈마이켈은 최고다. 나는 꼬마 시절에 슈마이켈의 플레이를 처음 봤고, 당시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중략) 그는 환상적이었다. 난 그가 완벽한 선수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슈마이켈 같은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는 내 영웅이 되었다. 난 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난 슈마이켈보다 나은 키퍼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상대한 골키퍼 중 최고였다. 엄청났다. 신들린 선방에 믿을 수 없는 경력을 지녔다.'''
'''상대팀 골키퍼로 정말 만나기 싫었던 선수였다.'''
'''데헤아는 훌륭한 선수다. 현시점에서 그는 최고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데헤아보다 슈마이켈을 더 좋아한다. 데헤아가 맨유를 많이 도왔기 때문에 그를 슈마이켈과 비교하지만, 슈마이켈이 더 좋은 선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안드레이 칼첸스키스
10. 관련 문서
[1] 2001년 명예 수훈, 5등급 대영제국 훈장 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이 가운데 이름은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3]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자.[4] 친선 경기에서 PK로 넣었다. 영상 3:02부터.[5] 이 사람 이후의 후임자는 프랑스 국가대표 주전골리를 도맡은 파비앵 바르테즈였다. 분명히 경력과 실력은 있었고 2000-01 시즌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될 정도로 첫 시즌에는 나름 성과를 보였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는 고질적인 '''기름손''' 문제 때문에 페페 레이나나 빅토르 발데스와 나란히 할만한 예능감각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다시 배턴을 넘겨받은 선수는 재능만 충만했던 미국 국방부 장관 팀 하워드. 하워드는 결국 에버튼에 가서야 재능이 만개했다.[6] 그리고 반 데 사르가 은퇴한 뒤 데 헤아가 각성하기 전까지 맨유는 또 뒷문 불안에 시달렸다. 다만, 슈마이켈에서 반 데 사르 사이의 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반면, 데 헤아는 한 시즌만에 각성했기 때문에 반 데 사르 은퇴 후, 골키퍼 불안은 금방 해결되었다.[7] 빅 이어를 들어올린 1998-99 시즌에는 FA컵과 리그까지 모두 우승하여 '''트레블'''을 달성했다. 한 마디로 맨유 창단 이래 최고의 시즌.[8] YOUTUBE영상에 올라온 장면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슈마이켈이 터널에서 도열한 맨유선수단에게 인사한것이 아니라 도열한 선수들에게 도열해있는 위치가 맨시티 선수단이 입장해야할 위치여서 네빌에게 전한거고 네빌도 맨처음에 손을 내밀다가 이내 내용을 듣고 자리를 바꿔주었다 물론 썩 표정이 좋아보이진 않았다.[9] 기자단이 선정한 유로 1992 MVP에 뽑히기도 했다. 유로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MVP를 뽑은건 유로 1996때부턴데 만약 이때 공식 MVP를 뽑았다면 슈마이켈은 유로 역사상 유일한 골키퍼 MVP 수상자가 될 수도 있었다.[10] 이후 2014년에 마누엘 노이어가 2위를 차지하면서 골키퍼로서는 사상 두 번째로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포디움에 드는 기록을 남긴다.[11] 물론 더 위로는 넘사벽의 존재인 레프 야신이 버티고 있다.[12] 덴마크 FA컵[13] 1907~2007[14] 역사상 유일한 골키퍼 수상자이다.[15] 1992~2002[16] 1992~2012[17] 1992~2002[18] 참고로 슈마이켈은 이 싸움 때문에 눈가에 멍이 들었고(킨은 손가락이 꺾였다고 한다) 기자회견에서 훈련중 다친거라 둘러댔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둘을 따로 불러내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하며 너네 둘이 그때 싸웠냐며 추궁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둘의 싸움을 보비 찰튼이 목격해서 퍼거슨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킨은 속으로 보비 찰튼이 둘의 싸움을 말리지 않은걸 원망했다고(...). 싸움 자체는 슈마이켈이 자기가 잘못했으니 책임을 지겠다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