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
官軍
1. 일반적인 의미
전근대 동북아에서 왕조의 조정(朝廷)에 속한 정부군를 이르는 말. 글자 그대로를 풀이해보자면 관(官)에 속한 군대를 뜻한다. 고대 중국의 3성 6부에서는 병부(兵府), 조선시대에는 6조 체제의 병조(兵曹)에 속한 병사들을 일컬으며 사병(私兵)과는 반대가 되는 말이다. 그야말로 정규군 혹은 정부군이라 지칭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관군의 의미는 수시로 변해왔다. 그 예로 동아시아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고대 중국의 주나라 시대에는 천자는 전차 1만승(乘)과 6군을 거느린다고 했으며 제후는 전차 1천승과 3군을 거느린다고 했다. 물론 천자의 군대가 관군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는 각지에서 왕(王)을 칭하였기 때문에 관군이라 부를 대상이 없었으며 진나라 시대에 이르러 전국을 통일했으니 통일 이후의 진나라 군대를 관군이라 할 것이다. 이후 초한대전으로 중국이 사분오열 되자 또다시 관군이라 부를 대상이 없다가 한이 통일을 이루어 이후의 한나라 군대를 관군이라 부를만 하다. 즉, 어지러운 난세에는 그 누구나 자신의 세력이 정통성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관군'이라 부를 대상이 없으며 난세가 평정된 다음부터 '명분 있는' 정부군, 즉 '관군'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중국의 전통사서에서는 '관군'보다는 '관병'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또한 관군의 반대말로 반란군을 들 수 있겠다. 관군은 당시의 정부군을 뜻할 뿐이지 정의로운 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의 '관군'은 어느 시대에는 명분없는 약탈자, 압제자의 모습으로, 또 어느 시대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는 명분있는 군대를 뜻하기도 한다. 예로 들자면 가병(家兵)으로 고려 말기의 난세를 평정하는데 앞장섰던 이성계의 '가별초(家別抄)'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가별초란 이성계의 사병으로서 그의 무력기반이 되었던 사병조직으로 최대 2천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성계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데에 제일 선봉에 섰으며 '황산대첩', '개경 재탈환' 등 굵직굵직한 전투에서도 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 본질은 사병으로서 관군은 아니었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의흥삼군부' 를 두었을 때는 국가조직에 소속되어 관군이 되었다가 이성계가 가별초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평등하게' 상속하자 각기 아들들의 무력기반이 되었다. 물론 이후엔 '제 1,2차 왕자의 난' 이 발발하였으며 태종이 즉위한 뒤엔 해산되어 민호(民戶)로 편입되었다.
이처럼 관군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상이하나 '정부군'이라는 의미로 통하지만 현대에는 '국군', '국방군' 등의 신식 호칭에 밀려 사장되었다.
동학 농민 혁명을 배울때 관군의 뜻은 대부분 조선군을 의미한다.
2. 일본에서의 관군
천황이 통치하는 조정(朝政) 휘하에 소속된 군대였으며, 대장군(大將軍)이 지도하는 군대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군이란 막부(幕府)의 수장인 쇼군과는 이름만 같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무사가 조정의 벼슬을 반협박으로 받아낸 것이고, 원래의 정이대장군은 조정의 무관이 군대 소집시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것이었다.
즉 사무라이들이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는 봉건제 군대는 관군이 아니었으며, 사병(私兵)이다. 마찬가지로 조정이 직접 군대를 움직이거나 무사단에게 밀지를 내려 관군으로 임명하여 군역을 맡기는 전쟁일 경우는 공전(公戰)으로 인정되어 조정이 벌이는 전쟁이지만, 조정의 지시 없이 사사로이 벌이는 무사단끼리의 가독분쟁이나 전쟁은 사전(私戰)으로 여겨졌다.
관군이 되면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인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를 수여받는다. 무늬가 들어간 붉은 비단에 황금색 원이 들어간 형태로, 일장기(日の丸)의 원조쯤 된다.
일본에서는 무사에 의한 군정이 수백년간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관군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율령제 붕괴 이후로는 조정이 관군을 편성할 능력도 입장도 되지 못했다. 실제로, 다이묘들은 100고쿠다카당 2.5명의 병사를 소유할 경제력이 있었으나[1] 천황의 경우 영지가 없으므로 병사들의 녹봉을 줄 수 없었으니 당연히 군대의 편성도 불가능했다. 그 대신 조정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조정에 충성을 맹세한 무사들의 군대가 관군이 되어 다른 무사들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는데, 가마쿠라 막부 초기와 말기, 남북조 시대에 천황측 무사들이 관군의 이름을 부여받아 막부측과 전쟁하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질권력은 막부에 있었지만 그래도 관념상 천황과 조정은 한참 위에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관군이 되면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그대신 관군에 대항하는 군대는 통칭 적군(賊軍) 또는 조적(朝賊)으로 불리며, 조적으로 규정된 군대는 사기가 엄청나게 떨어졌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죽은 이후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하는 관군을 일으키자 가마쿠라에서는 사기가 크게 떨어져 술렁거리던 것을 호조 마사코의 연설로 겨우 다잡을 정도였고, 그러고도 천황이 친히 출정하면 항복할 방침일 정도였다.
그러나 무사정권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관군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권위를 내세우기 힘들어졌고, 대응하는 측도 천황 주변의 간신들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약빨이 예전같지도 않았다. 무로마치 막부쯤 되면 아예 천황을 따로 옹립할 정도. 에도 막부쯤 되면 더 안습해져서, 막부의 보조금이나 타먹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관군을 내세울 처지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이런 입장이 반전된 것은 막부 말기의 혼란속에서 확산된 국학(國學) 때문. 서양열강의 침탈속에서 외국에 순순히 문호를 개방한 막부를 처단하고 천황을 다시 모시며(尊王)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攘夷)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이 젋은 무사들을 휩쓸면서 조정이 다시 힘을 얻게 되고, 금문의 변에서는 쵸슈번을, 무진전쟁에서는 막부를 조적으로 규정하는 등 명분제조기의 입장까지 회복한다. 대략 기준은 조정이 소재한 교토를 공격하면 조적(...) 유신웅번인 쵸슈는 강경론에 몸을 맡겼다가 교토를 공격하고 조적이 되어 털렸고, 막부는 사쓰마-쵸슈의 궁정 쿠데타를 무위로 되돌리고 정치적 우위를 되찾기 위해 토바-후시미 전투를 벌였다가 졸지에 조적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일본인들이 흔히 관군하면 떠올리는 건 이 무진전쟁 당시의 군대들이다. 즉 사쓰마-쵸슈-토사번의 유신웅번군. 이들 군대를 신정부군(新政府軍)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안습했어도 천황과 조정은 하늘 위의 존재처럼 일반인들에게 인식되어 있었고, 관군으로 인정되자 유신웅번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비해 막부육군은 눈앞에 니시키노미하타가 나타나자마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할 정도.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관군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았고 근대화가 되면서 국군[2] 또는 정부군, 일본군이라는 말을 쓴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이후에는 헌법이 개정되어 군대조직이 일단은 없어졌고 천황 직속도 아니기 때문에, 자위대를 관군이라고 부르면 다들 이상하게 본다. 자위대는 창설 당시에 치안유지를 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경비대 즉, 보안대로 불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군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관군으로 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