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

 



<colbgcolor=#13C481><colcolor=#FFFFFF> '''김장훈
金章勳 | Kim Jang Hoon'''
'''출생'''
1963년 8월 14일[1] (60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국적'''

'''본관'''
김해 김씨
'''본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신체'''
187cm,[2][3] O형
'''직업'''
싱어송라이터, 방송인, 공연 기획자 및 감독, 수필가, 사회운동가[4], 배우, 유튜버, 강연가, 사업가(의류 및 화장품), 신앙인[5]
'''가족'''
어머니 김성애[6], 누나 2명
'''학력'''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졸업)
서울광성중학교 (졸업)
마포고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7] (합격)
경원대학교[8] (영어영문 / 중퇴, 명예졸업)
'''종교'''
개신교(예장중앙)[9]
'''소속사'''
FX솔루션
'''데뷔'''
가수: 1991년 1집 앨범 〈늘 우리사이엔〉
집필활동: 2016년 〈나를 도발한다〉
유튜버: 2019년
'''장르'''
발라드, , 댄스 팝[10]
'''별명'''
'''숲튽훈(김튽훈, 숲장훈)'''[11], 독도지킴이, 갤주님[12], 신생아[13], 기부천사[14]
'''특기'''
하모니카 연주, 무대 연출, 김국진 성대모사, 언어유희[15], 소리 내지르기, 발차기[16], 깡[17], 언변[18]
'''링크'''

1. 개요
2. 상세
3. 심각한 발성 문제
4. 숲튽훈으로 재기, 그리고 컨텐츠화
4.1. 숲튽훈으로서의 유튜버 활동
7. 인간관계
7.1. 김현식과의 관계
7.2. 유희열과의 관계
7.3. 윤종신과의 관계
7.4. 싸이와의 관계
7.5. 김장훈 왕팬과의 관계
9. 대표곡
10. 연기 활동
11. 저서
12. 정치 성향
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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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싱어송라이터,[19] 방송인, 공연 기획자,[20] 수필가, 사회 운동가, 사업가,[21] 유튜버이자 강연가,[22] 집시[23]이기도 하다.

2. 상세


언더계에 머무르며 음악 활동을 하다, 가족의 빈곤을 버티지 못해 방송활동을 시작하였다. '나와 같다면', '사노라면',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을 히트시켜 정상 가수 반열에 올랐었다. 또 음악계에 몸담으며 음반 프로듀서와 싱어송라이터로도 활약했으며 그가 고안해낸 연출은 공연계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스스로의 공연을 연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소라, 최재훈 등의 가수 콘서트를 연출하였으며, 외국 뮤지컬의 특수효과 연출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긴급조치 19호[24][25]라는 영화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으며 그 이후 소박하지만 꽤 자주 주조연을 맡으며 연기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인터넷상에서는 숲튽훈[26]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노래를 잘하던 시절에는 가수 김장훈, 못하는 현재에는 농담삼아 '숲튽훈'이라고 한다. 요새는 '차에 타봐', '', '어디가요 오빠' 등의 괴곡으로 재주목 받은 가수 , '비단길', '이 노래 웃기지' 등으로 흥한 시아준수와 더불어 젊은 층 사이에서 인터넷 밈이자 개그 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실제로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 층이 댓글을 수백 개씩 달며 핫한 컨텐츠화가 되어가는 중. 김장훈 본인도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만, 크게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진 않다.[27] 또한 자숙 이후 방송 출연을 적게 하며 공연에 대한 홍보 부족을 인식했는지 유튜브 계정을 생성하여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유튜버로 데뷔하였으며 "숲튽훈" 컨셉의 인기로 여러 영상이 히트하였다.[28]
2019년 유튜버[29]로 데뷔하여 진행한 유튜브 생방송[30]에서 어떤 시청자가 "숲튽훈에 대해서 알고 있냐"라고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으로 "알고 있으며, 처음에는 조롱조로 시작했으나 이 때문에 몰려온 팬들 덕에 이미지가 좋아진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좋게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유튜브의 밈인 "김장훈vs숲튽훈"으로 발성을 선보이기도 하였으며[31] 숲서트"라고 이름붙인 숲에서의 콘서트도 열 정도이니 10대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숲튽훈"밈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는 듯 하다. 그러나 본인에 관련된 밈을 100% 숙지한 조혜련과 달리 완벽히 아는 것인 아닌지 나중에 채팅창에 올라온 "으락캬!!" 등의 유행어는 몰라보았다. 또한 방송내내 "숲튽훈"을 "숲장훈"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점점 그 밈에 대해 정보가 늘어가는지 현재는 "숲튽훈" 컨텐츠에 대해 꿰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프로필상으로는 1967년생이지만 이는 실제 생일이 아니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으며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그의 출생년도가 밝혀진 적이 없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위라는 증거들이 많다. 그 중 결정적으로 봄여름가을겨울1962년생인 김종진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 나와 '장훈이가 나보다 1살 어리걸랑요?'라고 말한 걸로 보아 아마도 1963년생이 정확한 출생년도로 추정된다. 물론 김장훈도 방송에서 봄여름가을겨울에 관련된 얘기를 할 때는 '종진이 형'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김장훈 다음으로 기부를 많이하는 박상민이 1964년생인데 김장훈을 언급하며 "내가 기부하는게 알려지나 싶으면 '''그 형'''이 한번에 기부를 너무 많이하잖아요"라고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63년생인게 기정사실화 되었고 1963년 생이라면 2017년 기준으로 53 ~ 54세이므로 1963년생이라는 것이 유력하다[32]. 가수 이승환1965년 생인데, 라디오 방송에서 형이라고 불렀다가 혼났다는 얘기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설이 있지만 상술 했듯이 2012년 당시 영상을 보았을 때 49세로 나온걸 보면 1963년생이 맞다. 주민등록상으로 1966년생이나 본인 주장으로 1962년생이라고 하는 임재범의 경우 다른 1962년생을 형님으로 모시거나 몇년마다 주장하는 나이가 수시로 바뀌어서 신뢰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김장훈의 경우 다른 연예인들이 일괄적으로 1963년생으로 대하는 걸 보면 방송용 나이만 다를 뿐 정확한(주민등록상) 나이가 1963년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승철만 하더라도 슈퍼스타K 심사 중 김장훈 얘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장훈이 형"이라고 지칭했는데, 한살 많은 이승환에게도 형이라고 잘 안 할 정도로 자존심이 세다.[33] 김장훈이 확실히 몇살 많다는 확신이 없으면 형이라고 할 가능성이 적다. 결정적으로 이 영상의 1분 18초를 보면 김장훈의 이름 옆에 49Y가 표시되어 있다. 병원에선 '''본인의 정확한 인적사항을 적어낸다는 점과 촬영시점인 2012년 8월 기준으로 49세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1963년생이 맞다.'''
어린 시절 몸이 매우 약했다고 한다. 조그만한 감기에도 실신할 정도였다고. 약한 몸 탓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생각했고, 그로 인해 중학생 때부터 많은 싸움을 벌여왔다고 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그가 가수로 데뷔한 이후에도 가요계에서 잦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 연습하던 중 김장훈의 어머니의 친한 지인의 아들인 김현식을 만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가까워지기 시작하며 김현식은 김장훈이 언더에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형편이 어려울 때는 서로의 집에서 자기도 했을 정도라고.
1990년 10월 김현식이 작고한 후 김현식의 사촌 동생[34]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러 시상식에서 '내 사랑 내 곁에(를 대신 부를 인물로 선정되었지만, 스스로가 김현식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해 방송을 펑크내면서 7년간 방송 출연을 금지당하게 되고, 결국 1991년에 1집 앨범 '늘 우리 사이엔'으로 언더에서 데뷔했다. 그렇게 방송 출연 금지가 풀린 1998년까지 언더에서 계속 활동하며 500여차례가 넘는 공연을 가졌다. 1998년 방송 출연 금지가 풀린 이후에도 계속 언더로 활동 하려다가 어머니가 고생하는 걸 볼 수 없어 대중가수로 데뷔했다고 한다. 3집까지는 인지도가 낮아서 3집을 낼 때 기획사와의 합의로 직접 앨범 표지에 3집이라는 언급은 못했고 그 대신 그림으로 "삼(인삼)"과 "집"으로 표시했다고 한다.[35] 3집의 타이틀 곡이 그 유명한 노래만 불렀지이다.
4집부터 가난한 가족을 돕기 위해, 그 외에 여러가지 이유로 언더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래서 대중적인 가수들의 발라드를 받아 부르기 시작했고, 방송에 나가면서 웃긴 가수의 이미지를 쌓았으며, PD와 싸우거나 방송펑크내지 않기로 했다. 대중적인 음악을 할 것, 방송출연 할 것, 싸우지 말 것, 세 가지 약속을 한 후에야 하나음악과 전격 계약했고 이때부터 서서히 곡 인기와 인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즉, 한때는 가요계의 대표적인 기부천사였다.
1998년에 발표한 4집에 수록된 '나와 같다면[36]'이 흥행하면서 무명가수에서 벗어났다.[37]
1999년 발표한 5집의 "오페라[38]"가 2000년 즈음에 라이코스병맛나는 광고에 삽입되면서 인지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5집 타이틀곡은 '슬픈 선물'이다.
2000년 6집의 '혼잣말'과 유희열에게 의뢰하여 얻은 '난 남자다'[39]또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1위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KBS 뮤직뱅크에서 수상했고, 당시 상대는 S.E.S.의 <감싸 안으며> 였다.
2001년 7집 앨범은 대중적인 히트는 치지 못했지만 마니아 층을 상대로 꾸준히 사랑받았고, 2002년 7월에는 긴급조치 19호의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도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 2002년 12월 크리스마스 연말 공연 '아듀'를 끝으로 UCLA로 유학을 떠난다 전하고 3년간 소식이 없었다. 그 유학이라는 게 공개 강좌한 과목만 들은 거지만.... 유학 시절 박경림과 자주 교류했다고 한다.
기부나 독도 알리기 등 사회 운동으로 유명하고 호탕한 퍼포먼스와 곁들여져 전성기 시절에는 굉장한 호감 연예인이었으나, 후술할 싸이와의 갈등, 저작권 문제, 추모식 욕설 사건 등의 구설에도 많이 얽혀 대중적인 호감은 현재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이다. 그러나 '숲튽훈' 개그 영상과 본인의 호탕한 모습으로 10~20대에게 이름을 알리며 다시 팬층이 모이고 있다.

3. 심각한 발성 문제




김장훈의 가창력을 깔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클립
가창력이 '''아주 형편없다고''' 평가받는 가수들 중 1명이며, 데뷔 시절부터 가창력이 그렇게 좋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특징이 있다면 진성으로만 노래하는 가수이며[40] 가성구가 손상되어 가성을 거의 쓸 수가 없다. 사실 테크닉적으로 봤을 때는 발성이 안정적이지 않아[41] 소위 말하는 '''생목''' 목소리가 나기도 한다.
사실 가수로서의 피지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굵직하면서 듣기 좋은 음색을 가졌고 폐활량도 좋았으며 음역대도 저음에서 고음까지 매우 넓었다.[42][43] 성량도 큰 편이라[44] 관객들을 다 사로잡을 정도였다. 문제는 발성이 나쁜 발성의 전형인 인골라[45]라서 음이 올라갈 때마다 목을 조이게 되었고[46][47] 거기에 술담배까지 즐긴 탓에 늙어서는 타고난 피지컬을 잃어버렸다.
데뷔 초기~ 중반기였던 2000년대 초반까지는 타고난 음색과 젊음에서 나오는 피지컬이 받쳐주었고, 또 영향받은 가수가 에어로스미스스티븐 타일러[48]등의 해외의 락커들과 김현식[49], 전인권[50]등의 국내의 철금성(쇳소리)나는 가수들이어서 가성을 거의 구사하지 않는 스타일을 무기로 꽤 특색있고 괜찮은 가창을 들려주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특유의 반가성과 가성도 나름 안정감 있게 나왔다.[51]
문제는 이후에 여러 차례 목이 망가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가성을 구사하려고 해도 소리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아지면서 가창력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 본격적으로 목이 망가진 것은 90년대 말부터로, 그는 이미 1998년 성대결절 판정을 받았었다.[52] 성대에 혹이 나 있어서 그 혹을 떼어 내야 했는데, 김장훈은 소리를 심하게 지르면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수술을 거부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2000년대 후반에 들어가며 가성을 못 낼 정도로 성대가 상해버렸다.
슬슬 목 관리에 들어가기라도 해야겠지만 본인의 음주, 흡연 습관까지 더해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거기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9집 활동과 2009년부터의 목소리 변화이다. Honey가 수록된 9집 활동 때 목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자주 구사한 바람에[53] 목이 심하게 망가졌고, 후술하듯이 결국 2009년부터는 성대 노화로 인해 고음부에서 목소리가 억지로 내는 것처럼 얇아지게 되었다.[54][55] 이러한 상태로도 2011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라이브를 선보였으나 2012년~2013년 즈음에는 목이 더 망가졌고 라이브가 많이 불안해졌으며 2014년부터는 아예 고음의 음색이 흔히들 말하는 '''소리'''로 변해버렸다. 이은미가 '언더 시절에는 음 하나 더 내보고 노래 좀 더 잘해보려고 선배들한테 묻고 다니던 게 방송에 맛들려서 노래 연습 안 한다'고 깠다가 김장훈이 인터뷰에서 '목이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받아쳤을만큼 목이 심각하게 망가진 것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 성대가 망가지며 가창력으로 승부하기에는 한계를 본 김장훈은 2000년대 중반부터 노래실력보다 퍼포먼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영상들을 보면 정말 가수인데도 불구하고 심한 겉멋과 프로답지 않은 무대 퍼포먼스[56]로 엄청난 호불호가 생겼고, 게다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목 상태까지 맛이 가버리며 노래실력 자체는 정말 참담한 수준이다. 27년차 가수 김장훈이 가창력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이 핫하기 때문이라 하지만 '''노래를 정말 못 하는 가수'''라는 표식어가 맞다는 평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전 라이브를 접한 사람들의 평마저도 '''과거에는 잘했지만 지금은....''' 혹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변했다.''' 라고 할 정도로 현재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하다.
음정을 못 맞춘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음병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음감 자체는 좋은 편인데 허구한 날 지르는 것 때문에 '음을 못 맞춰서 저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애초에 음감이 좋지 않았다면 보정이 없었던 90년대에 레코딩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57] 그리고 2010년대부터 고음을 낼 때에 목소리가 조금 기괴하게 변하는데[58] 2000년대 라이브에서는 비슷하게 지르는데도 갈라지지 않고 수월하게 나왔던 것을 보면 성대 노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금도 고음 없이 노래를 부르면 2000년대 음색이랑 큰 차이는 없고 그렇게 샤우팅을 해대는데도 아직 노래 부르는게 가능하긴 한걸 보니 성대 노화가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2007년, 고음이 깔끔했던 '사노라면' 라이브를 보면 지금과 엄청 다른 것을 알 수 있다.[59][60]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09년 이전까지는 저음에서의 좋은 음색이 2옥타브 중반 이상의 고음에서도 유지되어서 고음에서도 평이 좋았다.[61] 물론 이로 인해서 목이 많이 상해 버렸지만.
가장 상태가 심각했던 시절은 2015~ 2016년이다. 특히 2016년에는 신생아 창법과 떼쓰기 창법, 그리고 일렉기타 창법을 보여줬을 만큼 사실상 가수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라이브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여러 사건사고와 안 좋아진 이미지까지 더해졌기에......
음정보다도 문제인 것이 엇박을 심하게 타는 건데, 2008년부터 시작된 문제로 점점 심해지더니[62] 2016년 라이브에서는 반주가 김장훈에게 맞춰야 하는 상황까지 되었다.[63] 반주고 뭐고 그냥 막 부르는 수준.
또한 목 관리를 잘 하지 않는 가수로 매우 유명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매일 같이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렀고, 이는 프로로 전향한 뒤에도 이어졌다. 이런 습관은 김장훈의 성대를 망가뜨렸고 거기에 골초, 주당인 특성까지 더해져 목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 현재도 목 관리를 크게 하지 않는 건 여전해서, 목을 상하게 하는 잘못된 발성을 기반으로 한 샤우팅을 계속 지르거나, 공연 중간중간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는, 성대 건강에 최악인 습관들을 더러 가지고 있다. 동년배 가수인 이선희나 까마득한 선배인 조용필 등이 철저한 목관리로 현재도 좋은 사운드를 내는 것과 대비될 정도다.[64] 물론 재즈나 블루스 혹은 실험적인 밴드음악 같은 경우 보컬들이 목관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공연 중간에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장르의 보컬들은 자기가 낼 수 있는 한계를 억지로 넘지 않으며, '표현'에 집중하는 보컬들이다. 그러나 김장훈은 주된 장르를 락발라드로 하는 가수이고 락발라드는 보컬의 한계를 늘 넘나들어야 하는 장르이다. 블루스 보컬들이 담배를 물고 '필'에 취해 노래부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고, 깨끗하고 건강한 성대, 탄탄한 발성과 피지컬로 압도해야 하는 장르인 것이다. 즉 아무리 좋게 봐도 김장훈의 이런 태도는 겉멋이라고밖에 설명하기 힘들다.
따지고보면 젊은 시절에 근본적인 음색 자체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차라리 저음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래 했다면 평가가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노화와 관리 실패, 그리고 불안정한 발성 상태에서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계속 고수하니까 이 상황이 되었다.[65]
그래도 정식 가수인 만큼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고 90년대 후반에서 약 2009년까지의 시절은 고음도 적절하게 내면서 노래를 분위기 있게 꽤 잘 불렀었고, 특유의 음색이 한창 절정인데다 외모까지 훌륭했다. 거기에 뛰어난 퍼포먼스와 무대장악력 그리고 관객과의 호흡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때의 김장훈을 '킹장훈'이라고 부른다. 예시1[66], 예시2[67] 예시3[68], 김장훈의 무대 장악력과 퍼포먼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라이브로 꼽힌다. [69] , 전성기 시절 그의 가창력을 보여주는 영상.
팬들이나 안티들이나 김장훈 가창력의 최전성기는 대체로 2002년으로 보고 있다. 이때 라이브 앨범에서 보여준 슬픈 선물과 노래만 불렀지의 라이브는 그의 인생 라이브로 꼽힌다.[70] 9집의 Honey (Mania Ver)에서는 반가성을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71]
다만 전성기를 기준으로도 절대 테크닉적으로 잘 불렀던 가수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발성이나 테크닉 면에서 미흡했지만 음색과 표현으로 커버를 쳤던 수준이지, 노래를 수준급으로 안정감 있게 불렀던 적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72] 유희열이 2009년 명랑히어로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김장훈 씨 노래를 머리나 테크닉으로 들으면 안 와닿죠. 대한민국에서 가슴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몇 명 없잖아요. 다들 선생님들한테 레슨받아서 기계적으로 부르지만 김장훈씨는 노래를 정말 마음으로 하시잖아요. 사람들이 마음으로 받아 들이죠. 그럴 수 있는 가수가 대한민국에 또 있나요?'라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건 김장훈의 전성기 끝물이었던 2009년에 유희열이 발언한 시점에서는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시점에선 나쁜 가창력을 옹호하는 립서비스로밖에 안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음역대에 맞지 않은 노래를 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전인권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르는데[73] 자신의 음역대보다 높은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고음을 구사하는데 듣기가 매우 거북하다는 평이 많다. 여기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고음병까지 걸려서, 자기 음역대에 맞는 노래까지 애드립으로 샤우팅을 넣는데, 이 음역대를 소화를 전혀 못 하기 때문에 노래가 아니라 소음이 되는 것.
이렇게 음역대를 맞춰서 고평가를 받은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아니야'와 복면가왕에서 부른 '지금은 알 수 없어'. 이 곡들도 고음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편곡이 잘 되었고 김장훈의 음색에 맞게 노래했기 때문에 평가가 좋다.
관객들에게 마이크를 항상 넘기는 것도 큰 문제다. 물론 이게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관객들은 가수의 노래를 듣기 위해 콘서트나 공연을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김장훈은 거의 모든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다보니 가수 자체의 역량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이 덕분에 김장훈 콘서트를 세상에서 제일 비싼 노래방이라며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74]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몇몇 라이브에서는 대놓고 흡연음주를 한 것도 있다.[75][76]
이렇게 태도 면에서도 문제인데, 나아가 상태가 더 망가졌던 2016년에는 일명 아기 우는 소리인 신생아 창법, 떼쓰기 창법[77]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이전의 음색 깡패 이미지는 우주 너머 날아가 버린 셈...
사실 김장훈이 이렇게 된 것은 본인의 자만과 관리실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SNS로 많은 논란을 만들기 전인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음정은 잘 못맞췄어도 음색 하나로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평판을 유지했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기 관리 실패와 자만으로 목 관리를 심각하게 못하고 자기 음역대에 맞지 않는 노래에 치중하게 되면서 결국 이 지경까지 가 버렸다.
결론적으로 대중들과 팬들은 '''기부 활동들은 할 만큼 했고, 잘 하고 있으니 이제는 제발 좀 본업에도 충실하라'''고 비판하고 있다.
숲튽훈 드립이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고 나기 시작한 후에는, '''숲튽훈과 김장훈은 별개의 존재'''라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 이 드립 또한 야갤세이콘 드립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숲튽훈의 혼이 김장훈에게 빙의되었다, 김장훈으로 돌아와달라 등등... 실제로 "김장훈" 모드는 좋은 음색과 좀 제대로 된 라이브에 많이 비유되며 흔히 말하는 "숲튽훈" 모드는 친환경 보컬 소리를 듣는 닭소리를 내는 라이브에 비유된다. 이 동영상이 대표적으로 두 모드를 비교하는 좋은 예시.
전성기 시절 안정적으로 훌륭히 라이브를 소화하던 이 동영상에서도 3:54초 경에 훗날 숲튽훈시절을 연상케하는 괴랄한 고음이 나오자 댓글 중 "김장훈이 부르는 도중 내면의 숲튽훈이 주도권을 뺏으려 하다 실패했다"는 드립이 나오고 있다. 택도 없는 고음 욕심은 노래 잘 부르던 시절에도 여전했던 듯.[78]
욕설 사건 이후로 1년 넘게 자숙[79]하다가 다시 복귀하면서 소극장 콘서트를 열었는데[80], 과거처럼 심하게 고음에 집착하는 모습은 버린 듯하다. 하지만 성대와 목소리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목소리가 매우 탁해져서[81] 현재는 '''2옥타브 미(E4)''' 이상으로만 올라가도 쉰소리가 나고, 닭 창법은 거의 그대로여서 가수로서의 장점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음색조차도 예전 느낌과는 다른 탁한 느낌으로 변해서 지지받지 못한다. 또한 음역대 자체가 좁아져서 저음도 예전처럼 낮게 못내고, 고음은 2010년대 중반까지는 지르면서라도 음에 맞게는 냈는데 지금은 아예 못내고 있으며 내더라도 쉰 소리가 나며 심하게 갈라진다. 심지어 '노래만 불렀지'의 1절에서의 '어느덧 나의 그 방황에 익숙해있기 때문이'''야''''[82] 부분을 전성기 시절엔 '''10초''' 동안 끌었던 것에 비해[83] 2018년엔 겨우 '''3초~7초'''밖에 끌지 못하고 있고 10초를 끌더라도 '''음정이 심히 불안하며''' 심지어 가끔은 끝부분에는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장훈의 페이스북에서 올라온 라이브 영상에서 들을 수 있다. 그래도 '나와 같다면'과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소나기' '난 남자다' 등의 거의 모든 노래를 1키 내려서 노래하는 것을 보았을 때[84] 고음에 집착하는 모습은 버린 듯 하지만, 특유의 거북한 내지르기와 샤우팅은 그대로여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대 건강만 상하게 하고 있다. 여전히 담배를 즐기고 공연 중간에 술을 마시는 등, 목 상태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상 마지막 탈출구는 창법을 바꾸는 방법인데 창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2000년대와 같은 포스를 내기엔 '''사실상 불가능'''해보인다.
2018년 10월 인스타그램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성대결절 상태라고 한다. 의사는 100회 콘서트를 진행하지 말라고 거듭 말렸지만 본인이 이를 무시하고 소리 지르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은 공연이 진행될 수록 소리를 더 질러서인지 목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물론 이 방법은 목을 더 상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명백히 27년차 가수가 그걸 모른다는 것은 성대 상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Love Of My Life + Bohemian Rhapsody + Radio Ga Ga를 부른 영상을 보면 눈물이 다 날 지경. 그래도 요즘에는 무리하게 고음을 내지만 않으면 이전보단 안정적으로 부르는 편이다.
그런데 2019년 현재 놀랍게도 상태가 굉장히 좋아졌다. 자신의 목 상태에 대해 인지하고 과도한 허세성 퍼포먼스와 괴성을 줄인 효과로 보인다. 전성기 시절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 콘서트 도중 토크 시간에 성대결절에 걸리면서 저음 중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앞으로는 '''중저음'''에 힘을 쓸 것이다라고 밝혔다. 덕에 무리한 샤우팅도 많이 줄었으며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현재는 유튜브에 있는 채널을 찾아서 성악 발성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85] 우직하게 "악"하고 소리지르는 방법으로 목에 있는 혹을 떼며 "득음"하는 치료 방법을 사용하던[86] 그로서는 장족의 발전이다. 두 차례의 성대결절 이후 겁이 나서 예전처럼 미친듯이 소리지르는 것은 못하겠다는 듯.
그리고 그 성과가 나타났는지 2019년 8월에 오랜만에 MBC쇼! 음악중심에 나타나서 사노라면을 불렀는데, 전성기만큼의 기량을 다시 보여줬고, 2018년에 키를 낮춰서 불렀던 노래들도 원키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목 상태가 굉장히 좋아졌다.
최근 영상을 보면 후두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호흡을 바꿨다고 한다. 실제로 목이 좀 좁아서 그렇지 두성을 써서 노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괴성, 극단적으로 좁은 소리는 숲튽훈 콘텐츠로만 한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참고로 김장훈의 음역대 자체는 매우 넓어서 최저음 '''-1옥타브 라(A1)[87] ~ 최고음은 3옥타브 미(E4)이다.[88]

4. 숲튽훈으로 재기, 그리고 컨텐츠화


Q : 숲튽훈을 만들어준 야갤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요?

김장훈: '''제가 지금 나눔을 하고, 스스로 잘 살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에 대한 감사함이에요.''' (중략) '''정말 고마워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돈 줄 수도 없고. 잘 살아야겠더라고요. ‘숲튽훈으로 생기는 걸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하나님이 주신 기회니 이걸 더 좋은 데 쓰고, 좋은 사람 되려고 노력하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

디시人터뷰 숲튽훈(김장훈)을 만나다

이렇게 가창력 손실과 즉석 내지르기 등으로 그를 처음 접한 대중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황당하다고 여겨, 2018년 전후로 몇 가지 공연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런 김장훈 영상들은 점차 많아져 김장훈을 비판하는 성격에서 그의 특이한 창법에 대해 평하고 적절한 드립을 다는 컨텐츠로 자리잡은 추세다.
이와 더불어서 모창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나왔다. 이문세나 임재범처럼 음색을 비슷하게 하여 재주로 선보이는 느낌보다는, 심히 희한하고 심오한 김장훈의 창법을 패러디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 # '숲튽훈' 컨셉으로 모창해서 유명해진 것도 있다. 아리랑 콜라보레이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 진짜로 김장훈 공연에서 콜라보를 했다! 분위기를 더 띄우려고 샤우팅 하는걸 보면 현재는 김장훈 본인도 자기 고음 창법을 재밌다고 생각하는 듯...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창자 덕에 김장훈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에서 욕설을 한 뒤 구설수에 올라 1년간 자숙을 했던 김장훈은 그의 전성기 시절 대중이었던 3040세대를 비롯한 전 세대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먹었을 뿐더러,[89] "숲튽훈"으로 그를 접한 1020세대에게는 그저 괴성만 질러대는 웃긴 사람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창자를 비롯, 그를 어떻게 보면 "놀리는" 영상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반응이 많다. 콘서트장에서 그는 불편한 내색 없이 쿨한 태도를 유지했고 오히려 모창자를 격려해주며 재미있는 상황을 유도했다. 댓글들을 보면 전부 칭찬 일색.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조혜련과 태보의 저주로 인기를 끌어 이미지가 좋아진 조혜련과 한때는 엄청난 비판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을 받으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 때 오히려 유쾌한 대처로 화려하게 복귀한 가 있다.
최근엔 김장훈이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을 시작했는데, 이미 숲튽훈의 의미와 현재 반응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는 걸을 보여준다. 또 자신의 영상을 자주 보는지 자신의 공연 영상 댓글에 적힌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것만이 내 세상'의 '가꿔왔던 모든 꿈'이라고 하는 부분을 ''''카카오톡 노무쿤''''이라고 부른다든지, '익숙해있기 때문이야'에서 때문이야 부분을 ''''대물이야!!!! ~ 으아앙!''''이라고 드립쳤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정리하자면 유튜브에 떠도는 모창, 컨셉 영상이 그를 웃긴 이미지로 만든 측면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친근하고 호탕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에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게 효과가 있었는지 콘서트에 청소년 관객들이 늘었다고 한다. 김장훈이 숲튽훈 영상에 나오는 창법으로 부를 때 이들의 반응이 정말 좋다고 한다.[90]
김장훈은 안 좋아하지만 그를 광대 이미지로 만든 야갤에서는 숲튽훈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을 내리는 유튜브 짤이 개념글에 올라오면서 "갤주의 품격."이라며 찬양일색이었다. 김장훈이 복면가왕에 출연하자 과거 이종범 출연때처럼 미친 화력을 자랑했다. 떨어진건 숲튽훈이니까 김장훈 다시 한번 더 불러와라 같은 드립까지 나올 정도.
참고로 숲튽훈은 일종의 야민정음. 쇠 김(金)에 길을 장(長)과 훈을 조합한 金長훈인데 어쩌다가 숲튽훈이 되어버린것. 표준 발음법에 의해 발음은 [숩튼춘]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라디오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밝히길 예전엔 노래할때 절제 하면서 불러야해서 많이 예민했는데 숲튽훈이 빵 뜬 이후에는 내려놓고 노래를 해도 반응이 많이 괜찮아서 뭔갈 해야한다란 부담감이 많이 줄어들어서 되려 마음에 든다고 했다. 덧붙여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고등학교 행사에도 섭외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김장훈과 친분이 있는 윤종신김구라는 세상 모를 일이다며 경악하기도.[91]
그 이후에는 과거 몇 년간 입과 키보드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르던 시기에 내뿜었던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싶었던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고, 평판도 나아졌다. 아예 정치 쪽에는 엮이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듯. 그리고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 출연해서도 대놓고 숲튽훈을 컨텐츠로 내걸고 방송을 하드캐리하고 있다.
심지어는 심영물과의 콜라보레이션까지 나왔다.

4.1. 숲튽훈으로서의 유튜버 활동


2019년 들어 유튜버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2018년을 전후로 하여 음지에(주로 남초 커뮤니티) 묻혀있던 "숲튽훈 놀리기"가 웃긴 포인트와 중독성을 무기로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가 이를 포용함으로써 더욱 큰 히트를 쳤다. 그 즈음에 시작했던 유튜브 채널 역시도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전에도 운영은 했었지만 "아리랑" 등 한정적으로만 올렸었다)
라이브 방송의 경우 첫 회부터 "숲튽훈"이나 안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를 본인 콘서트 홍보에도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 시험 방송이 꽤나 괜찮은 반응을 얻어서인지 레귤러한 스케줄로 방송을 키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내용은 여타 유튜버들과 다를 바 없이 썰 풀기, 고민 상담, 노래(이 컨텐츠를 할 때 시청자가 조금 빠져나가긴 한다) 등을 진행하는데, 거의 매회 "숲튽훈"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본인의 인기를 다시 올려준 "숲튽훈" 컨텐츠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또한 정치 이야기나 본인의 독특한 인생관을 이야기하는 면모가 많이 줄어들어서, 팬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도 큰 부담이 없다는 평이 다수다. 그에 대해 대개 부정적이거나 빈정조로 여기던 커뮤니티에서도 재미있게 받아들일 정도.
유튜브 채널 운영에 재미를 붙인 모양인지 요새는 거의 매일 유튜브 방송을 틀어 소통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5. 음반 목록




6. 콘서트



콘서트에서 발차기와 같은 여러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심장에서 이러한 퍼포먼스를 시작한 이유를 밝혔는데, 콘서트에서만큼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다가 한 여학생의 자살시도를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계속해서 이러한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발차기는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방송에서도 자주 선보였는데, 현재 나이가 환갑에 가까워지는데도 공연에서나 방송에서나 발차기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발차기가 너무 격해서 오죽하면 팬들이 김장훈의 다리 관절을 걱정할 정도다.
이러한 일들 중 당시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콘서트 장비는 없고 상당수를 대여하거나 하면서 사용해야 했던 현실과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인해서 빡친 김장훈은 직접 카이스트로 가서 선물용으로 케이크와 난초를 들고 휴보를 빌리는 일을 진행하였다. 박사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김장훈이 계속 조르니까 "그러면 나 말고 다른 연구원들이랑 교수도 설득시켜봐라."이라고 하자 자기가 가수인지 모르는 연구원들이랑 술을 마시며 30여분 동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설득시켰다. 그러자 박사는 "우리들만 설득시키면 안 되고 정부의 산업자원부도 설득시켜야 한다."이라고 하자 또 선물을 들고서 산업자원부까지 가서 설득을 하자 담당자가 교수에게 전화 걸어서 김장훈 공연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다고. 결국 휴보와 콘서트를 했다.
이로 인해서 카이스트는 물론 여러 박사들도 김장훈을 좋게 보았는지, 회식자리에서 수십 명의 박사들이 김장훈에게 콘서트에 자기랑 관련된 분야(우주선, 비행기 등등)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달라고 했다한다. 또한 카이스트 기계과에는 4학년 필수 교과목 중 "창의적시스템구현" 이라는 교과목이 있는데, 이 과목에서는 잠깐이지만 김장훈의 콘서트 장비를 만드는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92] 때문에 카이스트에서 김장훈의 인지도는 특히 높은 편이다.[93]
2015년 12월 21일에는 청주교도소에서 콘서트를 진행했다. 참고로, 청주교도소 108년 역사상 최초의 가수콘서트이자, 교도소 공연 역사에서도 대한민국 최초의 가수 단독콘서트다. 게스트로는 전직 국가대표 선수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스포츠합창단도 참가하고, 교도소 수용자들로 구성된 중창단과 밴드까지 준비를 많이 한 듯하다.
와이어 퍼포먼스도 자주 선보이는데, 2002년 7월 100일 공연을 하던 중 와이어가 끊어져 추락하면서 어깨가 부서지는 큰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94] 어깨 부상 이후 장애인이 되었으며 이 후 3년 정도는 와이어를 기피하다가 2005년 8월 스스로 극복했다고 선언하고 와이어를 다시 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식 사건이 발생한 후, 1년 자숙기[95]를 거쳐 현재는 100회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7. 인간관계


김장훈은 가요계를 넘어서 예능계, 영화계에도 나름의 친분이 두텁다. 가요계에서는 유희열, 윤종신, 홍경민 등의 동시대 가수들과의 친분이 있으며, 선배 가수들 중에는 양희은, 전인권, 권인하 등과 친한 사이이다. 유희열과는 그의 밴드 '한국사람'의 창립 때부터 함께한 사이고, 그가 작사, 작곡한 "난 남자다"는 김장훈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한때는 싸이와 합동 공연 '완타치'를 열만큼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으나, 강남스타일 이후 친분이 모종의 이유로 틀어졌으나 최근에 화해하였다. 예능계에서는 김구라, 그가 성대모사한 대상인 김국진 등과 친하다고 알려져 있다.

7.1. 김현식과의 관계


김현식과 김장훈의 어머니끼리 어릴 적부터 친자매처럼 지낸 사이여서 김장훈과 김현식은 어릴때 부터 형동생하며 지낸 사이라고 한다.[96] 김장훈이 김현식의 친동생인지 아는 사람도 더러 있다. 김장훈은 당시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개되어 내사랑 내곁에를 부른적이 있다. 다만, 말도 안되는 삑사리와 박자놓침의 일관으로 방송용 가수의 수준으로 절대 볼 수 없는 방송사고급의 무대를 보여 당시 고인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으로 엄숙했던 장내 분위기를 '깨게 만드는' 흑역사급의 데뷔를 기록하고 있다.
인상이 엇비슷한 것도 그렇고 워낙 김장훈이 김현식을 많이 쫓아다녔기 때문에 둘이 친척인 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주변에도 많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둘다 성이 김씨이며 가족간의 교류도 잦았기에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을듯. 심지어는 김장훈이 김현식에게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기 때문에[97] 헷갈릴 만도 하다.
이후 내사랑 내곁에 5주연속 1위의 골든디스크 시상무대를 역시 그가 대신 부르기로 예정한 걸 펑크 내버리며 7년동안 방송 출연 금지, 인터뷰 금지의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98] 나중에 명랑 히어로에서 밝힌 바로는 "소속사하고 딱 한번만 하기로 했는데, 계속 혈육이라며 거짓말을 하며 김현식을 팔길래 잠적했다."라고 밝혔다 친형처럼 생각했던 김현식의 죽음을 팔아 데뷔한다는 것이 영 안 내켰다고. 아울러 이 사건으로 인해 김장훈은 장시간동안 가요계에서 매장당했었다.[99] 훗날 자신의 앨범으로 가수활동을 재개하면서도 계속 사촌동생으로 소개 되다가 그러다가 데뷔 10년이 넘어서야 사촌동생이 아니라는 언급을 했다.
김현식 헌정앨범도 냈다. 돈과 정성을 많이 들인 티가 나는 앨범이다. 그리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김현식의 아들인 김완제와 같이 출연한 적이 있다.
김현식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란 밴드를 할당시엔[100] 연습실에 항상 김장훈이 놀러갔었는데 그때마다 멤버들은 김장훈이 너무 웃겨 연습을 못했다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부터 개그맨이었다며 추억에 빠지기도.
참고로 김현식이 워낙 주먹으로 유명한데[101] 그중에서도 김장훈은 워낙 각별한 동생이었기에 더 많이 맞았다고 한다. 한번은 도망을 가는데 그 공간의 문이 안에서 자물쇠로 잠겨져 있는거라 잡혀서 쥐어 터졌다고... 마지막으로 김현식과 만난것도 이런식이었는데 김현식이 술에 취해 김장훈을 툭툭 건드리자 김장훈이 홧김에 성질을 확 냈다가 김현식이 흥분을 하자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때 어느 정도 뛰다 뒤를 돌아보니 김현식은 눈물 흘리는 채 서 있었고 있을 때 잘하란 말을 남겼다 한다... 그후에 김장훈은 김현식의 돌아갈 차비를 보태 먼저 보내면서 비싼 청바지를 사준다는 약속을 받고 그렇게 영영 사별한 거라고 라디오에서 밝힌바 있다.
김장훈이 말하길 사실 김현식이 사망했을 당시엔 정말 실감이 안 났다고 한다.[102] 어느 순간에 그리움에 사무쳐 너무 보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때는 김현식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7.2. 유희열과의 관계


유희열과는 각별한 사이다.
  • 유희열이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하기 전인 1989년, 친구의 누나가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해서 카페로 나갔는데 그 소개팅 상대로 김장훈이 나왔다. 김장훈이 자신의 밴드인 "김장훈과 한국사람"의 건반주자를 구하느라 소개팅이라고 속이고 유희열을 불러낸 것. 이 때 김장훈이 유희열에게 한 말이 "내가 들국화보다 음악 더 잘해"였다고 한다. 유희열은 속으로 "아 미친놈이다"(...)라고 생각했다고.[103] 그렇게 김장훈의 밴드에서 건반을 맡게 된 게 클래식 전공인 유희열이 가요를 하게 된 계기이다.
이후 밴드 멤버들간의 불화가 끊이질 않아 결성한 지 채 몇 달도 안 가서 김장훈과 유희열 둘만 남게 되었다. 결국 몇 년 동안 연락을 안 했는데 활동기간이 겹친 시기에 방송국에서 재회 후, 다시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김장훈이 게스트로 섭외돼 서로 마주치자마자 그냥 웃어버렸고 그걸로 별다른 화해 없이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 김장훈의 1집에 수록된 "햇빛 비추는 날"이 바로 유희열의 곡이다. 이 노래는 토이 1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후에 유희열은 김장훈에게 히트곡을 주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난 남자다'란 곡이다.[104][105]
  • 절친노트, 명랑히어로, 음악여행 라라라에 동반으로 출연했다.
  • 김장훈이 유희열에게 2천만원을 빌리고는 '돈을 갚으면 유희열을 무시하는 것 같아 갚지 않겠다'고 말하자, 유희열은 돈을 돌려받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쿨하게 넘겼다.
  • 유희열이 진행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도 고정과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였다. 특히 함께 진행했던 "원맨쇼"는 라디오천국 PD가 상까지 받을만큼 반응이 좋았다.

7.3. 윤종신과의 관계


[106] 첫 만남은 한 포장마차에서 자리를 마련해 만났는데 이때 오랜만에 가요계에 복귀하던 김장훈은 너무나도 히트곡이 절실했기에 윤종신을 따로 불러 '''꼭 뜨고 싶어요'''라고 호소했다고... 이후에 유희열과도 친분이 있던 윤종신이니 세명이서 끈끈하게 같이 놀게 된다. 셋이서 함께부른 토이의 스케치북이란 곡도 유명하고 라디오에선 정말 한땐 셋이서 많이 뭉쳤었다. 둘이 장난을 꽤 많이 치는 편인데 화끈한 김장훈의 성격상 이말저말 앞뒤 안가리고 하면 윤종신이 요리조리 잘피하다 예리한 디스를 거는식. 특히 김장훈에게 윤종신의 영원한 흑역사인 회드립은 늘 안빼먹고 치는 무기중 하나다.
알고 지낸지도 꽤 오래되었고 같이 CF도 찍은적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 윤종신이 군대를 갔을당시에 김장훈이 몸이 좀 상한거 같다며 맛있는거 사먹고 등목마사지(?) 받으라고 돈도 쥐어준적까지 있었다고 한다[107]
윤종신은 김장훈을 기부 관련해서 존경한다고 말을 한적이 많은데 기부금액을 믿을수가 없다, 기부로 일어서는 인간은 처음본다며 얄미운 말을 건내기도

7.4. 싸이와의 관계


싸이와도 상당히 친했다. 콘서트 비법을 많이 전수해줄 정도였고, 합동 콘서트 "완타치"도 함께 진행하며 돈독한 사이로 성장했다. 또한 싸이가 김장훈에게 "소나기"라는 곡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김장훈/사건사고 문서에서 참조할 수 있듯, 콘서트 원조 문제로 심하게 다툰 뒤 굉장한 반목과 잡음으로 관계가 파탄나 버렸고, "강남스타일"의 대히트로 간극이 상당히 벌어져 더 이상 서로의 입에서 서로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2019년, 김장훈의 라이브에서 오랜만에 "싸이"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디시인사이드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싸이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 친해졌다. 나중에 완타치2를 할 수도 있다."라고 밝혀 공식적으로 싸이와 화해를 했음이 밝혀졌다.
사족으로, 김장훈의 팬들은 싸이를 반농담조로 "그#S-2 가수" 라고 부른다.

7.5. 김장훈 왕팬과의 관계


본명은 나용재로, 유튜브에 김장훈 모창을 올리면서 유명해진 사람이다. 원래는 김장훈의 창법이 웃겨서 노래방에서 모창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컨셉으로 동영상을 올리던 유튜버이나,[108] 나중에는 진짜 팬이 된 것으로 보인다.[109] 이후 김장훈의 콘서트에 가서 김장훈과 듀엣을 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김장훈은 이 유튜버가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을 계기로 왕팬을 아끼고 챙겨 주고 있다. 왕팬의 유튜브 방송 도중에 김장훈이 직접 들어가서 채팅을 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마리텔에서 같이 출연하는 등 서로 사이 좋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김장훈이 왕팬에게 맞춰서 더 웃긴 모습을 보여 줄 때도 있다.

8. 사건사고




9. 대표곡


가창력으로 까이는 것과 별개로 노래는 굉장히 좋다. 히트곡도 많은 편.
  • 노래만 불렀지 (1996)[110]
  • 나와 같다면 (1998)[111]
  • 사노라면 (1998)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998)
  • 슬픈 선물 (1999)
  • 오페라 (1999)
  • 난 남자다 (2000)
  • 혼잣말 (2000)
  • 고속도로 로망스 (2004)[112][113]
  • 허니 (2006)
  • 소나기 (2008)
  • 친구여#s-3 (2010)[114]

10. 연기 활동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커리어 덕인지, 다른 분야와 달리 꾸준히 활동하지 못하고 단발성 출연에 그치는 양상이다.

11. 저서


2016년 12월, <나를 도발한다.>를 출간하며 수필가로 데뷔했다. 책을 쓴 이유는 '왜 몇 십년 째 나눔(기부)을 하는 것일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다.
2017년 1월 7일 광화문교보,1월14일 강남교보에서 싸인회와, 따로 2월에 북콘서트를 열 예정이라 했으나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2017년 1월 17일 인세 1억을 기부하겠다 주장했다.#

가수 이전에 참 넉넉한 남자다. 그것도 ‘얼토당토않은’ 일을 태연히 하는 남자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 어두운 곳에 불을 밝히고 싶어 하는 남자다. 그 일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도 해내지 못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걸 내세우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늘 고맙다. 솔직히 ‘아주아주’ 미안하기도 하다.

전원책의 추천사

그의 책은 에세이라기보다 소설에 가깝다. 그만큼 극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인생에 서린 눈물과 환희에 공감할 수 있었다. 거칠지만 그의 노래가 감동을 안겨주듯 그의 글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이 어우러진, 한 편의 뮤지컬 같은 책이다.

김수로의 추천사


12. 정치 성향


하술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좌우 양쪽 진영에서 "빨갱이다." "극우다."라는 비난을 듣지만 김장훈 자신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란 얘기를 해왔다.
대표적으로 리즈시절명랑히어로에 출연해서 MC들이 17대 대선에서 누구 뽑았냐고 물었는데 도저히 찍을 인간들이 없어서 투표 안할까 하다 자신이 투표홍보대사라서 어차피 안될거 알지만 그렇다고 1번 찍기는 죽어도 싫어서 소신껏 3번을 찍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고 또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진짜 싫어하긴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라 참여할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20대 총선에서는 김찬영 새누리당 예비후보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하였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장훈이 김찬영 예비후보의 제20대 총선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진보 세력에게 비난받은 바 있다. 이때는 "야당이 여당보다 잘하고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여당 지지자로 돌변할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또한 반크 소속으로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반크에 대한 열정이 상당한 인물이다. 금전적 지원, 홍보를 통한 회원 증대 등. 이 때문에 자신이 좌파는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분열되기 보다는 하나로 통합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2019년 데뷔한 유튜브 방송에서 본인은 좌우파로 나뉘지 않는다는 소신을 밝혔다. 뉴스나 신문에서 정치면은 이제 보지 않는다고 한다.

13. 기타


  • 혼자 있을 때는 밥을 챙겨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걸로 유명하다. TV 프로그램에 김장훈의 집이 나오면 99% 확률로 안습한 식사를 하는 모습이 나올 정도.
  • '소리를 잘 내기 위해' 팔을 담뱃불로 지지는 자해도 시도해봤다 한다.[115]
  •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대박난 덕분에 가정부는 물론 운전기사까지 거느리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다만 어머니의 사업은 이후 쇠락했고, 이후 빈곤한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이후 개종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 군대는 방위산업체로 갔다왔다고 한다.
  • 아들이 밖에서 욕을 안 듣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견딜 수 없어 세는나이로 17세에 가출을 해 검정고시를 봤다.
  • 독도 문제에 몸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대중들에게 자신의 애국심을 어필해왔다. 그렇게 얻은 폭넓은 인지도로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독도 관련 TV프로에 한번씩은 꼭 나왔을 정도. 하지만 후술하듯 2016년 히로시마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위령비엔 안 갔다고 사람이 아니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일본이 엮이기만 하면 외교관계가 자기 마음대로 안 돌아간다고 투덜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면모도 있다.
  • 연예계에서도 소문난 두산 베어스의 열혈팬이다. 다만 그가 직관할 때마다 두산이 지는 징크스가 있는 직관필패의 화신이라고 한다. 샤다라빠의 필패법칙이 그에 의해 깨졌다.
  • 2007년 8월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성추행범을 만난다면 말로 할게 아니라 바로 일격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하며 자신의 일화를 공개했다. 김장훈은 예전에 성추행범을 목격하고 일격을 가했지만 결국 김장훈만 맞은 뒤 싸움은 끝나 버렸다고 전했다. 김장훈은 “성추행범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나들이 많아 그런 부분에 예민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2016년 2월, 신혜성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해 신혜성의 팬들을 성추행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 2010년 7월 활동 7년만에 미국으로 제대로 된 휴가를 갔으며 불면증 치료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 윤종신에 의하면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김장훈이 술을 사겠다고 해서 윤종신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계산할 때 김장훈이 돈을 꺼냈는데 호주머니에서 꼬낏꼬낏한 현금을 꺼내서 계산했다고 한다. 윤종신이 이걸 보고 "무슨 마약 사는 사람도 아니고"라는 멘트를 했다.
  • 2011년 1월 20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싸이와 함께 공연하던 도중 객석으로 내려와 소녀시대태연과 포옹했다.# 이에 대한 소녀시대 팬들의 반응은 "김장훈 개새끼 해봐", "김장훈 부럽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뻘이다"로 나뉘었다.
  • 해피투게더에 나와서 말하기를 "자식이나 가족을 이용하는게 제일 웃겨"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해서 각자의 어머니 이름을 밝혔을 때, 어머니 성함이 "성애"씨라고 하자, 정찬우가 "이름에서 본능이 느껴지시네요."라면서 개그를 쳤고, "가족과 종교를 이용한 개그는 사장되어야 한다"라면서 흥분한 적이 있다.
  • 염색을 굉장히 자주 한다. 한때 보라색 머리를 하고 다녔을 때 누가 일본풍 머리라고 부르며 까였다고 한다.
  • 토호쿠 대지진 때의 조롱이나 반일성 반응에 대해 "인간답게 살자"는 코멘트를 남겼다.
  • 평소에 양말을 잘 신지 않는다. 왜 안 신냐는 인터뷰기자의 질문에 '어차피 벗을 건데 왜 신어요'라고 답했다.
  • 2011년 5월 15일 나는 가수다#s-6.1에서 김연우, 고영욱과 잠깐 만났을 때 자기 콘서트 할 때마다 고음을 중요시해서 고음을 많이 내고 또한 노래 키를 올려서 8단 고음을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관련동영상(약 15초부터) 중대축제 김장훈 나와같다면 9단 고음[116]
  • 흑역사가 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으며 김장훈 팬들이 절대 봐서는 안 될 영화 0순위라는 얘기도 있다. 라디오 스타에선 각본상 선배뻘인 박중훈을 돈 안 갚는다고 신나게 디스했다.
  • 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일본에 제기했던 호사카 유지 교수[117]와 함께 독도 전문 사이트를 개설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를 지원한다.관련기사
  • 2011년 10월 22일, 공황장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들켜서 강제 퇴원 당할 뻔했다. 23일에 자기 스스로 미투데이인증했다.#
  • 2012년 1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와 함께 도쿄 중심가에 일본군 위안부 포스터를 부착했다. 2011년 12월 29일 게재한 월스트리트 저널과 같은 디자인이지만 영어를 일어로 번역하고, 크기를 늘렸다.# 김장훈은 자신의 SNS에 '노후보장연금보험'까지 깨고, 모자라면 공연, 꽃배달 사업까지 해 위안부 광고를 게재한다. 뉴욕발 외신을 기다려 달라 홍보했지만, 광고비를 내지 않고 도망가 뉴욕 업체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 공연에서 가끔 솜씨 좋은 하모니카를 연주한다.
  • 젊었을 때도 한 성질 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거친 야수였다고. 다만 성격만 있어서 본인이 피해본 적이 더 많다고 밝혔다.[118] 유희열은 김장훈이 잘 먹어서 지금처럼 빼빼 마르지 않았다면 사람도 죽였을 거란 드립을 치기도 했다. [119] 성시경은 자신의 데뷔무대 때 김장훈이 대판 싸우는 바람에 자신이 데뷔 못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그 외에 스태프가 자기 몫의 달걀을 먹었다고 방송 중에 나갔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전해지고 놀이공원에서 불친절하고 직무유기를 하는 매표소 직원에게 발차기를 시전했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결정적으로 가정을 위해 4집부터는 오버에서 활동하기로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 어린 시절 몸이 약해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길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거라는 걱정에 머리 속으로 낭심을 차고, 박치기를 하는 상상을 하면서 긴장했다 한다.
  • 공황장애가 완치되었다고 얘기를 할까 매니저와 상담했더니 좋은 일도 하지만 가끔 터트리는 사건, 사고 때문에 그냥 가지고 있다 말해라 했다 한다.
  • 2012년 9월 슈퍼7의 기획과 연출을 맡아서 여러모로 이야기가 많았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그리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리면서 김장훈의 이미지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 2012년 11월 30일 고은아와의 열애설이 났지만 오해라고 본인 스스로 밝혔다. 다만 오해할 만한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작성한 데다가 너무 오버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4년 9월쯤 이해할 만한 dog(개 ㅎ)그를 괄호로 설명하는 것으로 욕을 먹었다. (튽훈체)
  • 예전부터 연예인 중에서는 바둑 잘 두는 사람으로 손 꼽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알파고 - 이세돌 바둑 경기에 해설로 나왔다. 그러나 기존의 비호감 이미지와 안티들 때문에, 특히 바둑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에게는 쟤는 프로도 아닌데 왜 나왔냐?라는 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김장훈은 실력도 아마 5~6단[120] 매우 높은 편이며 한국기원 홍보대사이기에 해설에 나올 자격은 충분히 된다. 물론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수준을 완벽하게 쫓아갈 수준은 못 되지만, 해설자가 반드시 프로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아마추어 고수들 입장에서 궁금한 부분을 짚어 줄 수 있기에 이런 출연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
  • 바둑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조훈현의 딸에게 김장훈은 '약속도 안 지킨 거짓말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한다. 1999년, 삼성화재배에 구경을 갔다 조훈현과 그의 딸을 만났고, 이 때 콘서트 표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가 그만 김장훈은 잊어버렸다고. 라디오스타에서 이세돌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기풍은 오늘만 사는 것도 아니고 현재만 사는 스타일이라고.
  • 돈이 없어 생리대를 쓰지 못하는 여학생들을 보고 복지사업에 관심이 생겼다 한다. 기업들이 돈을 벌면 사회에 환원해야하는데 대한민국 기업들은 기업윤리가 없고, CEO들도 기부를 안하기 때문에 자기가 팀을 꾸려 대한민국 복지를 끝내겠다 다. 그 시작으로 생리대를 공급하려 했으나 알아보니 위생 인증 등이 힘들어 보여 접었다. 눈을 돌려 소방관들에게 기본지급 되지않는 아이젠을 제공하고 싶어했다. 결과적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소방관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경기도의 지원으로 크레용팝과 함께 한 소방관 가족을 위한 무료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 크레용팝 문서를 참조.
  • 2016년 10월 1일 MBC가 주최한 '2016 DMC 페스티벌'에서 '대한민국 공연의 전설'로 엔딩무대에 올라 '난 남자다'를 불렀는데 통편집이 되었다. 제작진의 입장직캠을 참고하자.
  • 박근혜 퇴진을 위한 20차 집회 때 까지 나갈 생각이다 전했다.
2016년, 12월 3일, 6차 범국민행동에 이어, 10일 7차 범국민행동에도 참가했다. # 그 후, 8차, 9차에는 참여하지 않다가 31일 자신의 공연을 취소하고, 10차 집회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 공연 중 "여러분 제가 제일 못하는 게 뭘까요."라고 관객들을 향해 질문했는데 앞 쪽에서 '노래'라는 대답이 나왔다. 아마 본인이 원했던 답은 '불의를 못 참는다.'였던 모양이다.
가수 김장훈이 10차 집회(부산) 참여해 '난 남자다'를 불렀다.
집회에 앞서 " 입들 다물고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옷을 벗어라. 찢어버리기 전에 ", " (친일파 매국노의) 신라이벌전이며, 악의 축 ", " 저능아이거나 극 친일파 매국노 "라고 황교안·윤병세·한민구 세 사람을 규정했다. 미국과 일본과의 동맹관계도 언급하며, " 너무 굴욕적인 개무시를 당해왔다 "며 " 버락 오바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했는데, 한국인위령비엔 참배조차 안 했다. 사람이 아닌 거다 "고 밝혔다.
  • 라이브 하던 도중 방청객 한명을 데려다 노래 시켰는데 본인보다 잘 불렀다카더라 링크
  • 2017년 1월 7일, 분신하였고, 같은 달 9일 입적하신 정원스님을 애도하며 촛불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 50대치고는 나름대로 동안인 편이지만[121] 젊은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키가 크다 보니 기럭지도 있어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고 본인이 말했다.
  • 위 야민정음에서 알수있듯 야갤에서는 김장훈을 '갤주님'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는데 진심으로 그러는게 아니라 세이콘같은 의미로 그러는 거다. 김장훈 본인은 야갤에 대해 "거기 일베 같은 곳 아닌가?"란 반응을 보인 적 있다. 그런데 요즘 김장훈이 유튜브 생방송 덕분에 호감 이미지로 바뀌면서 야갤에서도 '유쾌하다', '솔직히 사람은 좋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122]
  • 노무현 추모제 욕설 사건 이후 1년 반동안 방송에 출연을 못 하다가 2019년 1월 3일, 공연 홍보를 위해 YTN에 출연한 방송에서 앵커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1년 방동안 자숙한거냐는 질문에 자숙은 무언가를 잘못을 했을 때 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것과 상관 없이 자신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자성을 한 것이다 설명했고, 반성은 좀 했냐는 앵커의 질문에 "억울하다, 똑같은 일이 있으면 똑같이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2019년 이후로 마음을 고쳐먹어서 그때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억울한 부분이야 당연히 있지만[123] 그 억울함을 설명하면 변명하는 느낌으로 보일까봐 섣불리 언급을 못하는 것이고, 남의 추모 자리에 와서 욕을 한 것은 명백히 미친 짓이므로 큰 뒷말 없이 사과한 것이라고 한다.
  • 현재 '삼월이'라는 개를 한마리 키우고 있다. 방송을 하는 동안 자주 등장하며 가끔씩 김장훈의 기타 줄을 튕기기도 한다.
  • 라이브 방송에서 임창정과 친분이 있냐는 질문에 여러 가수와 친분이 있다고 했지만,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 복면가왕 105차 경연에서 가왕, 무슨 형? 꽃미남형! 꽃미남 뱀파이어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라운드 곡은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2라운드 곡은 김종서의 '지금은 알 수 없어'였다. 1라운드부터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정체를 다 들켰지만, 2라운드에서 오랜만에 대중들 앞에서 되살아난 모습을 보여줘서 호평을 받았다. 참고로 개인기 시간에는 본인의 성격과 똑같게 "이거 방탄 유리야." 대사를 "이거 방탄소년단 차야"라고 센스 있게 바꾸는 등 예능 면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여담으로 개인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정체를 들켜 "발차기"를 보여달라는 요구가 나오는 등의 웃음 포인트가 있기도 했다.
  • 2019년 콘서트를 수학강사 정승제가 운영하는 구름아래소극장에서 했고, 이를 계기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김장훈의 라이브방송을 참고하면 정승제의 배려로 대관료를 아주 적게 받아서 콘서트를 극저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 구름아래소극장에서 공연 당시, 정승제에게 수학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124] 미적분을 잘했다고 하며, 확률과 통계가 아니라면 수학을 여전히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시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 2020년 3월 21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에 위치한 쪽방촌에 배우 박철과 '가톨릭 사랑 평화의 집' 활동가들과 함께 무료 도시락을 전달하는 봉사 활동 중에 의식 불명 상태로 홀로 쓰러져 있던 50대 남성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 뒤 구조대가 오는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여 모범적으로 대처하였다. 이 남성은 구조대 도착 후 응급실로 긴급 후송되어 처치를 받아 위험한 상황을 넘긴 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김장훈과 같이 봉사 활동에 참여했던 '가톨릭 사랑 평화의 집' 활동가의 제보로 전해졌다. 관련 기사
  • 김장훈은 국내야구 갤러리에 대해 일베저장소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해서 부정적으로 봤었으나, 현재는 자신을 갤주라고 환호해주면서 인기를 올려줘서인지 야갤러들에게 이벤트도 열어주겠다고 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1] 프로필 상으로 1967년 생이긴 한데 실제 나이는 이 쪽인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되는 내용 참조.[2] 젊었을 땐 186cm였으나 나이가 들어 185cm로 줄어든 것으로 보이며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는 본인 입으로 187이라 말했다.[3] 2019년 5월 17일 라이브토크에서 몸무게가 본인 입으로 87~88kg를 왔다간다 한다고 했는데 최근 또 다이어트를 한다 하여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참고로 데뷔 초인 1991년~1998년쯤에는 63~64kg정도밖에 안 나갈 정도로 굉장히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4] 자숙 전에는 사회 운동가로서 자주 언론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나, 정치색을 빼고자하는 목적인지 자숙 후 첫 방송인 복면가왕에서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스타에 게재된 글들을 보면 실질적인 활동은 여전한듯. 독도 관련 운동도 꾸준히 진행중이다.[5]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다. 모친의 영향으로 추정된다[6] 지금이야 개신교 목사지만, 원래는 불교 신자였고, 사업을 했었지만 가세가 기운 후 개신교로 개종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전도사 시절부터 유독 10대 청소년들을 많이 아끼고 챙겼고 현재도 청소년 위주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 교회 이름도 십대교회이다. 유튜브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 참고로, 김장훈의 부모님은 김장훈이 태어나기 전에 이혼했는데, 그 때문에 김장훈 본인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게다가 이것으로 인한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7] 졸업학력 검정고시 선택과목에서 가사를 선택하여 바느질을 잘한다고 한다.[8] 현재 가천대학교 글로벌캠퍼스.[9] 예장통합이라고 잘못 적혀 있는 일부 위키들이 있는데, 어머니가 담임 목사로 사역하는 교회부터가 예장중앙이므로 예장통합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어머니는 불교였지만, 정작 자식들한테는 교회에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10] 앞선 두 장르에 비해 그리 부각되진 않지만, "고속도로 로망스", "난 남자다" 등의 준 히트곡급 댄스 활동을 한 전적이 있다. 곡과 별개로는 춤을 꽤나 자주 선보이는 편.[11] 그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야갤발 유행어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미지를 기사회생 시켜준 고마운 별명이므로, 현재는 그가 나서서 별명을 사용하고 있다. 인스타에도 "내가 숲튽훈이다!", 유튜브에도 "박경림을 울린 숲튽훈의 힘, 다른 유튜브에도 "숲튽훈"으로 출연, 한 술 더떠서 "김장훈과 숲서트"도 기획중이라고 한다.[12] 비디시러들도 통용[13] '노래만 불렀지' 라이브에서 내지른 높은 샤우팅 창법에서 비롯[14] 과거에는 그의 수식어와도 같은 대표적인 별명이었지만, 2017년 노무현 욕설 파문으로 인한 이미지 손상으로 사라져 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현재 이미지가 개선되면서 다시 불리기 시작한 별명이다.[15] 소위 말하는 튽훈체[16] 한창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17] 나이가 들며 점차 사라졌지만, 젊을 때에는 무서움을 모르고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서 저지르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18] MC계의 달변가인 김구라와의 설전에서도 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19]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4집 이후부터는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아서 부르기만 하는 말그대로 '가수'로 변했지만 인디 시절에는 한 앨범에 본인의 자작곡을 못해도 2개 이상은 수록하는 엄연한 싱어송라이터였고 특히 3집에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자작곡으로 채워넣은데다 편곡과 프로듀싱까지 직접 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제대로 뜬 자작곡은 노래만 불렀지 정도이다. '광화문' 이라는 곡도 오랜만에 본인이 작사, 작편곡을 한 노래이다.[20] 인스타에 직접 본인의 직업을 "콘서트 감독"이라고 언급했다.[21] 김장훈은 공인으로서의 직업 외에도 개인 사업 역시도 하고 있다. 의류와 화장품 쪽이다. 인스타그램에도 사업출장 사진을 자주 올린다.[22] 예전에는 대부분 거절했으나 요새는 강연을 자주 간다고 한다. 아마도 "숲튽훈" 컨텐츠로 하여금 청소년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져서인듯. 대체적으로 청소년들의 꿈이나 독도 관련 이야기를 많이 하며, 입담도 좋은 편이다.[23] 이 역시도 본인의 인스타에 기재되었다.[24] 김장훈의 몇 안되는 영화 커리어지만 괴작으로 손 꼽히는 영화다.[25]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 이것저것 많이 출연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26] 김장훈 중에서 김, 장을 각각 金, 長으로 변형시킨 것. 왜 하필 長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한자 상관없이 모든 장을 튽으로 바꾸는 게 야민정음의 변경이다.[27] 자숙(본인은 '자성'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오랜만에 출연한 뉴스 방송에서 본인을 소재로 한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28] 정작 본인은 이런 다양한 활약상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sns에 남겼다.[29] 유튜브 가입 자체는 2011년에 했고 유튜버 활동이전에도 간간이 영상을 업로드했다.[30] 유튜버 데뷔 후 첫 라이브 방송이다.[31] '나처럼~ vs 나처르아악!!'을 선보였다.[32] 실제로, 광성중학교 25회(79년) 졸업생이라 1963년 생이 정설인 것으로 추측된다.[33] 다만 이승환의 경우에는 본인 주장으로 1965년 12월생인 것이고 신분상으로는 1966년 1월생이다. 그래서 신승훈 하고도 친구사이다. 그러나 이승환은 그렇다고 쳐도 이승철은 라디오스타에서 김국진에게 형이라고 하다가 고작 한 살 많다는 걸 알고 "아 62나 63인줄 알았다"고 찜찜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개그긴 해도 이승철이 한살만 많아도 깍듯이 형대접하는 스타일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34] 실제 사촌은 커녕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다. 다만 김현식의 어머니와 김장훈의 어머니가 친한 사이라고 한다.[35] 이는 KBS 스펀지 16회에서 소개되었으며 이 때 그는 식당에 갔다가 인삼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36] 1995년 가수 박상태가 불렀던 곡을 리메이크했다. 당시 박상태의 원곡은 아쉽게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김장훈이 불러 뒤늦게 빛을 본 사례.[37] 이 노래의 히트로 처음으로 메이저급 기획사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받은 계약금 9억 원을 비행청소년 선도 자원봉사활동 하던 어머니한테 모두 줬다고 한다. 김장훈의 기부활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4집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곡도 사랑을 받았다.[38] 원곡은 문관철의 곡이며 전혀 코믹한 곡이 아닌데, 김장훈이 부르면서 코믹성이 들어갔다. 라이브 무대에서는 목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며 점점 후렴구를 빨리 부르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후렴구는 점차 빨라져 후로는 김장훈 본인이 아닌 관객이 부르는 스피드가 된다. 사족으로 밴드 멤버 중 베이시스트 박정현이 조용필, 나훈아 등의 가수들을 성대모사를 하는 부분은 매 무대마다 빠지지 않는다. 여담으로 문관철이 불렀던 해당 음반엔 먼저 녹음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매가 늦어져 김현식의 대표곡이 되어버린 비처럼 음악처럼도 수록되었다.[39] 현재 이 곡을 부를 때는 "쏴!"라는 추임새를 넣고 반주를 빨리 감는 방식으로 재편곡했는데, 곡의 퀄리티를 포기하는 대신 흥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한 듯 하다.[40] 가성 파트도 진성으로 바꿔부를 정도인데, 가끔은 거북하게 들린다는 평도 있다. 예외로 러브레터에서 부른 김범수의 보고싶다에선 가성을 사용한다.[41] 굉장히 심각한 인골라 발성을 구사한다.[42] 2002년 라이브 앨범의 노래만 불렀지를 들으면 그의 최저음('''0옥타브 레(D2)''')부터 최고음('''3옥타브 미(E5)''')까지 다 들을 수 있다.[43] 1~2집때는 훨씬 더 높았다. '''3옥타브 레(D5)'''를 안정적으로 올릴 정도, 다만 저음은 후에보다 조금 떨어졌다.[44] 현재도 성량은 크다.[45] 목을 잡아먹는 소리[46] 여기에는 김장훈이 노래 부를 때 입을 작게 벌리는 것도 한몫했다. 입을 작게 벌리면 목소리를 크게 내기도 어렵고 고음도 내기 힘들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노래를 크게, 또 높게 부르니까 소리가 인골라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유의 울부짖는 듯한 느낌도 이런 발성 때문에 나온 것이라 감정표현에는 장점이 되었지만, 가수 생활에 점점 악영향을 끼쳤다. 여담으로 이와는 정반대의 케이스로는 엠씨더맥스의 이수가 있다. 이쪽은 라이브 할 때 보면 입이 거의 찢어지기 직전...[47] 참고로 선배 가수 중에서 김광석과 창법이 똑같다. 김광석도 같은 창법으로 울음을 참는듯한 느낌을 줘서 감정 표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김장훈처럼 발성에서는 평가가 떨어진다. 다만 김장훈과 달리 김광석은 노래를 정적으로 부른 덕분에 1000번이나 되는 공연에도 목이 망가지지 않았다.[48] 근데 이 양반은 70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치면서 초고음 샤우팅을 지르는 수준인데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김장훈이 공감에서 부른 노래만 불렀지 라이브에서 한 샤우팅(신생아 창법)과 스티븐 타일러가 Draw the line 이라는 곡에서 한 초고음 샤우팅을 비교하는 영상을 보면 넘사벽이다.[49] 원랜 가성도 자주 쓰며 '''3옥타브 레(D5)'''까지 고음을 깨끗하게 내던 미성 보컬이었지만 블루스 음악을 좋아했던 보컬이라 후기로 갈수록 진성만 사용하게 되었다. 4집부턴 아예 허스키 보이스가 되었을 정도.[50] 김현식처럼 원래는 하이톤의 미성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초기 음원을 들어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초미성임을 알 수 있다. 어느정도였냐 하면 양희은의 모창이 가능했을 정도.[51] 사실 위에 나온 데뷔 때부터 가창력이 좋다는 평가가 없었다는 말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단 김장훈의 기본기와 발성법이 프로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교과서적인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도 아니며, 부르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는 전성기 시절 그 잘못된 발성으로도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과 넓은 음역대를 자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음정이나 박자도 안정적으로 공연하는 걸 보면, 테크닉을 비롯한 기본기가 뛰어난 본좌급 보컬들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발라드 가수로서 전체적인 노래실력은 (전성기 기준) 좋은 편에 가깝다. 사실 발성 문제가 크다곤 하지만 가수로선 꽤나 늦은 나이인 40대 초반까지 기량을 유지했고, 40대 중반까지도 괜찮은 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빨리 하락세를 탄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하락세를 너무 극단적으로, 말도 안 되게 무너진 것이다. 사실 프로가수들은 망가져도 어느 정도인데, 김장훈은 프로급 가수가 한순간에 일반인만도 못하게 무너졌다. (타고난 걸로만 노래하던 가수가 타고난 게 사라지니 기본기가 없어 완전 망한 것.)[52] 안타깝게도 이때부터 김장훈이 유명해지던 시기라서 활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53] '허니~ 오 허니~ '''많이 보고 싶어'''' 부분에서 목을 심하게 긁으면서 내지르는 창법을 구사했다. [54] 처음에는 3옥타브 초반의 음부터 얇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범위가 점차 넓어졌고, 성대 노화가 심해진 2016년에는 2옥타브 솔(G4) 이상만 올라가도 목소리가 얇아지는 현상이 일어났었다.[55] 목소리의 변화가 확실히 티가 나기 시작한 공연이 싸이와의 완타치 2009 공연이다.[56] 뜬금없이 담배를 피거나, 갑자기 샤우팅을 하는 등의 행동들. , [57] 사실 망가진 이후 김장훈의 충격이 워낙 커서 원래부터 김장훈이 음치가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유튜브에 쳐보면 나오는 그의 전성기 시절 라이브만 들어봐도 음원 그대로 안정적이고 훌륭하게 음정박자 모두 잘 맞추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승훈이나 김연우, 이승철처럼 테크닉적으로 빼어난 탑급 보컬리스트는 아니었지만 발라드 가수에게 요구되는 박자감 음정감은 갖춘 가수였으며, 다소 부족한 기본기를 타고난 성량과 매력적인 음색으로 커버하는 좋은 보컬이었다. 원래부터 못 부르는 가수는 절대 아니었다. 성대 노화, 최악의 관리, 목상태와 자기 기량 신경안쓰는 말도 안되는 고음 지르기, 혼자 신나서 반주는 무시하고 맘대로 튀어나가기까지 조화를 이뤄 현재의 숲튽훈이 탄생하고 만 것이다.[58] 흔히들 닭소리라고 하는 그것으로, 2009년쯤부터 고음에서 목소리가 억지로 내는 느낌으로 얇아지는데 그 상태에서 확 내질러서 나오는 소리다. 김장훈의 아리랑 영상을 보면 1분 18초, 2분 31초, 3분 12초에 나온다.[59] 이 때 이문세, 성시경과 함께 공연했다.[60] 3년 뒤인 2010년에 싸이와 부른 것도 있는데, 이때부터 고음에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바뀐 것을 들을 수 있다. 숲튽훈식 샤우팅은 덤이다.[61] 라이브에서 뜬금없이 내지르는 것은 옛날에도 변함 없었다.# ## ###지금에 비해 목 상태가 좋아서 거북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62] 사실 그의 전성기였던 시절인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때에도 가끔씩 엇박을 타긴 했지만 이땐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정박자로 자주 불러서 그렇게까지 불거진 문제는 아니었다.[63]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해서 노래만 불렀지를 불렀는데 이 때 김장훈이 박자를 아예 무시하는 바람에 피아니스트가 박자를 놓치고 다시 맞추는 불상사가 벌어졌다.(노래만 불렀지 라이브 영상에서 1분 18초에 나온다.)[64] 이선희의 경우 제자인 이승기도 밝힌 바 있듯이 평소에는 필담을 하고, 반찬과 물 마시는 것조차도 극도로 조심할 정도로 목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65] 실제로 김장훈의 타고난 목소리는 김동률 같은 중저음 보컬에 가깝다. 전성기 때 그의 진성이 안정적으로 올라가는 범위는 딱 "나와 같다면" 정도의 음역대였고 실제로 듣기도 매우 좋았다. 대부분 가수들은 자기 음역이나 성량의 한계까지 라이브에서 잘 부르지 않는다. "말리꽃"이나 "바람기억"을 약간씩 낮춰 부르는 게 대부분인 이승철과 나얼이 좋은 예. 아무리 잘하는 가수라도 아차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락보컬은 경우가 다르다. 하지만 이들도 기본적으로 자기가 소화가능한 보컬범위를 라이브에 넣는다. 김장훈처럼 자기가 못 부르는 범위를 억지로 쥐어짜내는건 가창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비명을 질렀는데 이게 4옥타브가 나왔다고 음역대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3옥타브 초반까지 김장훈은 (전성기 기준) 좋은 가수였으나, 4옥타브의 괴성을 내는 김장훈은 냉정히 말하면 무대에서 비명지르는 중년남자일 뿐이다.[66]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슬픈 선물'의 라이브다. 2002년 공연에서 불렀다.[67] 그 유명한 허니 라이브. 2006년 라이브다.[68] 2006년의 오페라 라이브로 2옥타브 라(A4)의 음을 무려 '''11초'''간 끈다.[69] 2009년의 노래만 불렀지 라이브. 사실 무대매너와 별개로 이때부터 숲튽훈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평이 많다.[70] 특히 노래만 불렀지는 마지막에 '''3옥타브 레(D5)'''를 길고 깔끔하게 뽑아내는 것이 백미. 참고로 같은 라이브에서 앵콜로도 불러서 똑같이 뽑아냈다.[71] 사실 이것은 전국 콘서트 투어로 인해 목이 심하게 망가졌던 탓이다.[72] 정확히는 테크닉은 프로 수준보단 조금 아래 수준이었고, 기본기가 다른 가수보다 매우 떨어졌다.[73] 링크, 이외에 유튜브에는 1999년도에 부른 영상도 있는데 이때도 후렴구에서 자기 음역을 능가하는 고음역에 상당히 버거워하는 걸 볼 수 있다. 참고로 원곡에서 두 키를 올린 이 노래의 최고음은 '''3옥타브 레(D5)'''이고 후렴구 내내 '''2옥타브 시(B4)'''가 계속 나온다.[74] 김장훈을 비꼬는 사람들은 김장훈이 관객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것을 '뷔페 창법'이라고 부른다. 뷔페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먹듯, 김장훈은 자신이 부르고 싶은 것만 부르기 때문이라고.[75] 2011년 중대축제 나와 같다면 2014년 홍대 트라이브바 그것만이 내 세상[76] 과거 10년대 초~중반까지 라이브 영상을 보면 음주를 하는 걸 흔히 볼 수 있었다. 2019년 현재는 거의 하지 않는다.[77] 대중들에게는 '''일렉기타 창법'''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78] 사실 이런 게 그의 가창력을 갉아먹었다. 거의 레전드급 라이브를 보여 줄때도 이런 버릇이 나오는데, 심지어 이때 김장훈은 아팠다고...다만 중간에 "나와 같다면"에서 고음으로 올라가는 것까지는 매우 좋았지만 마지막에 후렴구를 한 옥타브 올리는 건 퍼포먼스에 불과했고 심지어 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전성기 때 이런 엄청난 무리수를 실제로 해낼 수 있었다는 것. 워낙 타고난 피지컬이 좋다보니 관리를 거의 안 해도 최소한 40대 중반이나 거의 후반까지 이런 짓거리가 가능했고, 잘 부르다가도 이런 무리수를 두다보니 성대에 무리->관리는 커녕 더 무리수를 두면서 처음엔 가끔 튀어나오던게 노래에서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처음엔 거의 깔끔하게 올라가던 것도 이상하게 들리게 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기본기가 안 좋아 목에 굉장히 무리가 가는 창법+성대를 혹사하는 고음 퍼포먼스+지독한 술담배까지 하는데 40대 중반까지나마 기량을 상당히 유지했다는게 얼마나 피지컬을 잘 타고났는지 보여준다.[79] 참고로 본인은 이를 자성(自省)이라고 주장한다. 인터뷰 중에도 기자들에게 정정을 요구한 적이 있다.[80] 공식적인 복귀는 2018년 8월이지만 사실 작은 행사는 뛰고 있었다.[81] 저음에서도 음색이 예전같지 않다.[82] '''2옥타브 라(A4)'''[83] 2년 전인 2016년 스페이스 공감에서의 라이브에서도 음이 떨리긴 했지만 '''2옥타브 라(A4)''' 음을 10초간 유지했었다. 폐활량이 2년 동안 심각하게 떨어진 셈.[84] 한 때는 2키 올리고 부른 적도 있었다.[85] 노화와 성대 망가짐으로 전성기 가창력을 잃어버렸던 김종서가 부활에 성공한 것이 성악 공부 덕분이다. 둘의 친분을 감안할 때 김종서가 미친 영향이 큰 듯.[86] 목이 나가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쓰면 안 되는 괴랄한 방법이다! 김장훈의 목이 어느정도 튼튼했기에 현재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듯 하다[87] https://youtu.be/hwixEzdVC4k[88] 최고음 5옥타브 솔♯(G♯7)'''까지 낼 수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 5옥타브는 그냥 괴성이기 때문에 가창으로선 의미가 없다. 5옥타브 음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휘슬 레지스터라는 창법을 써야 한다.[89]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막론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개인적인 경찰과의 분쟁에 대한 분풀이와 욕설을 한 것. 이 자리엔 어르신부터 어린아이까지 와 있었기에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비판을 들었었다. 이후 사과를 했지만 이미지가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90] 나처럼!!!! 을 하면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노래를 따라부른다고 한다.[91] 꽤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고 윤종신과 김구라는 김장훈에 대해 투사, 파이터라는 평가를 내린 바도 있었다.[92] 방송에서는 마치 김장훈의 콘서트 장비만을 만드는 과목인 것처럼 과장해서 말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참고로 해당 교과목은 교수와 학생들이 팀을 짜서 한 학기~두 학기 프로젝트를 한다.[93] 카이스트에도 자주 기부한다고 한다.[94] 어깨를 부상당하고 고통스러워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공연하고 싶어서 3주도 안 돼 공연장에 또 가서 공연하다가 부상이 도진 적도 있다고...[95] 본인은 자성(自成)이라고 부르며, 인터뷰에서 기자들에게 정정을 요구하기도 했다.[96] 김장훈의 어머님이 이북출신이었기 때문에 친척이 아무도 없어 더 김현식의 집안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돈을 급하게 메꿔야할땐 가족 식구들을 스키장으로 보내거나 김현식의 집에 보낸적이 더러 있었다고[97] 특히나 복장 면에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김종진이 밝힌 바 있다. 어렸을적부터 김현식이 주로 입던 바지나 신발등을 빌려입거나 따라서 코디했는데 그게 지금의 김장훈의 스타일로 굳어진 것.[98] 펑크낸 김장훈을 대신해 장필순이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99] 이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한국사람이란 밴드를 같이하며 가까이 지내온 유희열에게도 전화가 빗발쳐 어딨는지 말하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에 김장훈이 도저히 무대를 못 잊어 소속사 사장을 찾았을땐 계약조건에 무조건 말을 잘 들을 것을 약속하고 '''꼬장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명시해야만 했다고(...) 다만 이것도 그냥 흔쾌히 한 것도 아니고 김현식과 밴드를 했던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전태관이 동아기획의 사장앞에서 장훈이 계약 안 시켜 주면 우리는 앨범안낼거다라고 반협박식의 강수를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100]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슈퍼밴드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들은 당연히 들어가고 조용필의 밴드에서 활약하던 유재하와 빛과소금의 멤버들까지 꽉 채워진 초호화 멤버였다.[101] 얼마나 유명했냐면 '''원펀치 쓰리강냉이''' 이라는 별명도 있었을 정도였으며 김장훈외에 많은 후배들의 경험담이 있을정도다. 단 주먹을 많이 썼던 거와는 별개로 그만큼 대인배같은 일화도 꽤 많이 존재한다.[102] 김장훈의 어머니가 전화로 '현식이 형이 하늘나라에 갔다'라고 말했다는데 그냥 김장훈은 '네'라고만 답했다고.[103] 물론 둘의 사이가 각별하니 방송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104] 유희열에게 헝가리 무곡 스타일의 곡을 써달라 의뢰했는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김장훈이 유희열의 집에 찾아갔다. 곡이 하나도 안 써져있는 상황이라 김장훈은 매우 화가 났고, 그에게 어떻게든 납득할만한 결과물을 보여줘야 했던 유희열은 예전에 본 영화 '애마부인시리즈에 수록된 곡과 비슷한 코드진행의 곡을 하나 후딱 써 넘긴다. 그 곡이 바로 '난 남자다'.[105] 유희열은 곡이 안 나올 때 그냥 완전히 퍼져서 아무것도 안하다가 데드라인이 촉박한 상황에 후딱 써버리는 편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문세의 조조할인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문세에게 곡을 썼다고 보여는 줘야해서 대충 피아노치면서 불러봤는데 곡이 하나 완성되었다고. 물론 이렇게 날림으로 써버리니까 빌리 조엘도 들어가고 뭐도 들어가고 표절스럽다고 한탄 섞인 소리를 하기도.[106] 워낙 둘이 애정섞인 디스전을 많이 하는편[107] 희한한건 이걸 윤종신은 기억을 못했다.[108] 진지하게 노래할 때는 의외로 가창력이 좋다. 그 모습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어서 그렇지...[109] 김장훈의 신곡인 '하얀말'을 홍보하기도 했다.[110] 엄밀히 따지면 히트곡이라고 하긴 약간 부족하지만 김장훈의 이름을 알린 곡이며 김장훈 자신도 큰 애착을 가진 곡이라 항상 콘서트 엔딩곡으로 불러 유명해졌다. 김장훈의 자작곡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곡이며 자신도 굉장히 이 곡에 대한 애정이 많다. 참고로 대학시절에 5분만에 쓴 곡이라고...[111] 원곡자는 박상태이다.[112] 윤종신의 '고속도로 로맨스'가 원곡이다.[113] 김장훈을 비꼬는 동영상에서는 '조금만 조금만 더 빠르게↗↗↗' 부분과, '미쳐버렸어↗↗↗' 부분이 쓰인다.[114] 드라마 전우 OST[115] 정작 담배는 목에 좋지 않다. 그러니 담배부터 끊는 것이...[116] 이 링크를 들어가서 3분 25초부터 보면 영향받은 가수 중에 누가 있는지, 왜 그가 그렇게 고음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5분 55초부터 나오는 9단 고음도 하이라이트다.[117] 한국으로 귀화했으며 현 세종대 교수.[118]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타다가 불의를 못 참고 싸웠더니 정신을 잃었다는 일화처럼.[119] 과연 김장훈은 한 소속사에 오래 있던 적이 드물다. 자신은 직원들과는 사이가 좋았고, 사장의 횡포에 분연히 들고 일어난 것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당시는 지금처럼 가수의 권리가 강화되고 체계화된 시절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매니저들은 좀 다르게 본다는 썰도 있다.[120] 아마 단수는 7단이 끝이다. 7단은 아마추어 전국대회 우승을 여러 번 해야 주어진다. 5~6단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언론마다 다르게 쓰고 있기 때문.[121] 사실 2009년 명랑 히어로에서 유희열이 우회적으로 김장훈이 보톡스를 많이 맞았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김장훈이 꽤 늦은 나이에 인기를 얻은 것을 보면 4집 활동 이후부터 보톡스 시술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122] 똑같이 '갤주'로 불리는 윤서인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평이 좋다. 애초에 윤서인은 일뽕 주작충에 의한 '억지갤주'에 가까운데다 인간적인 평도 나쁜데, 김장훈은 그냥 유머스러운 이미지라 비교당하는 게 모욕일 정도다. 사실 정확히 따지면 초대 갤주가 김장훈이었고, 그 이후 김제동이나 정준하, 윤서인 등이 갤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즉 다른 갤러리와 다르게 "논란이 된 인물을 까기 위해 갤주로 내세우는 행위"의 정통성으로 승부한다면 김장훈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최근 그의 행보로 정치색과 비호감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어 갤주 드립의 발현지인 야갤에서조차도 욕을 줄이고 있는 것 뿐.[123] 김장훈은 색맹이라 운전을 못 하기 때문에 매니저가 없는 상황에서 차를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었다.[124] 이투스 개념때려잡기 확률과 통계, 06강 - 최단 경로의 수(1) 강의 9분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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