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1933)
[image]
[clearfix]
1. 개요
金復東
1933년 3월 5일 ~ 2000년 4월 19일 (향년 67세)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본관은 안동(신)(安東(新))[1] .
2. 생애
2.1. 출생
1933년 3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에서 김영한(金永漢)과 홍무경(洪戊庚[2]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부인 김옥숙(金玉淑)의 친오빠로 노태우가 그의 친구이자 매제(妹弟)이다. 노소영과 노재헌에게는 외삼촌. 종교는 불교다.
2.2. 군인 시절과 하나회
대구덕산국민학교,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그들과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육사 재학 시 성적도 가장 앞서면서 11기의 선두주자로 등극한다.[3]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하나회라는 군부 내의 사조직을 결성하였으나 육사 시절부터 위관 때까지만 해도 하나회의 같은 리더그룹이던 전두환과 중령 이상이 되면서 점차 선두를 다투는 경쟁관계에 들어갔다.[4] 이 때문에 김복동은 전두환과 멀어졌으며 또 기질적으로 달라 하나회 핵심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이후 "비하나회" 인사로 여겨진다.[5]
이로부터 비롯된 전두환의 견제는 1972년 말 준장 진급 심사 대상에서 동기인 전두환과 손영길이 올라가는데 자신이 누락된 것에서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김복동은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강창성 사령관이 이를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국 전두환과 함께 준장에 진급한다.[6]
1979년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와 황영시, 유학성 등을 포함한 신군부에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김복동은 12.12 쿠데타에는 반대하였다.[7] 이 때 김복동은 전두환의 눈 밖에 나서 예편당할 뻔하였으나 노태우의 도움으로 12.12 쿠데타 직후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80년 7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1982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의 눈 밖에 났음에도 매제 노태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이를 뒤집는 기사가 나왔다. 신동아에 연재되는 당시 정호용의 측근이었던 특전사 보안반장 김충립의 수기에 의하면 김복동과 불화를 겪은 것은 오히려 노태우였다는 것.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과 달리 후발주자격이었던 노태우가 쿠데타 이후 실세가 되면서 자신을 무시하자 술상을 뒤엎었다고. 노태우는 그를 강제 예편시키려 했으나 정호용이 이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2.3. 예편 이후 정치인 시절
그러다가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구속되자 대타로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으며, 결국 실패하자 그 해 가을 고종사촌 동생[8] 박철언(朴哲彦)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매제(매부)인 노태우 대통령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무작정 탈당계를 제출하는 바람에, 대구 지역구 사무실로 가던 도중 '''경찰 관용차에 강제로 모셔져서(.....) 서울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당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부른건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해 강제로 끌고 오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는 '''납치'''로 알려져 떠들썩. 당시에는 휴대폰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실시간 연락이 어려웠고, 하필 손윗처남이 탈당한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노태우 대통령이 경찰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통일국민당에 입당해 정주영 후보의 선거 운동을 적극 도왔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김영삼이었고, 이듬해 출범한 문민정부와 민자당이 국민당 의원들을 대거 빼가며 와해공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출범한 신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면서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갑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으며[9] 총선이 끝나고 불과 6일만인 2000년 4월 19일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7세.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4. 미디어상의 김복동
비록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이기는 했으나 쿠데타에 반대했으며 이후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과는 척을 졌다는 점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의 주역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평을 받는다.
SBS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한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 배우 임현식이 김복동을 연기하였다. 제4공화국(드라마)에서는 성우 이동주가 김복동을 연기하였다.
제5공화국(드라마)에서는 한 번도 출연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추정하자면, 글라이스틴 당시 미국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12.12 이후 전두환을 반대하는 장성들에 의한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는데 그 주체가 누군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역쿠데타 세력의 중심에 김복동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제5공화국 제작진에서는 이 설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작중 김복동에 해당하는 인물[10] 이 출연하긴 했으나, 확실한 역사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에 역쿠데타 관련 인물은 모두 익명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고원정이 쓴 가상 정치소설 <최후의 계엄령>에서는 전두환 등과 함께 '신(新)민정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된다. 1992년의 제14대 대선, 노태우의 대통령 임기 후반에서 정국 불안이 심화되어 군부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이 주된 내용. 당대 실존 정치인들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소설의 최초 사건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이었는데, 1년 후에 현실화되어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김극인(金克仁)을 파조로 하는 참봉공파(參奉公派)다.[2] 출처 기사.[3] 김복동은 노태우, 정호용과는 경북고등학교 32회 동기생이다.[4] 하나회에서 노태우, 정호용만 해도 이미 소령 진급 때 선두그룹보다 1년이 늦었다.[5] 김충식의 저서인 <남산의 부장들>에 의하면 김복동은 전임이던 황인수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맹호부대로 나가게 되자 그 후임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됐다고 하는데, 당시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였다.[6]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윤필용 사건이 발생하여 이런 하나회의 인사권 횡포는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임명 때까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7] 그 덕에 훗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때 매제인 노태우가 감옥에 갔을 때 김복동은 무사히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8] 작은고모 김당한(金棠漢)의 둘째 아들이다.[9] 이 때의 당선인은 이전 선거의 경쟁후보인 신성일.[10] 역쿠데타의 총책으로 등장하는 육군 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