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니시 마나부

 


'''제 3세대'''
나가타 유지
텐잔 히로요시
코지마 사토시
'''나카니시 마나부'''
[image]
'''본명'''
나카니시 마나부
中西(なかにし (まなぶ
'''생년월일'''
1967. 1. 22 (57세)
'''신장'''
186cm
'''체중'''
120kg
'''출생지'''
일본 교토부[image] 교토 시[image]
'''학력'''
센슈대학 레슬링부[1]
'''유형'''
'''파워하우스'''
'''시그니쳐 무브'''
역수평 찹[2]
야인 햄머[3]
야인 래리어트
막켄로(マッケンロー)[4]
야인 스피어[5]
대☆나카니시 저먼[6]
위에서 쾅!((うえからドン!)[7]
'''피니쉬 무브'''
특대☆나카니시 저먼[8]
'''아르헨틴 백브레이커'''[9]
'''헤라클레스 커터'''[10]
'''별명'''
일본산 헤라클레스(和製(わ せいヘラクレス)
인류 68억분의 1의 기적(人類(じんるい68億分(おくぶんの1の奇跡(き せき)[11]
'''야인(野人(や じん)'''
'''테마곡'''
NAVAL GUN (1993 - 1995)
HARD SHUFFLE (1996 - 1999)
NO-PROBLEM (1999 - 2002)[12]
'''Seize The Tactticz (2003 - 2020)'''
'''데뷔'''
1992년 10월 13일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립 중앙체육관
'''신일본''' SG 태그 리그전 II 5일차
vs 스콧 노튼 & 슈퍼 스트롱 머신
(w/후지나미 타츠미)
'''은퇴'''
2020년 2월 22일 코라쿠엔 홀
'''신일본''' 나카니시 마나부 은퇴기념대회
vs
고토 히로오키 & 이부시 코타 & 타나하시 히로시 & 오카다 카즈치카
(w/나가타 유지 & 코지마 사토시 & 텐잔 히로요시)
종합격투기 전적
1전 1패 (vs 후지타 카즈유키)

1 TKO
1. 개요
2. 경력
2.1. 신일본 입단 이전
2.2. 입단 초기 ~ 해외 무사수행(1992 ~ 1996)
2.3. 제 3세대 최초의 영광 (1997 ~ 2000)
2.4. 갑자기 드리운 먹구름 (2001 ~ 2003)
2.5. 이후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


'''"오-!!! (オー!!!)"'''

전직 아마추어 레슬러이자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베테랑 프로레슬러. 텐잔 히로요시, 코지마 사토시, 나가타 유지와 함께 신일본 암흑기의 산증인들인 제 3세대로 분류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시합 진행능력과 마이크웤이 부족했고 전성기가 신일본의 암흑기라 기대치에 비해 인상적인 커리어를 남기지는 못 했으나 역대 일본인 프로레슬러를 통틀어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파워를 지닌 순혈 파워하우스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2. 경력



2.1. 신일본 입단 이전


교토의 차 농가 출신으로, 우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레슬링을 시작하여 센슈대학에 진학하였다. 1989년부터 전일본 레슬링 선수권 자유형 4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고 대학 졸업 후 와카야마현청에서 근무하다 1991년 4월에 투혼 클럽[13]에 입단했다.
학생 시절 보여줬던 압도적인 실력으로 즉시 레슬링 국가대표로 뽑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100kg급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였다. 1차전을 통과하고 2차전에서 한국 대표인 김태우 선수에게 8:1로 판정패를 당하며 메달은 따지 못 했으며, 올림픽 이후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은퇴하고 바로 그 해 8월에 프로레슬러로 전향했다.

2.2. 입단 초기 ~ 해외 무사수행(1992 ~ 1996)


입단 초창기부터 남다른 체격과 파워, 압도적인 아마레슬링 실력을 가진 기대주로 특별 대우를 받아 입단 2달만인 10월 13일 슈퍼 그레이드 태그 리그 히가시오사카 시립 중앙 체육관 대회에서 데뷔년도면 20년 넘게 차이나는 대선배 '비룡' 후지나미 타츠미와 태그로 출전, 스콧 노튼 & 슈퍼 스트롱 머신팀을 상대로 데뷔하였다.
다른 까만 복장의 영 라이온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헤드기어까지 착용한 아마레슬러 복장을 입는 특혜를 받으며 언더카드에서 경험을 쌓다가 1995년 3월에 영 라이온배 쟁탈 리그전에서 우승, 미국 무사수행이 결정되었으며 그 해 7월에 WCW에 참전, 먼저 WCW에서 활동 중이던 선배 '옥문귀(獄門鬼)' 마사 사이토[14]의 총애를 받아 "세계에 통용되는 남자니까 세계에 통용되는 링 이름을 써라"라며 마사 사이토가 직접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쿠로사와 아키라에서 따와 붙여준 ''''쿠로사와''''라는 링네임을 쓰면서 커널 로버트 파커라는 매니저를 대동하고 '마초맨' 랜디 새비지, 릭 플레어, 스팅 등 당대의 톱 스타들과 매치를 가지며 활약했다.

2.3. 제 3세대 최초의 영광 (1997 ~ 2000)


1996년 9월에 개선 귀국한 나카니시는 1997년에는 마찬가지로 개선 귀국한 코지마 사토시와 ''''불 파워즈''''를 결성하여 5월 3일 쵸슈 리키 & 사사키 켄스케를 꺾고 IWGP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에 올랐으며, '''잘생긴 장발의 마초남'''이라는 조금 이질적이지만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뛰어난 비주얼과 호쾌한 파워 파이팅으로 인기를 얻었다.
태그 팀으로는 나름의 성적을 거두고 있으면서도 G1 클라이맥스에 출전했다가 1회전에서 탈락하는 등 싱글로는 부진을 겪고 있었지만 1999년 G1에서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어 공식 리그전을 1위로 통과하는 기염을 토하며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 무토 케이지와의 결승전에서 18분만에 아르헨틴 백브레이커로 항복을 받아내며 제 3세대 중 첫 G1 우승이라는 영광을 거머쥐었고, '''"이 야생아가 천하를 차지한다!(この野生児が、天下を取るんじゃ!)"'''라며 당당히 선언했다.[15] 이윽고 10월에 IWGP 헤비급 챔피언 무토에게 도전했으나 무토의 암바에 항복하며 타이틀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그보다 조금 앞선 99년 8월 28일에는 나가타 유지와 팀으로 '매드 독스'(고토 타츠토시 & 오하라 미치요시)에게 승리를 거두고 2번째 IWGP 헤비급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했는데, nWo JAPAN 소속의 '텐코지'(텐잔 히로요시 & 코지마 사토시)와 대립하며 1년 가까이 벨트를 지켜냈다. 비록 타이틀 차지는 실패했지만 99년부터 센슈대학 레슬링부 대선배인 '혁명 전사' 초슈 리키가 현장감독을 맡고 있었고 초슈의 총애도 받고 있었기에 이 때만 해도 제 3세대 중 나카니시가 빠른 시일 안에 IWGP 헤비급 챔피언을 차지하는 것이 기정 사실로 여겨졌다.
2000년 3월 28일에는 나카니시와 나가타 유지를 주축으로 요시에 유타카, 후쿠다 마사카즈 등 당대의 유망주들과 ''''파이팅 클럽 G-Eggs''''[16]를 결성했으나 결성 한 달만에 후쿠다가 시바타 카츠요리의 플라잉 엘보를 머리에 맞고 경기 이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경막하혈종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자 신일본에 참전 중이던 종합격투가 브라이언 존스턴을 새로운 멤버로 맞이했다.
나카니시가 6월에 당시 IWGP 헤비급 챔피언 사사키 켄스케에게 도전했다 패배하고 설상가상으로 7월 20일 태그팀 챔피언을 텐코지에게 잃자 모두 무관이 된 G-eggs멤버 4명은 전부 G1 클라이맥스에 참가하였고, 나카니시는 비록 결승전에서 사사키 켄스케에게 져서 우승은 하지 못 했지만 다른 선수들과 궤를 달리하는 진퉁 파워를 보여주며 싱글 레슬러로서의 기대감을 높여나갔으며, 이후엔 쵸노 마사히로의 ''''TEAM 2000''''과 항쟁을 이어나갔다.

2.4. 갑자기 드리운 먹구름 (2001 ~ 2003)


그러나 2001년이 되자 거짓말처럼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신호탄은 G-Eggs의 붕괴였다. G-Eggs의 두 주축 중 하나인 나가타가 전년도 12월부터 이이즈카 타카시와 태그팀이 짜이는 등 외부 활동이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나카니시가 마이크웤을 비롯한 관객 소통 면에서 상당히 서툴렀기 때문에 사실상 리더는 나가타였다는 것. 사실상의 리더 겸 관객 어필 담당이라는 최고 중책을 맡고 있던 나가타가 군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어버리며 군단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마가 끼었는지 3월에는 사망한 후쿠다 대신 영입한 브라이언 존스턴조차 뇌경색을 겪고 그대로 은퇴하며[17] 사실상 말이 군단이지 나카니시와 요시에 유타카의 태그팀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뒤로 별다른 활약 없이 7월에 나가타가 해산 선언을 하며 유망주 집단으로 야심차게 출발한 G-Eggs는 신일본 역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패한 군단'''으로 남고 말았다.

2.5. 이후


2011년 6월 4일 교토 KBS 홀 대회에서의 시합 도중에 이노우에 와타루의 저먼 스플렉스를 잘못 맞아 중심성 척수 손상까지 가는 중상을 당했는데, 1년 4개월의 필사적인 재활 끝에 2012년 10월 8일에 복귀하여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때의 경추 부상이 치명적이어서 40대에 접어들어도 멀쩡했던 폼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2016년 무렵에 화제가 됐던 시바타 카츠요리와 3세대의 세대투쟁 각본때도 유일하게 NEVER 오픈웨이트 챔피언십에 도전하지 못하는 등 3세대 중에서 독보적인 쩌리 취급을 받았다. 결국 2020년 2월 22일 나카니시 마나부 은퇴 기념 대회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다.

3. 여담


  • 자신의 어마무시한 파워를 주체하지 못하여 손해를 본 대표적인 선수로, WCW원정 시절 로드 워리어즈 호크의 팔을 실수로 부러트린 이후 오랫동안 시합을 못 가졌으며, 귀국 이후에도 '부상당할 것 같아 위험하니 나카니시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라는 선수가 몇 사람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평판이 이어져 메인 이벤터들과의 경기가 점차 줄어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 1999년 8명이 출전한 3전 2선승 격투가 팔씨름 대회에 출전, 카네하라 히로미츠와 신일본 선배인 '머슬 볼케이노' 사사키 켄스케를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엔센 이노우에에게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 기네스 세계기록을 보유한 적이 있다. 2006년 "산마의 카라쿠리 TV"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Fastest-time-to-pull-a-caravan-over-50-metres-pulling'(가장 빠른 시간 내에 캠핑카 50m 끌기) 부문에 도전하여 17.57초로 세계기록을 달성하였으며, 이 기록은 2010년 1월에 호주의 워릭 브랜트라는 사람이 13.59초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며 갱신했다.
  • 예능감이 뛰어나 다양한 TV 예능 방송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2013년 2월부터 2017년 3월 말까지는 매주 목요일마다 아사히 TV에서 30분짜리 비정기 방송 "인류 프로레슬러 나카니시 랜드"의 MC를 맡기도 했다.


4. 둘러보기


[image] '''역대 G1 클라이맥스 우승자'''
'''1998'''

'''1999'''

'''2000'''
하시모토 신야

'''나카니시 마나부'''

사사키 켄스케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2009'''

'''2010'''

'''2011'''
SMOP[18]
(아케보노 & 하마 료타)

'''머슬 오케스트라'''
(스트롱맨 & '''나카니시 마나부''')

스트롱 BJ
(세키모토 다이스케 & 오카바야시 유지)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투혼상'''
'''1998'''

'''1999'''

'''2000'''
아키야마 준

'''나카니시 마나부'''
오가와 나오야

카와다 토시아키

[1]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라인이 짱짱한 대학으로 초슈 리키, 하세 히로시가 그의 선배이며 후배로도 아키야마 준 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나왔다.[2] 신일본의 찹의 상징. 풀 근육인데다 길기까지 한 팔 + 솥뚜껑같은 손 + 의외로 빠른 팔 스윙으로 한 번 치면 소리가 고라쿠엔 홀 전체에 울려퍼질 정도의 찹 위력을 자랑했다.[3] 변형 더블 엑스 핸들. 양 손에 깍지를 끼고 야구 스윙하듯 상대 가슴을 후려치는 기술.[4]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낯춰 상대의 다리 뒷부분을 테니스 스윙하듯이 팔로 후려치는 기술. 쉽게 말하면 다리에 래리어트를 먹이는 기술. 기술 이름은 팔 스윙이 테니스 스윙같다는 이유로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인 존 매켄로에서 따왔다.[5] 상대 몸통을 들이박고 굴러서 낙법을 취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나카니시의 스피드가 비슷한 과의 라이노와는 다르게 느린 편인데다 점프가 낮아서 다른 사용자들에 비해 인상적이지는 못 했다. 사실 실제보다 게임에서 훨씬 유명했는데, 레슬킹덤 시리즈에서 러닝 기본기 주제에 발동 때부터, 심지어 쓴 이후 구르는 동작에까지 타격판정이 들어가있는 개사기 기술이었다고 한다.[6] 상대를 로프로 밀어붙힌 후 그 반동 그대로 저먼 수플렉스로 넘겨버리는 기술. 2008년 레슬킹덤 2에서 TNA소속 어비스와의 매치에서 첫번째로 공개했다. 저먼 자체는 2003년 칼 곳치에게 직접 사사받은 것으로, 브릿지가 깔끔하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넘기는 위력 하나는 예술이었다.[7] 정말 말 그대로 탑 로프에서 뛰어내리면서 상대 정수리를 손날로 '위에서 쾅'하고 찍는 기술. 2013년 4월에 '나카니시 랜드' 방송 중에 개발한 기술로, 이 괴랄한 기술명을 지은 사람은 당시 영 라이온이었던 까마득한 후배이자 자타공인 또라이 타카하시 히로무(...) 과연 이런걸 신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은 웃긴 기술이지만, 이걸 맞고 핀을 내준 자도가 "맞은 후에 키가 2cm 줄었다"라고 말할 정도의 웃어넘길 수 없는 파워를 자랑했다.[8] 대☆나카니시 저먼의 업그레이드 버전. 고릴라 프레스로 상대를 들어올린 다음 로프에 던져 목에 타격을 준 직후 저먼 수플렉스로 핀을 따내는 기술. 2009년 5월 6일 타나하시 히로시에게 처음 사용하여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IWGP 헤비급 챔피언을 차지하게 해준 기술로, 타이틀 획득일 다음날에 직접 이름을 공개했다.[9] 아르헨티나 백브레이커는 다른 서브미션들과 다르게 시전자가 상대를 직접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전자 허리에도 무리가 많이 가서 기술 자체의 유명세에 비해 사용하는 사람이 굉장히 적은데, 나카니시는 전 세계에 몇 명 안 남은 이 기술의 사용자로 유명했다. 다만 접수자의 접수 문제까지 있어서 정통방식으로는 안 쓰고, 상대를 옆으로 세워서 한 쪽 허리만 압박하는 식으로 썼다.[10] 아르헨틴 백브레이커 자세에서 그대로 반동을 줘서 리버스 커터로 연결하는 기술.[11] 캠핑카 50m 빨리 끌기 기네스 신기록을 세운 이후 생긴 별명.[12] 같이 신일본에 있던 시절 내내 나카니시를 열심히 놀려먹던 악연에 가까운 선배이자 일본 프로레슬링 원조 제어불능 또라이 '악마 가면' 켄도 카신의 테마곡인 Sky walk는 '''"PROBLEM!"''' 한마디로 시작하는데, 나카니시가 테마곡으로 쓰던 이 곡 제목(No problem)에 '아니, 문제 있는데?'라고 태클을 거는 것이었다(...)[13]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아마레슬러 팀.[14] 도쿄 올림픽 자유형 국가대표로 출전한 적 있는 일본 최초의 올림픽 선수 출신 프로레슬러. 미국 생활 도중 경관 폭행으로 현지에서 1년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는 바람에 붙혀진 옥문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손꼽히는 호인으로 나카니시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라고 밝혔다. 2018년 파킨슨병으로 작고.[15] 호기롭게 외친 건 좋았으나 일본 현지 팬들의 반응은 '본인을 스스로 야생아라고 지칭하는게 너무나 촌스러웠다' 였다(...)[16] 초슈 리키가 처음에 붙여준 이름은 '격투 달걀(格闘たまご)'이었으나 어감이 워낙 이상해서 나가타가 영어로 고쳐버렸다.[17]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후유증이 커서 2015년에 전해진 소식으로는 휠체어를 써야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18] 슈퍼 메가톤 오오스모 파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