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별궁
1. 개요
'''南京 離宮 / 南京 別宮'''
고려의 삼경(三京)인 중경 개성부, 서경 평양부, 남경 양주 중 남경에 설치된 별궁.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던 걸로 보인다. 단지 이궁 혹 별궁으로 불렸으며 둘은 같은 뜻이다.
2. 위치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고려의 다수 궁궐은 다 북한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 있거나 처참히 무너져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궁궐이 다수다. 하지만 남경 별궁의 터는 대한민국의 서울에 지어져 그나마 알 수 있다.
원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 혹 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 불렀다.[1] 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의 근처였고, 정복군주 근초고왕과 그의 태자 근구수왕이 고국원왕을 죽이고 지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도 전쟁의 신이 등장, 개로왕을 죽이고 다시 수복한다.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까지 모두 승리하여 땅을 차지한 신라는 이 곳을 한양군(漢陽郡)이라 했다. 왕건의 고려는 이 곳을 양주(楊州)로 개칭해 군에서 주로 승격시켰고, 항복한 전백제왕 견훤의 봉토로 주었다. 삼경 중 하나인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을 세웠다. 고려가 멸망한 뒤엔 조선왕조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근처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남경 별궁이 있던 곳엔 현 '''대한민국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2000년도부터 발굴과 복원이 되어가는 경복궁에서는 현재 고려시대 배수로와 기와, 청자가 발견되고 있다.
3. 역사
문종이 고려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키며 동시에 임금이 거주할만한 새 궁궐을 짓는데 이 궁이 바로 남경 별궁이다. 하지만 얼마 안가 남경은 폐지된다. 이후 시간이 지나 숙종이 재위 4년, 1099년에 다시 남경 설치와 궁궐 증축을 논의한다.'''이 해 중 남경(南京)에 신궁(新宮)을 창건했다.'''
1104년 숙종은 드디어 다시 남경을 재설치했다. 숙종은 재위동안 여진을 없애 북방을 수복하려는 노력을 계속 시도했는데 남경 재설치를 윤관, 오연총 등 북방에 나가는 신하들에게 시켜 그들의 입지를 크게 다져 주었다.'''남경궁궐(南京宮闕)을 완성했다.'''
고려사 숙종 세가 재위 9년, 1104년 5월 중. 남경 별궁 증축.
궁궐을 증축하는 것은 늘 신하의 반대를 불렀다. 숙종 대의 풍수지리 연구자인 김위제(金謂磾)는 나말여초의 승려 도선의 책을 인용해 남경 천도의 풍수지리적 이점을 강조했다.
조선왕조는 김위제를 방기[8] 열전에 넣어 비난했고, 당시에도 꽤나 반대가 있었다.[9] 하지만 북벌 담당자 밀어주기, 왕권 강화를 위해 숙종은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해 끝까지 추진했다.[10]도선기(道詵記)가 이르길: '고려(高麗)의 땅엔 삼경(三京)이 있어 송악(松嶽)이 중경(中京), 목멱양(木覓壤)[2]
이 남경(南京), 평양(平壤)이 서경(西京)이다.(임금이) 11, 12, 정, 2월은 중경에 있고 3, 4, 5, 6월은 남경에 있고 7, 8, 9, 10월엔 서경에 있으면 36개 나라가 조천(朝天)해올 것이다.'[3]
도선기가 또 이르길: '나라가 세워지고 160여년 뒤,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할 것이다.'
도선의 답산가(踏山歌)가 이르길: '송성(松城)이 낙후되면 어디로 갈까, 해가 뜨는 곳에 평양(平壤)[4]
이 있다. 후대현사(後代賢士)들이 우물을 파니, 한강어룡(漢江魚龍)들이 사해(四海)[5] 에서 몰려온다.[6]
삼각산 명당기(三角山 明堂記)가 이르길: '임자년(壬子年)에 땅을 개척하면, 정사(丁巳)년에 성자(聖子)를 얻는다. 그러니 삼각산(三角山)에 제경(帝京)을 만들면, 사해(四海)가 조(朝)[7]
한다.'
- 고려사 방기 열전 김위제 중. 남경 천도 시도자는 모두 도선기를 한번씩은 인용했다.
숙종의 태자 예종은 어머니 명의태후와 함께 남경에 행차했다. 사찰을 방문하고, 연회를 열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고종은 여몽전쟁 도중 남경 별궁에 자신의 곤룡포를 안치해둔 적이 있다. 이는 도참설에 따른 신하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공민왕, 우왕, 공양왕은 이미 폐허가 되버린 개경[13] 을 떠나고자 했다. 개경보다 더 엉망이 된 서경[14] 은 제외되었고, 남경의 궁궐을 다시 수축해 천도를 시도하였으나, 세 명 모두 실패한다. 만약 천도가 성공했다면 고려의 법궁은 철원성, 개경 본궐, 강화경 본궐, 연경궁, 수창궁에 이어 남경 별궁이 되었을 것이다."부소산(扶踈山)에서 왼쪽 산맥으로 간 곳을 아사달(阿思達)[11]
이라 하니 옛 양주(楊州)[12] 의 땅입니다. 이 곳에 궁궐을 만들어 거주하시면 국조가 800년을 더 이어갈 수 있습니다."
- 고려사 고종 세가 재위 21년(1234년) 7월 中.
4. 주요 건축
- 연흥전(延興殿)
- 천수전(天授殿)
- 근비전(謹妃殿)
- 만춘정(萬春亭)
- 옥간정(玉竿亭)
- 영덕정(靈德亭)
- 선벽재(鮮碧齋)
- 수어당(壽御堂)
- 수덕문(水德門)
- 금화교(錦花橋)
- 북령문(北寧門)
- 남명문(南明門)
[1] 지역을 가르는 기준을 다르게 잡은 것이다. 한산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북한산성, 평양의 남쪽에 있는 대평지라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남평양성으로 불린 것이다.[2] '목멱산의 땅'이란 뜻으로 목멱산은 지금의 서울 남산이다.[3] 이 문구는 묘청이 나중에 그대로 써먹는다.[4] 서경 평양이 아니고 남경 남평양. 고구려 때의 지명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5] 천하의 다른말.[6] 답산가는 엄연히 정확하게 예언했다. '''조선왕조가 남평양에 도읍했으니.'''[7] 조천의 줄임말.[8] 특출난 재주이지만 좀 의심스러운 기술을 가진 자.[9] 태자 예종이 서경에 용덕궁을 지을 때도 오연총이 크게 반대했다.[10] 이는 예종도 마찬가지다. 용덕궁은 결국 지었고, 이로인해 서경파 관료들의 힘이 세져 예종이 원했던 대로 개경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11] 특이하게 아사달이 개성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서울 부근에 있다고 한다.[12] 남경으로 승격되기 전 지명이 양주이다.[13] 몽골이 부숴버린 만월대를 원종이 재건축, 충선왕이 증축했다. 당시 연경궁은 총 410여칸으로 전성기 때보다 한참 축소되어 있었다. 근데 그나마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또 부숴져서 수창궁으로 옮겨 간 상태였다.[14] 나성에 황성까지 있던 장락궁은 제 2정궁 취급을 받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그야말로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