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선교회

 


1. 개요
2. 1992년 시한부 종말론 휴거 소동
3. 휴거 소동, 그 뒤
4. 부활?
5. 기타


1. 개요


1990년대 세기말을 틈타 이장림 목사를 중심으로 생긴 유사 개신교 계열의 사이비 종교. 후술할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그딴 말도 안되는 - 개소리로 당시 한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장림 목사는 원래 기독교 서적을 전문적으로 번역/출간하는 생명의말씀사의 번역가였다.[1] 그리고 현재는 이름을 "~답게 살자"라고 해서 "이답게"로 바꿨다고 한다. 80년대 후반에 출판한 이장림의 저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 에서 따와서 다미선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
새하늘교회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1992년 10월 28일 당시 KBS뉴스'''

2. 1992년 시한부 종말론 휴거 소동


이 종교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휴거 떡밥이다. 1990년대는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흉흉했던 세기말 분위기와 맞물려 종말론을 내세우는 신흥종교들이 많이 탄생한 시절이었다. 다미선교회는 종말론자 이장림 목사가 주도하여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요한묵시록을 근거로 해서 24시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주장으로 신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성경만 봐도 복음서에서 그 날은 천사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며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온다'''고 했다. '''개신교계에서는 당연히 이단 취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다.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후반부터로 이때부터 명동이나 서울역 등 주요거리에서 길거리 전도를 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가 된 것은 90~91년도 즈음부터였다. 시한부 종말론을 다룬 종교서적들이 서점에 다수 등장한데다[2] 1991년에 KBS 사랑방 중계,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PD수첩 등이 다미선교회와 시한부 종말론에 대해 다루면서 이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방송에서 다미선교회를 딱히 긍정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다미선교회측에서는 이를 오히려 포교의 기회로 삼아 상당수 신도들을 낚았다.
월급 300 받으면 잘 번다는 소리 듣던 시절에 뜯은 액수가 몇백 몇천도 아니고 무려 34억이니[3] 얼마나 많이 낚였는지 알만하다. 신도 중 4명이 총합 6억 5천을 냈고, 천만 원 이상 헌납한 신도는 30여 명이었으며, 그중 일부는 10월 28일까지 먹고 살 만한 돈만 남겨놓고 전재산을 헌납했다고 한다.
이하는 이장림의 휴거드립으로 인해 일어난 피해를 조사하다가 나온 각종 사건들이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에서는 30대 주부가 아들을 데리고 경남에서 선교를 하겠다며 가출했다.
  • 부산직할시에서는 누군가가 부동산 1억 원어치를 매각해 다미선교회에 바쳤다.
  • 대구직할시의 어떤 사람은 전세금 7백만 원을 교회에 내고 교회에서 살기도 했다.
  • 전라남도 강진의 한 여고생은 부모가 다미선교회에 못 나가게 막자 음독 자살했다.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사는 윤 모 씨는 대학생 세 아들들과 함께 모두 종말론에 빠져 가정이 파탄났다. 두 아들은 북한(!)과 외국에서 순교하겠다며 가출했다.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에서는 신도 10여 명이 1991년 10월부터 외부접촉을 끊으며 기도원에서만 생활했는데, 그중엔 어린 애들도 있었다.
  • 어떤 주부는 자녀 3남매를 모두 데리고 가출, 휴거론을 주장하는 부천의 모 교회에서 숙식하다 교회 목사와 부적절한 관계로 임신하였다.
  • 휴거론을 주장하던 한 목사는 여중생, 여고생 신도를 대상으로 안수기도를 구실로 삼아 성범죄를 가했다.
  • 임산부가 휴거되기 쉽게 몸이 가벼워지겠다며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태했다.
  • 휴거를 앞두고 세간 살림을 나눠준 사람들도 있었다.
  • 사표를 내고 교회로 가서 휴거를 기다린 회사원들도 있었다.
  • 세상에 종말이 오고 구원을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휴가에 복귀하지 않고 그대로 숙소에서 뻗대다 그대로 휴거가 불발되고 영창에 끌려간 군인도 있었다.
  • PD수첩에 나온 사례로, 어떤 고교생이 책을 보고 휴거론에 빠져 학교를 빼먹고 교회로 가는 지경이 되자 부모가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켰다. 그러다가 교회의 도움으로 용케 탈출한 뒤, 북한에서 순교하려고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어떤 여고생도 정신병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가출한 다음 제주도에서 숙식했는데 발각되었을 때 찬송가를 부르며 피아노를 치는 채로 방송에 나왔다.[4] 참고로 둘 다 방송에 나올 때 모자이크가 없었다. 한 명은 다시 출연했을 때 모자이크되었지만. [5]
하도 종말론이 유행하다 보니, 딱히 다미선교회와는 상관없는 다른 평범한 개신교 교회들도 휴거 책자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해졌다. 심지어 당시 이단 상담 전문가의 딸까지 종말론에 낚였을 정도로 크게 성행했다. 당시 한국기독교 이단상담소장이었던 진용식 목사가 KBS 모던코리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진 목사가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신도들에게 꾸준히 관련 강의를 하면서 주의를 환기시켜 왔기 때문에 교회 신도들 중에는 다미선교회와 종말론에 빠진 사람이 없었는데, 정작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진 목사의 딸이 다미선교회 추종자였던 담임교사의 영향을 받아 종말론에 빠졌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6] 그리고 다미선교회 안에서도 정확한 휴거의 때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10월 28일은 맞는데 정확히 몇 시냐는 것. 28일이라면 한낮인가 자정 직전인가, 한국시간인가 GMT인가를 놓고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결국엔 자정까지 기다리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다.
그리고 대망의 1992년 10월 28일. TV방송국과 외신기자들까지 취재에 나서며 그날 밤 마감뉴스를 통해(KBS 보도본부 24시, MBC 마감뉴스, SBS 마감뉴스) 생방송으로 휴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찰이 출동했고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지켜보았으며, 다미선교회와 종말론을 추종하던 교회들의 신도들은 일명 '승천복'이라는 흰색 옷을 입고[7] 열광적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했다. 물론 다미선교회 밖은 가족과 친구, 애인 등을 찾으러 온 사람들과 기자, 구경꾼들이 뒤섞이고 인산인해를 보이며 어수선했다. 도중에 교회 밖에 설치된 TV 수상기가 한 군중에 의해 부서지면서 그 소리가 휴거의 징조라고 떠드는가 하면[8] 애인을 찾으러 온 사람이 옷을 벗어던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밤 12시가 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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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뉴스의 아나운서

'''휴거 같은 건 당연히 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고 세상은 그대로였으며,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신도들은 그냥 멍하니 있는 등 정적에 빠졌고, 몇몇 신도들은 '에러가 났다'며 흥분하거나, 나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나방이 휴거가 되었다!"라고 소리쳐서 나방이 있던 곳으로 몰려들어 좀비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등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일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다미선교회 기도원에서는 분노한 신도들이 기물을 때려부수고 책임자 나오라고 소리지르고 난리가 났다. 일부 목사들은 난리통 속에 슬그머니 도망치거나, 심지어 분노한 신도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기꾼이라고 욕먹고 두들겨 맞으면서 목사관으로 피신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별 일 없이 평온하게 다음 날이 되었다. 당시 이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들은 하늘나라가 아닌 집으로 돌아갔으며..."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그리고 휴거 소동 다음날, MBC 뉴스데스크의 첫 앵커 멘트는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였고, KBS 9시 뉴스의 앵커 멘트도 비슷하게 "휴거의 기적을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였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의 사회면 기사 첫 구절은 이보다 더 심플한 '휴거는 없었다.'
휴거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신도들은 허탈감과 후유증만 남긴 채 대다수가 일상생활로 복귀했고, 망신을 당해 야반도주하다시피 이사를 간 가정도 많았다. 다미선교회를 따라 휴거론을 추종하던 많은 교회들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며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나마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이나 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같은 최악의 상황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고,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KBS 공식계정 크랩(KLAB)의 휴거 소동 요약영상.

3. 휴거 소동, 그 뒤


휴거소동이 끝난 뒤 다미선교회는 동년 11월 2일 휴거소동 사과문을 발표하고 신도들의 헌금반환 신청을 11월 10일까지 받기로 하면서 해체되었다. 해산당시 신도 수는 약 8천 명 정도, 보관한 헌금 액수가 25억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웃긴 것이라면, 막상 이장림은 '''1993년에 만기되는 환매조건부채권'''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9]1992년에 휴거 나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면서 왜 그랬는지(...).[10] 이때문에 검찰은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휴거 날짜 한 달 전인 9월 24일에 이장림을 사기 혐의로 구속했고, 수표 1억 9300만, 환매채 3억, 2만 6700달러를 압수하였다. 법원은 1992년 12월 이장림에게 사기죄로 2년 징역을 선고하였으며, 이장림이 항소하자 2심에선 징역 1년과 2만 6천 달러 몰수형으로 바꾸었다.
끝으로 이장림은 1992년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 '''"여러분, 휴거는 불발했습니다."'''(...) 라는 희대의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미선교회 신자들은 일반 교회로 흩어졌으나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다미선교회 건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등 상당기간 방황하였다. MBC 뉴스에서는 1992년 11월 26일자로 구 다미선교회 신자들이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짧게 보도하였다. 당시 보도 내용
이장림은 1년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지 오래되었다. 현재는 시한부종말론은 잘못된 것이며 종말의 때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뒤로는 또 '레머 선교회'라는 걸 세우고는 여전히 종말론을 펴므로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2012년 종말 떡밥도 돌았지만, '''당연히 이것도 불발했다.''' 그러나 1992년에 있었던 소동은 2012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이 소동이 일어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지구는 잘 돌아가고 있다.
당시 뉴스에 등장했던 다미선교회 서울 본부 건물은 이후 네비게이션 회사 "하이온콥"이 별관으로 사용하였다. 하이온콥이 2008년 부도처리되자 지금은 환경단체들이 '숲 센터'로 공유하여 사용 중이다.
'''2020년 성산동 숲 센터(前 다미선교회) 위치[11]'''
'''1992년 당시 성산동 다미선교회'''
다미선교회 시절에는 딱 90년대스러온 짙은 갈색 벽돌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건물 외장을 밝은 색으로 개장하여 인상이 많이 다르다. 휴거소동 당시 임시 예배소를 설치했었던 앞 주차장 역시 아직도있다.
2012년 휴거 소동 주역들(?)의 20년 뒤 근황이 공개되었다. 장만호를 제외하면 종말신앙론은 접은 걸로 보인다고.

4. 부활?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휴거를 주장하는 다음 카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 다미선교회의 실질적인 후신이라는 의혹이 있다. 고문으로 있는 조호남 목사는 92년 당시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다 노회에서 면직당한 사람이고(해당 기사), 장죠셉 목사는 다미선교회 미주 지부장이며 휴거 디데이 당시 본부 집회를 인도했던 장만호 본인이다(...). 바코드가 베리칩으로 바뀌고 휴거 일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뿐이지 동일한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12][13]

5. 기타


사실 이장림 본인은 휴거가 모일 모시에 올 것이라고 딱 잡아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냥 "잘은 모르겠는데 언젠간 올 테니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라고 말했을 뿐이며, 휴거가 1992년 10월 28일에 일어난다고 말한 것은 다미선교회 소속의 '''고등학생''' 신자였던 하방익이었다. 당시 다미선교회는 청소년들의 순수함을 이용하여 하방익과 권미나[14] 등 여러 고등학생들을 거짓 예언자로 활용했다. 그 때문에 이장림을 체포할 때 사기죄밖에 수사할 게 없었고 형량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하방익은 휴거사태 이후 다미선교회를 떠나서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후에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훗날 종말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철없던 시절 넘어가서 사이비 종교 홍보를 했다고 후회한다는 인터뷰를 하였다. 하방익은 종말론과 이단 문제에 대하여 계속 비판하면서 기성 개신교계에 자정을 촉구하고 있다.“일 지진은 재해, 내년 종말은 없다” 권미나도 종말론을 버리고 일반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2011년에 이장림은 이그노벨상 수학상 부문 공동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세계 종말 시기를 주장한 사람들'이라는 타이틀로. 수상 이유는 '수학적 추정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공로'라고(...)
당시 한국 기독교단들은 다미선교회가 휴거 소동을 벌이기 전부터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쪽은 신천지와 달리 기성교단과 명확하게 갈리지 않고 야릇한 교집합을 이룬다.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지정되지 않은 기성 교회 중에도 진지하게 휴거에 대한 환상을 품은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연세중앙교회. 이쪽은 아예 2013년 하계성회 당시 휴거 관련 연극인 '그날'을 청소년들 앞에서 상연하고 선동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날짜를 특정하는 선을 넘지 않고 휴거가 임박했다고 주장하는 정도는 대체로 용인된다. 심지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도 90년대까지는 종말론 설교를 하고 다녔을 정도.[15] 이런 현상을 한국개신교계에 짙게 드리워진 세대주의 신학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당연히 그런 설들은 제대로 된 신학도 교리도 아니니까 빠져들거나 하지는 말자.
MBC 재연프로그램인 타임머신에서 이 사건을 다소 코믹하게 재현했으며, 2016년 삼일절에 방송된 XTM 잡식남들의 히든카드 M16에서도 언급되었다.
독립 영화 선지자의 밤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따왔다.주인공인 여주는 어렸을때 다미선교회를 모티브로 한 교회에서 선지자[16]를 했다. 이후에 어른이 돼서 이 일을 잊고 살지만,과거 선지자로 살 때와 달리 정보를 빼돌리면서 사채업자에 넘기는 답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고,생존자이자 아직도 휴거를 믿는 중헌이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휴거 이후의 생존자들의 삶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주인공 여주가 결국 과거와 현재를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이 잘그려져 있다.
2020년 2월 20일, KBS 다큐 인사이트 모던코리아에서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태를 당사자들의 후일담 격인 인터뷰와 함께 아침마당, 생방송 전국은 지금, 사랑방 중계, 뉴스비전 동서남북, KBS 뉴스 9, 문화토론 자유공간 같은 자사 프로그램 자료뿐만 아니라 해외 방송국과 MBC PD수첩 자료까지 인용하며 상세히 다루었다. 물론 당대의 방송자료 상당수는 모자이크나 가리개 처리는 했지만.
당시 다미선교회를 비롯한 종말론 교회들에서 단골로 불렀던 찬송가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팔소리'였는데, 정작 이 찬송가의 실제 가사 내용은 하느님이 오시기 전까지 바른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며 재림을 기다리자는 것에 가깝다.[17]
2020년 10월 29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휴거 전날과 당일 이야기를 다시한번 다루었다.
[1] 이단 사역자가 정통 기독교 출판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다 마각을 드러내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는 극동방송에서 설교를 송출한 적이 있으며, 유병언은 무려 극동방송의 부국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유병언과 다른 구원파의 분파 수장인 박옥수는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책을 낸 적이 있었다.[2] 사실 1990년대 초반에 미국과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한 걸프 전쟁이 일어난 여파로 "이제 곧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라는 공포 분위기가 한국 사회 전반에 가득했던 데다가, 마침 1990년대가 2000년대로 넘어가는 이른바 세기말의 연대였기 때문에 종말론이 한층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3] 2020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75억'''이다. 참고로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억 5천만 원이었고, 이자율이 기본 10%에 달했으므로 현금 1억 원을 은행에 넣기만 하면 이자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잘 먹고 살 수 있었다.[4] 참고로 이 피아노 치는 장면은 모던코리아에도 나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때 MBC에서 썼던 장면도 인용한것. 휴거불발 이후로 둘다 정신 차린 채 PD수첩에 다시 출연했다는 후문이다. 참고로 피아노 장면이 나온 회는 86회(1992년 7월 21일 방영) 후일담을 다룬회는 90회이다.(1992년 11월 13일 방영)[5] 이때는 초상권 개념이 희박하여 웬만큼 심각한 사건사고라 해도 모자이크나 목소리 변조 처리를 하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래도 미성년자는 꼭 가려주었다. 청소년의 모습을 전혀 가리지 않는 건 당시 기준으로도 몹시 특이한 일이었다. 참고로 모던코리아에 해당 장면을 인용했을 때는 초상권 문제가 있는 만큼 눈가리개는 했다.[6] 이 담임교사는 결국 사표를 내고 집을 비롯한 전 재산을 처분하고 교회로 들어갔다고 한다.[7] 일부 교회에서는 휴거되었다는 증거를 남긴다며 신도들의 옷에 일일이 이름표를 달기도 했다.[8] 이아나운서S 모던코리아에 출연한 당시 경찰 경비과장에 따르면, 사실은 '''다미선교회 건물 인근에 살던 한 수험생이 공부하던 중에 바깥 소음이 짜증나서''' TV 수상기를 발로 차서 부순 것이라고 한다[9] 구입을 한 년월일은 92년 5월 22일 이었다.[10] 전해지는 이장림의 항변 내용은 후술하는 예언과 환상을 말하는 미성년자들, 자칭 선지자들에 비해, 이장림 본인은 그런 예언과 환상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은 휴거되는 자격을 얻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서 환란기를 거치며 순교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그 기간에 사용할 자금(...)이 필요했다고 한다. [11] 주소는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 11길 5(지번 주소는 성산동 209-4)[12]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다미선교회 이장림 본인도 휴거 일자를 특정하진 않았다. 휘하의 소년 선지자인 하방익이 휴거 일자를 밝히자 거기에 편승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결국 선을 넘기 이전의 다미선교회와 똑같은 짓을 답습한다고 볼 수 있다.[13] 카페에 독자 카테고리를 갖고 있는 목사들 중에 정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나은게 해외 목사인 폴 워셔와 데이빗 윌커슨인데, 폴 워셔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그러려니 하더라도 데이빗 윌커슨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있는 사람이다. 나머지 국내 목사는 다미선교회와 얽혀 있거나 과거 노골적인 이단에 투신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14] 태어났을 때는 말을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다가 학교 들어갈 즈음에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장애인 신세에서 벗어나, 이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교회에서 설교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라면 본인에게나 가족들에게나 기쁜 일이겠지만, 문제는 본인과 본인 가족들이나 기적의 능력을 능력을 얻었다고 과신하다가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들어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고 설파하는 활동을 벌였다는 것. 당연히 휴거는 오지 않았고 본인과 본인 가족들, 신도들에게 이불킥 할 일로 남았다.[15] 조용기 목사의 90년대에 출간한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강해" 내용을 읽어보면 전형적인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날짜 지정 여부만 다르지 다미선교회가 당시 말했던 종말 상황에 대한 해석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이만만(2 X 10,000 X 10,000 = 2억)의 괴수를 중공군으로 해석하고, 황충의 소리를 탱크 엔진음으로 해석한다는 식이다.[16] 사실은 주인공은 가짜인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해서 거짓말을 한거다.[17] 1절과 2절에서 휴거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보면 마치 시한부 종말론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3절의 가사가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며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