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역사

 





1. 고대


대전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가까운 공주구석기 시대 유적인 석장리 유적이 있어 대략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되며, 청동기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청동기 유물, 집터, 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 중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농경문 청동기.

농경문 청동기. 서점의 한국사책들에 잘 나오는 그거 맞다.
대전 지역은 원삼국시대삼한 중 마한에 속하는 곳이었으며, 마한을 이루던 소국 중 하나인 신흔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지명 표기는 삼국시대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순우리말 지명 '''비수리'''를 한자를 이용해 표기한 것이다. 이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 전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전에는 산성 유적이 많고, 산성이라기보다는 보루에 가까운 수준의 성도 많다. 그 뒤로는 통일신라의 비풍군(比豊郡)[1]에 속하게 된다. 한편 진잠 일대는 진현현이었고 유성 및 둔산신도시 일대는 유성현이었다. 유성현은 비풍군의 영현이었고, 진현현은 황산군(나중에 연산현이 됨)의 영현이었다.

2. 고려


고려 시대에 들어서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대전 일대에는 공주목이 관할하는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 덕진현 4개의 속현이 있었다. 회덕현과 진잠현에는 명종 때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적인 행정을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도 별도의 고을로 이어졌다. 유성현과 덕진현은 독립하지 못하고 공주목에 흡수되었다. 한편 특수 행정구역인 향, 부곡, 소도 있었는데 명학소는 지금의 둔산이 있는 곳이며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알려져있다.

3. 조선


조선시대에 들어 회덕군/진잠군으로 개칭되었다. 현 대전 중심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공주목(公州牧)에 속한 작은 농촌이었으며, 조선 초기부터 '한밭'을 한자로 옮긴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한때 '태전(太田)'으로도 불렸다는 속설이 있으나, 실제로 태전은 1904년에 처음 등장한 명칭으로, 근대에 잠깐 사용되다 사라진 지명이다.[2] 다만 등장한 시대가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다보니, 8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종종 태전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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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대전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 대전 중심부는 1906년까지 회덕도, 진잠도 아닌 '''공주''' 땅이었다가 회덕군으로 넘어왔다. 물론 저 길쭉한 공주 땅이 원래 공주 땅인 건 아니고, 속현 유성현, 덕진현이 공주에 흡수되면서부터 저렇게 된 것이다. 상단의 이미지에는 1895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군현들의 비입지나 두입지가 일괄적으로 정리된 것은 1906년이다.[3] 또한 청주의 월경지였던 주안면이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회덕군에 편입되었는데, 상단의 지도에는 누락되어 있다.
단, 현재의 유성 지역은 계속 공주에 남아 있다가 1914년 대전군 출범 때 넘어왔다. 그리고 유성까지 대전군에 합류하게 되면서, 비풍군 시절의 중심 지역과 영현들까지 합친 영역을 대략적으로 회복한 것이 되었다.

4. 일제강점기


대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은 1900년에 확정된 경부선 철도 노선이었다. 1904년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4]대전역이 설치[5]된 이후 인구가 유입되고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1906년 산내면이 회덕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회덕군청 역시 기존 회덕읍내에서 대전시가지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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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현내면(유성면)을 통합하여 출범한 대전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행정구역 대개편 당시 기존의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유성면을 통합하여 '''대전군'''(大田郡)이라 명명하였다. 단순히 기차역이 있던 동네 이름인 '대전'이 기존 고을 이름인 '회덕'을 대신해 새로운 고을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 때 대전역 일대의 시가지(중구 은행동, 동구 정동, 중동, 원동, 인동)를 '대전면'으로, 그 외곽지역을 '외남면'으로 대전면을 둘러싸는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6] 1917년 내남면이 회덕면으로 개칭되었다. 대전은 계속 성장하여 '''충청권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1931년 대전군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었다.
1935년 대전군 대전읍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됨으로서 본격적인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대전군의 잔여 지역은 '''대덕군'''(大德郡)으로 개칭되었다. '대'전과 회'덕'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 1940년 대덕군의 외남면[7]과 유천면 일부[8]를 대전부에 편입하였다.
대전역부터 구 충청남도청까지의 중앙로를 카스가초도리(春日町通)라고 불렸으며, 대전역에서 목척교 일대가 카스가초 잇초메(春日町一丁目), 은행동이 카스가초 니초메(春日町二丁目), 선화동이 카스가초 산초메(春日町三丁目)라고 불렸다. 구 충청남도청이 완성되자, 카스가초 니초메와 산초메의 땅값이 급격히 오르며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카스가초의 사진

5. 대한민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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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해방 당시 대전부와 대덕군의 행정구역 상황.
1949년 대전부를 '''대전시'''로 개칭하고,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이 점령하자 매우 짧은 기간동안[9]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다.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미 24사단이 지연전을 수행하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대전 전투의 와중에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대전시는 한국전쟁 이전의 모습을 찾기 쉽지 않다. 결국 북한군은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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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대덕군 유천면 전역, 산내[10]·회덕면[11]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대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1973년 대덕군 북면과 유성면이 각각 신탄진읍과 유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77년에는 대전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동구의 2개 구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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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대덕군 유성읍과 회덕면 전역, 탄동[12]·구즉[13]·진잠[14]·기성면[15] 각 일부를 편입하여 대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때 대덕군은 2쪽으로 나뉘어졌다. 이 상태로 1989년 대덕군 폐지 및 대전직할시 승격 때까지 이어졌다.[16] 직할시 승격 직전인 1988년에는 중구에서 서구가 분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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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대전시~대전직할시 시절의 대전시 휘장
1989년 대덕군을 폐지[17]하고 대전시에 병합[18]하여 통합된 충청남도 대전시[19]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되었다. 동시에 서구에서 유성구가, 동구에서 대덕구가 분구되어 현재의 5구 체제가 완성되었다.
1993년대전 엑스포를 개최해서 도시의 인지도가 상승했다. 꿈돌이라는 노란색 외계생명체(?) 마스코트는 봉제인형이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상품으로 나왔고, 대전의 마스코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엑스포 종료 후에는 그 시설과 부지를 활용해 엑스포과학공원을 열었지만 일부 전시관은 거의 문을 닫은 상태이다. 엑스포와 비슷한 시기에 내부에 놀이동산으로 마스코트인 꿈돌이에서 이름을 딴 '''꿈돌이랜드'''도 런칭했지만 이쪽도 현재 관리상태는 막장이다. 꿈돌이랜드는 그나마 놀이기구 몇 개를 새로 들여놨지만, 엑스포 유령의 집은 들어가면 웃음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엑스포가 끝난 뒤 국제 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재개발할 계획이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크리로 인해 단지내 재개발 계획조차 지지부진한 상황. 2012년 6월 1일, 결국 적자를 못 버티고 꿈돌이랜드가 매각되었다. 그후 2018년 현재 부지는 기초과학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5개 직할시[20] 중 가장 인구가 적었지만 1995년에 광주광역시의 인구를 앞질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지금의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인구가 1,270,873명이고 광주광역시의 인구는 1,257,063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상 교통의 영남·호남 분기도시[21]가 된 데다가 정부청사 및 신 행정도시의 영향권 등 각종 메리트가 따라붙었으니 발전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전은 충청남도 남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충청남도 북서쪽과의 연계가 잘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홍성군예산군의 경계[22]에 인구 10만짜리 내포신도시를 만들고 충청남도청을 이전하였다. 홍성과 예산 지역은 대전에서도 대전당진고속도로로 연결되어있어서 접근성도 나름 괜찮다.
[1] '비수리'를 백제의 우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다.[2] 대전지명 관련 참조 링크, 실록의 태전 지명 첫 등장 기사 첫 번째 링크 내용에서 한국지명요람을 인용한 부분을 보면, 태전이 근대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진 지명임을 알 수 있다.[3] 1895년 23부제 실시 당시에는 도의 폐지만을 골자로 개편이 이루어졌기에 산하 군현들의 구역 변경은 한성부의 추가 확장 말고는 없었다. 이곳을 참고.[4] 지금의 동구 정동[5] 흔히 '공주에 지으려 했으나 지역 유지의 반대로 대전에 지었다'라고 하지만, 전국에 퍼져있는 지역 유지 반대설이 그렇듯이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양반들도 강제 노역에 동참시킬 정도로 양반들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양반일지라도 양민들과 같이 노역하던 시절이다. 공주의 몰락은 일제의 모략(?)이 아닌 그냥 땅이 좁아서이다. 굳이 이런 공주보다는 대전으로 길을 파는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공주에 철도를 놓아도 공주는 주변 산을 다 밀어야 도시를 넓힐 수 있다.[6] 이처럼 청주시의 전신인 청주군도 이 때 읍성이 있던 시가지를 청주면, 그 외곽지역을 사주면으로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 이후 외남면이 대전부에 편입되듯이 사주면이 청주시에 편입되는 것도 마찬가지. 청주시/역사 문서 참조.[7] 이 지역은 대전이 부로 승격되기 전인 1926년과 1932년에 이미 일부가 편입된 상황이었으며, 이 시기 편입되지 않은 외남면의 잔여지역(삼정리, 가오리, 호동리, 옥계리, 대성리)은 산내면에 이관되었다. 1940년에 편입된 곳은 홍도리, 가양리, 소제리(소제동, 자양동), 연효리(삼성동, 성남동), 산소리(판암동), 용방리(용운동), 석교리, 중촌리.[8] 유천리, 과례리(문화동), 당대리(산성동), 평리(태평동), 용두리 일부(용두동).[9] 6.28 ∼ 7.14[10] 옥계리, 가오리, 삼정리, 호동리. 원래 외남면이었다가(대성리 포함) 1940년 대전부 편입대상지에서 제외돼 산내면으로 이관된 곳들로, 대성리만 산내면에 계속 남고 나머지는 모두 대전시에 편입됐다.[11] 대화리, 오정리, 용전리.[12] 신성리, 가정리, 도룡리, 장동리, 내동리(방현동), 화암리, 덕진리, 하기리.[13] 원촌리, 문지리, 전민리, 용산리 일부(현 전민동 대덕골프장 뒷산 일대).[14] 내동리(원내동), 교촌리, 대정리, 용계리, 학하리.[15] 관저리, 도안리, 가수원리.[16] 다만, 위의 지도에서 진잠면 동북쪽에 살짝 튀어나온 부분인 계산리는 1987년 대전시에 편입됐다. 1983년 편입대상지에 포함되지 않아, 한동안 진잠면의 실질월경지로 남아 있었다.[17] 이때 신탄진읍은 신설된 대덕구, 산내면은 중구와 동구에 분할 편입되었고, 동면은 동구, 기성면은 서구, 진잠면(남선리 제외), 탄동면, 구즉면은 역시 신설된 유성구에 분할 편입되었다.[18] 단, 진잠면 남선리는 논산군 두마면(현 계룡시 신도안면)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의 계룡시 지역번호는 충청남도의 041이 아닌 대전의 042를 쓴다. (정확히는 계룡시 출범 이전인 1997년부터 042로 변경) 여담으로 오늘날 남선리는 계룡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도안면에서 유일하게 거주지가 있는 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도안면으로 변경하기 전 이름이 남선면이었다.[19] 2017년에도 충북 대전이라고 쓴 기사가 나왔다. 경북 울산이라 잘못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20] 당시에는 광역시를 이 명칭으로 불렀으며, 울산은 아직 경상남도에 속한 일반 시였다.[21] 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당진영덕고속도로 등의 대체도로가 건설되어 영·호남 분기도시로서의 역할이 다소 줄어들었다.[22] 충남 전지역에서 2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