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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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의 황제. 당시 서로마 제국 내의 실력자였던 오레스테스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로물루스였으며, 황제가 되면서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어린 아우구스투스)가 덧붙었다. 서로마 제국이 오도아케르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남게 되었다.
2. 생애
2.1. 즉위
동로마에서 임명하여 글리케리우스 황제를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가 황제로 있었지만, 이 당시 양 로마 제국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리키메르 사후 그의 지지세력이 동로마 제국과 척을 지게 되면서 그 지도자인 오레스테스[1] 는 동로마 제국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추대한다.[2]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2.2.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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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있던 야만족 출신의 장교들이 봉급으로 땅을 요구했는데 오레스테스가 무슨 배짱에서인지[3]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들이 오도아케르를 리더로 하여 로마에 쳐들어와서 전투에서 이기고[4] 오레스테스를 죽인 다음 라벤나로 들어가 황제를 폐위시켰다.
물론 여전히 율리우스 네포스는 자신을 제국 서방 황제로 자칭했으며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 취급하지 않았지만, 율리우스 네포스는 이탈리아 반도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은 데다, 이후 이탈리아를 손에 넣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위를 정식으로 동로마 황제에게 반납하는 제스처[5] 를 취하면서 이때를 계기로 서로마 제국 황제위는 사실상 사라졌다.
2.3. 이후 생애
오도아케르의 관용 덕택인지 퇴위 후에는 나폴리 근교의 자택에서 엄청난 연금을 받으면서 조용히 살 수 있었으나, 그 뒤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기원후 500년 이후까지도 살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3. 기타
로마 제국은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황제의 치세에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로마의 초대 국왕 로물루스와 초대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모두 가진 황제의 치세에 서로마가 멸망하여 예언이 실현되었다. 율리우스 네포스를 마지막 황제로 간주하면 첫번째 '카이사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율리우스'라는 이름이 겹친다. 심지어 동로마 제국도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황제이자 제국의 행정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똑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치세에 멸망하였다. 이것을 어거지로나마 연장해서 로마의 후계를 자칭한 나라에 적용해도 의외로 잘 들어맞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 서로마의 계승을 표방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카를 1세의 치세에 멸망했다.[6]
-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고 황제로 즉위했던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1제국은 본인의 치세에 멸망했고,[7] 그의 조카[8] 로서 제국을 재건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 역시 본인의 치세에 멸망했다.
- 신성 로마 제국에 이어 독일 민족의 제국을 자칭한 독일 제국은 빌헬름 1세에 수립되었으나 그의 손자인 같은 이름을 쓰는 빌헬름 2세때 독일 11월 혁명으로 공화국이 되었다.
-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를 자칭했던 불가리아 최초의 차르[9] 시메온 1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시메온 2세[10] 가 폐위되어 불가리아의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수립한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는 보두앵 1세였는데, 마지막 황제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보두앵 2세였다.
-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를 자칭했던 세르비아 제국의 초대 차르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었는데,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치세에 세르비아 제국은 멸망하고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를 재통일한 군주들은 차르로 즉위하지 못하고 공작(크냐지→데스포트)을 칭하다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11] .
- 동로마를 멸망시킨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이라고 칭한 군주는 메흐메트 2세였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메흐메트 6세가 아타튀르크에 의해 폐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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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토머스 브로디생스터.
<마지막 군단>이라는 영화에서는 이 황제가 나중에 탈출해서 영국으로 가서 아서 왕의 조상이 된다는 내용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고증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 동로마 제국이 황제를 보호하겠다고 했다거나 뒤늦게 오도아케르를 승인했다거나,[12] 아니면 410년에 이미 황제를 자칭한 인물에게 선동되어 극히 일부를 빼면 일찌감치 갈리아로 떠난 브리타니아의 군단이 로마 멸망 시점에도 건재하다든가[13] 하는 게 대표적.
희극인 '로물루스 대제'라는 연극이 있다. 이 작품에선 국정에는 아무런 관심없이 닭이나 키우는 무능한 암군으로 나오는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폐위되어 능력을 입증할 기회조차 없었던 인물이었던 반면 여기에 나오는 로물루스는 결혼할 나이가 된 딸까지 있는 늙고 무능한 황제라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고, 실제로 국정에 관심 없고 닭이나 키우던 인물은 서로마 초대 황제 호노리우스였다. 작가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로, 국내에선 야인시대로 유명한 배우 권성덕옹이 암투병 이후 복귀작으로 나왔던 작품이라 그쪽 매니아들에게 조금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5. 둘러보기
[1] 참고로 아틸라에게 부역한 매국노이긴 하지만 엄연한 로마인이었다.[2] 오레스테스 본인이 로마인이라서 법적으로는 황제가 되는데 하자가 없었지만, 아틸라에게 부역했던 경력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서 어린 아들을 황제로 추대했다.[3] 당시 서로마 정규군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던 데다 그나마도 각 지역에 사실상 정착하다시피 한 게르만족에 맞서 분산되어 방어전을 벌이느라 라벤나를 구원할 여력이 없었다. 이들은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각개격파당하여 대부분 전멸한다.[4] 두 번 모두 이겼고 두 번째 전투에서 오레스테스를 참했다.[5] 서로마 황제의 관을 보냈다. 물론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이걸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보낸 테오도리크에게 죽는 원인이 된다.[6] 카롤루스와 카를은 같은 이름을 각각 라틴어와 독일어로 표기한 것이다.[7] 멸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어린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즉위한 건 아니라서 큰 의미는 없다.[8]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학술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가십에 불과하다. 다만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들과 나무위키의 다른 문서들에서는 정말로 사생아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9] 세계 최초의 차르이기도 하다.[10] 앞으로 슬라브권에 차르가 복고되지 않는다면 세계 최후의 차르이기도 하다.[11] 다만 세르비아를 재통일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후대의 민담에서는 '차르 라자르(라자르 황제)'로 불리는 경우도 많은데, 실제로 사용한 칭호는 크냐즈였다.[12] 로물루스 황제는 애시당초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옹립되었으며 그렇다고 오도아케르를 승인하지도 않았다. 테오도리크가 왜 오도아케르를 죽일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자.[13] 오히려 건재했던 군단은 갈리아 지역에 배치되어 게르만족에 맞서 싸우고 있던 군단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프랑크족과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