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

 




[image]
중세의 아홉 위인을 묘사한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아서 왕
'''왕호'''
영어
King Arthur
웨일스어
Y Brenin Arthur[1]
''''''[2]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
'''생몰년도'''
불명
'''재위기간'''
불명
1. 개요
2. 무구
3. 역사와 재구
3.1. 역사 속 아서 왕 시대
3.2.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
4. 대중문화에서
5. 여담


1. 개요


'''아서 왕(King Arthur)''', '''아더 왕''' 또는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은 고대 브리튼 지역에서 브리튼인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아서 왕'이나 '아서 왕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존했다면, 그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6세기초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서는 앵글족과 색슨족의 침입에 맞서 브리튼을 방어하기 위해 분투하는, 군담(軍談)적 살신성인에 해당하는 공을 세웠을 것이다. 아서 왕이 창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당시 브리튼족의 멸족과 망국에 대한 위기감,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 전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 서사를 정비하여 중세 유럽에서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다. 아서 왕 전설은 오랫동안 서양 세계 음유시인과 문학가들에 의해 널리 사랑받았고, 오늘날에도 문학적 영감의 소재로 꾸준히 이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더 왕과 아서 왕이라는 표현이 둘 다 사용되지만, 외래어 표기법의 표준 표기로는 '''아서'''이다. 아서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인명으로 종종 사용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아서 위즐리셜록 홈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만 맥아더(MacArthur)와 같은 경우는 관용어 존중의 차원에서 맥아서가 아닌 맥아더로 읽히고 있다.
중세 영국에서는 예수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중세기 문학과 예술에서 이른바 영웅의 본보기, 기사도 정신의 원천으로서 그를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중세의 아홉 위인(Nine Worthies) 중 하나로 칭송을 받았다. 나머지 여덟명은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윗, 여호수아, 유다 마카베오,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문헌은 웨일스어 문헌인 어 고도딘Y Gododdin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는 사본은 13세기의 것이지만 원본은 가장 이르게 작성된 부분은 7세기, 대부분은 9~10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서 왕에게 구체적인 생애를 부여한 몬머스의 제프리 이전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싸우거나 웨일스 민속 영웅의 왕으로 나오는 등 민속적인 면이 강했으나 프랑스에서 아서 왕 전설이 기사도 문학으로 바뀌고 원탁의 기사들이 활약하면서 비중이 낮아진다.

2. 무구


아서 왕 전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호수의 요정 등 다양한 조력자에게서 구한 여러가지 신비한 무기들이다. 그 유명한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비롯한 그의 무구 전설은 중세 기사도 문학의 서사 전개 방식에 중요한 소재로 작용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정통 판타지 소설의 클리셰가 되고 있다.

그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리라. 바람이 불고, 비가 젖고, 태양이 회전하며, 바다가 에워싸고, 땅이 이어지는 한. 다만 오직 내 와, 내 망토, 내 검 칼레드불흐(=엑스칼리버), 내 창 흐롱고머얀트, 내 방패 위넵구르투헤르, 내 단검 카른웬하이, 그리고 내 아내 그웬휘바르(=기네비어)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Thou shalt receive the boon whatsoever thy tongue may name, as far as the wind dries, and the rain moistens, and the sun revolves, and the sea encircles, and the earth extends; save only my ship; and my mantle; and Caledvwlch, my sword; and Rhongomyant, my lance; and Wynebgwrthucher, my shield; and Carnwenhau, my dagger; and Gwenhwyvar, my wife.

아서 왕이 사촌동생 킬후흐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한 말. 영문 번역은 Lady Charlotte Guest에서 발췌.

  • 구스화이트(Goosewhite):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 수많은 보석들이 황금으로 고정되어 있고, 한때는 우서 펜드래곤의 소유였던 무구. 모든 것 중 매우 희귀한 것이었기에 구스화이트라고 불렸다.
  • 롱고미니아드
  • 엑스칼리버(+검집)
  • 위가르(Wygar): 강철 그물로 장식된 사슬갑옷. 요정의 장인이 탁월한 기술로 지은 것으로, 지혜로운 자가 만들었다 하여 위가르라 불렸다. 그리고 강철 넓적다리 가리개 등등은 아발론에서 마법의 능력을 부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칼리번이 있었을 당시에는 위가르를 착용하고 칼리번은 옆구리에 찼다고 한다. 작가 라야먼은 그의 작품에서 아서 왕의 갑주(구스화이트, 위가르)에 대해 화려하게 묘사했고, 같은 12세기의 로버트 와스(Robert Wace)도 유사한 글을 썼던 반면,[3] 정작 라야먼과 와스가 아서 왕이라는 소재를 얻은 몬마우스의 제프리는 아서 왕의 갑옷을 묘사하지 않았다. 투구에 대해서는 드래곤이 새겨진 황금 투구[4]를 썼다고 적었지만, 갑옷의 경우에는 아서 왕이 갑옷을 입었는지 자체를 생략한 채 가죽 조끼(leather jerkin) 차림으로 전투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즉, 제프리의 기록을 종합하면 아서 왕은 가죽 조끼에, 황금 드래곤 투구를 쓰고,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방패 프리드웬을 들고, 장검 칼리번을 차고, 그의 창 론을 쥐고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된다.
  • 카른웬난(Carnwennan)[5]: 아서 왕의 단검.[6] <킬후흐와 올루웬(Culhwch ac Olwen)>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아서 왕이 킬후흐에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하면서 "다만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매우 귀중한 보물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모험의 과정에서 아서 왕이 동굴 속에 사는 마녀 오르디(Orddu)를 이 단검으로 "단칼에 둘로 쪼개어 반으로 갈랐다"(clove her in twain so that she fell in two parts)는 기록이 있듯이, 전설의 무기에 걸맞는 스펙을 보여준다. 또한 웨일스의 삼제가 중 아서 왕궁의 기사들의 삼제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서 왕에게 내리신 세 가지 신성한 무기를 들면서 "그의 창 롱고미안트, 그의 검 칼레드풀흐(=엑스칼리버), 그의 단검 카른웬난"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카른웬난은 아서 왕 전설에서 일종의 삼종신기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장검이나 창에 비해 단검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임팩트가 적어서인지 웨일스 밖에서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 클라렌트
  • 투명 망토(or 그웬(Gwenn)): 웨일스 신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망토. 아서 왕에게는 그 착용자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망토가 있는데, 엑스칼리버나 롱고미니아드 등과 함께 쿨후흐에게 절대로 넘겨줄 수 없는 보물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프러다인 섬의 열세 가지 보물(Tri Thlws ar Ddeg Ynys Prydain)>은 이 망토를 열세번째 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보이지 않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다"(whoever was under it could not be seen, and he could see everyone)라고 간결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2세기 웨일스의 <로나뷔의 꿈(Breuddwyd Rhonabwy)>에서는 망토가 아니라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양탄자 그웬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아서 왕의 앞에 양탄자를 펼쳤는데, 각 모서리에 불그레한 금빛의 사과가 있었고, 그는 양탄자 위에 의자를 놓았다. 그 의자는 너무나 거대했기에 세 명의 무장한 전사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양탄자의 이름은 그웬이었는데,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었다.
>And he spread the carpet before Arthur, and there was an apple of ruddy gold at each corner thereof, and he placed the chair upon the carpet. And so large was the chair that three armed warriors might have sat therein. Gwenn was the name of the carpet, and it was one of its properties that whoever was upon it no one could see him, and he could see every one.
아서 왕이 그래서 이 신비한 양탄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하면, 오웨인 경과 거기 앉아서 체스를 두는 것이다. 망토든 양탄자든 간에 상당히 흥미로운 기능을 지닌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킬후흐와 올루웬>, <로나뷔의 꿈>에서는 이 물건 자체가 스토리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무구가 너무 사기여서 묻히기라도 한 듯.

3. 역사와 재구



3.1. 역사 속 아서 왕 시대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약화로 로만 브리튼으로부터 로마 군단이 철수한 5-6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사에서도 이 당시의 역사서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이후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야만족이었던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자기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화되는 8세기 말이 되면 이와 반대로 사료가 많아져서 아서의 모델이 되는 여러 인물들을 추정할 수 있다.
[image]
아서 왕 전설의 배경이 되는 6세기경 영국의 지도. 켈트계 브리튼 세력이 게르만의 내습으로 약화되고 있을 무렵이다.
지도에서 북부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것은 노르만족이 아니라 노르드인이다.[7]
로마 군단이 철수한 힘의 공백 아래 로마화된 켈트족인 브리튼인들은 야인(野人) 켈트계인 픽트족, 스코트족의 잦은 약탈로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던 와중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 프리시 등 게르만족 계파들까지 북해 바다를 건너 오면서 섬 안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중세 영국 수도사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브리튼인들의 왕 보티게른(Vortigern)이 픽트족과 싸울 용병으로 색슨 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가 이끄는 색슨족을 브리타니아에 불러들이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게른을 배신하고 브리튼인들을 학살하며 색슨족을 브리타니아에 정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보티게른의 아들들인 보티메르(Vortimer)와 카티게른(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그들도 헹기스트와 로웨나의 암수에 당해 죽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브리튼인들은 웨일스로 밀려나고 색슨족이 브리타니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고 전해진다.
브리튼인들의 저항은 6세기경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페스트로 추정되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상륙하면서 크게 좌절되었으며, 이미 구 브리타니아의 수도 론디니움(Londinium, 현재의 런던)은 전쟁터가 되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8]. 전쟁은 7-8세기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리된다. '''최후의 승자는 앵글로색슨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서왕 전설이 왕의 죽음과 브린튼인들의 동족상잔, 브리튼인 왕국의 몰락으로 끝나는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후 앵글로 색슨족은 잉글랜드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을 동화시키거나 추방하고, 칠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후에 이들은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고, 이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들도 최후에는 후에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현대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게르만 계열이며,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은 웨일스브르타뉴콘월 등으로 밀려나거나 혹은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동화되었다.
[image]
1520년대에 만들어진 아서의 동상.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아서 왕의 모델은 이런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의 상황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으로부터 브리튼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한 "어떤 브리튼인 영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바돈 산 전투 등 앵글로 색슨족의 공세가 한 세대 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던 정황이 기록 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나타나므로,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 설에 근거해서 여러 인물들이 아서 왕의 모델이 되지만, 그 인물의 존재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아서 왕의 시대를 살아간 길다스 사피엔스(500?~570?)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9]에는 어디에도 '아서 왕'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아서 왕보다 2세기 후의 <브리튼 부족사>에서야 최초로 '앵글로색슨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아서'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왕'이 아닌 전투지휘관이며, 20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면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적어도 6세기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적어도 100년 이상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위축되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이 당시의 지휘관이 아서 왕인지는 고사하고 전투가 벌어진 바돈 산이 어디인지조차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아서 왕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대시대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6세기 중반 아서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다"는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허구라고 볼 이유도 없다. 우선 브리튼인들은 6세기경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100년 이상이나 늦춘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무렵 다른 기록에서 '아서'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짓는 당대의 유행을 감안한다면 바돈 산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의 이름이 아서라고 볼 만한 약간의 심증도 존재한다.
참고로 1981년의 영화 "엑스칼리버"는 아서 왕 전설을 집대성했다고 보는 토머스 말로리의 15세기의 저서 《아서 왕의 죽음》(Le Morte D'Arthur: 제목은 불어지만 실제론 영어로 쓰임)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하여 배경은 시기를 알 수 없는 중세로 되어 있으며,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이다. 대부분의 아서 왕 영화가 고대가 아니라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이라면 저런 플레이트 아머는 입었을 가능성은 없다. 5~6세기 무렵 로마와 그 영향을 받은 야만 왕국들은 사슬갑옷이나, 찰갑, 어린갑 등의 여러 조각들을 엮은 갑옷을 애용했기 때문. 때문에 현대에서는 아서가 로리카를 입고 있는 것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서가 로마 영향권의 브리튼인이었다면 드루이드교도가 아니라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드루이드교는 로마 지배 당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4세기 말에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면서 아예 이교는 로마의 영역 내에서 박멸되기 때문이다. 다만 410년에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하면서 박멸까지는가지 못했다.
아서 왕은 브리튼인들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서의 적이었던 앵글로색슨족에게도 아서 왕의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 이유는 앵글로색슨이 곧 브리튼인들과 마찬가지의 동병상련을 겪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인들을 몰아낸 후, 기독교로 개종하고 칠왕국을 세웠지만, 브리튼섬은 그다지 안정적인 곳은 아니었다. 7왕국이 세워지자마자 앵글로색슨족의 원래 고향 본거지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던 북게르만일파인 바이킹들이 같은 루트를 통해 브리튼을 계속 침범하면서 앵글로색슨족도 이후 300년간 본인들이 몰아냈던 브리튼인들과 같은 처지로 외침에 시달리게 된다. 이교도[10]였던 바이킹들은 노략질만 한 것이 아니라 '데인로(Danelaw)'라고 하는 정착지까지 건설하고 대군을 모아 앵글로색슨국가를 침략했다.[11] 이렇게 되자,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을 이교도의 외침으로부터 지키는 아서를 바이킹으로부터 잉글랜드를 지키는 자신에 등치시키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앵글로색슨에 맞선 켈트족 영웅이었던 아서가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한 브리튼인 전체의 영웅이 된다.[12]

3.2.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


역사상 아서 왕 혹은 그 모델이 되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며 역사상의 아서 왕 및 그 모델의 존재를 부인하는 역사가들도 많다. 그렇지만 직접 간접적으로 아서왕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아서 왕에 대응시키려는 이런저런 노력은 계속 있어왔다.
역사상의 아서 왕의 실체에 대한 설명 중에 유명한 것은 아서 왕 전설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르마티아 중기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기병 자체가 '기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펜드래곤과 비슷한 용의 문양을 사용했다는 점, 땅에 칼을 꽂아놓는 관습이 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된다. 또한 사르마트족의 전설에는 영웅이 죽게 되자 그의 검을 바다에 던지는 이야기[13]나, 아서 왕의 '호수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물의 여인'도 나온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르마트족과 관련시킬 만한 전설은 초기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에 주로 나오며, 켈트의 전설에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으므로 굳이 사르마트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와 관련된 다른 유명한 설로는 '아서 왕 = 로마의 군인 아르토리우스'설로, 루키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Lucius Artorius Castus)가 5,500명의 사르마트 기병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수비한 것이 아서 왕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그의 깃발이 펜드래곤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론으로는 그는 로마 제국이 아직 강성하던 시기의 인물이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점, 그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 그가 사르마트 기병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점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정설로 취급받았으나, 이젠 좀 아니다 싶다는 분위기.
2004년의 미국영화 "킹 아더"는 아서가 브리튼에 주둔했던 로마군의 보조병(사르마티아 중기병) 출신일 것이라는 설과, 로마인 아르토리우스라는 설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전의 아서왕 영화와는 달리, 아서가 침략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서 브리튼인 기독교도들을 지킨 영웅이라는 것을 부각시켰으며, 아서의 적들은 앵글로색슨족임을 명시하고 있다. 색슨족 추장 체르디치(스텔란 스카스가드) 및 그 아들 신릭(틸 슈바이거)을 맡은 배우들도 고증을 위해서 스웨덴인 및 독일인 배우가 나오며 초반에는 게르만어 대사를 쓴다.[14]
또 다른 학설로는 로마의 기록에 '브리튼의 왕(REX BRITANNICA, a king of Britons)'으로 등장하는 리오타무스가 있다. 리오타무스라는 말은 브리튼어로 위대한 왕을 의미하므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의 요청으로 무려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이는 이 시대에 브리튼의 분쟁에서 동원되는 병력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리오타무스는 색슨족과 맞서싸우는 입장에서 본토에서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 로마와 협력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 관리의 배신 때문에 로마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르군드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 후 리오타무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만 리오타무스가 퇴각한 방향에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이건 유사역사서다. 이 학설에 대한 반론은 별다른 내용이 없고, 기껏해야 아서는 로마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는 점 정도이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기록이 부족해서 연구 자체가 어렵고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이 주장의 약점이기도 한데, 리오타무스는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서보다도 알려진 바가 적은 인물인 것이다. 아서 왕과의 관련 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리오타무스가 누구인지부터 연구해야 할 판이다.
그 외에도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아서 왕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색슨족을 물리친 바돈 전투를 중심으로 아서의 존재를 탐구하던 중에 나온 견해이다. 바돈 전투는 벌어진 정확한 시기도, 바돈이 어디인지도, 그리고 싸운 것이 브리튼 인들인지 로마군인지조차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색슨족이 바돈에서의 패배로 활동이 수십년동안 위축된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실인 듯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길다스에 따르면 색슨족 부대는 브리튼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바돈에서 포위 섬멸되었다고 한다. 길다스는 바돈 전투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길다스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당시의 군 지휘관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 듯하다. 그런데 몬모스의 고드프리는 이 바돈 전투는 아서 왕이 지휘했다고 적었으므로,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곧 아서 왕이라는 것. 문제는 그 고드프리의 기록은 신뢰성이 상당히 떨어지며, 고드프리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아서 왕의 큰아버지(즉 우서 펜드래곤의 형)라고 적어놨다는 점이다. 길다스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 중에도 아우렐리아누스가 활동한 것은 바돈 전투보다 앞선 시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또다른 문제는, 사실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길다스의 기록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체 역시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로마의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이 가설을 따른 작품이 ABE 전집에 포함된 영국 역사소설 '횃불을 들고'인데 이 작품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그의 조카이자 기병대장인 새끼곰 '알토스' 두 사람이 아서 왕의 모델로 나온다. (해당 소설은 시공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로 재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Urien Rheged)나 전설적인 북부 브리튼의 왕 코엘 헨(Coel Hen)[15]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너무 많다...
그중 역시 거인 2명을 죽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은 콜랑이라는 이름의 키가 5m이고 거대한 을 탄 거인기사로 나온다. 최후는 목이 잘렸는데... 목이 그대로 몸에 있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쉽게 말해 끔살이다. 또 한 명은 산 미카엘 성에 사는 식인 거인이다. 이때 엑스칼리버로 거인을 베어 죽이고 거인의 보물을 백성에게 나눠줬다.
여길 참조.
아서 왕 전설의 시기와 영국 역사를 쭉 비교해 봤을 때, 실재했다면 여러 정황상으로 로마 지배시기가 끝나가던 때(5세기 후반~6세기 전반)가 가장 적절하며 그 시절에 실제로 영국을 통치했을 만한 강력한 군사지휘관의 증거가 여럿 나오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정체가 사실 로마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혹은 그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이 강하게 힘을 얻고 있다. 아서 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인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서는 그를 '왕'이 아닌 군 사령관(dux bellorum)으로 부르며, '브리튼의 왕들 편에서 싸웠다'고 서술하므로 본인은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엑스칼리버 전설의 경우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품질 좋은 금속검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호수로 유해를 보냈다는 전설의 경우, 북유럽에서 죽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비유하는 이야기가 많아 같은 맥락으로 취급했다. 또한, 그 가설을 따르며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 가다가 마침내 아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실 신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영국에 돌던 전설의 모음집적 성격이 짙다.
최근 켈트족 연구가들에 의해 아서 왕은 사실 폭군이었다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링크의 세계일보 기사 헤드라인은 명백한 오역으로, 원문의 문구는 "genocidal warlord", 즉 번역하자면 '''인종학살을 저지른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서 왕의 주적은 대륙에서 쳐들어온 앵글로색슨(Anglo-Saxon)족이었으므로 색슨을 증오하는 브리튼인들 입장에서 색슨족을 마구 죽였다고 폭군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또한 위 기사에서 을 죽인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사실 곰은 브리튼인 왕권과 용맹의 상징이라고 한다. 게다가 아더라는 이름 자체가 곰의 의미가 있다. 역시 명백한 오역.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문제가 오역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저 기사에서 말하는 내용은 아서가 직접 인종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브리튼족의 예언서 등을 보면 브리튼인들이 아서가 돌아오면 색슨족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내용이다. 즉 '인종학살을 저지른 전쟁지도자'가 아니라 '인종학살에 적합할 것으로 (후세에) 떠받들어진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여하간, 주류 학계에서는 이제 아서 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가려내는 일은 반쯤 접은 상태다. 위에서 설명한 인물들도 죄다 물증이 없는 추측에 싸인 가설일 뿐이다. 참고로 아서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가 아닌 9, 10세기 윤색된 역사서로서 존재하는 연대기에는 그저 무슨 무슨 전투에서만 싸웠다는 기록만 있다.
다만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어떠한 가설을 따라도 지금의 상상화처럼 철갑옷을 두른 이미지는 절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갈리아 전기에 나오는 켈트족처럼 벗고 싸웠을 가능성도 없다. 아서 왕은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의 장수에, 로마군 출신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리아 전기가 쓰여질 무렵과 아서 왕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사이의 시간차, 골 지방과 영국의 기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무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제식 갑옷인 로리카 하마타(체인메일)로 무장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나마도 부하들을 다 입히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3.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


"아서의 포지션에 해당할 인물"들이 위와 같이 여러 명 거론되지만, 그들 중 확실한 물증이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 아서의 실존성을 주장하는 주요 전거는 『브리튼인의 역사』(9세기)와 『캄브리아 연대기』(10세기)다. 『브리튼인의 역사』에 바돈산 전투, 『캄브리아 연대기』에 바돈산 전투와 캄란 전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튼인의 역사』는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초기 버전 같은 것으로, 옛날에는 무비판적으로 신뢰받았지만 현재는 좋게 봐줘야 삼국유사 수준이지 사료로서 가치가 영 좋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문헌이다.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왕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자세해서 문제가 되는데, 도저히 6세기의 인물의 행적을 이렇게 많이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문헌(인용, 전거의 대상)이 『브리튼인의 역사』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캄브리아 연대기』의 상세한 아서왕의 행적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후로마 브리튼(sub-Roman Britain) 시대를 논할 때 역사학자들은 아서왕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최대한 우호적으로 말해줘봤자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해줄 말이 없다”에 그치는 것이다. 이렇게 아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두드러진 조류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서의 왕국의 강역을 지도에 표시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보다 더 급진적으로, 아서가 특정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기에 "아서 후보"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학설도 있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는 아서를 6세기 사람이라고 기록했는데, 정작 6세기 당대에 쓰인 길다스 사피엔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아서라는 존재는 전혀 기록된 바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도 없다. 8세기 사람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도 없다. '''기원후 400년에서 820년 사이에 작성된 필사본들 중 "아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16] 그래서 아서 완전허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서왕"이 역사학자가 진중하고 중요한 연구를 할 시간을 빼앗고 현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주제 자체를 교과서와 역사책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Nowell Myres,[17] David Dumville[18] 등이 있다.
아서 왕이 실제 역사적 모델과는 무관하게, 완전히 켈트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존재라는 설도 있다. 그중에서는 거인 2명을 처치한 영웅이라는 점도 있다. 실제로 아서 왕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켈트 신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아서왕 전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성배의 원전은 누아다의 황금솥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4. 대중문화에서


아서 왕/창작물 참고. 역대 영국의 국왕 중 가장 창작물이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5. 여담


불가타 연작에 따르면 아서 왕의 전투 함성은 "클라렌스(Clarence)!!"였다고 한다. 여기서 클라렌스는 웨일스의 지역 이름인데,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왕도 실제 지역명인 "몽주아(Munjoie)!"를 전투 함성으로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 작가들이 아서 왕 문학을 집필하면서 그걸 따라했다는 것이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멀린에서는 아서 왕과 기사들의 전투 구호가 "Camelot!"이나 "For the love of Camelot!"으로 변경되었다.
아서 왕의 배경으로 비정되는 시대동로마 제국사산 왕조는 열심히 게임하고 있었고 그 도중에 전자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즉위한다.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북조의 북위가 한화(漢化) 정책을 수행했고 남조는 양나라가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한국은 삼국시대로 그때까지 변방의 후진국이었던 신라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등 명군들의 잇단 등장으로 급속도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이한다.
2020년, 넷플릭스에서 아서왕 전설 속 요정 니무에[19]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저주받은 소녀' 를 제작하기로 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그게 아서왕을 여자로 나오게 하는 것으로 와전되더니 아서왕은 원래 여자였다는 개드립 도 나오고 있다.# 물론 해당 넷플릭스 드라마에선 아서는 그냥 남자다. 문제(?)가 있다면 아서왕이 흑인으로 등장한다는 것.

[1] '어 브레닌 아수르'로 읽는다. 브레닌은 군주를 뜻하므로 전체 의미는 영어 이름과 같다.[2] 펜드래곤이 아서왕의 '이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예를 들면 '펜드래곤'이란 명칭의 출처가 대부분 창작물이라는 것. 또한 동양에서의 '휘'의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처음 언급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선 드래곤의 머리라는 뜻으로 쓰였다.[3] 다만, 와스는 갑옷과 투구에 고유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4] golden helmet on his head, on which was engraved the figure of a dragon[5] 카른웬하이(Carnwenhau)라고도 표기된다.[6] 기록에 따라 어디서는 단검(dagger)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단도(knife)라고 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불명.[7] 노르만족은 프랑크족과 스칸디나비아 노르드인의 피가 섞이고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 민족을 특별히 말한다. "a member of a people of mixed Frankish and Scandinavian origin who settled in Normandy from about AD 912 and became a dominant military power in western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in the 11th century."(옥스퍼드)[8] "The last days of Londinium". Museum of Lond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January 2009. Retrieved 31 March 2013.[9] 길다스가 쓴 것인지는 확실치 않고 추정이다.[10] 사실 앵글로색슨족도 브리튼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바이킹과 마찬가지로 오딘, 토르를 주신으로 하는 북유럽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11] 이렇게 200년간 바이킹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앵글로색슨족의 통일왕국인 잉글랜드는 11세기 초반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바이킹)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 곧이어 (바이킹계 프랑스인) 노르만의 윌리엄 1세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바이킹을 맞아 싸우던 앵글로색슨족은 알프레드 대왕 등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어 브리튼인들과는 달리 참패하면서도 밀려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웠고, 앵글로색슨을 지배하던 바이킹인들이나 노르만인들은 앵글로색슨족을 한 때 지배했지만, 완전히 앵글로색슨에 동화되어 앵글로색슨은 영국의 주류민족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12] 그래서 어떤 학자는 기존의 켈트족의 아서왕 전설이 중세를 거치며 앵글로색슨족의 대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모델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아서왕과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은 사실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아서왕 이야기는 중세 내내 구전되어 왔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아서왕 전설에 앵글로색슨 고유의 베오울프와 같은 요소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13] 심지어 두 번은 던지지 않고 던졌다고 속이려는 내용도 나온다.[14] 영화의 마지막 바돈산 전투에서는 아서가 색슨족 추장인 체르디치를 죽이지만, 이것은 픽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 역사에서 체르디치는 웨식스 왕국을 세웠고 신릭이 뒤를 이으며, 이 왕국은 이후 500년간 이어지며, 8세기부터 침략해오는 바이킹에 대항하는 앵글로색슨족의 중심 세력이 된다. 이 왕조가 낳은 알프레드 대왕은 잉글랜드 통일 왕조의 초석을 놓는다.[15] 이 두 사람은 웨일즈의 시와 전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왕들이다.[16] Pryor, Francis (2004), Britain AD: A Quest for England, Arthur, and the Anglo-Saxons, London: HarperCollins, ISBN 978-0-00-718186-5.[17] Myres, J. N. L. (1986), The English Settlem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282235-2. "no figure on the borderline of history and mythology has '''wasted more of the historian's time'''"[18] Dumville, D. N. (1977), “Sub-Roman Britain: History and Legend”, History 62 (62): 173–92, doi:10.1111/j.1468-229X.1977.tb02335.x. "I think we can dispose of him quite briefly. He owes his place in our history books to a 'no smoke without fire' school of thought ...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there is no historical evidence about Arthur; '''we must reject him from our histories and, above all, from the titles of our books.'''"[19] 엑스칼리버를 준 호수의 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