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독립 운동
琉球獨立運動 / 琉球独立運動 / 琉球独立运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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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류큐 독립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류큐 공화국의 국기 삼성천양기(三星天洋旗). 말 그대로 세 별, 하늘, 대양을 그린 깃발이다. 하늘색과 파란색 바탕은 각각 하늘과 대양을 그려 대자연을 상징하고, 흰 별은 도덕과 이성을, 붉은 별은 자랑과 정열을, 노란 별은 평화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한다. 1968년에 제정되었다. 상세한 설명(일본어) 구 류큐독립당→현 가리유시 클럽의 당기(黨旗)이기도 하다. 다만 ConIFA에서는 류큐 대표팀이 구 류큐 왕국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다른 사례들도 보이기 때문에, 류큐 독립 운동 지지자들이 모두 삼성천양기를 류큐의 국기로 삼는 것을 지지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류큐 독립 운동은 옛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현을 독립국으로 만들자는 운동이다. 오키나와현 내 류큐 독립론자들은 류큐 왕국의 옛 영토인 가고시마현의 아마미 군도도 독립국 류큐의 일부로 포함되길 희망하고 있다.
운동의 주요 명분으로는 근대 이전에는 독립국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대우도 좋지 않고, 관광업 외의 산업이 미숙하다는 점이 있다.
19세기에 메이지 시기 '''류큐'''가 1872년 일본이 강제로 실시한 제1차 류큐 처분에 의해 일본 국내의 일개 번으로 전락하고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은 '류큐 번왕'(琉球藩王)이 돼 그 지역의 영주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제2차 류큐 처분에 의해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면서 류큐 왕국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마지막 왕인 쇼 타이(尚泰)는 일본 본토로 보내져서 일개 후작이 되었다.[1] 이 시기 즈음해서 류큐의 지배층 중에 청나라로 탈출하여 류큐의 독립을 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탈청인(脫清人)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은 기대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오키나와현에서는 류큐 왕국의 부활을 추구하는 소위 '완고당(頑固黨)'과 류큐 왕국의 소멸을 인정하고 일본화를 추진하는 '개화당(開化黨)'이 대립했다. 이들은 청일전쟁 때 각각 청나라와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완고당의 세력은 쇠퇴하고 말았다. 대신 일본의 오키나와 현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오키나와 현에 자치권을 두어 류큐 왕족인 쇼 씨(尚氏) 가문이 통치자로 복귀하게 해달라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을 공동회 운동(公同會運動) 또는 복번 운동(復藩運動)이라고 하며,[2] 주도자는 쇼 타이의 차남 쇼 인(尚寅) 남작과 사남 쇼 준(尚順) 남작 형제였다. 일본은 당연하게도 이들의 청원을 거부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로 조직적인 류큐 독립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키고 승리한 미국은 류큐를 일본의 압제를 받아 합병된 지역으로 간주하여 오키나와현 전역과 가고시마현의 아마미 군도 및 토카라 열도를 미국이 통치하는 '류큐' 지역으로 편성시켰다.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 류큐를 점진적으로 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아마미 군도는 류큐 왕국의 영토였으나 1609년 일본의 사츠마 번에 빼앗겼다. 그 후로 류큐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형식상으로는 류큐 왕국의 영토이되 실제로는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래서 현재 이곳은 오키나와 현이 아닌 가고시마 현 소속이다. 토카라 열도는 아마미 군도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가면 있는 도서군(島嶼群)이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데 미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류큐 지역의 일부로 삼았다.
오랫동안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아마미 군도와, 애초에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토카라 열도는 일본 복귀 운동을 전개했다. 아마미 군도의 공산 세력은 처음에 독립국인 아마미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 복귀 여론이 거센 것을 확인한 뒤 목표를 바꿔 그들도 일본 복귀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미국은 '여기에 대단한 미군 시설을 둔 것도 아닌데 주민들 반발에 시달리면서까지 억지로 통치할 필요가 있겠나' 판단하게 됐다. 그래서 토카라 열도는 1952년에, 아마미 군도는 1953년에 각각 일본에 반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이때부터 미국이 설정한 '류큐' 지역은 1972년까지 오키나와현 단독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1972년 이전까지는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오키나와현에 갈 때 여권이 필요했다. 미국의 통치 하에서 제한된 자치가 실시되었다. 처음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주일미군... 아니, 주류(駐琉)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런 분위기 하에서 독립 운동도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점차 주둔 미군과의 갈등이 벌어져서 주민들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평화 헌법 하의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제 일본은 군대가 없이 자위대만 있는 나라가 되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던 모양. 그래서 독립 운동은 세력이 약해지고 일본 복귀 운동이 강해진다. 결국 미국은 당초 류큐를 독립국으로 만들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1972년 일본에 반환하였다. 1972년 이후로는 오키나와는 일본 국내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국내선들과 똑같이 여권도 필요 없어졌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 반환되자 오히려 주일미군의 대부분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주민들이 본토에 비해 차별받는 등, 아직도 문제가 존재하는 상태이다.
현지의 다수 여론이 되진 못했으나 지금까지 이어지고는 있다.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보니 70년대에는 이곳에 있는 한 구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려 화형식을 벌이자 구장에 있던 다른 관중들이 환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일본 본토로 들어간 류큐인들이 내지인들에게 차별을 받자 독립을 요구하는 주장과 함께 테러를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975년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가 방문했을 때 화염병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3] 게다가 냉전의 종식으로 미군이 주둔할 정당성이 줄었기 때문에, 70년대 이후 잠수를 탔던 구 류큐독립당이 이름을 바꾼 가리유시 클럽이 지방 선거에 등장할 정도이다. 다만 현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2005년 설문 조사를 보면 1,029 명의 오키나와인 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답했다. 21%는 그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36%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양쪽 모두 다 해당된다고 답했다. 이는 언어나 민족의 기원으로 봤을 때 일본인과는 친척 관계에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원인인 듯 하다.
오키나와 주민의 독립 문제 설문.[4]
일본사 과목에서는 류큐사를 지방사 정도로만 짧게 다루고 있다. 기타 인문사회 교육 과정에서도 본토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일수록 독립 의식이 약해지고 있다.
2013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령이 된지 41년이 되는 날에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일종의 독립(문제를 논의하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목표로 '류큐자치연방공화국'의 건설을 내걸었다. '복귀' 이래 4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오키나와 차별, 미군기지 강요라는 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의 절정인 셈이다. 물론 오키나와가 실제로 독립을 이룰 가능성은 낮으나 오키나와의 분리-독립 가능성을 공론화하여 오키나와에 강요되고 있는 무수한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해) 오키나와만 분발해 봤자 (일본 정부와 미국의 전향적 자세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 패배주의 풍조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한편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공식적으로는 철폐되었다지만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열도 전체의 주민은 모두 '일본인'이라는 기치 하에 통합된 단일민족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고 명기한 것은 오키나와 주민이 '일본인'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자결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 된다.
류큐 독립 지지자들은 대개 독립한 뒤 '비무장한 평화의 섬'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일본인(오키나와 주민 포함)들은 막연하게 군대=전쟁이라고 인식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오키나와현은 전쟁의 피해를 심하게 입은 데다가[5] 주둔 주일미군 병사들의 일탈 행위 등으로 인해 군사력을 갖추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
한편 독립보다는 오키나와 또는 류큐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제안도 있긴 하다. 물론 독립론자 중에서도 독립 전 단계로서 자치를 주장하는 경우는 흔하다. 자치를 독립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강력한 자치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독립 찬성 여론을 완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치를 통해 니즈에 잘 피드백이 이뤄진다면 굳이 어렵게 독립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6] 구 민주당은 '오키나와 비전'#이라고 명명한 정책안에서 일국양제까지 거론한 바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현재의 도도부현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서 고도의 지방자치권을 부여한 도주제(道州制)로 바꾸자는 논의가 수십 년 동안 있어 왔는데, 오키나와/류큐 자치와 관련하여서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자치권 확대론자들이 제주특별자치도 사례를 참고하여 오키나와/류큐에 적용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경우도 있다. #1, #2, #3. 사실 제주도(道)를 제주특별자치도로 바꾸는 것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반대로 오키나와현을 비롯한 해외 여러 곳의 자치 확대 논의들과 실제 사례들을 참고했다.
일본 정부는 독립 운동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바는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일본 중앙정계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큰 폭의 자치권 이양을 종종 논하는데 이를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오키나와가 독립하기 힘든 것은 '''아시아 북단과 남단, 그리고 대륙과 해양의 중간'''이라는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 전투기나 전함 등을 통해 동아시아 어느 곳이든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는 한반도의 한국, 북한과도 유사한데 한국, 북한보다도 훨씬 인구가 작고 영토도 작은 오키나와가 독립하게 되면 동아시아 초약소국이 되어 동아시아 군사요충지를 점하고자 하는 타국의 간섭이 엄청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전후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이곳은 미국, 일본의 세력권이었는데, 만약 일본에서 독립한다면 중국이 역사적 공통점 운운하며 세력을 뻗칠 가능성이 높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시피 한 중국에서 최근 들어 류큐 독립 운동을 옹호하는 듯한 언론 기사가 난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12년 이후 중국 언론에서는 류큐 독립을 지지한다는 말이나 류큐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도 나왔다.[7]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반중감정이 커서 중국의 속국이 되느니 일본의 영토인 상태가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8] 이는 설문조사로서 볼 수 있는데, 2012년에 중국, 대만과 센카쿠 열도 분쟁이 심화되면서 치러진 설문조사에서는 # # '최근 센카쿠 열도나 쿠메지마에서의 영해침범, 미야코지마와 오키나와 섬 사이 군함 통과가 늘어나고 있고, 중국에서는 센카쿠도 오키나와도 중국의 영토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오키나와 주민의 75%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도합니다만,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독립 찬성 시 이유도 함께 적음)' #라고 하여 중국으로 인한 안보 위협을 강조하였는데, 이 조사에서 독립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반면 전 주민이 아닌 대학생 대상 조사이긴 하지만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안보 체제가 성립된다면' 독립을 지지합니까?" 식으로 안보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가정하고 물어봤을 땐 독립 찬성의 비율이 38%까지 올라가 반대(28%)를 앞서는 조사도 있는 등 독립 여론이 중국이라는 변수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모습을 보인다. #
중국 내에서 일부러 류큐 독립을 부르짖자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오키나와 현 내의 류큐 독립 운동가들을 중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있다. 음해가 꽤 심한 모양인지 가리유시 클럽의 전(前) 당수인 야라 조스케(屋良朝助)[9] 가 본인의 공식 트위터 계정의 프로필에 명예훼손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경고문을 써놓았을 정도다.[10]
오키나와는 일본 중앙정부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오키나와현 재정의 중앙정부 비중은 57.6%나 되어 전국 평균의 1.57배에 달하고 있으며 두 말 할것도 없이 전국 최대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가 미군기지 유지의 대가로 편성, 지원중인 연간 한화 2~3조 규모의 오키나와 특별진흥예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데, 현실적으로 류큐가 재독립한다 해도 인구 150만 규모의 소국이 미국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일뿐더러, 중국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군사력을 갖출 수 없는 류큐의 현실을 감안할 때 여러가지 안보문제에 대응해 미군의 주둔은 필연적인 만큼 예산지원이라도 받아내는 쪽이 훨씬 이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지역의 주요 산업인 관광업 측면에서도 독립은 문제가 된다. 일본인들의 입국 문제부터 시작해서[11] 항공편도 국내선에서 국제선으로 변경되는 등[12] 불리해지는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은 비자 발급에 매우 깐깐한 나라라서 류큐를 개발도상국으로 지정할지, 선진국으로 지정할지에 따라 류큐 국민의 일본 방문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학업이나 경제활동 등으로 일본 본토와의 연계를 끊을 수 없는 현실이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독립론자들이 주장하는 류큐 자치 지역에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류큐 왕국의 옛 영토인 아마미 군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미 군도 주민들이 류큐 자치 지역에 편입되는 것에 얼마나 동의할지 회의적이다. 2차 대전 직후 잠시 미국에 의해 류큐의 일부로 묶여서 받은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류큐 독립이 '''"모든 류큐인들의 총의를 대변하는가?"'''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특히 사키시마 지역은 어차피 류큐 왕국 시대에도 피정복 주변부로서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주변부로서의 처지는 이들의 국적이 류큐이든 일본이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심지어 사키시마 지역은 오키나와 본토와 언어도 안 통하기 때문에[13] 오히려 표준일본어로 의사소통 하는 게 편할 지경이며 실제로도 이들 지역의 토착어는 이미 표준일본어로 거의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령 오키나와 본토의 주민들은 어찌어찌 류큐 독립에 찬성하는 여론이 형성된다 해도 사키시마 지역은 오히려 류큐에서 이탈해 일본의 월경지로라도 남고자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립국 류큐 정부에서 새롭게 오키나와 중부언어에 기초한 '표준 류큐어'를 제정해 보급하려 든다면 이것도 사키시마 주민들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 못지않은 폭거에 해당한다. 영어와 지역언어들을 공용어로 정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14] 인도처럼 일본어와 지역언어들을 복수공용어로 정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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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류큐 독립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류큐 공화국의 국기 삼성천양기(三星天洋旗). 말 그대로 세 별, 하늘, 대양을 그린 깃발이다. 하늘색과 파란색 바탕은 각각 하늘과 대양을 그려 대자연을 상징하고, 흰 별은 도덕과 이성을, 붉은 별은 자랑과 정열을, 노란 별은 평화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한다. 1968년에 제정되었다. 상세한 설명(일본어) 구 류큐독립당→현 가리유시 클럽의 당기(黨旗)이기도 하다. 다만 ConIFA에서는 류큐 대표팀이 구 류큐 왕국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다른 사례들도 보이기 때문에, 류큐 독립 운동 지지자들이 모두 삼성천양기를 류큐의 국기로 삼는 것을 지지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류큐 독립 운동은 옛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현을 독립국으로 만들자는 운동이다. 오키나와현 내 류큐 독립론자들은 류큐 왕국의 옛 영토인 가고시마현의 아마미 군도도 독립국 류큐의 일부로 포함되길 희망하고 있다.
운동의 주요 명분으로는 근대 이전에는 독립국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대우도 좋지 않고, 관광업 외의 산업이 미숙하다는 점이 있다.
2. 일본 치하
19세기에 메이지 시기 '''류큐'''가 1872년 일본이 강제로 실시한 제1차 류큐 처분에 의해 일본 국내의 일개 번으로 전락하고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은 '류큐 번왕'(琉球藩王)이 돼 그 지역의 영주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제2차 류큐 처분에 의해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면서 류큐 왕국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마지막 왕인 쇼 타이(尚泰)는 일본 본토로 보내져서 일개 후작이 되었다.[1] 이 시기 즈음해서 류큐의 지배층 중에 청나라로 탈출하여 류큐의 독립을 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탈청인(脫清人)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은 기대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오키나와현에서는 류큐 왕국의 부활을 추구하는 소위 '완고당(頑固黨)'과 류큐 왕국의 소멸을 인정하고 일본화를 추진하는 '개화당(開化黨)'이 대립했다. 이들은 청일전쟁 때 각각 청나라와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완고당의 세력은 쇠퇴하고 말았다. 대신 일본의 오키나와 현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오키나와 현에 자치권을 두어 류큐 왕족인 쇼 씨(尚氏) 가문이 통치자로 복귀하게 해달라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을 공동회 운동(公同會運動) 또는 복번 운동(復藩運動)이라고 하며,[2] 주도자는 쇼 타이의 차남 쇼 인(尚寅) 남작과 사남 쇼 준(尚順) 남작 형제였다. 일본은 당연하게도 이들의 청원을 거부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로 조직적인 류큐 독립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3. 미국 통치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키고 승리한 미국은 류큐를 일본의 압제를 받아 합병된 지역으로 간주하여 오키나와현 전역과 가고시마현의 아마미 군도 및 토카라 열도를 미국이 통치하는 '류큐' 지역으로 편성시켰다.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 류큐를 점진적으로 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아마미 군도는 류큐 왕국의 영토였으나 1609년 일본의 사츠마 번에 빼앗겼다. 그 후로 류큐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형식상으로는 류큐 왕국의 영토이되 실제로는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래서 현재 이곳은 오키나와 현이 아닌 가고시마 현 소속이다. 토카라 열도는 아마미 군도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가면 있는 도서군(島嶼群)이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데 미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류큐 지역의 일부로 삼았다.
오랫동안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아마미 군도와, 애초에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토카라 열도는 일본 복귀 운동을 전개했다. 아마미 군도의 공산 세력은 처음에 독립국인 아마미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 복귀 여론이 거센 것을 확인한 뒤 목표를 바꿔 그들도 일본 복귀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미국은 '여기에 대단한 미군 시설을 둔 것도 아닌데 주민들 반발에 시달리면서까지 억지로 통치할 필요가 있겠나' 판단하게 됐다. 그래서 토카라 열도는 1952년에, 아마미 군도는 1953년에 각각 일본에 반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이때부터 미국이 설정한 '류큐' 지역은 1972년까지 오키나와현 단독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1972년 이전까지는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오키나와현에 갈 때 여권이 필요했다. 미국의 통치 하에서 제한된 자치가 실시되었다. 처음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주일미군... 아니, 주류(駐琉)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런 분위기 하에서 독립 운동도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점차 주둔 미군과의 갈등이 벌어져서 주민들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평화 헌법 하의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제 일본은 군대가 없이 자위대만 있는 나라가 되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던 모양. 그래서 독립 운동은 세력이 약해지고 일본 복귀 운동이 강해진다. 결국 미국은 당초 류큐를 독립국으로 만들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1972년 일본에 반환하였다. 1972년 이후로는 오키나와는 일본 국내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국내선들과 똑같이 여권도 필요 없어졌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 반환되자 오히려 주일미군의 대부분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주민들이 본토에 비해 차별받는 등, 아직도 문제가 존재하는 상태이다.
4. 현재
현지의 다수 여론이 되진 못했으나 지금까지 이어지고는 있다.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보니 70년대에는 이곳에 있는 한 구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려 화형식을 벌이자 구장에 있던 다른 관중들이 환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일본 본토로 들어간 류큐인들이 내지인들에게 차별을 받자 독립을 요구하는 주장과 함께 테러를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975년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가 방문했을 때 화염병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3] 게다가 냉전의 종식으로 미군이 주둔할 정당성이 줄었기 때문에, 70년대 이후 잠수를 탔던 구 류큐독립당이 이름을 바꾼 가리유시 클럽이 지방 선거에 등장할 정도이다. 다만 현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2005년 설문 조사를 보면 1,029 명의 오키나와인 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답했다. 21%는 그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36%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양쪽 모두 다 해당된다고 답했다. 이는 언어나 민족의 기원으로 봤을 때 일본인과는 친척 관계에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원인인 듯 하다.
오키나와 주민의 독립 문제 설문.[4]
일본사 과목에서는 류큐사를 지방사 정도로만 짧게 다루고 있다. 기타 인문사회 교육 과정에서도 본토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일수록 독립 의식이 약해지고 있다.
2013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령이 된지 41년이 되는 날에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일종의 독립(문제를 논의하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목표로 '류큐자치연방공화국'의 건설을 내걸었다. '복귀' 이래 4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오키나와 차별, 미군기지 강요라는 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의 절정인 셈이다. 물론 오키나와가 실제로 독립을 이룰 가능성은 낮으나 오키나와의 분리-독립 가능성을 공론화하여 오키나와에 강요되고 있는 무수한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해) 오키나와만 분발해 봤자 (일본 정부와 미국의 전향적 자세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 패배주의 풍조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한편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공식적으로는 철폐되었다지만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열도 전체의 주민은 모두 '일본인'이라는 기치 하에 통합된 단일민족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고 명기한 것은 오키나와 주민이 '일본인'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자결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 된다.
5. 독립 구상
5.1. 독립국으로서
류큐 독립 지지자들은 대개 독립한 뒤 '비무장한 평화의 섬'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일본인(오키나와 주민 포함)들은 막연하게 군대=전쟁이라고 인식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오키나와현은 전쟁의 피해를 심하게 입은 데다가[5] 주둔 주일미군 병사들의 일탈 행위 등으로 인해 군사력을 갖추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
5.2. 자치 운동
한편 독립보다는 오키나와 또는 류큐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제안도 있긴 하다. 물론 독립론자 중에서도 독립 전 단계로서 자치를 주장하는 경우는 흔하다. 자치를 독립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강력한 자치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독립 찬성 여론을 완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치를 통해 니즈에 잘 피드백이 이뤄진다면 굳이 어렵게 독립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6] 구 민주당은 '오키나와 비전'#이라고 명명한 정책안에서 일국양제까지 거론한 바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현재의 도도부현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서 고도의 지방자치권을 부여한 도주제(道州制)로 바꾸자는 논의가 수십 년 동안 있어 왔는데, 오키나와/류큐 자치와 관련하여서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자치권 확대론자들이 제주특별자치도 사례를 참고하여 오키나와/류큐에 적용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경우도 있다. #1, #2, #3. 사실 제주도(道)를 제주특별자치도로 바꾸는 것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반대로 오키나와현을 비롯한 해외 여러 곳의 자치 확대 논의들과 실제 사례들을 참고했다.
6. 일본 정부의 반응
일본 정부는 독립 운동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바는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일본 중앙정계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큰 폭의 자치권 이양을 종종 논하는데 이를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7. 독립운동의 난점
7.1. 국제정치적 관점
현실적으로 오키나와가 독립하기 힘든 것은 '''아시아 북단과 남단, 그리고 대륙과 해양의 중간'''이라는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 전투기나 전함 등을 통해 동아시아 어느 곳이든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는 한반도의 한국, 북한과도 유사한데 한국, 북한보다도 훨씬 인구가 작고 영토도 작은 오키나와가 독립하게 되면 동아시아 초약소국이 되어 동아시아 군사요충지를 점하고자 하는 타국의 간섭이 엄청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전후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이곳은 미국, 일본의 세력권이었는데, 만약 일본에서 독립한다면 중국이 역사적 공통점 운운하며 세력을 뻗칠 가능성이 높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시피 한 중국에서 최근 들어 류큐 독립 운동을 옹호하는 듯한 언론 기사가 난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12년 이후 중국 언론에서는 류큐 독립을 지지한다는 말이나 류큐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도 나왔다.[7]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반중감정이 커서 중국의 속국이 되느니 일본의 영토인 상태가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8] 이는 설문조사로서 볼 수 있는데, 2012년에 중국, 대만과 센카쿠 열도 분쟁이 심화되면서 치러진 설문조사에서는 # # '최근 센카쿠 열도나 쿠메지마에서의 영해침범, 미야코지마와 오키나와 섬 사이 군함 통과가 늘어나고 있고, 중국에서는 센카쿠도 오키나와도 중국의 영토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오키나와 주민의 75%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도합니다만,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독립 찬성 시 이유도 함께 적음)' #라고 하여 중국으로 인한 안보 위협을 강조하였는데, 이 조사에서 독립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반면 전 주민이 아닌 대학생 대상 조사이긴 하지만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안보 체제가 성립된다면' 독립을 지지합니까?" 식으로 안보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가정하고 물어봤을 땐 독립 찬성의 비율이 38%까지 올라가 반대(28%)를 앞서는 조사도 있는 등 독립 여론이 중국이라는 변수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모습을 보인다. #
중국 내에서 일부러 류큐 독립을 부르짖자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오키나와 현 내의 류큐 독립 운동가들을 중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있다. 음해가 꽤 심한 모양인지 가리유시 클럽의 전(前) 당수인 야라 조스케(屋良朝助)[9] 가 본인의 공식 트위터 계정의 프로필에 명예훼손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경고문을 써놓았을 정도다.[10]
7.2. 경제적 문제
오키나와는 일본 중앙정부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오키나와현 재정의 중앙정부 비중은 57.6%나 되어 전국 평균의 1.57배에 달하고 있으며 두 말 할것도 없이 전국 최대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가 미군기지 유지의 대가로 편성, 지원중인 연간 한화 2~3조 규모의 오키나와 특별진흥예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데, 현실적으로 류큐가 재독립한다 해도 인구 150만 규모의 소국이 미국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일뿐더러, 중국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군사력을 갖출 수 없는 류큐의 현실을 감안할 때 여러가지 안보문제에 대응해 미군의 주둔은 필연적인 만큼 예산지원이라도 받아내는 쪽이 훨씬 이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지역의 주요 산업인 관광업 측면에서도 독립은 문제가 된다. 일본인들의 입국 문제부터 시작해서[11] 항공편도 국내선에서 국제선으로 변경되는 등[12] 불리해지는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은 비자 발급에 매우 깐깐한 나라라서 류큐를 개발도상국으로 지정할지, 선진국으로 지정할지에 따라 류큐 국민의 일본 방문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학업이나 경제활동 등으로 일본 본토와의 연계를 끊을 수 없는 현실이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7.3. 오키나와 내부의 의사 불일치
한편 독립론자들이 주장하는 류큐 자치 지역에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류큐 왕국의 옛 영토인 아마미 군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미 군도 주민들이 류큐 자치 지역에 편입되는 것에 얼마나 동의할지 회의적이다. 2차 대전 직후 잠시 미국에 의해 류큐의 일부로 묶여서 받은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류큐 독립이 '''"모든 류큐인들의 총의를 대변하는가?"'''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특히 사키시마 지역은 어차피 류큐 왕국 시대에도 피정복 주변부로서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주변부로서의 처지는 이들의 국적이 류큐이든 일본이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심지어 사키시마 지역은 오키나와 본토와 언어도 안 통하기 때문에[13] 오히려 표준일본어로 의사소통 하는 게 편할 지경이며 실제로도 이들 지역의 토착어는 이미 표준일본어로 거의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령 오키나와 본토의 주민들은 어찌어찌 류큐 독립에 찬성하는 여론이 형성된다 해도 사키시마 지역은 오히려 류큐에서 이탈해 일본의 월경지로라도 남고자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립국 류큐 정부에서 새롭게 오키나와 중부언어에 기초한 '표준 류큐어'를 제정해 보급하려 든다면 이것도 사키시마 주민들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 못지않은 폭거에 해당한다. 영어와 지역언어들을 공용어로 정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14] 인도처럼 일본어와 지역언어들을 복수공용어로 정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8. 같이 보기
[1] 조선 왕실이 무려 왕공족이라는 별도 지위를 부여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류큐에 대한 일본의 취급을 알 수 있다.[2] 즉 제1차 류큐 처분 후의 류큐 번왕 체제로 복구시켜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완전 독립은 불가능해 보이니 그건 포기하고 전개한 자치 운동인 셈.[3] 당시 히메유리 학도대를 기념한 히메유리의 탑에 방문했다가 그 주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화염병 투척을 당했다. 이를 히메유리의 탑 사건이라고 한다.[4] 임천충(林泉忠)「오키나와 주민의 정체성 조사(2005~2007)」『정책과학・국제관계논집』제9호, 2009년3월, 105-147장. 임천충은 중국계 영국인 국제 정치학자로 조사 당시 류큐대학 준교수였다.[5]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미군이 상륙하느라고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군과 싸워 양측이 엄청난 피해를 냈고, 일본군의 옥쇄 강요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자살 등도 많았다.[6] 그래서 영국에서는 1999년에 스코틀랜드 자치를 도입하기 전에 자치가 독립을 조장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독립론을 효과적으로 무마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당시 토니 블레어 내각은 자치를 추진하면서 후자를 역설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았는지는 앞으로 수십 년 간 스코틀랜드 현지 여론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7] 2차 대전 말기 미국은 전후 중화민국에 류큐를 '반환'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장제스가 사양했다고 한다. #[8] 류큐가 역사적으로 중국과 가깝냐 일본과 가깝냐 논쟁을 하면 그래도 일본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류큐어 자체가 일본어와 같은 일본어족이고 류큐인들은 혈통적으로 일본 본토의 야마토 민족과 가까운 친척뻘이다.[9] 2018년 5월 15일 당 홈페이지에 친북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10] 야라 씨의 트위터 계정을 2014년 8월 13일에 캡처한 화면: #. 해석: (앞 부분 생략) "'이쪽에 비판을 할 경우 증거에 기반해서 행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비방중상이 되어 명예 훼손의 대상이 됩니다. 예=중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부당해고했다 등등. 경우에 따라서는 철저히 반격합니다."' 유권자들에게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은 어지간하면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전직 당 대표가 저렇게 공식 계정에서 강한 경고문을 써놓았다. 아무래도 강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본 내 극우세력이 류큐 독립론자들에게 상당한 비방을 가하는 듯하다.[11]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와 비슷하게, 독립한 류큐가 일본과 무비자 협정을 맺는다 해도 이전에 없던 입국 절차가 추가되는 순간 오키나와의 매력이 크게 감소하며 한국(특히 제주도), 중국, 대만, 홍콩 등의 동북아 역내 주요 국가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정면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나마 언어 메리트가 있기야 하지만 일본 국내 관광지들에게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대마도만 해도 국내여행객들이 도통 안오는데 류큐가 외국이 되어버리면 굳이 가깝고 컨텐츠도 풍부한 한국 놔두고 류큐를 택할 이유가 사라진다.[12] 단순히 항공편의 지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류큐 정부가 독립국으로서 일본 정부 및 국제항공기구와 항공운항 관련 각종 합의를 처음부터 다시 체결해야 한다.[13] 슈리-나하어와 미야코어의 차이가 한국표준어-제주어의 차이보다 심할 지경이다.[14] 표준 류큐어를 사키시마에 강요한다는 것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보어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흑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고 아프리칸스어만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