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요구자/아시아
1. 등재 기준
2. 현재 왕위 요구자 목록
2.1. 네팔
2.2. 대한제국 황제
2.3. 라오스
2.4. 레바논 아미르
2.5. 말레이시아
2.6. 몰디브 술탄
2.7. 몽골
2.8. 무스카트-오만 술탄
2.9. 미얀마
2.10. 베트남 황제
2.11. 술루 술탄
2.12. 스리랑카
2.13. 시리아 국왕
2.14. 아프가니스탄 국왕
2.15. 예멘
2.16. 우즈베키스탄
2.17. 이라크 국왕
2.18. 이란
2.19. 이스라엘
2.20. 인도
2.21. 인도네시아
2.22. 일본
2.23. 촉한 황제
2.24. 카자흐 칸
2.25. 칼리프
2.26. 키프로스 국왕
2.27. 태국
2.28. 터키
2.29. 티베트
2.30. 파키스탄
2.31. 헤자즈 국왕
1.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왕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아시아 지역의 왕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2. 현재 왕위 요구자 목록
2.1. 네팔
네팔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1.1. 네팔 국왕
네팔 왕실 참극을 시작으로 전제 정치를 편 12대 왕 갸넨드라는 2008년 반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다. 네팔은 공화국이 되었고, 샤 왕가는 네팔 왕국의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왕위 요구자인 마지막 국왕 갸넨드라는 여전히 왕정복고를 주장한다. 갸넨드라의 후사로는 전 왕세자 파라스가 있다. 파라스 샤는 2013년 심장발작을 일으켰다가, 2014년에는 타이에서 대마초 소지 혐의로 잡히는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2.1.2. 로 라자
로 왕국은 오늘날 네팔 중부의 무스탕 지방에 있었던 티베트계 국가이며, 옛 네팔 왕국의 속국이었다. 로 왕국은 네팔 왕국 치하에서도 나름 자치권을 누렸으나, 2008년에 혁명으로 네팔 왕국이 무너진 직후 네팔에 들어선 공화국 정부는 로 왕국을 네팔에 완전히 합병했다. 로 왕국 왕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자치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으나, 공화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끝내 로 왕국의 자치권을 박탈해버렸다. 로 왕국의 마지막 라자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조카인 지그메 싱헤 팔바르를 양자로 들였으며 현재 지그메 싱헤 팔바르가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 왕국의 라자위를 요구하고 있다.
2.1.3. 바장 라자
바장 왕국은 옛 네팔 왕국의 속국이었으며, 네팔 왕국 멸망 이후 네팔 공화정에 의해 네팔 본토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는 비노드 바하두르다.
2.1.4. 비르코트 라자
비르코트 왕국은 옛 네팔 왕국의 속국이었으며, 네팔 왕국 멸망 이후 네팔 공화정에 의해 네팔 본토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는 프라카쉬다.
2.2.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 제국에 영구 병합되어 멸망하고, 황족은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고종 이희는 덕수궁 이태왕, 그 아들들인 순종 이척과 황태자 이은은 창덕궁 이왕으로 차례대로 대한제국의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일본 제국 패망 후 신적강하에 따라 이왕은 폐지되었고, 이은은 무국적 상태로 일본에 체류한다. 1948년 수립된 공화국 정부는 왕위 요구자 이은의 입국을 거부했다.[8] 1963년에 박정희가 이은 일가의 귀국을 허가했고, 1970년 이은 사후 그의 장남인 이구가 다음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이구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2005년에 죽기 전까지 구 나시모토노미야 황족의 후손인 나시모토 다카오 당주[9] 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시모토는 나시모토노미야 기념재단의 총재인데,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10] 1990년대부터 종묘제례에도 일본을 대표해[11] 매번 참석했다. 그런데 2006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한일관계에 금이 간 직후에, 나시모토가 황사손 이원에게 "나시모토 가의 후손 이구의 묘가 일본에 있으니 양자인 기일을 맞아 참배해달라"는 공문식 팩스를 보내며 양 집안의 관계가 냉랭해졌다. 2005년, 이구는 후사가 없이 죽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2005년 7월 16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의친왕의 서손 황사손 이원(고종의 증손자)을 이구의 양자로 들여 계승하게 했다.[12] 나시모토는 "대한황실문화원"의 후임 총재인 이구와 좋은 관계를 지속해나가기 위해 참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구의 묘가 일본에도 있다는 나시모토의 발언에 대동종약원과 이원은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그리고 200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죽은 이구의 시신 일부를 채취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예전 같았으면 능지처사를 당했을 것"이라며 강경하게 반응했다. 이를 그대로 나시모토에게 회답했으며, 두 집안은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시모토는 이게 아니다 싶어서 "이구가 아닌 이진(영친왕의 장남)씨의 묘를 조성했다, 한국 측이 잘못 들은 것이다"라고 했으나, 대동종약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지"라며 확인사살을 했다.[13][14]
한편 몇몇 황족들은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이름으로 2006년 9월 29일, 황손녀 이해원(고종의 손녀)을 '''대한제국 여황제'''로 선포했다. 황족회 측에서는 대동종약원은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장자를 승계했을 뿐, 왕위 요구자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밝혔다. 때문에 황족으로 인정받은 의친왕계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이진을 여황제로 추대한 것이다.[15]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을 분리하려는 것으로도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대동종약원에서는 2006년 10월 2일에 "조선 왕조의 적통은 고종 황제 - 순종 황제 - 황태자 영친왕 - 이구 황태손 - 이원 황사손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이해원이 황녀로 추대된 것은 억지 장난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16]
이원은 황실 행사에서 군주 역할로 참여하며 조선 및 대한제국의 각종 의례와 제사를 주관한다.[17][18] 제주관광공사의 명예 홍보대사가 되는 등 공화국 정부에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19] 각종 인터뷰에서 이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황사손의 책무를 다할뿐이며, '''이원은 공식적으로 대한 황실 복원을 주장한 바 일절 없다. ''' 한편 이해원은 국가를 상대로 양부 이기용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거는 등 공화국 정부에 반감을 드러냈다.[20] 현재는 이해원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대한제국 황실 복원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모든 마지막 왕조가 그렇듯 무능한 군주가 들어서며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나라를 뺏기기까지 하였다. 이후 의친왕은 상하이로 망명 시도를 하다가 붙잡히며 모든 노력들은 빛을 보지 못했고 이후 황족들은 현실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에게 지원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사실상 왕위계승에 합당한 인물이 전무한 상태이며, 왕위 요구자인 이원이 비정통 계승자이기 때문에 정통성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황가가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21]
2.3. 라오스
라오스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3.1. 라오스 국왕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군이 승리하면서 라오스 왕국 국왕 시사방 바타나는 왕위에서 내려왔다. 공산주의 정권은 반공 반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해 왕가 전원을 라오스 북부 지역의 수용소로 이주시켰다.[22] 시사방 바타나와 세자 봉 사방은 수용소에서 죽었고, 프랑스로 망명한 봉 사방의 아들 술리봉 사방이 현재 왕위 요구자다.
2.3.2. 참파삭 국왕
참파삭 왕국은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시암과 크메르의 전쟁으로 초토화되었으며, 1893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치하에서도 참파삭 왕실 수장이 행정 수장으로 임명되어 명목상 참파삭 왕국이 계속 이어졌으나, 1946년에 라오스가 독립할 때 참파삭 왕국 영토가 라오스에 합병되면서 참파삭 왕실은 더 이상 군주를 배출하지 못하고 왕위 요구자 신세로 전락했다. 현 왕위 요구자 참포네삭은 보운 오움 왕자의 아들이다.
2.4. 레바논 아미르
레바논 아미르국은 현대 레바논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는 나라로, 칼케돈 공의회 이전부터 교황 수위권을 따랐던 동방 가톨릭 교회 계열의 마론파가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나라였고[23] , 멸망 직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아미르[24] 는 엉뚱하게도 이슬람에서 파생된 종교인 드루즈교를 믿고 있었고, 그래서 19세기 경에 이르러서는 드루즈교 신자들과 마론파 신자들이 대립하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1840년에 아미르가 절대다수의 마론파 신자들에 의해 폐위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이 사태를 진정시킬 겸해서 자국에서 실시한 서구식 개혁 정책인 탄지마트 운동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고 행정관을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레바논의 아미르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841년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메흐메드 알리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보낸 행정관이 일시로 축출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고[25] , 덕분에 레바논의 아미르가 복위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26] 현 아미르위 요구자 오스만 1세는 바시르 시하브 2세의 후손이다.
2.5.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5.1. 사라왁 라자
사라왁 왕국의 3대 라자인 찰스 바이너 브룩은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의 침략을 피해 다른 왕실 사람들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망명했으며, 일본 패망 후인 1945년에 복위하나 1년 뒤인 1946년에 영국에 이양하면서 사라왁이 영국의 왕령식민지로 바뀌었다. 찰스 바이너 브룩 사후에는 그의 조카인 앤서니 월터 데이렐 브룩이 명목상의 사라왁 라자위를 이어받았고 앤서니 사후에는 앤서니의 장남 제임스 버트램 라이오넬 브룩이 그 뒤를 이었으며 제임스가 사망한 현재는 제임스의 아들이자 앤서니의 손자인 제이슨 데즈먼드 앤서니 브룩이 사라왁 왕국의 라자위를 요구하고 있다.[27]
2.5.2. 조호르 술탄
조호르 술탄국은 말레이 반도 남부의 조호르에 있었던 나라다. 조호르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바뀌었으며, 1855년에 조호르 술탄국의 제후국들이 모두 독립하면서 조호르 술탄국은 해체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 텡쿠 샤왈은 조호르 술탄 후세인 샤의 후손이다.
2.6. 몰디브 술탄
몰디브의 마지막 술탄 무함마드 파리드 디디는 1968년에 몰디브의 술탄제가 폐지되어 물러난 후 이듬해인 1969년에 향년 6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무함마드 파리드 디디는 총 5명의 자녀를 얻었지만 자녀들이 모두 요절하면서 그의 이복동생 이브라힘 파리드 디디가 뒤를 이어 몰디브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2.7. 몽골
몽골[28] 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7.1. 러시아 대칸
타타르족이 러시아에 복속된 이래로 러시아의 역대 군주들은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몽골 제국 대칸 칭호[32] 를 쓰며 타타르족을 다스렸다. 그리고 훗날 러시아가 진짜 몽골계 민족인 칼미크인과 부랴트인을 복속시킴에 따라 러시아의 군주는 진짜로 몽골족의 군주가 되어 몽골족 위에서 대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러시아인 대칸의 계보는 단절되었다.
2.7.2. 몽골 귀르겐
티무르 제국의 창업군주 티무르는 몽골어로 부마라는 뜻을 가진 귀르겐(Güregen)이라는 칭호를 쓰며 티무르 제국 치하의 몽골족을 다스렸다. 대칸이나 칸 칭호를 쓰지 못한 것은 모계 쪽으로만 보르지긴 왕조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티무르가 몽골 제국의 부활을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비록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원나라처럼 몽골 본토와 중국을 지배할 생각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의 왕위 요구자를 여기에 기재한다.
2.7.3. 젭춘담바 후툭투
젭춘담바 후툭투(몽골어로는 잡증담바 호특트)는 티베트 불교 겔룩빠의 달라이 라마처럼 환생을 통해 계승되는 몽골 불교의 수장이다. 8대 젭춘담바 후툭투는 신정일치 국가 복드 칸국의 칸이자 대칸을 자칭했다. 복드 칸국은 중화민국에 점령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24년 잡증담바 호특트의 사망과 동시에 몽골은 군주제를 폐지했고, 9대 잡증담바 호특트는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9대는 2012년 몽골에서 죽었고, 2016년에 달라이 라마가 10대는 몽골에서 환생했을 것이라고 하여 찾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10대를 찾아냈지만 너무 어려서 세월이 흘러 10대가 성인이 되면 10대의 신원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원래대로면 젭춘담바 후툭투의 왕위 요구자가 불명인 관계로, 토론 합의에 따라 등재되지 않았을 법도 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의 독특한 계승 방식에 따라[34] 계승자가 누구인지를 모를 뿐이지 어떤 사람이다라고 특정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수록한다.
2.8. 무스카트-오만 술탄
오만 제국의 정식 국명은 1650년부터 1820년까지 무스카트 술탄국이었고, 그 이후로 1970년에 쿠데타로 아버지를 몰아내고 즉위한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에 의해 오만 술탄국으로 국명이 바뀔 때까지는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이었다. 1856년에 사이드 이븐 술탄이 서거한 후 일어난 술탄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오만 제국은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본토와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분열되었다. 잔지바르의 역대 술탄들은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본토의 술탄위 계승권도 주장하였으므로, 잔지바르 술탄위 요구자는 무스카트-오만 술탄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2.9. 미얀마
미얀마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9.1. 몽폰 사오파
2.9.2. 버마 국왕
버마 왕국은 꼰바웅 왕조 말기, 티바 민 왕 대에 대영제국과의 전투 끝에 멸망했다.[41] 티바 민 왕은 왕위 요구자가 되었지만 대영제국에 의해 유폐되어 1916년 삶을 마쳤다. 티바 민에게는 2남 6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들은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버지인 10대왕 민돈 민 왕이 '''55남 53녀 총 108명'''을 두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인도에서 태어난 막내딸 먯 파야 갤래이는 미얀마로 돌아와서 승려 우 냉과 결혼해 또 아들을 둘 뒀다.[42] 먯 파야 갤래이의 장남이 1948년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1956년 티바 민 왕의 딸이 모두 죽게 되어 에드워드 타우 파야가 꼰바웅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에드워드 타우 파야에게는 장남 리처드를 비롯해 5남 2녀가 있다.
2.9.3. 시포 사오파
2.9.4. 용훼 사오파
2.9.5. 켕퉁 사오파
몽폰, 시포, 용훼, 켕퉁 등 미얀마의 샨족들이 세운 여러 번왕국들은 미얀마 독립 이후로도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존속되었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의 국가원수가 된 네 윈이 번왕들을 폐위시키고 자치권도 전부 없애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여담이지만 샨족은 미얀마 최초의 통일왕조인 버간(파간) 왕조를 멸망시킨 장본인을 배출한 민족이기도 하다.
2.10. 베트남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성립 과정에서 취약점 때문에 프랑스에 정복돼 그 영향하에 놓였고 후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제국에 의해 베트남 제국을 세우게 된다. 대남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 황제는 1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베트남 제국 황위에 올랐으나 1945년 호찌민의 베트남 독립 선언으로 다시 물러났으며, 1949년에 프랑스의 괴뢰국으로 세워진 베트남국의 국장(국가원수)이 되기도 했으나 1955년에 응오딘지엠이 국민투표를 조작하여 베트남 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국가원수 자리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 왕위 요구자였던 바오다이 황제는 1997년에 죽고, 태자 바오롱이 응우옌 가문의 수장이자 다음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바오 롱은 유럽에서 교육받았으며, 프랑스 외인부대에 베트남 황실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바오 롱이 2007년에 부르고뉴에서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 동생 바오 통이 응우옌 가문의 수장,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바오 통은 2017년 3월 15일에 죽었고, 그 동생인 바오 안이 뒤를 이었다.
2.11. 술루 술탄
나라가 멸망한 데다, 자치권도 박탈되고, 왕실마저 뿔뿔이 분열되어 버린 안습함의 집약체이다. 술루 술탄국의 옛 영토가 바로 민다나오 지역이지만, 정작 민다나오 주민들은 왕실을 개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방사모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민다나오의 자치를 요구하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민다나오 섬 일대에 ISIL에 충성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반군이 창궐하여 필리핀 정부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고, 위의 표에 언급된 왕위 요구자들이 '술루 술탄국 군대'를 자칭하는 테러 조직을 결성해 술루 왕국의 옛 영토이자, 오늘날의 말레이시아령 지역인 사바 주 일대를 쳐들어왔다가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주적 제1호로 찍히는 등으로 인해 왕위 요구자가 누구든지 간에 술루 술탄국의 부활 가능성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43]
2.12. 스리랑카
스리랑카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12.1. 자프나 국왕
아래의 칸디 왕국이 싱할라족의 불교 왕조였다면 자프나 왕국은 타밀족의 힌두교 왕조였다.[44] 자프나 왕국은 스리랑카 북부지역의 자프나 반도에 있었던 나라인데 1258년부터 1323년까지 판드야 왕국의 조공국이었으며 독립하여 주권국가가 된 후에 잠시 스리랑카 전역을 통일하기도 했으나 코테 왕국에 의해 잠시 멸망했다가 1467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1505년부터 포르투갈이 스리랑카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포르투갈과의 전쟁이 몇 번 이어지다가 결국 1624년에 포르투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현재 자프나 왕국의 마지막 왕 칸킬리 2세의 후손인 레미기우스 카나가라자가 명목상의 자프나 왕국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스리랑카 독립 이후 싱할라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스리랑카의 타밀족이 탄압을 받다가 끝내 스리랑카 내전으로 이어진 이후 오늘날의 타밀계 스리랑카인들은 타밀족이 자신들의 뜻대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자프나 왕국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2.12.2. 칸디 국왕
칸디 왕국은 본래 스리랑카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나라였고, 16세기에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나라를 점령하고 국가의 보물인 석가모니의 이빨 사리를 안치한 불치사가 습격당하는 굴욕까지 겪었다[45] . 그 이후에 어찌저찌하여 19세기 초까지 왕국이 잘 유지되나 싶었으나, 1815년에 끝내 영국에게 패망하고 만다. 그래도 스리랑카 역사상 마지막으로 존속한 독립국이었던지라, 오늘날의 스리랑카 국기의 디자인부터가 칸디 왕국의 국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등, 현대 스리랑카의 직접적인 전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의 왕위 요구자인 모칸바부 라자는 라자디 라자신하 왕[46] 의 후손이다.
2.13. 시리아 국왕
이라크 초대 국왕 파이살 1세는 잠깐 동안 시리아 국왕이기도 했으므로(결국 프랑스의 강제접수로 물먹었다.) 이라크 왕위 요구자는 시리아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자이드 빈 후세인은 1970년에 죽었고, 그 아들인 라아드 빈 자이드가 현재 왕위 요구자다.
2.14. 아프가니스탄 국왕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탈레반이 축출되고, 200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국으르 돌아왔다. 무함마드는 2007년에 죽었고, 왕세자였던 차남 아흐메드 샤 칸이 다음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장남은 1941년 요절해서 처음부터 차남이 왕세자였다. 후임자가 될 사람은 아흐메드의 장남 무함마드이다.
2.15. 예멘
너무 길어져서 문서를 분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왕위 요구자/아시아/예멘 문서 참조.
2.16.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16.1. 부하라 아미르
러시아 제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했던 부하라 아미르국은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의 군주제가 폐지된 후 중앙아시아까지 미친 사회주의 혁명의 바람으로 혼란에 빠졌다가 결국 1920년에 마지막 아미르인 모하메드 알림 칸이 폐위되어 완전히 멸망했다. 모하메드 알림 칸은 1944년에 서거했으며 그의 아들 샤 무라드가 뒤를 이어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2.16.2. 티무르 아미르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는 티무르의 후예를 자처했을 뿐더러 실제로도 티무르의 5대손이었으며 그에 따라 무굴 제국 자체가 티무르 제국의 후신을 칭했기 때문에 무굴 제국의 황위 요구자는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위도 요구할 수 있다. 애초에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 모두 정식 명칭이 똑같이 '구르카니' 였다.
2.17. 이라크 국왕
1958년에 이라크에서 자유장교위원회의 군사 쿠데타 직후 마지막 국왕 파이살 2세와 그 일가족이 압둘 카림 카심의 반란군에 의해 모조리 학살당하면서 초대 국왕 파이살 1세로부터 이어져온 이라크 왕국의 하심 가문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그 때문에 쿠데타 당시 영국 대사로 파견되어 화를 면했던 자이드 빈 후세인(파이살 1세의 동생)과 그 후손이 대대로 이라크 하심 가문의 수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자이드 빈 후세인은 1970년에 죽었고, 그 아들인 라아드 빈 자이드가 현재 왕위 요구자다. 파이살 1세는 잠깐 동안 시리아 국왕이기도 했는데, 따라서 이라크 왕위 요구자는 시리아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2.18. 이란
이란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18.1. 모하마라 셰이크
이란의 후제스탄에 있는 항구도시 호람샤르는 본래 아랍계 셰이크가 통치하였으며 당시의 명칭 또한 호람샤르가 아닌 '모하마라' 였다. 모하마라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에 의해 번갈아가며 점령되었는데 1936년에 최종적으로 팔라비 왕조에 의해 이란의 영토가 되어 호람샤르라는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계속 이란령으로 남게 되었으며 셰이크 또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알리 빈 나데르가 명목상의 모하마라(호람샤르) 통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2.18.2. 이란 샤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레자 팔라비는 이란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바뀐지 40년이 넘어가는 지금 상황에서도 여전히 미국이나 서방세계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팔라비 왕조의 복위를 외치고 있다.[47] 그는 현재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며 그의 남동생인 알리 레자 팔라비 또한 유복녀 1명만을 남겼기 때문에 차기 팔라비 가문의 수장은 사촌인 패트릭 알리 팔라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팔라비 왕조 이전의 카자르 왕조에서도 여전히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몰락시킨 팔라비 가문을 반역자 가문이라고 하며 극도로 증오하여 팔라비 왕조의 복위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란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카자르 왕조의 부활 가능성까지 차단된 현재의 암울한 상황 때문에, 자신들의 원수였던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현 이란 신정체제에도 반대한다.
2.19.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19.1. 예루살렘 국왕
1291년에 제9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 예루살렘 왕국의 최후의 수도인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의 이슬람 군대에게 함락되면서 오랫동안 예루살렘 왕위가 여러 귀족과 군주들에게 명목상으로나마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예루살렘 국왕을 명목 상의 작위로 자칭하는 사람은 총 5명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에 스페인 왕실에게 넘어가긴 했으나, 역대 스페인 국왕들이 이 작위를 자칭하지 않아서 사실상 계보가 끊어졌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아직도 위에 언급된 이들이 실제로 자칭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가 기독교의 수호자라고 내세우는 의미가 강하다.[54]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부활할 가능성은 0에 한없이 수렴하고 있지만, 혹시나 예루살렘 시의 인구의 대부분을 기독교인이 차지하게 된다면 이 작위의 보유자가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 시는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므로, 이 지역에서 기독교가 우세해질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최소한 중동 지역의 기독교인의 보호라는 명분 하에 중동 지역의 정세에 개입할 권한이 생긴다.[55] 십자군 전쟁 때 이 작위를 갖겠다고 제후들이 정치적으로 투닥거렸던 건 바로 이런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2.19.2. 유다 국왕
2.19.3. 이스라엘 국왕
요세프 다얀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다스렸던 다윗 왕조의 후손이다. 유다 왕국 역대 국왕들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 칭호도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사용했으므로 요세프 다얀은 유다 왕국의 왕위 요구자인 동시에 이스라엘 왕국의 왕위 요구자다. 왕위 요구자/아프리카 문서에 있는 에티오피아 제국 솔로몬 왕조 왕위 요구자들은 솔로몬 왕조가 진짜로 혈통상 다윗 왕조의 후손이 맞는지 불분명하기[56] 때문에 본 문단에 없다.
2.20. 인도
너무 길어져서 문서를 분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왕위 요구자/아시아/인도 문서 참조.
2.21.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21.1. 리아우링가 술탄
리아우링가 술탄국은 인도네시아의 리아우 제도와 링가 제도를 영토로 하는 군주국이었다. 1911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합병되면서 리아우링가 술탄국이 멸망했으며, 현 왕위 요구자는 마지막 술탄 압둘 라만 2세 무아잠 샤의 후손인 무함마드 유수프다.
2.21.2. 마타람 술탄
마타람 술탄국은 1755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수라카르타 수난국, 욕야카르타 술탄국, 파쿠알라만 공국으로 분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 술탄위 요구자는 파쿠부워노 13세다. 수라카르타 수난국 수난 가문이 마타람 술탄 가문의 후손이었으므로 파쿠부워노 13세는 수라카르타 수난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2.21.3. 반자르 술탄
반자르 술탄국은 다하 왕국이 멸망한 후에 세워진 인도네시아의 술탄국이며, 남칼리만탄주의 전신격 국가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침략으로 쇠퇴하던 반자르 술탄국은 결국 1860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완전히 합병되어 멸망하였다. 이후에 마지막 술탄 히다야툴라 2세를 중심으로 반자르 술탄국 부흥운동이 있었지만 결국 1862년에 히다야툴라 2세가 체포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온 부흥운동 또한 1905년에 부흥운동의 마지막 지도자 무하맛 스만이 사망하면서 사실상 끝나버렸다. 반자르 술탄국의 현 술탄위 요구자는 하지 구스티 카이룰 살레다.
2.21.4. 반튼 술탄
반튼 술탄국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반튼 주의 전신이며 1813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합병되어 멸망하였다. 욕야카르타 및 발리 섬의 왕가와 달리 이쪽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되찾지 못했으므로 왕위 요구자로 분류된다.
2.21.5. 수라카르타 수난
수라카르타 수난국 수난위는 마타람 술탄국 술탄 가문의 후손들이 대대로 계승하였다. 따라서 파쿠부워노 13세는 마타람 술탄위 요구자이자 수라카르타 수난위 요구자다.
2.21.6. 폰티아낙 술탄
폰티아낙 술탄국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서부 칼리만탄 주에 있었던 술탄국이며, 토착 인도네시아인이 아닌 아랍계 이주민의 왕조였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 편을 들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반대했던 폰티아낙 술탄국은 결국 인도네시아가 독립하게 되자 줄을 잘못 선 대가로 욕야카르타 및 발리 섬과 달리 옛 군주 가문에게 통치권이 없는 평범한 인도네시아령으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폰티아낙 술탄 가문의 수장은 그 두 지역 군주 가문의 수장과 달리 왕위 요구자로 분류된다.
2.22. 일본
너무 길어져서 문서를 분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왕위 요구자/아시아/일본 문서 참조.
2.23. 촉한 황제
촉한의 창업군주 유비의 60대손인 유창은 조상의 출세 이전 삶처럼 청두시에서 돗자리와 짚신을 만들어 팔고 있다고 한다.
2.24. 카자흐 칸
2.25. 칼리프
흔히 수니파에만 칼리프가 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흐마디야파에도 칼리프위가 엄연히 존재하며, 시아파도 정통 칼리프의 계보가 끊어졌다고 볼 뿐, 칼리프의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니파 칼리프 말고도 칼리프직을 정당하게 행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다.[58] 참고로 자기가 칼리프위 요구자라고 주장하는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있었는데[59] , 이 인간이 세운 ISIL은 나라가 아닌 테러단체에 불과하고 알 바그다디가 칼리프위를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2.25.1. 수니파 칼리프
명분도 없이 칼리프를 자칭했던 또라이의 자녀들을 제외하면[61] , 현재 적법하게 수니파의 칼리프직을 요구할 수 있는 이는 현재의 명목상의 오스만 제국 황제인 뒨다르 알리 오스만 뿐이다. 참고로 왜 오스만 황제가 칼리프를 겸하게 됐느냐면, 1511년에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그곳에 있던 칼리프를 협박해서 강제로 지위를 선양하게 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랍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아랍인들이 오스만 황실의 무시[62] 와 탄압을 받은 역사 때문에 터키와 사이가 안 좋으며 그에 따라 현대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 왕위 요구자의 수니파 칼리프직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2.25.2. 아흐마디야 칼리프
아흐마디야 칼리프 미르자 타히르 아흐마드는 본래 파키스탄에서 아흐마디야 무슬림들을 관리하고 있었으나 지아 울 하크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63] 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84년에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는 2003년에 향년 74세의 나이로 서거했고 미르자 마스루르 아흐마드가 그 뒤를 이어 칼리프가 되었다.
하지만 망명 신세지만 아흐마디야 칼리프는 왕위 요구자가 아니라 엄연히 현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교황이 로마를 벗어나 아비뇽으로 옮겨갔다고 교황위 요구자가 되는 건 아니기에.
다만 아비뇽 유수 당시 아비뇽이 가톨릭 국가인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현재 아비뇽이 속한 프랑스 또한 가톨릭이 주류 종교인 반면, 미르자 타히르 아흐마드가 영국으로 망명할 당시 파키스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였고 영국은 이슬람교 국가인 파키스탄과 달리 기독교 국가라서 단순 비교는 어렵기도 하다. 일단 티베트의 종교지도자들이 중국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한 뒤로 자기들 직위의 요구자로 여겨지는 걸 보면 아흐마디야 칼리프 역시 왕위 요구자로 봐도 무방하다.[64]
2.26. 키프로스 국왕
키프로스 왕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망명정부였으며 이름처럼 지금의 키프로스에 세워진 나라다. 키프로스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의 예루살렘 국왕 칭호를 쓰면서 키프로스를 다스렸으나, 1489년에 키프로스 왕국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합병되어 멸망하면서 키프로스 왕실의 후손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요구자인 동시에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다만 샤를로트 1세를 쿠데타로 쫓아내고 즉위한 자크 1세의 후손들은 마지막 군주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공식적으로 군주 칭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으며, 샤를로트 1세의 왕위를 명목상 이어받은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이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 요구자로 간주된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요구자 4명 중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조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와 아마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는 키프로스 왕국에서 이어지는 예루살렘 왕국 왕위 요구자이므로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며, 나머지 2명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키프로스 왕국과 무관하다.
한편 리뉴 가문의 샤를-앙투안 라모랄 또한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키프로스 자뉘 왕의 후손이다.
2.27. 태국
태국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27.1. 난 국왕
2.27.2. 람팡 국왕
2.27.3. 람푼 국왕
2.27.4. 치앙마이 국왕
현 왕위 요구자 웡삭 나 치앙마이는 치앙마이 왕국의 마지막 왕자 카에우 나라왓의 후손이다.
2.28. 터키
터키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2.28.1. 오스만 황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는 오스만 제국 멸망 후 몰타로 망명했으며 1926년에 이탈리아의 산레모에서 사망했다. 비록 그는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의 손녀인 네슬리샤 오스마놀루가 1957년에 조국의 옛 수도 이스탄불로 돌아가 그 곳에서 2012년에 생을 마쳤다. 메흐메트 6세의 남계후손이 단절된 관계로 현재는 수니파 최후의 보편 칼리프인 압뒬메지트 2세의 후손들이 대대로 오스만 제국의 황위와 수니파의 칼리프위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전전임 왕위 요구자였던 오스만 바예지트는 터키 공화국 출범 이후 터키와 브라질을 오가면서 택시기사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2.28.2.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국왕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오늘날 터키 남동부의 해안지대인 킬리키아 지방에 세워진 국가다. 처음에는 공국으로 세워졌다가 나중에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루벤 왕가는 자신이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왕가인 바그라티온 왕가의 분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근거 없이 자처한 것이었지만). 1375년에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의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멸망하면서 킬리키아는 이슬람 문화권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 요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아마데오, 리뉴 가문의 샤를-앙투안 라모랄 그리고 브로글리 공가의 수장인 필리프-모리스 빅토르 아메데 세자르가 명목상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국왕 칭호를 쓰고 있다.
2.29. 티베트
티베트의 왕위 요구자들은 중국이 1950년에 티베트를 강제로 병합하면서 계승에 실패하였고, 중국 공산당 측에서 멋대로 해당 작위의 후계자를 옹립하는 통에 대부분 계승을 포기한 상태이며, 이에 따라 여기에 등재된 작위의 후계자는 영영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티베트인뿐만 아니라 몽골족, 만주족, 북방한족(특히 베이징과 내몽골 자치구 그리고 동북 3성의 한족)들도 티베트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현 상황에서 만약 티베트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한다면 달라이 라마가 수장인 티베트 불교 겔룩빠는 독립국가 티베트 국민들이 신봉하는 반중성향 종파와 중국에 잔류한 친중 티베트인 및 중국 북부 지역 주민들이 신봉하는 친중성향 종파로 분열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전자는 달라이 라마 제도가 폐지되어 선출직 지도자가 이끌게 되고 후자는 중국에 잔류한 일부 친중 티베트인이나 화북 지역 중국인 중에서 전임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여겨지는 인물이 나타나 그가 달라이 라마가 되어 이끌게 될 듯 싶다. 한편 청나라 황제가 티베트로부터 전륜성왕으로 추대된 역사를 감안하면 과거에 등재되었던 청나라 황위 요구자도 티베트 왕위 요구자로 분류할 수 있었겠지만, 합의에 따라 선통제가 공식적으로 군주 칭호를 폐지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청나라 황위 요구자가 삭제되었기 때문에 전륜성왕 칭호의 요구자가 여기에 등재될 일은 없어졌다.
2.29.1.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실질적 국가 원수이자 티베트 불교 겔룩빠의 수장이며 현재로서는 사실상 티베트 불교 전체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다. 티베트는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탄되었으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반중감정이 강해져 여러 차례 중국 정부와 마찰이 빚어졌고[72] ,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는 1959년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멋대로 차기 달라이 라마를 선출할 것을 우려해 "14대를 끝으로 환생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자 무신론을 따르는 중국 공산당 정부는 "달라이 라마 개인이 환생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중국 정부의 소관인데, 달라이 라마가 월권을 행사하려 한다."는 개드립까지 쳐댔다. 현재 14대는 본인이 인도에서 환생하게 될 거라고 말을 바꾼 상태이지만, 본인이 입적한 후 티베트 망명정부가 공화정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으므로, 달라이 라마 계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위의 젭춘담바 후툭투처럼 군주 지위를 잃고 그저 종교 지도자로서만 활동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29.2. 카르마파 라마
티베트 불교 까규빠의 수장 카르마파 라마는 티베트 불교 수장 환생 제도의 원조격이며 티베트 불교 겔룩빠의 수장 달라이 라마에 의해 티베트 전역의 지배권을 상실할 때까지 약 350년 동안 티베트를 통치했다. 현재 17대 카르마파 라마인 우기엔 트린리 도르제가 달라이 라마 제도 폐지 이후 티베트 망명정부의 새로운 지도자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우기엔 트린리 도르제는 중국 정부로부터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를 비판하라는 내용의 압박을 받다가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2000년에 달라이 라마의 뒤를 따라 인도로 망명했다.
2.29.3. 판첸 라마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톈진 갸초가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티베트를 탈출하고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결성한 티베트 망명 정부를 결성했을 때,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제10대 판첸 라마인 초에키 걀첸은 망명하지 않고 티베트에 그대로 남았는데[80] , 입적 직전에 게둔 초에키 니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81]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 판첸 라마의 지위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악용하기 위해 정통 후계자인 게둔 초에키 니마를 납치해서 숨겨버렸고, 대신 부모가 모두 공산당원인 걀첸 노르부를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새 판첸 라마로 옹립했다. 당연히 티베트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서 판첸 라마의 지위는 중국의 의도와는 달리 완전히 유명무실해졌고, 되려 티베트 내에서는 진짜 후계자인 게둔 초에키 니마의 행방을 밝히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일단 중국 측은 게둔 초에키 니마가 잘 살아있다고 주장했으나, 2019년 현재까지도 그의 생사조차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어쩌면 게둔 초에키 니마는 이미 중국 공산당의 손에 비밀리에 처형되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현재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는 앞으로 판첸 라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게둔 초에키 니마 본인이 아닌 이상 모두 가짜라고 선포한 상황이며, 그가 추정대로 죽었다고 밝혀질 경우, 더 이상 이 지위를 계승할 사람은 없게 된다. 한편 일각에서는 설령 게둔 초에키 니마가 중국 정부의 말대로 잘 살아있다 해도 연금되어 있거나 중국 정부 주도의 세뇌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전자가 사실이라면 게둔 초에키 니마가 살아있을 때 중국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등 모종의 이유로 끝내 티베트를 상실했을 경우 그가 무사히 구출되어 판첸 라마 계보가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후자가 사실이라면 게둔 초에키 니마 스스로 사실상 판첸 라마 계승권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의 사망설과는 다른 의미에서 절망적인 셈이므로 판첸 라마 제도가 폐지되는 건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만약 티베트가 독립한다면 걀첸 노르부는 독립한 티베트의 티베트 불교 겔룩빠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문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의 티베트 불교 겔룩빠 신자들 중 걀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로 인정하는 친중 성향 신자들 또한 함께 파문당할 듯싶다. 그리고 걀첸 노르부가 사실상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임명된 만큼, 만약 티베트의 독립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멸망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걀첸 노르부는 티베트 판첸 라마위의 비정통 요구자이면서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판첸 라마위 요구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티베트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민족을 막론하고 중국 공산당의 통치 하에 있었던 티베트 불교 신자들 모두(한족, 몽골족, 만주족 등 비티베트계 티베트 불교 신자 포함)의 지도자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0. 파키스탄
너무 길어져서 문서를 분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왕위 요구자/아시아/파키스탄 문서 참조.
2.31. 헤자즈 국왕
1925년에 헤자즈 왕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복당해 멸망한 후 헤자즈 왕실 하심 가문은 이라크로 도피하였다. 사우드 가문은 뒤를 이어 네지드-헤자즈 왕국을 다스리다 1932년 두 왕국을 통합해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국왕 알리 빈 후세인의 장남 왕세자 압드 알-일라는 1958년 이라크 쿠데타 중 참혹하게 죽었다. 알리 빈 후세인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현재 헤자즈 왕국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은 알리 빈 후세인의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의 남은 후손인 요르단 왕가, (단절), 현 이라크 왕위 요구자 가문이다.
[1] 네팔 왕실 참극의 주범이다.[2] 경술국치 직후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를 격하한 칭호이므로 이 칭호는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3]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인정한 왕위 요구자.[4] 다만 이원은 왕위를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5] 대한제국 황족회가 인정한 왕위 요구자.[6] 이원의 큰아들.[7] 이해원의 큰아들인 이진휴는 대한제국이 준 살리카 방식으로 왕위를 계승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후임자가 된다. 하지만 한국 황실에서는 종법제를 따랐기 때문에 이해원 후손이 아닌 이원 후손에 계승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크며, 이해원 사후에는 그렇게 되었다.[8] 타국에 망명한 일부 유럽 왕위 요구자의 사례처럼, 공화국 정부에서 전 왕가를 껄끄럽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9] 나시모토 노리히코의 양자. 이구와는 사촌지간이다.[10] http://www.segye.com/newsView/20131201002503[11] 한국 황실의 외척 자격으로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12]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10/200610020423.html[1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76007[14]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70825707&nidx=25708[1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61175.html[16]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10/200610020423.html[17] http://news.joins.com/article/22011935[18] http://news.joins.com/article/21598737[19]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26560[20] http://news.donga.com/3/all/20120922/49591674/1?[21] 그나마 국민들에게 동정론을 받을 수 있던 사람은 의친왕의 아들인 흥영군 이우인데, 이 사람은 '''1945년 8월 6일에 업무상의 이유로 히로시마에 갔다가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맞아 끔살당한 바람에''' 그나마 황실 부활 여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졌다. 흔히 돌아다니는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낭설이긴 하나, 적어도 황족들 중에선 가장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구 황실 인사가 전멸해버리고 말았다.[22]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라오스 왕국을 무너뜨리고 라오스의 공산화를 주도하고 초대 주석으로 취임한 사람인 수파누봉은 시사방 바타나의 친척, 즉, 라오스의 왕자였다. 그리고 라오스 내의 반공 민족주의 세력을 이끌던 수파나 푸마도 이 사람의 이복 형이자 역시 라오스 왕자였던 사람이다. 둘 다 왕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 반대하고 공화주의를 주장한 점이 재밌는데, 만일 라오스의 마지막 왕세자 봉 사방의 직계혈통이 끊어지거나 직계후손들이 왕위 요구자 자리를 포기하는 등의 이유로 왕가의 계승권이 꼬이면 왕국을 무너뜨린 장본인인 두 형제들의 후손이 왕위 요구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일도 생길 수 있다.[23] 그래서 이 나라의 실질적인 후신인 현대 레바논 공화국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마론파 기독교 신자다.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슬람이 주가 되지 못한 나라다.[24] 아랍 지역의 군주의 명칭들 중 하나다.[25] 다만, 메흐메드 알리가 레바논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의 점령지들을 오스만 제국에 반환하면서, 이 지역에 다시금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당시 알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고, 오스만 황제로부터 수니파의 칼리프위를 찬탈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너무 막나간다고 생각한 프랑스가 지원을 끊겠다며 협박해서 진정시킨 결과였다. 이 대신으로 알리가 통치하는 이집트 왕국이 오스만 제국의 정식 자치령으로 인정받았으므로, 알리 입장에선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다.[26] 때문에 터키에서 모든 것의 원흉격인 이집트 메흐메드 알리 왕조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다.[27] 참고로 브룩 가문은 동남아시아 역사상 유일한 유럽계 왕조이다. 그리고 브룩 왕가의 시조인 제임스 브룩은 양성애자이기도 하여, 현재까지 동남아시아 역사상 유일한 성소수자 군주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28] 독립국가인 외몽골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몽골 문화권 모두 해당된다. 다만 지금의 칼미키야 공화국 지역은 유럽에 있으므로 제외한다. 만약 칼미크 칸국의 왕위 요구자를 추가한다면 왕위 요구자/유럽 문서에서 러시아의 여러 왕위 요구자들 중 하나로 분류하길 바란다.[마리아] 러시아 여대공[앤드류]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카를]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공위 요구 포기[29]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오빠.[30]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31] 카를 에미히의 아들.[32] 일명 '''하얀 대칸'''(белый хан).[33] 후술할 내용대로 몽골에서 젭춘담바 후툭투위 요구자를 찾아냈으나, 미성년자인 관계로 신원이 공개되지 않았다.[34] 자세한 건, 티베트 불교 항목 내지는 아래의 판첸 라마 부분의 각주들을 참조하길 바란다.[35] 잔지바르 최후의 술탄이다.[36] 잠시드 빈 압둘라의 아버지다.[37] 잠시드 빈 압둘라의 장남이다.[38] 사오파는 샨어로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다.[39] '툰 아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40] https://www.pinterest.co.kr/pin/463378249132941643/[41] 특이하게도 먼저 침략한건 버마다. 정확히는 버마 내의 반란 세력들이 패망하고 영국령 인도 지역으로 망명했는데 버마 측이 이들을 도로 끌고가겠다고 국경을 넘어버리자, 이에 영국이 대노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버마군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42]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미얀마와 같은 상좌부 불교가 대세인 나라에서는 대처승이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대승 불교가 대세인 나라 중에서도 일본은 대처승이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43] 사바 주를 두고 '이곳은 술루 술탄국의 고토'드립을 치는 게 어불성설인 것이, 이곳은 술루 술탄국이 망하기 한참 전에 당시 보르네오 섬 북부를 전부 통치하던 브루나이에 의해 합병된 상태였고, 이 상태로 영토 회복을 하지도 못한 채로 브루나이에서 영국령 말라야 연방을 거쳐서 말레이시아령으로 편입된 것이라서 이제와서 술루 술탄국 관계자들이 영유권을 주장할 건덕지는 없다. 이런 고토 회복 드립을 이용해서 필리핀 정부도 '술루 술탄국의 영토가 전부 필리핀령이 됐으니 이 나라의 옛 땅들은 다 내 거임!'하며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땅따먹기를 시도했다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부터 비난만 받고는 영유권 주장을 보류했다. 하지만 아직도 떡밥은 유효해서, 필리핀 정계에서 사바 북부 지역에 대해 영유권 드립을 치는 인간이 종종 나온다.[44] 정확히는 인도 오디샤 출신 정복자의 왕조였지만 타밀족이 다수민족이었기 때문에 왕족들이 타밀족에 동화되었다.[45] 잔인한 성격의 알부케르케는 불교 신자들의 신앙을 깨뜨려 버리겠다며 석가모니의 이빨 사리를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부숴버렸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여 그가 이끌던 포르투갈 군대를 순식간에 개발살내버리고 스리랑카 땅에서 이들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알부케르케 본인도 이 때문에 포르투갈 왕실의 눈 밖에 나서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고아로 가다가 배 안에서 객사했다. 정작 문제의 석가모니의 이빨은 진작에 칸디 왕실이 빼돌려서 무사했고, 화강암으로 가짜를 만들어서 포르투갈 군이 훔쳐갈만한 곳에다 놔둔 것이었다(...). 군중들은 포르투갈 군을 몰아낼 때는 이걸 모르고 있었다가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46] 이 사람이 칸디 왕국 최후의 왕은 아니다. 진짜 마지막 왕은 스리 비크라마 라자신하였다.[47] 하지만 현실적으로 왕정 복위의 가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지 최근에는 아예 왕정 복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란 정부에게 이란 귀국이나 방문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란 정부 측에서는 이들이 해외 망명 생활을 접고 이란으로 귀국할 경우 이들을 즉각 검거해 처벌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자세한 건 왕정복고, 팔라비 왕조 문서 참조.[48] 움베르토 2세의 후손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4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후손이다. 이탈리아 왕국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50] 샤를-앙투안 마리 루이 외젠 라모랄 드 리뉴 라 트레무아유[51] 현 스페인의 국왕이다.[52] 카를 1세의 후손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53] 이 사람은 현재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54]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루살렘 왕국 왕위는 '''중동권 기독교인들의 수호자 직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국의 부활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여전히 많은 군주들이 명목상으로나마 이 작위를 자칭하고 있다.[55]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서는 아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가 이 명분으로 레반트 지역을 점령하고, 수많은 친영, 친불 국가를 수립해서 현지의 정계에 간섭을 했다.[56] 물론 에티오피아인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한다면 그 에티오피아인은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57] 촉한이라는 명칭 자체는 후대인들이 붙인 것이며, 촉한의 실제 명칭은 그냥 한(漢)이었다.[58] 이는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종파에 교황의 개념이 있는 것과 같다. 가령, 가톨릭은 로마 주교가, 콥트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s-4가 교황직을 맡으며, 나머지 개신교가 아닌 모든 종파도 로마 교황의 정통성을 부인할 뿐, 교황이라는 직책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59] 2019년에 자살.[60] 이 사람은 오스만 제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61] 칼리프를 자칭하는 명분으로 자신이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들었으나, 무함마드의 후손은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 널리고 널렸다.[62] 그리스인, 남슬라브족 등 발칸 반도 선주민들은 비록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탄압받을지언정 아랍인들처럼 아예 무시당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고위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63] 수니파의 칼리프직이 터키 공화국의 세속주의 정부에 의해 폐지된 것과는 대조적이다.[64] 종교 지도자의 경우, 관할해야 할 지역이 주어진다. 예를 들면, 가톨릭의 교황은 바티칸이,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s-1는 이스탄불이, 콥트 정교회의 교황은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교 시아파의 라흐바르는 테헤란이 그 관할구역인 식이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이 관할구역에서 신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는 식이다. 가령 역사상의 대립교황이나 현대의 달라이 라마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65] 움베르토 2세의 후손이다.[66]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후손이다.[67] 샤를-앙투안 마리 루이 외젠 라모랄 드 리뉴 라 트레무아유[68] 움베르토 2세의 후손이다.[6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후손이다.[70] 샤를-앙투안 마리 루이 외젠 라모랄 드 리뉴 라 트레무아유[71] 달라이 라마 14세 본인의 뜻에 따라 그의 사후에는 티베트에 공화정을 도입할 계획이다.[72] 애초에 중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티베트를 한족에 동화시키려고 시도한데다 자치권도 거의 무시하고 있어서 반중감정이 생긴 거다. 이 점에서는 2019년에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과도 같으며, 그래서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73] 후임자가 없는 까닭은 아직 우기엔 트린리 도르제의 나이가 젊기 때문이지만 최악의 경우 언젠가 이쪽 또한 달라이 라마처럼 군주로서의 지위를 포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74] 티베트 제2의 대도시인 시가체에 위치해있다.[75] 제10대 판첸 라마가 공인한 후계자다.[76] 중국 공산당이 불법으로 옹립한 사람이다.[77] 제10대 판첸 라마.[78] 달라이 라마의 경우처럼, 이쪽도 앞으로 영원히 후계자가 나오지 않을 예정이다.[79] 만약 티베트가 독립한 후 티베트 불교가 친중파와 반중파로 갈라진다면, 걀첸 노르부 및 그의 환생으로 간주되는 후임 판첸 라마가 대대로 티베트 불교 친중파의 구심점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80] 과거 9대 판첸 라마 시절에 13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판첸 라마의 독자적인 자치권역을 빼앗기고 종교 지도자의 역할만 맡도록 강요된 역사가 있어서 달라이 라마 측과 판첸 라마 측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자주독립파의 구심점이 되자, 자연스레 판첸 라마는 친중 성향을 띄게 되었다. 문제는 9대 판첸 라마는 자신의 자치권을 회복하겠다고 중화민국을 끌어들였다는 것으로, 이후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때의 일을 계기로 티베트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생겨서 티베트인들 사이에서 9대 판첸 라마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안 좋다. 대만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국민당을 지지하는 친중화민국파와 민진당을 지지하는 티베트 독립파로 나누어지는데, 전자가 9대 판첸 라마에 대해 긍정적 재평가를 시도하는 것과 달리 후자는 티베트 본토인들처럼 9대 판첸 라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81] 티베트 불교는 명망있는 고승들은 죽을 때 누군가로 환생한다고 믿어서 그의 환생자로 여겨지는 아이가 그 고승의 후계자가 된다. 가령,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였던 스티븐 시걸은 충닥 도르제라는 고승의 후계자로 공인받은 바 있었고, 티베트 불교가 국교인 부탄에서는 국사(國師)의 환생자로 추정되는 아이가 셋이나 나오는 아스트랄한 일이 벌어지면서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일도 있었다.[82] 현 요르단의 국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