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카 치사토

 

<color=white> '''모리타카 치사토'''
'''森高 千里 | Chisato Moritaka'''
<colbgcolor=#ff90a3><colcolor=white> '''본명'''
'''江口 千里(えぐち ちさと (에구치 치사토, Chisato Eguchi)'''[1]
'''출생'''
1969년 4월 11일 (54세)
오사카 부 이바라키 시[2]
'''국적'''
[image] 일본
'''신체'''
161cm, O형
'''배우자'''
에구치 요스케(1999.06.03 결혼 ~ 현재)
'''자녀'''
(2000년 2월생)
아들(2002년 5월생)
'''학력'''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직업'''
가수, 작사가, 작곡가, 드러머, 배우
'''소속사'''
업프론트 크리에이트
'''레이블'''
워너 뮤직 재팬[3]
'''링크'''

1. 소개
2. 가수로서의 활동
3. 결혼 후의 활동
4. 이야깃거리
5. 작품 일람
5.1. 싱글 디스코그래피
5.2. 앨범 디스코그래피
5.3. 주요 히트곡


1. 소개


'''미각#s-2(美脚)'''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가수이자 '곱게 늙어가는 것'의 아주 모범적인 사례.[4] 정통파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기도 하다.

2. 가수로서의 활동



<color=white> '''포카리스웨트 이미지 걸 데뷔 영상.[5]'''
1986년 오츠카 제약에서 주최한 포카리스웨트 이미지 걸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연예인이 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하여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였다. 1987년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 「あいつに恋して」의 개봉 전 영화의 주제가인 'NEW SEASON'으로 데뷔.
활동 초반에는 연기활동과 가수활동을 병행하였으나 1988년 싱글 'ザ・ミーハー'[6]의 여름 라이브투어의 리허설 도중 복통으로 입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기활동을 중단, 이후 가수로서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988년 발매한 앨범 'ミーハー'[7] 중 동명의 타이틀곡을 통해 작사가로 데뷔, 가사의 유니크함을 주목받았고 상기한 입원생활을 바탕으로 작사한 'ストレス'가 또 한번 화제가 되어 이후 거의 모든 작사를 직접 담당하게 된다. 이 작사하는 아이돌로서의 이미지는 그녀에게 유니크함을 가져주게된다.

'''히트곡 <17才>를 부르는 치사토'''
1989년에는 'ストレス'를 중동풍으로 믹스한 싱글 'ザ・ストレス'에서 이후 모리타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코스프레 의상이 처음 등장하였고, 1970년대의 아이돌 미나미 사오리(南沙織)의 곡을 리메이크한 '17才(17세)'가 대히트를 치면서 일약 초인기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무대에서의 의도적인 판치라는 남성팬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8] 이 시기 발매한 앨범 '非実力派宣言(비실력파선언)'의 가사 또한 그 특이함이 높게 평가받았다.

'''히트곡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를 부르는 치사토'''
1992년엔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내가 아줌마가 되어도)'가 히트, "내가 아줌마가 되면 당신은 아저씨야!!"라는 특유의 가사 센스(...)를 보여주며 여성팬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았다. 정작 본인은 50이 넘은 현재도 20대 시절의 몸매를 유지중이고, 심지어 남편인 에구치 요스케도 50 넘은 아저씨이건만 배나온 아저씨가 되지 않았다(...). 이 가사는 크레용 신짱의 극장판인 암흑 마왕 대추적에서도 노하라 미사에의 대사로도 간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며, 노래가 히트한 당시의 1992년도엔 니혼TV에서 방영된 'まったナシ!'라는 드라마에 오프닝곡으로 쓰이기도 했다.[9] 또한 이박사의 일본 데뷔앨범 Encyclopedia of Pon-Chak에서 이박사 특유의 뽕짝 스타일로 리메이크 리메이크 된 적도 있다. 홍백가합전에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연속으로 출장하였다.
당대 여성 아이돌 중에서는 독보적인 "댄스 퀸"으로, 노래와 동시에 활발한 무용을 할 수 있는 (당시) 많지 않은 일본 가수중 하나였다. 물론 일본 외에는 당시 자넷 잭슨이나 마돈나 등 실력파 여성 댄스 뮤지션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모리타카 수준으로 춤과 보컬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여성 뮤지션은 적었다. 물론 모리타카의 댄스는 21세기의 걸그룹이나 댄스가수들의 정교한 안무에 비하면 치어댄스 수준으로 그냥 깡총거리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특유의 길다란 팔다리를 휘두르며 추는 춤은 그녀의 인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보컬리스트 드러머로 쌓은 내공 덕인지 춤추면서도 보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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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곧게 뻗은 다리는 모리타카 치사토의 트레이드마크로, 다리를 강조하는 짧은 스커트와 하이힐이 포함된 무대의상을 자주 착용하였으며 데뷔 초에는 소위 판치라, 즉 팬티가 흘낏 보일 정도로 짧은 초 미니도 많이 입었다. 아예 팬티(?)[10]에 머릿글자인 "M"을 새겨 고의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
한편 음악적인 면에서는 아이돌이라는 수식이 무색할 만큼의 실력파 뮤지션이기도 한데,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 기타[11], 드럼, 리코더 등 다양한 악기에 능하며 특히 드럼은 본인의 곡뿐만 아니라 다른 뮤지션의 세션으로 참여할 정도의 수준급. 이러한 재능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앨범 및 싱글의 수록곡 대부분을 직접 연주하여 수록하는#[12] 등 활발한 음악적 참여를 보였는데,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노선이 명확히 갈리기 시작했던 시점에 아이돌가수의 포지션을 유지하면서도 아티스트와 같이 가수 본인이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행보를 보였다.
모리타카 치사토의 활동 당시는 이미 여성 솔로 아이돌들이 한창 유행이던 시기를 지나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솔로 아이돌로써 90년대 후반까지 꽤 유효한 성공을 거두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마츠다 세이코 등의 정통파 아이돌들의 전성기 시대가 이미 지나고 스핏츠, WANDS, B'z 등과 같은 밴드 음악의 전성 시대가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전까지의 아이돌 음악과는 다르게 활동 초기 부터 밴드 형식의 음악을 추구하였고, 마침 그러한 스타일이 당시의 유행에 맞았던 것. 요약하자면, 모리타카 치사토는 '''80년대 스타일의 정통파 아이돌 이미지로 90년대 음악을 추구하여 90년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아이돌 뮤지션'''인 셈. 또한 전성기가 빠르고 짧았던 기존의 아이돌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전성기는 이전의 아이돌 여가수라면 전성기를 살짝 지나있을 20대 초중반에 맞이하였고, 에구치 요스케와의 결혼 직전인 20대 후반까지 꽤 오랜 기간동안 안정적으로 인기를 유지했다는 것도 특이사항.[13]

'''1996년 TAIYO Tour에서 <太陽と青い月>를 부르는 치사토'''
보컬리스트로서는 발성과 비음의 사용으로 인해 평이 갈리나 안정감에 있어서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는 편. 데뷔 이래 수차례의 콘서트와 라이브 투어를 개최 하였으며 특히 1990년에서 1993년까지의 라이브 전국 투어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이 많은 공연횟수를 자랑한다.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달에 10번 꼴로 공연하기도 했다. 92년의 투어 기록 링크 공식 페이지의 바이오그래피. Live・Event 참조
또한 모리타카의 가사는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여성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많아 많은 여성 팬들의 공감을 받기도 했다. 비틀즈의 "내가 64세가 되면"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노래인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 남친과 헤어졌으니 절친과 함께 여자끼리 올 여름을 만끽하겠다는 내용인 "나의 여름(私の夏)" 등이 특히 유명. 또한 정말 특이한 내용의 노래들도 제법 많아서, 건물 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대형 태풍이 상륙했는데도 당일 데이트가 취소될까봐 걱정하는 내용인 “태풍”, 어릴 적 친구와 지갑을 주워 경찰에게 가져다 줬는데 6개월 뒤에 주인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 결국 반반 나눠 가졌다는 내용의 댄스곡(...)인 “지갑 발견(見つけたサイフ)”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渡良瀨橋 (와타라세 다리), 二人は恋人 (두사람은 연인)의 PV에서 뮤지션으로서의 모리타카 치사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이외에도 콘서트 및 라이브투어에서 직접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3. 결혼 후의 활동


''' 2018년의 모습.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은 모습이다.'''
5년간 사귄 2살 연상의 배우 에구치 요스케와 1999년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거나 드러머로 활동중이며 광고에도 간간히 출연중.
2007년에는 자신의 1993년 히트곡 渡良瀬橋(와타라세 다리)의 배경이 된 아시카가 시(足利市)에 그 곡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10년에는 일본 어머니 협회의 베스트마더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부터 애들이 웬만큼 컸으니 활동 재개를 고려중이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방송에 간간히 얼굴을 비추었고, 공식 유튜브에 꾸준히 셀프 커버곡을 올리고 있다. 가창력은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았나? 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건재. 특유의 비음이 사라지고 보다 차분한 느낌의 목소리가 되었다.
2012년부터는 싱글 컬렉션인 'ザ・シングルス'의 발매 및 연말 가요제 출연, 셀프 커버곡의 공개 수록 등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데뷔 25주년 기념 기획인 셀프 커버 시리즈의 음반 발매, 방송 활동 및 라이브 공연 등 조금씩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가는 중.
현재는 FNS의 음악 교양 프로그램인 Love Music에 진행자로 고정 출연하고 있다. DA PUMP의 ISSA 등이 게스트로 출연.
최근에는 다시 활발히 음악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라이브 투어도 자주 도는데, 20대 시절이랑 똑같이 춤추고 노래하면서도 외모의 차이도 입가의 미소 주름 빼고는 자연미를 보여주는데다 목소리톤, 호흡의 변화와 관련된 기복이 없는 굉장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주름마저 없었다면 냉동인간급 무대로 평가받았을지도.

4. 이야깃거리


  • 구마모토 시의 관광버스 가이드가 '모리타카'는 부모의 출신지인 타카모리마치, '치사토'는 쿠사센리(草千里)에서 따온 예명이다" 라고 얘기했는데 모리타카 본인이 자신의 이름은 본명이라고 필사적으로 여러번 부정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가이드의 말은 거짓말인데, 모리타카 치사토의 아버지는 로커빌리 밴드에서 활동했던 음악가 모리타카 시게카즈(森高茂一)이기 때문에 모리타카라는 성은 원래의 성이 맞다.
  • 모리타카 치사토는 스스로를 구마모토 사람이라 생각하며[14] 애향심도 깊다. 방송에서도 고향 얘기를 자주 하며 ANA 큐슈 CM에도 나왔으며, 구마모토 지진이 났을때도 메세지를 남기고 구마모토 캐릭터인 구마몬 테마송을 부르기도 했다. 모리타카의 노래인 "이 거리”에서도 큐슈 사랑을 엿볼수 있다.
  • 초기 히트곡인 17세는 린 앤더슨의 'Rose Garden'과 유사하여 1970년대 일본 음악계에서 표절 의혹을 받았던 곡이다. 실제로 전주+도입부 부분이 매우 비슷하다. 물론 모리타카가 이 곡을 커버(리메이크)한 시점에서는 이미 옛날 얘기.
  • 업프론트 그룹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 중의 한 명이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업프론트 그룹 초기 시절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면서 많은 자본을 쌓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하로프로 특유의 투어 뺑뺑이도 이 분이 원조격이다.[15] 업프론트의 메인 프로듀서 층쿠 및 그가 속한 그룹사운드였던 샤란Q보다도 선배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의 사정을 아는 업프론트 그룹 소속 연예인의 팬들은 모닝구무스메아베 나츠미를 '업프론트의 공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아베 나츠미는 모리타가 치사토의 곡을 직접 커버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리타카 치사토는 '업프론트의 여왕님'이라고 부르는데, 업프런트를 먹여살리는 여왕님 소리 듣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80년대 일본 여자 아이돌계의 4대 여왕으로 군림했던 것도 거의 사실이라서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도 않은데다 현재 업프론트 그룹의 사장이나 중역들의 상당수가 모리타카 치사토의 담당 스탭 출신이며 모닝구무스메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 아마도, 한국의 가수 하수빈이 모리타카 치사토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16]
  • 김완선과 나이와 데뷔 시기가 같다. 츰과 노래를 같이 한 것도 비슷하다. 다만 당시 김완선은 너무 나이가 어려 나이를 올려 활동했었고, 일본 문화 개방 전이라 비교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김완선은 악기 연주나 작곡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노래 스타일도 달랐다. 당연하겠지만 춤 실력은 김완선이 치사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위였다.

5. 작품 일람


  • 총 판매량: 11,584,690장
    • 싱글 판매량: 6,408,070장
    • 앨범 판매량: 5,176,620장

5.1. 싱글 디스코그래피


<rowcolor=white> '''발매일'''
'''제목'''
'''순위'''
'''판매량'''
1987.5.25
<colbgcolor=#ffebee> '''NEW SEASON'''
23위
43,950장
1987.10.25
'''オーバーヒート・ナイト''' (오버히트 나이트)
24위
22,490장
1988.2.25
'''GET SMILE'''
28위
13,860장
1988.4.25
'''ザ・ミーハー''' (더 미하)
29위
28,940장
1988.10.25
'''ALONE'''
25위
26,110장
1989.2.25
'''ザ・ストレス''' (더 스트레스)
19위
40,120장
1989.5.25
'''17才''' (17세)
8위
195,300장
1989.9.25
'''だいて''' (안기)
8위
57,120장
1990.1.25
'''道 / 青春''' (길과 청춘)
5위
163,500장
1990.5.25
'''臭い物にはフタをしろ!!''' (냄새가 나는 것엔 뚜껑을 덮어!!)
4위
116,720장
1990.9.10
'''雨''' (비)
2위
179,870장
1991.2.10
'''勉強の歌''' / '''この街''' (공부의 노래/이 거리)(HOME MIX)
4위
184,450장
1991.6.25
'''八月の恋''' (8월의 사랑)
6위
105,630장
1991.10.25
'''ファイト'''!! (파이팅!!))
10위
268,880장
1992.2.25
'''コンサートの夜''' (콘서트의 밤)
7위
104,010장
1992.6.25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싱글 버전)
15위
227,720장
1993.1.25
'''渡良瀬橋''' / ライター志望 (와타라세 다리/작가 지망)
9위
309,660장
1993.4.10
'''私の夏''' (나의 여름)
5위
382,210장
1993.6.25
'''ハエ男''' (파리 남자) / Memories (싱글 버전)
12위
135,940장
1993.10.11
'''風に吹かれて''' (바람이 불어와)
'''1위'''
380,540장
1994.1.25
'''ロックン・オムレツ''' (로큰 오믈렛)
13위
99,800장
1994.1.31
'''気分爽快''' (기분상쾌)
3위
437,870장
1994.5.10
'''夏の日''' (여름날)
5위
409,100장
1994.10.10
'''素敵な誕生日''' / '''私の大事な人''' (멋진 생일/나의 소중한 사람)(싱글 버전)
'''1위'''
380,300장
1995.2.10
'''二人は恋人''' (둘은 연인)
5위
'''443,610장'''[17]
1995.10.10
'''休みの午後''' (휴일의 오후)
5위
219,050장
1995.12.1
'''ジン ジン ジングルベル''' (징 징 징글벨)
2위
252,510장
1996.2.19
'''SO BLUE'''
7위
269,650장
1996.6.10
'''ララ サンシャイン''' (라라 선샤인)
5위
178,660장
1996.11.11
'''銀色の夢 '''(은빛 꿈)
9위
236,070장
1997.2.25
'''Let's Go!'''
19위
93,130장
1997.6.11
'''SWEET CANDY'''
10위
92,960장
1997.10.15
'''ミラクルナイト''' (미라클 나이트)
20위
29,670장
1997.11.19
'''SNOW AGAIN'''
9위
134,240장
1998.3.4
'''電話''' (전화)
17위
57,730장
1998.7.15
'''海まで5分''' (바다까지 5분)
20위
31,840장
1998.10.1
'''冷たい月''' (차가운 달)
33위
13,810장
1999.3.17
'''私のように''' (나처럼)
37위
11,400장
1999.5.19
'''まひるの星''' (대낮의 별)
41위
22,950장
1999.10.1
'''一度遊びに来てよ'99''' (한 번 놀러와) / EVERY DAY
60위
6,700장

5.2. 앨범 디스코그래피


<rowcolor=white> '''발매일'''
'''제목'''
'''순위'''
'''판매량'''
1988-03-25
<colbgcolor=#ffebee> ミーハー
17위
72,390장
1988-07-10
Romantic
22위
23,820장
1988-11-17
見て
5위
66,110장
1989-07-25
非実力派宣言
2위
215,610장
1989-12-10
森高ランド
3위
312,860장
1990-10-17
古今東西
'''1위'''
353,710장
1991-07-10
ザ・森高
2위
353,030장
1992-03-25
ROCK ALIVE
3위
313,340장
1992-11-18
ペパーランド
5위
197,080장
1993-05-10
Lucky 7
3위
420,830장
1994-07-25
STEP BY STEP
3위
573,170장
1995-03-25
DO THE BEST
2위
'''1,340,110장'''
1996-07-15
TAIYO
3위
385,840장
1997-07-16
PEACHBERRY
4위
321,330장
1998-05-21
今年の夏はモア・ベター
10위
62,050장
1998-09-09
Sava Sava
7위
91,500장
1999-02-15
the best selection of first moritaka 1987-1993
6위
73,840장

5.3. 주요 히트곡


  • 1988년 - ストレス (스트레스)
  • 1989년 - 17才(17세)
  • 1990년 - 雨(비)
  • 1992년 -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내가 아줌마가 되어도)
  • 1993년 - 渡良瀬橋(와타라세 다리), 私の夏 (나의 여름)
  • 1993년 - 風に吹かれて(바람을 맞으며)
  • 1994년 - 気分爽快(기분상쾌),
  • 1995년 - 二人は恋人(둘은 연인), 素敵な誕生日(근사한 생일)
  • 1995년 - ジン ジン ジングルベル (징 징 징글벨)
  • 1996년 - ララ サンシャイン(라라 선샤인), 銀色の夢(은색의 꿈)
  • 1997년 - "SWEET CANDY', SNOW AGAIN
  • 1998년 - 海まで5分(바다까지 5분), 冷たい月(차가운 달)
    • 볼드체는 홍백 출장곡.
[1] 결혼 전 본명은 '''모리타카 치사토'''.[2]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현재의 구마모토시 니시구)에서 자랐다.[3] 업프론트 가수들이 대부분 업프론트의 자회사인 zetima를 통해서 음반을 발매하는데, 모리타카는 데뷔 당시부터 워너 뮤직 재팬 쪽에서 음반을 발매했기에 이러한 것으로 보인다.[4] 목소리가 '''활동 초기'''와 '''현재'''의 상태가 '''똑같다!''' 20대의 치사토와 50대의 치사토. 외모 자체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데, 오히려 노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 더욱 자연스럽고 좋게 받아들여져 대중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다.[5] 1분 10초 경에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히트곡 '십계 (1984)'를 부르는 모습도 나온다.[6] 1988년 발매한 앨범 'ミーハー'의 타이틀곡 'ミーハー'를 새롭게 믹스하여 발매.[7] 유행에 쉽게 휩쓸리는 젊은 세대(특히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8] 참고로 이때의 의상은 KOF 97에서 아사미야 아테나를 1P측에서 1번 엔트리로 놓았을때 나오는 복장의 원본이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 나오는 N 나가토미 하스미의 특훈후 복장도 이 복장의 오마쥬이다.[9] 여담으로 1992년 당시 히라마츠 에리의 部屋とYシャツと私(방과 와이셔츠와 나)와 더불어 결혼식 축가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제목만 봐서는 의아할 수 있으나 노래의 내용이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 변치말고 사랑해줘!'라는 내용이라 결혼식 축가로 부르기에 어색한 곡은 아니다. [10] 노출을 염두에 두고 입은 의상이므로 속옷인 팬티라고는 할 수 없다.[11]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Bill Lawrence에서 출시된 시그네춰 모델까지 나와 있다!(사용 사진 &사용 영상)[12] 링크는 PEPPERLAND 앨범의 가사집 중 일부[13] 80년대 후반까지 보통의 여성 아이돌 가수들은 10대 때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20대 들어서면서는 '아이돌'로서는 전성기가 저물기 마련이다. 굉장한 인기를 구사했던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또한 20대 초반 이후에는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시대가 한참 흐른 2010년대 이후로는 아이돌로서의 유효기간이 꽤 길어진 편이다.[14] 출생지는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이지만 어릴적부터 구마모토에서 자랐기 때문이다.[15] 심할 때는 한 달에 10회 꼴로 콘서트 스테이지에 섰다고 한다.[16]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는 일본 가수의 이미지를 베껴 활동하는 경우가 흔했고, 심지어 노래까지 베껴 써먹기도 했다. 작사 작곡 능력이 있던 강수지마저 초창기에는 일본 가수 쿠도 시즈카의 이미지를 베꼈다.[17] 싱글 커리어 최고 판매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