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덕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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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제9선거구)
선거구 개편
김창근[A]
박용만[A]

제11대
오한구
홍사덕

제12대
오한구[B]
홍사덕[B]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영주시·영풍군·영양군·봉화군)
제11대
오한구[C]
홍사덕[C]

제12대
오한구
홍사덕

선거구 개편
김진영[D]
오한구[E]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을)
제13대
이태섭

제14·15대
홍사덕


제16대
오세훈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서구)
제16·17대
강재섭

제18대
홍사덕


제19~21대
김상훈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제7대
김덕룡

제8대
홍사덕


제9대
김홍걸


대한민국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홍사덕
洪思德 | Hong Sa-duk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943년 3월 5일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 내죽1동[1] 속수마을
(現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1리)#
사망
2020년 6월 17일 (향년 77세)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재임기간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0년 6월 5일 ~ 2001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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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배우자
임경미
자녀
슬하 1남 2녀
학력
순흥초등학교 (3학년 / 전학)
영주초등학교 (졸업)
영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외교학 / 학사)
병역
[image] 대한민국 해병대 일병 귀휴(학적보유병)(130기)
종교
개신교[16]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1, 12, 14, 15, 16, 18
경력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롯데 평화건설 기획실장
신한민주당 대변인
제11, 12, 14~16, 18대 국회의원
민주당 부총재
정무제1장관
제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친박연대 선거대책위원장, 비상대책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1. 개요
2. 생애
2.1. 정계입문 전
2.3. 2000년 이후
2.4. 사망
3. 저서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이력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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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6선 국회의원 출신 관록의 정치인이자 친박의 대표 인물. 제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정계입문 전


1943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영주초등학교, 영주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의무복무하였다. 졸업 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2.2. 리즈 시절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시-영풍군-봉화군-영양군 지역구에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오한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4년 말 서석재, 박관용, 김찬우, 허경만, 김현규, 손정혁, 최수환 등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같은 해 신한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이민우 구상이 홍사덕의 아이디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이철, 허경구, 조순형, 장기욱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 양쪽 모두에 합류하지 아니한 채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로 옮기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태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였고, 야당이 통합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구 을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김대중과 친분이 각별했으며, 한때는 동교동계 주변의 몇 안되는 영남 출신으로서 당 내에서 입지를 얻기도 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조순, 조세형, 이철 후보와 맞붙어 3등으로 낙선했다.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갔다가 바로 탈당하였다.[4]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2.3. 2000년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기표와 함께 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추진하다가, 뜬금없이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홍사덕 창당 선언 '작심 1주일'[5]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맡고 싶다면서 새천년민주당 쪽과도 접촉했었다고 한다. 권노갑 증언 최종 발표 직전까지 계속 간을 보고 있었던 듯하다.
지역구를 오세훈에게 넘겨주고 전국구 2번을 배정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2001년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의 대의원 조사에서 지지율이 36.5%으로 53.1%인 이명박에게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오면서 경선을 포기했다. 당시 "이명박이 당내 경선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홍사덕이 크게 분노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홍사덕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반드시 보여 주겠다"고 무소속 출마를 시사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무소속 출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이라크 파병하면 한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심지어 재입대를 하겠다며 입대 자원서를 제출했으나, 병무청측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2004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큰 결례다”며,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개혁 개방 자유화 민주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한미안보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철학도 신념도 없이 한미 관계를 망가뜨렸다. 이라크 추가파병도 일본은 미국의 신뢰를 얻고 파병시간을 벌었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기분을 상할대로 상하게 해놓고 보내는 시기는 일본과 같지 않느냐”고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6] 이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주도하고, 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현 일산동구)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탈락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진섭 후보에 밀려 또 낙선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친박연대 후보로 대구광역시 서구 지역구에 출마,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한편,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한국일보에 "DJ -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2013년 정치자금법위반죄로 벌금 300만원과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으로 있다가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정권교체로 물러날 때까지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직을 수행했다.[7] 2016년 북한 대홍수 사태에 대해 인도적 대북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2.4. 사망


2018년 9월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20년 6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저서


책 제목으로 인터넷상에서 암암리에 레전드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잠이 옵니까 문서로.
[image]

4. 여담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는 서울사대부고 동기 동창이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몇몇 일화를 살펴봐도 절친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의 빈소에 이건희 회장 명의로 조화가 전달되기도 했다. #
  • 10월 유신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가 비판 받았다. 유신정권은 강성 수출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던 시대였다.[8] 2차 석유파동으로 대한민국 자체가 아예 망할 뻔 했다. 대외적으로 수출 100억 달러니, 1000억 달러니 나왔지만, 실질적인 국민 소득이 매년 감소했다. 당장 보릿고개가 19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을 정도로 유통망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였으니까 말이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1 - 1985
정계 입문

1985
당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탈당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탈당

1987
창당

1987 - 1990
당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탈당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9]

1995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

1995
창당

1995 - 2000
당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탈당

( )
2000
창당준비위원회

2000 - 2005
입당

2005 - 2007
재·보궐선거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7 - 2008
복당

2008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8
입당

2008
당명 변경

2008
한나라당 복당을 위한 탈당

2008 - 2012
복당

2012
당명 변경

2012 - 2020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인한 탈당
정계 은퇴

6.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9선거구[10]

21,199 (14.78%)
당선 (2위)
초선[11]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주·영풍·영양·봉화

35,828 (24.10%)
당선 (2위)
재선[12]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구 을

34,746 (30.39%)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64,201 (52.24%)
당선 (1위)
3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30,601 (26.06%)
당선 (1위)
4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365,359 (39.0%)
당선 (2번)
5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45,936 (46.61%)
낙선 (2위)

2005
하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주시

17,812 (30.8%)
낙선 (2위)
[13]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구

52,713 (61.77%)
당선 (1위)
6선[14]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36,641 (45.89%)
낙선 (2위)
[15]

7. 둘러보기






[1]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2] 26세손 사(思) 수(秀) 항렬.[3] 1992년의 홍사덕 이후로는 2016년 전현희 의원이 당선될 때까지 24년 동안 강남 지역구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공천을 받고 당선된 국회의원은 나오지 않았다.[4] 서울시장 경선때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크게 실망했었다는 후문도 있는데, 권노갑은 "그가 우리와 정견이 달라서 탈당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지역구인 강남 아파트 지역에서 국민회의 간판으로는 당선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에 탈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5] 이 기사에서 인용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에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대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던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느냐"라는 말이 당시 정확한 세간의 평가였다.[6] 관련 기사##[7] 애초에 정권탄생에 기여한 사람들이 가는 자리 중 하나로, 참여정부 시절에는 범 여권 인사였던 이수성 전 총리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임명되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6인회의 일원인 김덕룡 전 한나라당 부총재, 원내대표가 임명되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는 친박계 좌장인 홍사덕이 이 직을 맡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을 지원한 김홍걸 교수(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 아들)가 임명되었다.[8] 대표적으로 1978년 강남 땅값은 1963년에 비해, 무려 178배 폭등했다.다만 강남 개발이 1977년 경 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니 땅 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9]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10] 영주시, 영풍군, 영양군, 봉화군[11] 중대선거구[12] 중대선거구[13] 공천 불복으로 탈당[14] 2008년 한나라당 복당[15] 이후 정계 은퇴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