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image]
1926년 9월 8일 - 2006년 11월 18일
1. 소개
2. 생애


1. 소개


李東元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본관은 양성(陽城).#

2. 생애


1926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신창소학교, 송도중학교를 거쳐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했으나 중퇴하였다. 1945년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당시 정경과) 학사 과정에 입학하였고, 이 당시 보성전문학교이철승 등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연희대학교 재학 중 도미하여 해외 유학생 1호로 미국 리오그란드 대학교를 1950년 졸업한 뒤 1952년 미국 켄트주립대학 대학원 석사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리고 영국으로 가서 1958년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1]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 권한대행의 비서실장(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12월 비서실장직에 물러나고 그 후임에는 '''제갈조조''' 이후락이 취임하였다. 비서실장직을 사퇴하고 태국 대사로 부임하여 7개월간 근무하였다. 이듬해인 1964년 외무부(현 외교부)장관에 임명되어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비판을 받았다.[2][3] 하지만 대미외교 측면에서는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인정받고 있다.[4] 1966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의 마찰 끝에 외무장관에서 물러났다.[5]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7년 여당이 개헌선을 확보하자 여야의 완충을 위한 교섭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머 10.5 구락부(12석, 후에 대중당 출신 의원들이 # 합류하여 15석의 교섭단체 정우회)를 만들어 대통령의 양해하에 개별 노선을 추구하였으나, 삼선 개헌을 반대했던 소신이 무색하게 결국 정우회를 이끌고 날치기 개헌에 가담하고 만다. [6]
이후 10월 유신에도 반대하여 미국 유학을 떠났다.[7]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9년 3월에는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국제학술원 이사장을 맡으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정계에서 쌓은 인망을 바탕으로, 1996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보수 인사 끌어안기 공천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창당 직후 중앙당 후원회 회장을 맡았으나 이후 거의 발언이나 활동을 하지 않았다.[8]
4번의 국회의원 임기를 모두 비례대표로 수행하는 전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민주공화당 전국구 2회, 유신정우회와 새정치국민회의 각 1회.[9]
김종필의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정계 인물들 중 멋 부리는 것을 최고로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진을 보면 늘 포켓스퀘어를 한 차림이며, 당시 사람 치고 옷을 좀 튀게 입는다. 퇴임 후 말년의 자택 인터뷰를 보더라도 옷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스트라이프 와이셔츠라던가, 붉은 타이등. 그 다음으로 멋부리는 걸 좋아했던 인물은 포철의 박태준이라고.
말년에는 교육사업에 힘썼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동원대학교는 이 사람이 세운 대학이다. 대학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이사장은 그의 아들인 이정훈이다. 한영중.고교를 인수하고 한영외국어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회고록으로 1992년에 쓴 <대통령을 그리며>가 있다. 해방 후 학생운동의 거물급으로 김구, 이승만, 조병옥, 홍명희, 이기붕[10], 백낙춘 총장을 즐겨 만난 일화[11], 옥스퍼드 출신으로 접점이 없던 박정희에게 정변 직전 우연한 식사로 인연을 얻어 비서실장과 외교부장을 거치며 린든 B. 존슨/리처드 닉슨/지미 카터/허버트 험프리/로버트 맥나마라/히로히토/사토 에이사쿠[12]/라마 9세/팔라비/사우디 파이살 국왕/루트비히 에드하르트/빌리 브란트/우 탄트/마르코스/마릴린 먼로/육영수/정구영/김형욱/이후락/김재규/차지철/최규하와 개인적 인연들을 나눈 이야기가 두루 실려있다.[13] 10.26 우발설을 주장하며 차지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냉철한 판단력에 대한 우호적 평가를, 하지만 차지철과 주요 인사들을 제어하지 못한 말년의 박정희에 대해서는 총기가 흐려졌다는 평가를 남겼다. 반면 초중반의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 리더십과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제목에서 보듯이 대통령에 대한 회고조의 서술이 많다.
2006년 별세했다. 향년 81세.

[1]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가 옥스퍼드 동문이라며 공동성명을 실수를 빌미로 발표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졸업장을 많이 써먹었다고.[2] 그러나 본인은 한일협정을 본인 인생의 최대 공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회고록도 주된 내용은 한일협정의 극적 타결과 월남파병에서의 성공적 실익 구현(+ 아시아 국제기구 아스팍 창설)에 중점되어 있다. 그러나 의외로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경력에 한일협상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반대시위를 적극 주선, 독려(!)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는 점, 일본의 팽창주의는 적극 경계했다는 점에서 이단아적일 정도로 현실주의, 실용주의적 면모도 많이 드러나는 인물이 이동원이다.[3] 시나 에츠사부로 외상이 일본 외상으로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 독도 문제를 선물로 넘겨달라고 요구하자 대마도와 맞바꾸자면 하겠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 김종필이 오히라 마사요시와 밀약하던 당시 독도 폭파 드립까지쳤던 것에 비하면 단호했던 셈. 그런데 저 발언과는 별도로 60대의 시나 외상과는 거의 작은 아버지와 조카 격의 친밀한 유대감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여담으로.. 시나 외상의 외모가 윤보선와 너무 닮은 것도 언급하고 있다.[4] 존슨 대통령이 이동원은 외교에 능숙하다라고 했을 때, 박정희는 이동원이 낮의 외교에도 능숙하지만 밤의 외교에 더욱 능숙하다고 답변했다.[5] 결정적인 계기는 이른바 '투 코리아', 즉 유엔 남북 동시 가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대놓고 피력한 것이었다. 결국 유엔 정치국 회의 연설을 하루 앞두고 전격 해임 통보되어 민간인의 신분으로 연설만 하고 귀국하였다.[6] 마침 고려대 출신의 이철승도 야당 유력 정치인 으로 활동하던 시기라 나름 야당(?) 대표로서 자주 회동했다고 한다.[7] 박정희는 처음엔 지역구 의원 공천(사실상 당선)을 주려다가 극구 반대하자 스위스 대사를 거쳐 결국 아내를 한국에 둔다는 조건으로 미국 유학을 허락했다.[8] 1997년 당시 동교동과 YS 청와대와 연락망에서 김광일 특보의 상대 역할을 했던 것은 확인된다.[9] 이후 이만섭이 민주공화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새천년민주당으로 전국구 4회 기록을 남긴다.[10] 그냥 친한게 아니라 박사 유학 후 귀국하자 바로 뒷집에 이기붕이 살아서 박마리아를 포함 부부끼리 친했다고 한다(...) 문화공보부 실장(장관급)을 제의받았으나 자유당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다고. [11] 심지어 하와이에서 사망 4개월 전의 이승만을 만난 봐 있는데, 이승만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12] 다나카 가쿠에이 등 무수한 일본 계파 수장들은 개별이 아닌 지나가는 인물 수준으로 마구 등장하는게 백미다.[13] 특히 10.26 마지막 4일 전 차지철이 돌연 대취하며 자신을 부둥켜 안고 울며 뺨을 부비고 노래를 불렀다는 충격적인 일화도 나온다. 이동원은 사람이 죽기 전에 변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냐면서 이것을 '초혼의 잔치'(...)라고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