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범

 



제25대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인범
全仁釩 | Chun In-bum

출생
1958년 9월 6일 (65세)
서울특별시 중구
학력
경기고등학교 (73회 / 졸업)
육군사관학교 (37기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 박사)
본관
정선 전씨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81년 ~ 2016년
임관
육사 37기
최종 계급
중장
최종 보직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제27보병사단장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가족
어머니 홍숙자
아내 심화진
장남 전민규
차남 전민우
외부 링크

1. 개요
2. 생애: 군인 시절을 중심으로
2.1. 가족관계
2.2. 학창 시절
2.3. 육사 37기 생도 시절
2.4. 위관급 시절
2.5. 영관급 시절
2.6. 장군 시절: (1) 초기
2.7. 장군 시절: (2) 특수전사령관
2.8. 장군 시절: (3) 특수전사령관 이후
2.9. 전역
3. 19대 대선 당시의 행적
4. 근황
5. 평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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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1958년 9월 6일생. 서울시 중구 장충동 출신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육사 37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신원식, 양종수, 박찬주, 김영식, 이재수, 엄기학, 조보근, 박지만, 고명현, 이상욱 등이 있다.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총 복무 기간은 1981년 4월 3일 ~ 2016년 7월 31일(전역식 7월 28일)로 35년 4개월이다. 그가 현역 시절 받은 훈장은 도합 11개로, 창군 초기 참전 군인을 제외하고 현역 중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렸다. 주요 보직으로 30사단 작전장교, 한미연합군사령부 기획참모부 우발계획장교, 특전사령부 연합작전장교, 육군본부 참모총장실 정책장교, 22사단 55연대 3대대장, 22사단 인사참모·작전참모, 9사단 29연대장,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국방부 국제협력관실 대미(對美)정책과장, 합동참모본부 작전기획부 공동작계 추진단장, 합참 전략기획부 전략기획차장, 합참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육군특수전사령관 등이 있다.
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초,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대선 캠프에 안보자문위원으로 잠시 합류했지만 여러 논란을 일으키며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한동안 미국, 영국, 일본 등지에 체류하며 방문학자 등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서울 중구에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팬들과 밀리터리 매니아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2. 생애: 군인 시절을 중심으로



2.1. 가족관계


할아버지 전항섭은 유한양행 사장이고 아버지 전주화는 한의사이다.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역시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에 출마했던 홍숙자 박사이다. 국방일보 기사 이처럼 본인의 집안 배경은 상류층인데도 불구하고 사병들에게 따뜻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들의 복지에 힘을 썼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의 부인 심화진은 남편보다 1년 9개월 먼저 태어났다. 2007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어 8, 9, 10대 총장으로 연임했다. 또한 그의 고모 전혜성 예일 대학교 교수의 장남으로 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를 지낸 하워드 고는 그에게 내종형(內從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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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심화진 총장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전민규(우)와 차남 전민우(좌) 두 아들 모두 육군 현역병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전민규는 UN평화유지군레바논 파병부대(동명부대)에서 근무했다.

2.2. 학창 시절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어머니 홍숙자 박사와 함께 살았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서 5년 정도 살았는데 외톨이 신세였다고 한다. 이때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TV 시리즈 컴뱃(Combat!)을 보며 샌더스 중사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 12살 때 한국에 돌아와 외삼촌과 국군의 날 행진을 보았는데,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행을 결정하였다.
학창 시절에는 워낙 운동도 못하고 겁도 많아서 체육에서는 C, D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홍 박사는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한국에서 AFKN을 시청하게 하고 저녁식사 때는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전인범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 등을 하나하나 읽었다. 미래 미국통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영어 실력은 이때부터 완성된 셈이다.

2.3. 육사 37기 생도 시절


육사 37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의 기수로 유명하다. 자신의 아들을 박지만과 학연을 맺게 하여 아들 덕에 뭔가 얻어 먹어보려는 고위장성들이 넘쳐서, 통상 기수당 1, 2명에 그쳤던 고위 장성의 아들이 37기에만 10명이 넘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지만과 친한 육사 37기가 약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육사 37기로 이재수 기무사령관, 신원식 함참 작전본부장,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 등과 함께 전인범이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하지만 박지만은 선배들이 입교 첫 날에 "니들 중에서 육사가기 싫은데 온 사람은 당장 손들어!"할 때 유일하게 손들었을 정도로 억지로 들어왔었고, 결국 생도 시절 박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대위로 제대한다. 이후 육사 동기들과 거의 연락도 안 하고 지내기 때문에 육사 37기가 박지만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잘나간다는 것은 무리수라는 언론의 분석도 있다. 육사는 동기생 20명씩으로 중대를 구성하는데 박지만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6중대 사람들의 모임에는 매년 참석한다고 한다. 전인범은 6중대원이 아니었다.
통상 한 기수에 중장은 6~7명 정도 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32기 7명 / 33기 6명 / 34기 7명 / 35기 8명 / 36기 6명) 8명이 중장으로 진급한 37기가 승진이 조금 잘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훈장을 받았는데도 그대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전인범은 다른 장성들에 비해(심지어는 대장까지 포함해도) 훈장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군복무 내내 한 개 받기도 힘든 훈장을 자그마치 11개씩이나 받았고, 그 중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 공로훈장인 Legion of Merit 3개가 들어있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손에 꼽는 수훈이다. 다시 말하지만 군 복무기간 내내 한 번 받기조차 힘든 훈장을 저렇게 많이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한 개만 받아도 승진이 빨라야 정상인 훈장을 전인범은 11개나 받았다.
전인범의 어머니 홍숙자 박사는 외교관이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홍 박사는 전인범에게 '지만이 잘 챙겨줘라'라고 했지만 박지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아들로 교장인 정승화 중장이 직접 챙겨주는 특별한 생도이며, 박지만과 친해져 보려고 입학한 장성 아들이 10명에 달하는 상태라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다. 전인범 스스로도 박지만 생도 주변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지만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육사 4학년이던 1980년 7월 8일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국내에서 치렀다. 이때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박지만 덕분에 육사의 키 크고 잘생긴 생도들을 차출해서 미스 유니버스 각국 대표들의 파트너로 만찬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위의 일화처럼 박지만에 대한 수없이 쏟아지는 군부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선배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연대 책임으로 육사 37기를 마구 굴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정신이 없어 37기들은 후배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했는데, 이때 대표적으로 나서서 후배들을 교육한 사람이 전인범이다. 그 당시 별명이 '잔인범'(殘仁犯)이라고 38기 이하 후배들은 기억한다.
'잔인범'이 탄생한데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1학년 시절 하도 심하게 기합을 주던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전인범은 어느날 우연히 그와 함께 기합을 받았는데 그 선배는 원산폭격을 5분도 못 견뎠다. 알고보니 그 선배는 귀여움만 받았지 기합을 안 받아 봤다고 한다. 이때 전인범 생도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불합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여담으로, 당시 육사 37기 중 입학 성적이 뒤에서 두번째였다고 한다. (368명 중 367등)

2.4. 위관급 시절


중위 시절 이 계급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 대장의 전속부관(참모장교)에 보임되었다(지금은 합참의장 부관을 소령#s-1 계급이 맡는다). 1983년 10월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긴급 후송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아수라장이었던 폭파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 장군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서는 받기 어려운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2013. 10. 9. 전인범 소장 전화 인터뷰. 전인범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두부(頭部)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그때의 경험 때문에 27사단장이 되고 나서는 “전시 혹은 훈련 중에 두부에 상처가 생기면 두발이 짧아야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사단 全 장병에게 마치 모히칸 스타일 같은 짧은 헤어 스타일을 지시했다. 그래서 전 간부가 주 1회 이발을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이때의 머리를 이기자 컷이라고 하는데, 옆·뒷머리를 싹 밀고 앞머리가 6㎜인 것이 이기자 컷의 표준이다.

테러 당시 영상. 1분 남짓한 영상 중 1분 30초쯤부터 당시 전인범 중위가 나온다. 이기백 대장을 구하기 위해 폐허 더미를 헤집고 다가가고 있는 장교가 전인범 중위. 영상의 육성으로 "의장님, 괜찮으십니까?"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인범은 상황실에 있다가 카메라 배터리를 교체하러 잠깐 나갔었는데 이때 폭탄이 터졌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합참의장을 무너진 더미에서 빼내어 놓고 "여기 좀 도와줘요!"라고 외치며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기백 장군은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첫 마디가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였다고 한다. 전인범은 이를 통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상관과 부하를 챙기고 위하는 것이 진짜 군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중대장 시절에는 우수 전투중대장에게만 주는 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2.5. 영관급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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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시절엔 육군대학을 마친 후 무려 5년간 육군본부 참모총장실 정책장교로 근무한 바 있다. 육대시절 약 1년을 제외하고, 보통 1차 중령 진출자들이 순수하게 야전에서 복무하는 5년을 모두 육군의 핵심에서 복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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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단 대대장을 할 때 매년 1명씩 3명이 자살했었다. 연대장이 관에 태극기를 덮어주라고 했지만 안 덮어 주다가 마지막 세 번째 자살자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덮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부하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입으로만 말했지, 정말 자식처럼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후로는 부하를 아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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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7월 11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전인범 대령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했을 당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하여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때 국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승인받은 투표용지를 중국 등로부터 수송기로 받아 이라크 전역의 5800개 투표소에 분배하고 직원들 봉급을 비롯해 비용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서울신문 기사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

2.6. 장군 시절: (1)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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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일 장성#s-3으로 진급 후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김관진 대장과 함께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적극적인 인질 구출작전으로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합뉴스 기사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출된 인질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인범 단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전인범 군사협조단장은 아프카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파견되어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 유학시절 알고 지낸 독일군, 미군이 있어 도움을 받게 되었다. 전인범이 괜히 미국통이 아닌 것이다.
2009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사단 예하 모든 부대와 일선 장병들이 전투적 사고와 호전적 공세 기질을 갖춘 최정예 전투형 부대가 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 당장 싸울 수 있는 거점 전비태세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27사단 장병들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를 참군인으로 평가했다. #
위에서 언급된 이기자 컷도 이 시절 존재하였다. 이기자 컷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이기자 컷'이라는 단어가 이기자부대 전역자들에 의해 인터넷상으로 워낙 유명해져서 이 명칭이 마치 공식 명칭처럼 되었다. 나무위키 시절 이 문서의 초창기 버전은 이기자 부대 사단장 시절의 전인범을 다루면서 시작되었고, 이때의 이기자 컷으로 전인범 자체가 유명해졌으며 당시 수많은 미담과 소탈한 면모를 과시하였다. 인터넷에 이기자부대 전인범이라고 치면 많은 미담들이 쏟아진다. 그가 사단장을 이임한 뒤 후임은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다소 완화되었으나 특전사령관 시절 직속 부하였던 남영신 28대 특전사령관이 김운용 후임으로 3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전설의 백골 컷을 그대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반면에 소장 진급식에 성신여자대학교 직원을 사적으로 동원한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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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사단장 시절 제설작전에 직접 넉가래를 들고 진두지휘하시는 무시무시한 짤방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겪어본 블로거들의 말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평가다.
이기자 부대에 있었을 때 중요한 일은 차성도 중위를 재발굴하고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한 것이다. 차성도 중위는 1970년 27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부하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를 당시에는 사고라고 덮어 버리고 이후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인범은 중대장 시절 재구상을 받은 사람이다. 강재구 대위도 부하가 놓친 수류탄을 덮쳐 폭사하였지만, 당시 대대장이 박경석이고 사단장이 바로 그 채명신 소장이었다. 박경석 대대장은 채명신 사단장에게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채명신 사단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시켰다.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숨겨야할 사고가 되는지, 국민적 영웅이 되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재구상까지 받았던 전인범은 잊힌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발굴하여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이후 27사단 주관으로 '차성도 중위 추모제'를 열고 차성도상을 제정했으며 사료를 발굴하여 보전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27사단의 창고를 1년에 걸쳐 개조하여 사단 역사관을 만들었다.
2011년 5월 13일에는 한미 유대를 공고히 하고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이 상을 받은 다른 외국인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s-2, 영국의 조지 6세, 소련주코프 원수, 프랑스드 골 대통령, 한국의 김용배 대장(제17대 육군참모총장), 김성은 중장(제15대 국방부 장관), 김관진 대장(제43대 국방부 장관), 정승조 대장(제37대 합동참모의장) 등이 있다.
2011년 11월에는 2년간의 사단장직을 마치고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으로 영전했다. 연합사 작전참모차장은 한·미군의 핵심 보직으로 미군 소장이 작전참모부장을 맡고 한국군을 대표해 차장이 한미연합 작전 실무를 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핵실험미사일 발사 위협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임무를 탁월히 수행했다는 평이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연합사 근무 시절인 당시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윤장호 하사를 기리는 나무가 미 8군부대에 있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인범은 그 나무를 교체하도록 건의하고 그가 사단장을 역임했던 이기자부대 역사관 안에 윤장호 하사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전인범은 상술한 '차성도 중위', '윤장호 하사'처럼 그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도 호국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기리는데 두팔을 걷고 나섰다. 이후 전인범의 전역식 당시 유일하게 축사를 해준 사람이 군번도 계급도 공로 인정도 없이 싸웠던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이진복 부회장이라는 점은 이러한 전인범 장군의 행적과 연관이 있다.
2013년 4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제16대 한국군 수석대표에 임명됨과 동시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지상구성군사령부 참모장 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유엔사 군정위 수석대표는 유엔군사령관 지침에 따라 평시 정전협정 유지 및 관리를 기본 업무로 수행한다. 특히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발생하면 유엔사 회원국 연락단을 포함한 다국적 특별조사팀을 구성해 조사한다.

2.7. 장군 시절: (2) 특수전사령관


2013년 10월 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특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변화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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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범 중장이 특전사령관에 부임한 뒤 특전사 베레모는 이렇게 바뀌었다. 특전사 베레모의 모표도 그동안 장교계급장만 달고 특전휘장을 달지 않던 것에서 특전휘장 아래에 계급장을 달도록 바꾸고, 특전훈련을 이수하지 않은 인원은 베레모에 특전휘장을 달지 못하도록 하고 기존의 특전병들이 특전사 부사관과 휘장을 공유하던 것을 특전병 전용 휘장을 달도록 바꿨는데, 전인범 장군 자신도 사령관이긴 하나 해당 훈련 미이수자였으므로 특전휘장을 재직기간 동안 달지 않았다. 특전사령관 취임 1년차에 접어들면서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부대원들의 여건 개선 노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서울신문 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특전사에 근무하다가 전역해 현재는 보안 관련 업계에 종사하며 후배들에게 자문활동을 해주고 있는 한 예비역 중사는 “지금과 같은 사령관이 있었다면 전역 안 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장기복무자들에게 불필요하게 반복적이고 지나친 육체적 소모와 부상을 가져오던 기존의 정기적인 천리행군을 자대배치 전에 특전교육단에서 한 번만 하고 이후에 자대에 가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천리행군의 방식도 바뀌었는데, 마치 지옥주처럼 7일간 잠을 안 자는 무박으로 강행군하고 중도 포기자는 모두 퇴교시키는 일종의 살아남기식 자격 훈련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전인범 사령관이 물러나고 새 사령관이 부임한 이후론 전처럼 자대에서도 천리행군을 계속 하고 있다. 이것 외에도 전인범 사령관 시절 바뀌었던 사항들이 새 사령관 교체 후 대부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특전사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세종시에 달려가서 관료들 만나 빌고, 울고, 협박도 했어요"라고 할 정도. 그 결과 강하 수당이 15년 만에 5만 원에서 7만 원으로 40% 인상되었다. 전투력을 올리면서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많이 보장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달에 250㎞를 뛰면 휴가 하루를 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또한 예전엔 사제 택티컬 장비 (비인가 장비)의 사용 가능 여부가 각 대대의 대대장의 마인드 성향에 따라 저마다 달랐었는데, 전인범 사령관은 모든 예하 부대에 사제 장비의 사용을 정식으로 허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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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 이로서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들 중 최다 훈장 수상 기록을 세웠다. 연합뉴스 기사
그가 지시한 특전사 포로 체험 훈련 중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한 사건에 대한 처벌이 서면경고를 받는 데 그쳐 비난 여론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려한 수훈과 커리어, 인맥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중장에서 예편했다는 주장과, 이리저리 튀는 편인 전 장군을 탐탁찮게 보던 장성들이 이걸 기회로 대장 진급을 막아버린 것이란 주장이 있다. 일단 육군의 입장은, 전인범 당시 특전사령관은 도의적 지휘책임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2016년 10월 장성 인사에서 당시 2차 지휘책임이 있던 13공수특전여단장 정재학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해 50사단장으로 영전한 것은 육군의 이러한 판단에서다.
신동아 2016년 5월호 225페이지에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부하를 아끼는 사령관도 실재한다. 전인범 사령관이 그런 사례이다. 보급품 확충, 수당인상, 사제품 허용, 간결한 훈시 등 여러 면에서 부하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 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 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 후로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으면 나도 유(시진)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부사관 출신 A씨)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를 볼 때 일선 특전사 대원들에게 상당한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2.8. 장군 시절: (3) 특수전사령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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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야전군 부사령관 시절 전인범 중장 (해당 사진은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교육 도중) 국방일보 기사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기사 전인범 25대 특전사령관 이임사 영상
2016년 상반기 장성 인사에서 고현수 중장이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보직이동함에 따라 전인범 중장은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이란 직책으로 전역 대기상태가 되었다.

2.9.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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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8일 경기도 이천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 동안의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했다. 이날 보국훈장 국선장과 함께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특수작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도 수여받았다.[1] 해당 훈장은 한국군 출신에게는 처음 수여된 것이다. 전역식에는 정호용, 이기백(군인), 김동진, 김태영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전역 직전 한국군사학회 부회장으로 영입되었다. 다만 해당 단체에는 이미 10명 이상의 부회장직이 존재하므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10월부터는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해를 넘긴 2017년 1월 23일에는 미국의 북한전문 매체 'NK 뉴스'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공개 편지를 발표하여 눈길을 끌었다. 관련 국내보도 NK뉴스 원문 NK뉴스 번역문

3. 19대 대선 당시의 행적


2017년 2월 4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날 콘서트 진행을 맡은 고민정 아나운서와 함께 인재영입 대상으로 확정됐다. 본인 스스로도 페이스북에 더불어민주당 안보자문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더민주의 안보자문위원으로 합류한 직후인 2월 6일의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에 관해, "기존 한미 합의를 존중하고, 중국의 경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선언이 전제된 상태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혀 사실상 배치 찬성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국방 현안에 대해 "문재인 후보와 견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도 했다.
2017년 2월 8일 아내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교비를 횡령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고 이는 두 가지 논란을 불렀다. 먼저 전 사령관은 과거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거라 생각하느냐. 권총으로 쏴 죽였을 거다"라고 말했다. 기사 둘째,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캠프에 참가하자마자 친인척의 비리가 드러나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뿐 아니라 전 사령관을 참여시킨 문재인 측 인사 검증도 의심을 받고 있다. 전국교수노동조합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앞서 2017년 2월 7일 성명서를 통해 "영입 인사에 대한 검증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며 "공인으로서 흠결이 있는 인사와 함께 정권교체와 적폐청산이라는 국민들의 엄중한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심각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보다 앞서 전인범은 문재인 후보 측을 돕기로 한 배경을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특히 '람보 칼'로 불리는 개당 7만 원의 특수작전용 서바이벌 칼의 도입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에 "조용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육군 측은 "특수작전 칼을 당초 개당 7만 원에 구매하려 했지만, 더 나은 15만 원짜리로 구매하기로 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18억5000만 원의 관련 예산이 이미 통과되어 2017년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보급될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특수작전 나이프가 해외 유명 나이프 제작사의 제품이긴 하지만 민간 아웃도어용이어서 특전사가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현역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게다가 2월 9일에는 한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를 전두환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인범은 당시 계엄군의 발포를 "당시 지휘체계가 문란해서 일어난 일"로 생각한다고 한다. 기사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국민의당은 즉시 전인범과 문재인을 비난했으며,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전인범을 그만 내려보내야 한다는 주장과, 언론 매체들은 타 후보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으면서 정작 문재인 쪽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입당하지도 않은 자문위원의 가족에게도 검증이란 이름으로 뒤집어 먼지 털 듯한다며 분개하는 사람들로 이견이 엇갈렸다.
2월 10일 미국으로 떠나 연수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 많은 언론에서는 그가 문재인 캠프를 하차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캠프 관계자들은 그가 자숙 차원에서 도미한 것이며, 안보 자문은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기사

4. 근황


이후로는 한국은 물론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에서 한미외교 연구, 안보 강연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2018년 6월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를 주최하여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파이낸셜뉴스 기사 당시 세미나 참석자 다수는 휴가 등을 얻어 참석한 국군 장병 및 안보관련 종사자였고, 다수의 밀덕들도 자리를 차지했다.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명 이상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참석을 희망했지만 장소가 비좁아서 받을수 없어 안타까워 했다는 후문.
또한 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되어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예로 미국 사회에 한국 전쟁을 통해 맺어진 우방으로서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12월에는 조지아주 보훈청장과 면담하며 미국으로 귀화한 한국군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미 정부로부터 유공자 인정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중앙일보 기사
2021년 신동아 2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에서 19대 대선 당시 "전작권 전환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캠프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현재 제동이 걸린 전작권 전환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서는 늦춰지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인터뷰 기사

5. 평가


한미연합군사령관이던 미 육군대장 커티스 스캐퍼로티 장군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육사 1기수 선배인 육군대장 장준규와는 인연이 깊다. 비슷한 시기에 1야전군사령부 관할 지역인 강원도에서 대대장을, 3야전군사령부 예하 9사단에서 연대장을, 다시 1야전군 관할 지역의 사단장을 지냈고, 특전사령관도 차례로 거쳤다. 2015년 9월 장준규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기 전까지 1야전군사령부에서 각자 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일했다. 후임 사령관으로는 육사 37기 동기생인 김영식 장군이 취임했다.
27사단 사단장으로서의 평가도 매우 긍정적인 편이다. 훈련이나 원리원칙에 상당히 엄격한 사람인 건 맞는데, 그만큼 사병 복지에도 신경 많이 쓰는 사단장이었다. 통큰 휴가를 선물한다든지, 후졌던 군용 슬리퍼를 꽤 고품질의 슬리퍼로 교체해 '국방부의 역작'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등 사병들 입장에선 빡세지만 좋은 사단장이라는 평을 얻었다. 내구성이 뛰어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통칭 "아다만티움 슬리퍼" 또는 "국방부 마지막 양심" 이라고 불린다.
2015년 하반기 군 수뇌부 인사가 야전 경력 위주의 인사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 가운데 신원식, 이재수 장군은 박지만 EG그룹 회장과의 친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인범 중장을 배제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이유로 그가 야전보다 ‘미국통’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 외에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이 지목되기도 했다. 뉴스1 기사 국민일보 기사 주간동아 기사
그의 대장 진급을 가로막은 가장 큰 원인을 특전사령관 재직 중 있었던 훈련 중 사망 사고로 보는 이들이 많다.

6. 기타


사관학교 시절 별명이 '살인범', 혹은 '잔인범'이었다. 굉장히 엄격하여 후배들이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자가 진정한 사나이다"(Nemo vir est qui mundum non reddat meliorem)라는 라틴어 격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
위관급 장교 후반 시절, 어머니인 홍숙자 여사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바 있다. 당시 홍 여사는 '정치 기적은 여성 대통령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마했다가 김영삼 지지 선언을 하면서 사퇴했다.
대령 시절인 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연구(1994-2004)"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4년 후 제27사단장 재직 시절인 2010년 경남대학교에서 "美 닉슨·부시(’01.1~’09.1) 행정부 시기 주한미군 감축결정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둘 다 한미동맹에 관한 주제인데, 해외파병 경험에 따른 한미 연합작전 부문의 근무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전역 직후 <신동아>지와 가진 인터뷰 기사가 2016년 9월호에 게재되었다. 본 문서의 작성 내용 가운데 일부는 여기서 유래한 것들도 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남은 생을 한미관계 증진에 바칠 것이며 또한 동물자유연대 회원으로서 개와 고양이 등 동물 보호활동에도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특히 군 시절부터 동물들의 권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1야전군 부사령관 시절 퇴역 군견들을 민간에 분양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 전역 후 예비역이 되면서는 동물자유연대 이사가 되어 3년 동안 8평의 좁은 내실에 갇혀 사는 사자 가족을 미국의 야생동물보호소에 보내주는 등 동물의 자유를 위한 다양한 활동도 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사 이외에도 특전사령관 시절에 10년 넘게 후원해왔던 아동양육시설 SOS어린이마을에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특전사로서의 보람된 삶을 추천하기도 했다. #
그의 부인인 심화진 총장에 대한 여러 의혹이 있다. 2008년 미아역 근처에 위치한 성신여자대학교 운정그린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부지의 전 소유주였던 신일학원의 이세웅 당시 이사장에게 총 3억여 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2015년에 검찰에 고발되었으며, # 같은 해 약 3억 7천만 원의 교비를 자신의 변호사 비용 등으로 사용하여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었다. # ## 또한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관해 재판을 의도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심화진 총장 측은 일련의 의혹에 대해 "학교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들을 절차에 맞게 집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뉴스1 기사 아울러 이는 총장의 비리 척결이 목적이 아니라 학교운영권을 차지하려는 음모란 의견도 있다. # 성신여대 학교 구성원들 중 일부는 심 총장의 여러 의혹과 더불어 10년이 넘어가는 연임과 독단적인 학교 운영에 반발하며 총장 퇴진 운동을 전개중이다. # ## ### 심 총장의 연임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는데, 황우여 전 사회부총리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송인준 성신학원 이사장에게 외압을 가했다는 것. 결국 2017년 2월 법원에서는 전인범 장군의 부인 심화진 전 성신여대 총장의 비리 혐의에 대해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하였다. #
특전사령관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페이스북 활동이 활발하다. 전역 후인 상기의 2016년 신동아 인터뷰나 2020년 인터뷰 자료를 보면, 현역일 당시 그가 페이스북을 시작하니 상급부대에서는 이것이 보안에 위규되므로 그만 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하며, 심지어 예비역 장성 중에서도 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본인이 보안에 위규되는 행동을 하면 처벌하면 되는 것이고, 이에 대해 더이상 궁시렁거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한다. 더불어 그가 페북을 시작한 근본적 이유는 군 복무중인 병사나 그 부모, 여자친구 등 그 어느 누구든지 지휘관인 본인에게 직통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통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그리하여 중간 간부들도 이를 알도록 하게 해 그들이 일선 병사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게 주목적이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병사들의 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지 "군대공감" 혹은 "병사공감" 관련 글들에 공유를 하거나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경우가 많다.
2019년 3월부터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채널 이름은 전인범- In Bum Chun이다. 2019년 3월 19일 첫 영상이 업로드됐다. 2020년 9월 6일 기준 구독자 수는 29500여명이고, 조회수는 136,000여 회이다.
2019년 하반기 플래툰 컨벤션 2일차에 깜짝 등장했었다. 인터뷰나 기타 특별한 활동 없이 구경만 하다 갔는데 마스크를 쓰고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구경 온 평범한 아저씨인줄 알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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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마지막 양심이라고 불리우는 아다만티움 슬리퍼의 책임자라 카더라.


[1] 수훈은 5월이었지만 훈장수여식은 이 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