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경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로 1985년 강변가요제를 통해 데뷔했다. (강변가요제 영상)
히트곡으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이브의 경고', '넌 그렇게 살지마' 등이 있으며 파워풀한 댄스와 시원시원한 가창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기억속의 먼 그대에게' 처럼 소울풀한 발라드 곡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가창력을 댄스곡과 발라드곡에서 모두 선보일 수 있는 몇 안되는 레전드급 가수. 대한민국의 '''소울 디바'''이다. 폭발적인 성량과 가창력의 디바로, 1990년대 당시에는 엄정화와도 비교되곤 했었다.[2]
2. 음악 활동
박미경은 어릴 적부터 꿈이 가수였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6~7세 때 피아노와 기타를 배우고 레슨 선생님이 3명이나 있었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자랐다. 조기교육의 결과로 어릴 때부터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면 악기 소리를 구분해낼 만큼 듣는 귀가 좋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기타를 들고 양로원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음악과 그녀의 성장 과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2.1. 1985~1990년
[image] 연영가요제에서 임기훈의 '벗들아' 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경력을 쌓아가던 박미경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1985년 강변가요제에서 '민들레 홀씨되어' 로 장려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이 곡은 당시에 그리 히트한 것은 아니었으나 라디오 등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면서 몇 년 후 박미경이 데뷔 앨범을 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3][4] 1986년 드라마 '풀잎마다 이슬' 의 주제가를 부르는 등 음악 활동을 지속하던 그녀는 1987년 졸업 후 1년의 하와이 음악 유학을 끝내고 귀국, 음반 녹음에 들어가 1990년 이호준 작곡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이 들어있는 데뷔작을 발표한다. 이 곡을 제작 및 홍보했던 제작자 최환은 화요일에 비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이 앨범에 실린 노이즈 천성일 작곡의 '그대 알고 있는지'라는 노래는 1993년 내일은 사랑의 OST에 박소현의 솔로곡으로 리메이크되었다.
2.2. 1991~1994년
[image] 그때까지 아는 사람들만 아는 노래를 부른 무명에 가까웠던 박미경은 프로듀서 김창환을 만나며 경력에 극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다운타운 DJ로 활동하던 시절 당시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흑인 음악을 주로 부르던 박미경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김창환은 이후 신승훈, 김건모, 노이즈를 연달아 배출하며 프로듀서로 성공했고[5] 그동안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흑인 음악에 대한 실험의 연장선으로 완벽하게 흑인적인 감성을 체화하고 있던 소울 여가수인 박미경을 통해 새로운 사운드를 구현한 1집[6] 앨범을 2년 간의 작업 끝에 내놓는다.
데뷔 때부터 박미경과 함께했던 단짝 천성일(그룹 노이즈의 멤버)의 작곡에 김창환이 가사를 쓰고 당시 떠오르던 뮤지션인 김형석의 편곡으로 완성[7] 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선언조의 가사와 하우스 댄스 사운드, 격정적인 소울풍의 보컬이 담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음악이었고 이 곡을 부르는 박미경의 모습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과 같았다.[8]
길거리 노점상과 나이트 클럽 등 댄스 뮤직의 변방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 곡은 연말이 되면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고[9] 결국 가요프로 1위를 석권하면서 그 해 하반기 가장 핫한 댄스곡이 되었다.
참고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발표하기 전에 박진영, 강원래와 함께 프리스타일이라는 그룹으로 데뷔를 준비하다가 기간이 길어지면서 박진영이 먼저 이탈해 날 떠나지마를 발표했고 그 직후 박미경이 나와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발표했다고 한다.
2.3. 1995년
[image] 1995년은 그녀의 가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1994년의 열기를 그대로 이어갔으며 가요톱텐에선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후속곡 '서툰 기대'의 동반 히트와 함께 음반은 40여만 장이 팔렸다.
새 앨범 작업에 돌입한 그녀는 1995년 7월 2집앨범 'Jungle New Style'을 내놓았으며 신승훈과 노이즈가 여전한 기세를 자랑하고 김건모 3집으로 가요계의 음반판매량 기록을 다시 쓴 김창환 사단의 감각은 박미경의 2집에서 절정에 달했다. 박미경 2집은 뉴 잭 스윙, 하드코어 테크노, 유로댄스, 딥 하우스 등 서구의 트렌디한 댄스 뮤직을 한국식 가요와 융합하였던 라인음향의 전략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트랙리스트에 각 곡의 세부 장르를 표기하면서까지 댄스 뮤직 앨범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정글 리듬을 도입한 천성일의 '이브의 경고'는 나오자마자 미친 듯한 인기를 구가하며 전 차트의 1위를 석권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행하던 정글 음악은 난해한 비트가 사용되는 클럽 음악으로서 이브의 경고에서 정글 장르의 요소가 보이는 부분은 인트로에 깔리는 드럼 비트가 전부이다. 전형적인 유로댄스 악곡인 이브의 경고를 "정글" 장르라고 내세운 것은 콘셉트를 위한 고의적인 곡해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곡이었다.
이 곡은 안무가 강원래가 래퍼로 참여한 안무가 대유행했으며 음반 판매량은 보름만에 20만 장, 두 달만에 50만 장을 돌파, 최종적으로 치열했던 당시 연말 결산 음반 판매 탑10에 들어갔고 그 해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의 영광을 얻으면서 전성기를 누렸다.[10] 후속곡 '넌 그렇게 살지마' 역시 인기 순항을 하면서 연말 시상식에서 SBS 올해의 스타상, 골든디스크상, 서울가요대상 기타 등등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았으며 하반기에는 톱 여성 연예인들만 찍는다는 화장품 CF의 모델로 발탁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11] 더욱이 당시 가요계에 여가수 기근현상이 심했던 시기였기에 그녀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2.4. 1996년
[image] 두 해 동안의 절정기 이후 1996년에 접어들면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김건모와의 결별과 노이즈의 부진, 몇년 만에 김창환 사단 최초의 실패한 가수가 된 콜라[12] 등 전력에서 예전만 못한 기운이 감지되던 김창환 사단은 결국 박미경 3집의 부진으로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1996년 하반기부터는 김창환 사단에서 윤일상, 이승호 팀의 히트곡 제조기 쪽으로 인기가 넘어가면서 하락세였고 그나마 클론이 '꿍따리 샤바라'로 대박쳐서 본전은 했다.
타이틀곡인 '아담의 심리'는 어느 모로 보나 '이브의 경고'에서 대폭 다운그레이드 된 곡이었고 발매 전에 미리 클럽에 돌렸다가 반응이 시원찮은 것을 확인한 뒤 전면 재작업에 들어갈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곡이 이브의 경고만큼 반응이 좋지 않아서 소용없었다. 그래도 박미경의 이름값과 김창환 사단의 홍보력으로 가요차트에선 10위권까지 오르면서 그런대로 선전했으며 천성일이 작곡하고 클론 멤버인 구준엽이 피처링한 '날 도와줘'를 더블 타이틀로 밀었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차트와 연말 시상식에서 그럭저럭 체면치레를 하긴 했으나 1995년의 영광에 비하면 아쉬운 성과였다. 그나마 3집에선 오히려 TV 프로모션을 그리 하지 않았던 신재홍의 발라드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는 가요 순위에선 20~30위권에 머물렀으나 타이틀곡보다 더 히트했으며 이후 박효신을 비롯한 여러 후배들이 리메이크한 그녀의 대표곡이 된 것과 김창환 사단의 역량이 집결된 준수한 앨범 완성도가 위안거리였다.
참고로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의 원곡은 1993년 정인정의 '내게는 소중한 그대'며 다른 제목으로 먼저 수록된 뒤 3년 후에 박미경 음반에 다시 수록되었다. 또한 신재홍은 다른 제목의 같은 곡을 수록한 바 있으며 1997년 수록된 에스더의 '송애'는 3년 후인 2000년 임재범이 '너를 위해'라는 곡으로 리메이크되었다.
2.5. 1997~1999년
[image] 한계를 느낀 그녀는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미국으로 음악 유학길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등 세계적인 가수들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세스 릭스에게 발성부터 창법 전체를 교정받았으며 새로운 보컬 스타일을 확립한 후 귀국, 1999년에 '집착'을 타이틀로 한 4집을 발매했다. 앞서가는 스타일을 추구하던 김창환 사단의 전략에 따라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라틴 댄스 음악을 차용했으며 마치 제니퍼 로페즈 같은 비주얼과 안무[13] 를 앞세워 과감한 무대를 선보였다.
음반 판매나 반응은 중박 정도로 가요 차트에서는 탑 10에 들어가는 성적을 냈으며 연말에는 세미 누드 컨셉트의 콘서트를 성공[14] 시키고 서울가요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3년 공백을 가진 30대 여가수의 활동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였으나 당시 10대 위주로 재편된 가요 시장에서 그녀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집착'은 현재까지 사실상 그녀가 메이저한 규모로 낼 수 있었던 마지막 히트곡으로 남는다.
참고로 이 곡은 원래 엄정화가 부르기로 했으며 본인은 '몰라'를 부르기로 했는데, 김창환의 설득으로 둘의 노래가 바뀌었다고 한다.[15]
2.6. 2000년~현재
[image] 김창환 사단과 결별하고 2000년 5집 천성일의 프로듀스로 발표한 '벌'로 활동했으며 4인조 흑인 코러스를 대동하고 소울풍의 무대를 선보이는 등 야심찬 활동으로 가요차트 중위권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으나 이때부터 사실상 가요계 트렌드와 거의 멀어진 상태로 차트에서는 이름 보기 힘든 가수가 되었다.
그 뒤 3년 간의 공백기 후 2003년에 발표한 6집은 조성모의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이경섭과 함께 작업했으며 'Just one'은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발라드 타이틀곡이며 후속곡으로 김송과 함께한 팝 리메이크 'Hot Stuff'[16] 가 약간 반응이 있었으나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온 간호사 의상이 문제가 되어 간호사 협회에 소송크리[17] 를 맞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뒤로는 드라마 음악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다 2005년 7집 'Mickey Seven'을 발매했으며 자신의 영어 이름인 Mickey를 타이틀로 무려 세계 진출의 의욕을 불태우면서 신곡 'Sexy Lady'의 활동에 돌입했지만 아이돌 시대로 바뀌는 시대였던터라 차트 성적은 시원치 않았고 늘씬해지는 외모와는 반대로 점점 앨범 제작 공백기는 길어지게 되었다.[18]
그리고 2010년에 김창환 사단과 10년 만에 재결합하여 정규 8집이자 통산 9번째 앨범인 '2010 Deluxe Edition'을 발표하며 야심차게 컴백했다. 신곡+베스트를 합한 구성으로 무려 16트랙을 수록하며 김창환, 김건모 등 역전의 멤버들이 뭉친 대작이었으나 이미 40대 중후반에 접어든 나이와 김창환 사단의 올드한 감각은 더 이상 대중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클론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타이틀곡 '돌아와' 역시 차트 순위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으며 이 앨범이 그녀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3. 음악적 평가
가창력에 대해서는 흠잡을 수 없이 대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가수다. 파워풀하고 시원시원한 보컬의 대명사이며,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격렬한 안무와 함께 화끈한 라이브 실력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운동을 거르지 않고 하루 1시간 이상씩 달리면서 노래 연습을 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매우 철저한 노력파다.
그래서, 데뷔 당시에는 외모로 주목받았던 가수는 아니었으나, 50대가 된 현재는 출연 프로그램에도 당당하게 나이를 거꾸로 먹을 정도로 '미녀' 라는 수식어를 올릴 정도로 섹시한 스타일과 뛰어난 몸매의 소유자가 되었다.[19]
디스코, 소울, 재즈 등 흑인 음악의 전 분야에서 뛰어난 소화력을 자랑하며 피아노 연주와 함께 펼쳐지는 팝송 공연은 압권. 1990년대 이후 흑인 음악이 가요계의 주된 장르로 자리잡는데 공헌한 가수다. 빠르고 강한 댄스 비트에 특정 장르의 보컬을 얹어서 격렬하게 풀어내던 박미경의 스타일은 이후 소찬휘, 진주, 김현정 등 가창력이 뛰어난 여가수가 가요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종의 롤 모델이 되었다.[20]
대성공을 거둘 당시 김창환 사단과 박미경의 음악은 파격적이었고 가요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련된 사운드였지만 1996년 3집을 기점으로 가요계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났고 오히려 이 당시 고착된 음악 스타일과 대중적 이미지가 향후 그녀의 음악 활동에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21] 2000년대에 들어서며 김창환과의 작업에서 벗어나 여러 프로듀서를 거치며 변화를 모색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한 채 지금은 다시 김창환의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가수로서의 명성이나 히트곡의 인기에 비해 전성기가 짧았던 가수로 늦은 나이에 인기를 얻어 빠르게 이미지를 소진하고 사실상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시즌 2의 멤버로 첫등장한 나가수의 녹화에서는 '언제 이렇게 큰 무대에 서보겠나, 한 번이라도 서는 것에 감사하다. '어, 박미경 나왔네' 하고 한 마디만 해줘도 족하다. 가수지만 가수답지 않게 살았다'며 그동안의 침체기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무엇보다 뛰어난 가창력에 비해 다소 올드하게 여겨지는 음악 스타일이 극복 과제일 것이다.
4. 사생활
격식 없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연예계에 많은 인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건모, 강원래, 구준엽, 홍록기 등이 그녀의 유명한 연예계 친구들이다. 2005년 10년간의 연애 끝에 미국인 트로이 아마도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 필리핀에도 집이 있어서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으며 필리핀 교민과 관광객을 상대로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태원에서 바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5. 나는 가수다 2
2012년 4월 29일부터 2개월간 나는 가수다 2에 출연했다.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부활한 기분' 이라며 열성적으로 방송에 임할 각오를 다졌으나 본 경연이 시작되고 난 후의 반응은 좀 애매한 상황. '원하고 원망하죠' 를 부른 첫 경연 5월 6일 A조 무대에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별 가수전에서 정훈희의 '무인도' 를 선곡, 큰 스케일의 곡을 무리없이 소화하며 선전했지만 6월 A조 경연에서 부른 패티김의 '이별' 로 다시 한 번 하위권 3인에 들며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고별가수전에서 자신의 장기인 댄스 편곡으로 김현식의 '주저하지 말아요' 를 부르며 반전을 노렸으나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별 가수로 선정되었다.[22]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데다 생방송에서 한 번의 경연으로 바로 결과가 나오는 방송 시스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로 '마음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했으며 방송 녹화 중 여러번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잦은 공백으로 현 세대의 가요팬들에게 충분한 인지도를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본 경연에서도 부진한 무대를 이어갔기에 경연 초반부터 유력한 탈락 후보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다섯 번의 공연에서 각자 다른 스타일의 곡을 선보였고 뒤로 갈수록 나아졌으며 막판에 화끈한 댄스 무대를 보여줬으므로 어느 정도는 할 거 하고 퇴장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후 '보여줄 것 다 보여줬다, 여한이 없다' 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으며 고별 가수로 선정되고 나서도 '이게 마지막이 아니기에 더 나아갈 것이다, 제 2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 며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고 팬들에게 여전히 현역 가수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봐줄 것을 당부했다.
5.1. 나가수에서 부른 노래들
5.2. 나가수에서 다른 가수들이 부른 박미경의 노래들
- 2011년 7월 20일: 이브의 경고 (박정현)
- 2011년 7월 24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조관우) - 중간 평가 연습 장면에서 원곡 가수로 특별 출연했다.
- 2011년 11월 6일: 이유같지 않은 이유 (김경호)
- 2012년 8월 19일: 기억속의 먼 그대에게 (이영현)
- 2015년 2월 6일: 넌 그렇게 살지마 (소찬휘)
- 2015년 2월 6일: 이유같지 않은 이유 (효린)
5.3. 나는 가수다 갤러리에서의 박미경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공연 내용보다 개그 캐릭터로 흥했다. 자세한 내용은 와 역시 백수단 선배님 완전히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문서 참고.
5.4. 하차 이후
6월 24일 6월의 가수전에서 2개월 간의 출연 심경을 담은 인터뷰가 방송되었다. '오히려 후련하고 좋다'고 홀가분하게 웃음을 보이는 등 불안정해보이던 방송 기간에 비해 심적으로 많이 회복된 듯. 다만 공연의 질적인 면에서 '평소에 보아온 박미경이 아니다'라는 주위 의견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공감하며 많이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나가수' 에 대해서는 '꿈을 갖고 연습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주는 프로'라며 '연습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모니터링을 하면서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는 소감을 전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는 3주차 공연이었던 '무인도'를 꼽았다.
미니홈피, SNS, 팬카페 등 어떤 경로로도 인터넷을 하지 않는 가수라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7월 2일 여수엑스포 팝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무대를 보여주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여니수니와 함께한 박미경
2018년 9월 2일에 히든 싱어 5 마지막 원조 가수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020년 11월 5일 사랑의 콜센타에 출연해 이브의 경고, 이제는, 골목길을 불렸다. 영상1 영상2 영상3
6. 디스코그래피
6.1. 앨범
- Park Mi Kyung (1990, 현대음향)
- 1집 이유같지 않은 이유 (1994, 대영에이브이)
- 2집 Jungle New Style (1995, 라인음향)
- 3집 아담의 심리 (1996, 라인음향)
- 4집 집착 (1999, 서울음반)
- 5집 Parkmikyung 5 (2000, 서울음반)
- 6집 Just One (2003, C&J Entertainment)
- 7집 Miky New Style (2005, 예당음향)
- 8집 2010 Deluxe Edition (2010, 로엔)
6.2. 싱글
- Hot Stuff feat. 김송 Kor ver (2003, CJ)
- PDP: digital single - Jopd + Park Mi Kyung Project 12 Inch Single (2008, 로엔)
- DJ Koo: digital single / remix - 돌아와 (2011, CJ E&M)
6.3. OST
- 풀잎마다 이슬: 풀잎마다 이슬 (1986)
- 패자부활전: 패자부활전 (1997, 라인음향)
- 왕꽃선녀님: 그림자 (2004, 예당)
6.4. 피처링
- 싸이 3집 3마이: NIGHT (2002, 예당음향)
- 김수철 Pops & Rock: 다시 또 (2002, LSP)
- 클론 5집 VICTORY: 2001, 4 병상일기 (2005, 예전미디어)
- 에스진 다가갈게요: 버릇 (2008, M play)
- 아웃사이더 3집 주인공: 가면무도회 (2010, Pony Canyon Korea)
- 조PD&버벌진트 ep - 2 The Hard Way: Man Up (2010, 로엔)
- 김원준 넝쿨째 굴러온 당신 OST: Crazy (2012, 로엔)
- 배동성 오빠가 쏠게: 오빠가 쏠게 (2017, ES)
6.5. 컴필레이션
- 제6회 MBC 강변가요제: 민들레 홀씨되어 (1985, HKR)
- 아웃사이더 3집 주인공: 가면무도회 (2010, Pony Canyon Korea)
- 조PD&버벌진트 ep - 2 The Hard Way: Man Up (2010, 로엔)
[1] 박미경이 재학할 당시에는 실용음악과가 학교에 없었다. 최초의 실용음악과는 1987년 서울예대가 설치했다. 김건모, 유영석도 같은 케이스.[2] 엄정화와의 비교가 당연한 것이, 엄정화 역시 댄스곡과 발라드곡을 올라운드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였으며, 히트곡도 굉장히 많았다. 김창환의 페르소나가 박미경이라면, 주영훈의 페르소나는 엄정화. 가수의 대결인 것과 동시에 작곡가의 대결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3] 박미경이 유명 가수가 된 지금은 열린음악회 등에서 애창되며 준 국민가요급 대접을 받고 있다.[4] 노래가 히트한 후 홀씨가 아니라 포자로 번식하는것이 아니냐는 항의를 받자,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홀씨와 포자는 같은 것이다. 민들레는 정작 그것이 아닌 '씨'로 번식한다.[5] 김건모도 박미경이 소개시켜준 가수다. '스티비 원더 노래 잘 하는 애가 있다'며 알려준 후배가 김건모.[6]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이 들어있는 1990년작이 아닌 이쪽 앨범을 1집으로 친다.[7] 라인 기획의 김창환이 이끌던 가수들과 뮤지션 팀, 일명 김창환 사단. 가수 신승훈, 김건모, 박미경에 댄스그룹 노이즈, 작곡가 김형석, 천성일 그리고 안무와 의상을 책임지는 클론의 구준엽과 강원래.[8] 너무 완벽하게 달라진 모습이라 지금도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을 부른 박미경이 동명이인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9] TV프로에서 연예인들이 춤만 췄다 하면 배경음악으로 나왔다. 당시 최고의 화제였던 드라마 '아들의 여자'의 채시라의 반라 댄스 신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오던 것도 이 노래.[10] 참고로 이소라와 같이 박미경처럼 당시 연말결산 탑 10에 랭크되면서 1위 곡을 배출한 솔로 여가수다.[11] 제품명은 리마, 카피는 '후회하지 않는 선택', 배경음악으로는 '넌 그렇게 살지마'가 쓰였다.[12] 강원래의 아내인 김송이 있던 그룹이며, 그래도 완전한 실패라고는 볼 수 없는 게 가요프로그램에서는 나름대로 중위권에 오르면서 선전했기 때문이다.[13] 김창환 사단의 컨셉 상으로 박미경은 제니퍼 로페즈, 홍경민은 리키 마틴이었다.[14] 이 공연은 DVD로도 발매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유일한 박미경의 공연 DVD다.[15] 이는 히든 싱어 5에서 본인이 나왔을 때 밝혀졌다.[16] 디스코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나 서머의 곡을 리메이크했다.[17] 이후 '인내 한도 내에서의 창작적 표현'이라는 법원의 판단으로 뮤비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은 기각되었다.[18] 이 해에 베스트 앨범이나 연말 공연 등 여러 계획이 잡혀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19] 실제로, 라인이 20대 못지 않다. [20] 실제로 소찬휘는 데뷔 당시에 '제 2의 박미경' 이라고 홍보하기도 했다.[21] 다른 김창환 사단 가수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22] 실제로 후일담에 의하면 청중평가단의 득표수로는 3위를 차지했는데, 문자투표에서 크게 뒤져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영희 pd는 생방송 경연과 문자투표의 불공정성을 들어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고 녹화와 '모니터 평가단'이라는 이상한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차라리 <나는 가수다> 시즌 1의 시스템이 훨씬 덜 복잡하고, 시청자들에게 주는 재미로는 더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