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라(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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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6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충무시 출생. 동명이인의 모델과 동갑내기이고, 생일은 55일 늦다.[3] 이선희와 함께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성 뮤지션이다. 또한 최고의 여성 발라드 가수이자 그 실력이 현재진행형인 레전드중의 레전드다.
대표곡으로는 ''''난 행복해', '기억해 줘', '처음 느낌 그대로', '제발', '바람이 분다', '청혼'''' 등이 있다.[4] 인천대학교 재학 중 아카펠라 재즈 그룹 '낯선 사람들'의 멤버로 데뷔, 특유의 음색 때문에 일부에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다 김현철과 듀엣으로 부른 노래인 '''그대 안의 블루'''가 대인기를 끌면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1집, 'Vol. 1'에서 '난 행복해'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며 솔로 데뷔, 솔로 데뷔 앨범은 100만장 이상 판매된 밀리언셀러로 기록되었다. 이때 당시 뮤직 비디오에 이소라 본인이 직접 등장했는데 화면을 위아래로 늘여 놓아 이소라의 어머니조차 딸인줄 몰라 봤다고 한다.
이소라 2집, '영화에서처럼' 역시 80만장 가량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으면서 이소라는 최고 수준의 여성 가수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이소라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메탈 사운드를 선보인 '피해의식' 등과 '믿음' 등이 있었다.
이후 4집엔 다시 김현철과의 프로듀싱으로 '꽃'이라는 앨범을 발매했고, 제발이라는 또 다른 히트송을 냈다.
2년 뒤 발매 된 5집. 소라의 일기 라는 주제로 목소리가 얇아지며 점점 말을 들려주는 이소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5집부터는 메인스트림 세션들과 더불어 인디 록 뮤지션들과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녕'.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겨울, 이별' 등의 명곡들도 마구 마구배출한다. 이전까지는 팝발라드 형식에 모던 록의 질감을 다소 유지해 왔다면(ex: 4집의 제발) 5집부터는 모던 록 선율에 팝 발라드 곡 구성을 연주해 오는 파격도 감행하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어, 명곡 바람이 분다가 포함된 대망의 눈썹달 앨범이 발매된다.
6집에 수록된 '바람이 분다'의 가사다.
작사에 있어서도 수준급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라는 종결어미를 적극 활용한 독창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화자의 모습을 '바람' '비' 등의 소재로 표현하는 능력 역시 수준 이상이다.[5]
6집은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가수, 경향신문 선정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수록되는 등 대중적으로나 비평으로나 크게 성공한 앨범이 되었으며, 이로써 이소라는 작곡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곡 전체를 지배하는, 흔한 여성 보컬리스트가 아닌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4년간의 공백 후 내놓은 7집도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작품이 되었다.[6] 7집은 발매 당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보라색 배경에 작은 꽃 하나 달랑 있는 앨범 자켓부터 범상치 않더니만 아예 '''앨범이 제목이 없다.''' 아니 그렇다면? 그렇다. '''노래도 제목이 없으며''' 노래에 직접 제목을 붙여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문자로 된 제목이 없는 것으로 각 곡에 그려진 손톱만한 작은 그림이 그 곡의 제목이다. # 여담으로, 7집의 track9는 한국 애니메이션 고스트 메신저의 엔딩곡으로 쓰였다.
2010년 10월 21일 팝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했다. 본인 말로는 이례적으로 후딱후딱 작업해서 그냥 냈다고 한다. Alone Again이 타이틀곡이긴 한데, 아니나다를까 죽고 싶다는 얘기를 쌍콤발랄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 앨범에는 'THE 우울' 이소라가 부른 무려 'Gloomy Sunday'가 들어있다!
드디어 6년만에 8집이 나왔다. 2014년 4월 11일에 발매.[7] 제목은 8. 장르는 록. 8곡이 수록되었다. 앨범 발매 이전부터 앨범 수록곡들의 가사와 악보를 공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를 통해 6년만의 컴백을 박효신[8] , 손승연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타이틀 곡인 '난 별'을 커버하면서 이소라를 맞이했다. 재미있는것은, 몇몇곡을 제외한 대부분의 커버곡이 피아노선율에 따라 전개되었는데, 정작 곡은 날카로운 모던록 느낌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또, 앨범 전체에 대해서도 1집과 2집의 몇몇 수록곡들과 3집의 후반부 트랙, 수많은 공연에서, 또 방송을 통해서도 그녀 스스로가 록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지만, 8집처럼 한 앨범 전체가 록으로 채워진 경우는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9] 하지만 장르가 바뀌어도 클래스는 바뀌지 않는 법. 그녀의 또 한 번의 실험이 퀄리티까지 잃지 않으면서 굉장한 호평을 받고 있다.
16년 10월에 정규 9집, '그녀풍의 9집' 으로 약 2년만에 복귀를 예고했다! # 현재 김동률과 함께 작업한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의 티져가 공개되어 있다. 이 곡은 11월 10일자를 기준으로 이소라 솔로곡으로 선공개되었고 '''9집 자체의 발표 시기는 미정'''이다. 가장 최근 활동인 2018년 6월18일 필스너 우르켈 파크 뮤직 페스티벌에서도 앨범이 나오는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비긴어게인(JTBC) 코리아 등 다수의 방송에서 9집 발매를 약속하고는 있지만,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또한 황인찬 시인, 이병률 시인과 함께 네이버 랜선 라이브 낭독회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이병률 시인이 왜 새 앨범이 아직 안나오느냐에 대한 질문에 아직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상 당분간은 9집 앨범을 만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2020년 8월, 패션· 문화 콘텐츠 매거진 ‘데이즈드’ 8월호를 통해 발렌시아가(BALENCIAGA) 제품을 착용한 이소라의 화보가 공개되었다. 데뷔 28년만의 첫 패션지 표지모델이며 이번 제안은 다른 걸 묻지않고 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제안이 와도 거절부터 하고 재고 따지는 게 많아 듣다보면 또 거절을 하게 될 것 같아 바로 수긍했다고 한다. 표지 모델로 이소라를 만나는 건 팬들도 처음이므로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진작 왜 이런걸 하지 않았냐는 반응이다.
2. 음반
3. 음악성
3.1. 음악적 성향
1집 때부터 본인의 가사를 직접 써왔으며, 2집부터는 아예 자기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현재까지 자신의 음반을 직접 프로듀싱 해오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의 앨범에서 직접 작곡한 노래를 실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직접 작곡가와 편곡자를 섭외해 음반을 만들면 작곡가들한테 영화나 그림을 던져준 다음에 이런 느낌으로 쓰라고 주문한다고 한다.
팬들로서는 안타깝게도 앨범이 잘 나오지 않는다. 워낙 공을 들이고 대부분의 노래의 가사를 직접 쓰며 노래 자체가 섬세하다. 주로 이별이나 사랑의 아픔을 표현하는 노래가 많으며 특유의 허스키하고 섬세한 깊은 음색으로 감정을 잘 살려 부른다. 가사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지라 감정 이입이 잘 되고, 노래에 자연스럽게 깊은 감정이 묻어 나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소라는 감성적인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롹스피릿이 충만한 가수다. 본인도 락을 좋아해서 라디오에서 여러번 언급도 됐고 2집, 3집에 락 음악을 내고 8집에와서 다시 얼터너티브 록 위주로 앨범을 구성했다. 기존의 잔잔한 모습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충격을 많이 받은듯 하다. 하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앨범수록곡 등에서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드러낸 적도 많고, 러브홀릭, 델리스파이스, 불독맨션 같은 유명한 락 밴드들과의 음악적 교류도 활발한 아티스트다. 6집 눈썹달을 들어보면 세션이나 편곡에서 이러한 락에 대한 기호를 많이 느낄 수 있다.
가사 쓰는 능력이 점점 뛰어나지고 있으며 2집 때만 해도 풋풋하고 어설픈 가사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의 1집부터 7집까지의 모든 정규앨범에는 언제나 'thanks to'란에 고찬용, 김현철, 조규찬 세 사람의 이름만 들어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해준 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것이다. [10][11][12]
가사에 주목하면, 가사에서 주제 의식이 변하고 있다. 이소라 본인이 점점 변화(혹은 음악적 진보, 자아의 발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 2, 3, 4집까지만 하더라도(5집이나 6집에서도 강력하게 우울함을 말하는 가사가 많다.) 가사가 실연에 대한 고통을 묵직하게 표현해냈다면 7집부터 가사가 다루는 내용의 폭이 넓어졌다. track 9 같은 경우에 노래 부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이며, 7집은 이별의 고통을 이전만큼 극심하게 부르진 않는다. 8집은 락이라는 장르의 특징도 있지만 실연에 대한 이야기가 흔치 않다. 이소라의 목소리도 얇아지고, 가사에서도 이별의 고통보다는 이제는 사랑의 희망이라든가 일말의 기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일종의 시를 노래했달까. 이쯤되면 자기 인생을 걸어 노래하는 느낌이 드는 정도다.
3.2. 보컬리스트
비성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가수. 특유의 콧소리가 묻어나는 독특한 목소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애초에 김현철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독특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비성에 가려져 있지만 의외로 특유의 울림통에서 나오는 성량도 매우 뛰어나다. 실제로 이소라의 라이브를 유심히 들어보면 나즈막히 부르는 노래도 상당히 크게 울리는 편임을 알 수 있다. 잔기교보다는 소리의 공명 그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독특한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 덕분에 자칫 BMK나 박정현같은 소울, 팝, R&B 느낌이 짙은 보컬리스트로 오해되기 쉽고, 실제로 데뷔 전인 '낯선 사람들' 시절에는 재즈보컬로 활동했다.[13] 하지만 정작 그녀의 음악 스타일은 초창기 김현철이 프로듀싱했던 음반을 제외하고는 재즈적인 성향이 적은 편이다. 오히려 이후 보컬의 변화를 보면 그녀는 자신의 취향대로 락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14]
기교를 굉장히 절제하는 스타일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소리의 공명 그 자체에 집중해서 노래를 하며, 감정적인 부분은 본인의 풍부한 음색으로 표현한다. 사실 이게 오히려 대단한 점인데, 일반적인 보컬리스트들과는 달리 말그대로 '''목소리''' 하나만 가지고 곡의 분위기와 설득력을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
그렇다고 이소라가 보컬 테크닉이 떨어지는 가수로 오인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녀는 노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호흡'''을 잘 활용하는 가수로 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발성에서 남는 호흡을 잘 활용한다. 성대가 많이 열린 상태에서 소리와 호흡이 같이 나오게 되면 가성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이소라 특유의 보컬스타일이다. 이는 짤막짤막 내는 가수들은 몇몇 있지만 이걸 '''노래 전체에서 활용하는 가수는 이소라가 유일하다.''' 보컬에 대한 노하우가 많다는 증거.
특유의 비음과 음색때문에 가성에만 의존해서 노래부른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실제로 이소라 목소리가 가성이냐 반가성이냐는 이야기는 은근히 이견이 갈리는 주제이기도 하다. 당연히 순수 가성에 의지한다기 보다는 독특한 발성을 통한 믹스보이스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가성으로는 이소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큰 성량과 또렷한 음정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고, 가성의 정의 자체가 성대가 접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목소리는 성대가 많이 열려 바람소리가 섞일 뿐이지 중심이 되는 발성은 단단하게 잡혀 있으며, 이는 곧 성대를 세밀하게 접촉시키며 컨트롤한다는 뜻이다.
3집부터는 락음악의 영향으로 락 느낌이 짙은 창법을 구사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3집 수록곡인 '피해의식' 같은 곡에서는 이게 진짜 이소라 맞나 싶을 만큼 강렬하게 울부짖는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록 4집에서는 프로듀서 김현철의 영향으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이후 다시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면서부터는 락을 하는 이소라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수다에서 보여줬던 '주먹이 운다' 무대가 대표적.
여담으로 수많은 레전드급 보컬을 탄생시킨 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말하길 수십년간의 프로듀싱 경험 가운데 단 한 번의 녹음으로 레코딩을 끝낸 가수가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고인이 된 김재기이고 다른 한명은 이소라였다고 한다. 녹음실 밖에서 듣고 있었는데, 딱히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고.
4. 방송 활동
4.1. 이소라의 프로포즈
아마 이소라의 팬들이라면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KBS 2TV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인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1996년 10월 19일부터 2002년 3월 30일까지 진행했다. 후속타는 "윤도현의 러브레터".
언니네 이발관의 멤버인 이석원의 증언에 따르면 목이 안 좋은 상태에서 립싱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대 아래에 가습기까지 켜 가면서 꿋꿋히 라이브를 고집했다고 한다. 가수 김경호는 평범한 신인이었던 당시 '이소라의 프로포즈' 신인 가수 소개 코너에서의 무대 한 번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15]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바뀌어 있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는 직접 방청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녀가 립싱크를 많이 하는 가수나 아이돌 가수들이 나오면 강제 라이브를 하라고 한다든가 본인 스스로 방송 펑크를 냈을 정도로 립싱크 가수들을 무지 싫어했다. 특히 god가 나왔던 편에서는 갑자기 방송 펑크를 내서 급하게 미국에서 돌아온 박진영이 스페셜 MC로 진행했을 정도로 당시에 말이 많았다. 이 때 그녀는 건강 문제라고 해명했지만, 자정에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나와서 god에게 반감을 가진 게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다.
컨츄리꼬꼬와도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데, 당시 립싱크를 자주 했던 컨츄리꼬꼬와 '이소라의 프로포즈'와의 컨셉 자체가 맞지 않다면서 3번 섭외 중 2번을 펑크 냈다고 하며 그 바람에 컨츄리꼬꼬가 진행과 무대를 병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참고로 방송을 하면서 그녀가 스스로 방송 펑크를 낸 건 총 5번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방송에 대한 이소라의 자부심은 대단했는데, 가수가 브릿지 염색을 했다는 이유로, 국장이 녹화 재촬영을 요구하자[16] , 이소라가 노래도 잘했는데 왜 다시 찍냐고, 집 가버렸다. 덕분에 원본 그대로 방송이 나갔고, 그게 바로 전설의 부활 박완규의 론니나잇 첫방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제작진하고 많은 갈등을 빚어왔으며 그 갈등이 심했는지 그녀가 종영되기 전에 본인 스스로 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그 뒤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KBS joy에서 '이소라의 두번째 프로포즈'로 부활했으며 2011년 4월 26일부터 2012년 8월 7일까지 매주 화요일 밤 12시 10분에 방영되었다. 총 65회.
4.2. 나는 가수다 출연
2011년 3월 6일부터 6월 13일까지 우리들의 일밤의 코너인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다. 방송중 인터뷰에서 말했듯 너무 가리면 노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첫무대에서 히트곡인 '바람이 분다'를 불렀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까지도 바람이 분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동시에 무대 진행까지 맡았다.
그러다가 3월 20일 방송에서 김건모, PD 김영희, 김제동과 함께 미친듯이 까였다. 이 날 김건모가 하차하게 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 것인지 내가 좋아하는 건모가 떨어지는 건 참을수 없다고 울면서 녹화장을 나가는 깽판을 쳐버린 것. 결국 여러 요소가 겹쳐져 김건모가 재도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발언이 선후배 친목질이냐며 얻어맞았는데, 이소라와 김건모는 친한 사이가 아니다.(한 살 차이 손위며, 동시대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다름아닌 연예계 인맥이라면 공형진과 1위를 다툴 김건모가 '이소라씨'라고 부르는 사이.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차라리 백지영-김건모일 것이다. 나가수 1회 참조) 이 방송 촬영직후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2011년 3월 13일자 MBC FM 정엽의 푸른밤)에서 이소라는 출연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는 서바이벌 포맷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김영희 피디에 대한 호감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답했고, 앞으로 누가 꼴찌가 될 것 같냐는 질문에 꼴찌라는 말 자체가 잔혹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이 꼴찌가 되기를 바랐고 6인 중 누군가가 꼴찌가 되어 상처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꼴찌가 되어서 끝나는 게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녀는 경쟁이라는 룰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가수 1회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가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인터뷰했다. 이소라의 감성(슬픔과 분노가 주된)은 이소라라는 아티스트가 존재하게 한 원동력이지만, 단지 브라운관을 통해 이소라를 접하는 대중들이 그런 것을 이해해 줄 관용이 있을 리 없고 있을 이유도 없어서, 재도전논란으로 '히스테릭하고 지 고집만 부리는 여자'등 안 좋은 이미지란 이미지는 다 뒤집어 쓰고 있었다.
당시 영상에서 탈락 발표 후 대기실로 이동한 김건모를 비추면서 ''말보로 화이트 멘솔'' 담배를 피우는 김건모의 영상까지 잡힌걸로 봐선(피우는 모습은 아니고 담배곽과 담배 연기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모습이 찍혔다!!) CP였던 김영희의 인식이 지나치게 '올드'했다.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케이블TV에서도 이런 비방용 영상은 편집으로 거르는데 이걸 지상파 정규방송으로 내보낼 생각을 했으며, 이러한 상황을 시청자들이 받아들일거라 생각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예원과 이태임 사건에서처럼 실제 방송에서는 화기애애해 보여도 뒤에서는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사이인 것을 몰카를 통해서나 알수 있었던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보여야 할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김영희 CP의 책임이 큰 부분이다.
그러다가 5월 8일 방송분에서 쾌활하고 밝은 댄스곡인 보아의 No.1을 원곡재해석이 아닌 재창조 수준으로(음습한 락)으로 편곡해, 뮤즈나 비에르크를 연상시켰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수많은 악플 여론을 반전시켰다. 이는 재도전으로 비판받던 중 '공연으로 입증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와갤에서는 이소라가 암흑사제로 특성을 바꿔 청중단을 딜링했다는 드립이 나왔다. 이후 노래 도중에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있던 모습에 아서스의 서리한과 갑옷을 합성한 '''이소라스''' 짤방이 뜨면서 화제로 떠올랐다. 여하튼 대한민국에서 가창력을 넘어서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최고의 가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5월 29일 방송분에서는 놀랍게도 임재범이 피쳐링 한 소울다이브의 주먹이 운다를 열창, 심지어 랩까지 소화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실력우위를 재는 게 무의미한 가수들이 출연하는 상황에서, 나가수가 보컬능력 싸움이 아닌 프로듀싱 경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
6월 12일 방송분에서는 행복을 주는 사람을 잔잔한 선율과 함께 불렀으며 순위 합산에서 7위를 차지해 이게 나가수에서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이소라가 하차했을 때 동료 가수들은 물론 네티즌도 충격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는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나가수의 편곡 스타일이 점점 무대를 가득 메우는 과잉감동을 추구하는 데 대한 일종의 경고라는 시각도 있었다.
이 경연을 끝으로 MC 자리도 하차[17] 했고, 신PD의 전화도 받지 않는 등 그간 '나는 가수다'에서 활동할 때 상처가 너무 커서 이젠 '나는 가수다'에서 그녀를 볼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10월 중순에 있을 '나는 가수다 호주 콘서트'에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 콘서트에서도 경연 방식을 그대로 이어감에도 참석하는 것이 나타나자 이소라 팬들은 반색하고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그녀는 이 날 이현우의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를 피아노 반주만으로 부른 감성적이고 절제된 무대를 선보였다. 이 날 그녀는 본경연에서도 기록하지 못했던 저조한 성적인 7위를 받았음에도]] 인터넷에선 오히려 그녀가 1위를 했어야 한다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다음 인터넷 투표에선 48%로 넘사벽급 1위를 했다. 이는 고음 위주의 무대가 대접받는 요즘 나가수의 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해당 노래를 '''4시간 전에 급변경해서 급편곡했다'''는 사실[18] 이 밝혀지면서 더 큰 화제와 찬사를 불러 일으켰다[19] . 안티만 드글대던 반 년 전과 비교하면 피아노와 자신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찬사로 바꾼 이소라 같은 감성甲은 어지간해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호주경연 방송분량에서도 다른 가수에 비해 매우 적은 분량만이 나갔고 마지막 순위 발표 현장에도 와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등, 정말 나가수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인지는 의문점이 남는 부분도 있으나, 김영희PD가 경연 당시 상당한 공황 상태였고 노래 부르자마자 바로 공연장을 나가 하루동안 밥도 안 먹고 호텔에 처박혀 있었다고 하면서 일단락.
또한, 이번 경연 때 보여준 이소라의 초췌한 모습 때문에 이소라 지병설까지 심심찮게 나왔는데 당시 호주 날씨가 방송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더웠다 쌀쌀했다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몸이 약한 사람이라면 몸살이나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상황이었다. 예민한 성격의 이소라처럼 감정에 따라 컨디션이 쉽게 바뀌는 스타일의 사람에겐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 외부출입을 자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2018년 본인의 콘서트에서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무대 비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잊고 싶었고 또 잊어야만 했기에 이 노래를 선곡했다고. 이 무대 이후 정말 잊었고, 이 뒤로 그 사람과 만나거나 연락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4.3. 나가수에서 다른 가수가 부른 이소라의 노래
- 2011년 3월 27일: 제발 (김범수)
- 2011년 11월 6일: 난 행복해 (거미)
- 2012년 1월 1일: 처음 느낌 그대로 (적우)
- 2012년 6월 17일: 바람이 분다 (한영애)
- 2012년 6월 24일: 난 행복해 (정엽)
- 2012년 12월 9일: 바람이 분다 (더 원)
- 2015년 2월 13일: 바람이 분다 (스윗소로우)
4.4. 그 외
MBC 라디오 FM4U에서 "이소라의 밤의 디스크쇼"와, "이소라의 음악도시", "이소라의 오후의 발견", "이소라의 정오의 희망곡"을 진행했고, 2005년도에 KBS 시트콤인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에서 출연하여 2006년 2월 하차할 때까지 연기 활동을 하였다. 당시에 시트콤을 찍으려고 18kg를 감량했다고 한다. 연기의 평가는 첫 연기인데도 나쁘지 않았다는 평.
2004년 방영된 최수종쇼 서태지 특집편에서 짤막하게 등장, 서태지에 대한 인터뷰에서 너무 멋있고 동화 속 주인공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 피부관리 어떻게 하시는건지 궁금하다고 언급하기도.
립싱크하는 가수들을 엄격하게 내칠 정도로 깐깐한 이소라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무한도전에도 잠깐 출연했으며 자유로 가요제 특집에서 김C와 정준하의 듀엣곡에 피처링으로 참가했다. 정준하는 이소라를 보고 정말 놀라면서 같이 해서 영광이라고 했다. 김C에게서는 소리가 현같다는 평가를 받았다.[21][22]
2013년 KBS 제2라디오의 봄 개편을 맞아 저녁 6시에 방송되는 '이소라의 메모리즈'라는 팝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7월 16일 100회를 맞아 특집으로 꾸며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 그 뒤 건강상의 이유로 12월 23일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후임은 하차하기 전에 대타로 뛰던 강수지가 맡게 되었다.
2014년 7월 22일에는 여름휴가를 간 정찬우를 대신해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해 김태균과 함께 일일 DJ를 한 적이 있다.[23] 방송활동이 드문 이소라의 팬들로썬 반가운 방송. 처음엔 어색해 하다가 라디오라는걸 인지하고 순식간에 라디오 진행톤으로 바뀌는 것이 압권. 근래의 조용한 이소라의 이미지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 망가지는 꽁트까지 했다. 3, 4부는 정준일, 원모어찬스와 라이브를 했다. 전체 방송분 (mp3)
2017년 3월 26일 방영된 판타스틱 듀오 시즌2에 출연하여 출연자와 진행자로서 3번의 녹화를 진행했다. 애초에 이소라는 mc로서 3회성 단발출연을 하기로 계약했다고 한다.
2017년 6월 25일 첫 방송인 JTBC의 음악 예능 비긴 어게인에 윤도현, 유희열, 노홍철과 함께 출연했다.
2020년 6월 6일 시즌 4로 돌아온 비긴 어게인 코리아에서 대선배로서 가수들의 정신적 지주 겸 진행자에 맞먹는 역할로 출연하였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눈물을 보이며 5회를 끝으로 하차하였다.[24] 최근에는 방송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애정을 쏟았던 프로그램에서 개인적 사정으로 하차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5회 간의 출연이었지만 자신의 히트곡뿐 아니라 후배 가수들과의 듀엣 등 다양한 음악으로 가수 '이소라'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증명해냈다.
2020년 10월 30일, 히든싱어 6 마지막 원조가수로 출연했다. 방송을 전혀 모니터링을 하지 않아 방송 룰을 잘 모르는 모습을 보여줬고 심지어 자신의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던 어반자카파의 권순일을 못알아보기도 했다. 1라운드에서는 투표와는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몇 번에 있는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통 번호를 언급하는 바람에 제작진들까지 깜짝 놀라는 사태도 벌어졌다. 1~3라운드는 득표율이 높진 않았으나 순위는 계속 낮았는데 4라운드에서는 엄청난 득표율로 우승했다.
5. 콘서트
5.1. 소극장 공연
2010년 4월에 '''세번째''' 봄 공연을 했으며 2009년 공연처럼 조용히 전석 매진을 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으며 집에서는 와우를 하고 지내고 풀 캐고 돌 캐고 그러는 게 너무 좋댄다. 노래는 전체적으로 우울하다. 가사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감정이 많이 묻어나며 7집에 와서는 사랑보다는 자기 탐구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 아이돌 열풍으로 아이돌만 넘처나는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귀중한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부르려고 써낸 가사라는게 느껴진다.
2009년 소극장 공연때에는 공연 한참하다가 거의 후반부쯤에 이런 목상태로 돈 받고 노래할 수 없다면서 '''전액 환불을 해줬다.''' 현장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는데 이소라 본인이 납득할 수 없는 노래였다고 5000만원정도의 손해를 부담하면서 그 날 관객들에게 전액 환불했다.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를 읽어보면 당시 이소라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5.2. 김범수★이소라 조인트 콘서트
나는 가수다에서 김범수가 이소라의 제발을 불렀고, 중간점검 때 이소라의 행복을 주는 사람에 아주 잠시 피쳐링을 해준 일. 그리고 원래부터 이소라는 김범수가 동경하는 가수였다는 내용의 인터뷰 등의 인연으로 2011년 연말에 김범수★이소라 조인트 콘서트를 가졌다.# 콘서트 전부터 둘의 포스터가 '로맨스는 없다' 등으로 화제가 되었고 모든 지방의 콘서트에서 자체 '나는 가수다' 승자는 김범수가 되었다.
물론 그녀의 인기도 증명이 된 것이, 부산 콘서트에서 이소라 갤러리에서 조공하는 인간 화환이 남녀 한 쌍으로 두 개가 떴다.(...) 게다가 이소라는 그 두 사람을 직접 나와서 만나 준 데다가 그걸 또 공연 끝난 후 마무리 인사에서 관객들에게 자랑했다. 갤러리에서는 역시 와갤러의 패기는 다르다며 칭송하는 분위기.
6. 이모저모
6.1. 예술의 전당 대관 거부 사태
그야말로 전국을 뒤흔들었던 대사건. 2008년 4월의 일이다.
최초 기사 TV 뉴스 영상 1 TV 뉴스 영상 2
사실, 이 사태에 앞서 2007년 싸이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예술의 전당에 대해 서운하다 토로하며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는데, 이 사태로 인해 재조명됨과 아울러 인순이 등 여러 가수들이 들고 일어나며 파장이 커졌다. 파장의 정도는 검색 결과 목록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들고 일어난 가수들 중 결정타는 패티김. 결국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유인촌은, 당시 사장으로부터 처분 결과를 보고받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며 격노했다. 그런데 정작 최초 공연은 조용필이 했다. https://sports.donga.com/article/all/20111013/41083387/3?adtbrdg=e#_adtReady. [25]
이후로도 한동안 논란거리로 수 년 동안 사그러들지 않았었지만, 최근 한대수가 오를 예정으로 확인되는 등 나아진 모양새다. #
6.2. 출연 보이콧 사건
예술의 전당 사건보다도 더 오래된 일이지만 당시 시청자들이라면 기억하는 큰 사건. 규모로는 비교가 안 되기에 사건으로 표기했으나, 사실 관계자들 입장에서 보면 '''꽤나 위험한 사태'''였다.
1999년 6~7월 사이의 일이라, 한참의 탐색 끝에 '''공식 자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뉴스 라이브러리로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운 '''귀한 기사'''다. 더불어 '''당시 판매했었다는 판매량 집계 자료도 있다. 이 역시 귀하다.''' 음원 사이트들에서도 검색하면 발견되지만 재생은 불가능하며, 당시 잠깐이나마 팔려나간 음반들은 현재 희귀음반화되어 간간히 거래되는 상황을 검색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기사 내용 전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방송국들은 무소불위의 파워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채널이 많던 시절도 아니라 그 위력은 엄청났다. 일명 파워 게임의 강자 격이라, 당시 힘이 약하던 기획사들은 그야말로 데꿀멍일 수 밖에 없었다. 밉 보이면 밥줄이 끊기기 때문.[26] 그렇다보니 방송국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컴필레이션 앨범을 찍어 팔아 돈을 벌어대곤 했다.
그러나 이에 이소라는 사전협의도 없이 멋대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사실에 격분, 출연 보이콧으로 정면 대응하며 부당함에 맞섰고, 결국 판매 중인 음반들이 전량 회수조치됨으로써 상황이 종료되었다.[27][28]
'''진정한 걸 크러쉬는 따로 있었다.'''[29]
6.3. 다이어트에 관한 에피소드
이소라가 이문세[30] 와 살을 빼기 위해 배드민턴을 쳤다. 배드민턴이란 운동이 보통 셔틀콕을 줍는 과정에서 큰 운동이 되는데 이소라의 경우 셔틀콕이 멀리 떨어지면 콕을 매니저에서 주워달라는 만행(...)을 저질렀고 결국 이소라는 체중의 변화가 없었고 매니저만 엄청난 감량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또한 이문세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할때, 주제를 정해주면 팩스로 사연을 받는 코너가 있었는데, 하루는 '가장 싫어하는 것 3가지'로 주제를 정했는데, 이소라가 직접 '''1번 달리기 2번 달리기 3번 달리기''' 라고 팩스를 보냈다(...) 빵 터진 이문세는 너무 웃었다며 상품을 보냈다고 한다(...).
2005년에는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라는 일일시트콤에 조연으로 출연할 당시 기자회견장에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기자들이 다이어트 비결을 묻자 '그냥 굶어서' 뺐다는 명언(...)을 남겼다. 아래의 와우 관련 언급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6.4. 와우폐인
2011년 3월 6일 방송된 일밤 나는 가수다 예고편에서 아니나 다를까 와우를 하며 성질내고 있었는데, 위 짤방으로 이소라가 와우 폐인임이 만천하에 인증되었다. 하지만 이소라의 팬 중에 이 짤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아래에.
이소라 본인이 와우 폐인임을 인증한 건 먼 옛날 MBC라디오 '오후의 발견' DJ 시절부터이니 이미 7집 나오기 수년 전이다.[31] 급기야는 7집 앨범때 20킬로 빠진 모습으로 나타나 팬들을 경악시켰는데, 운동이나 식이요법이 아닌 밤새 게임을 하며 굶어서 뺐다고. 그 게임의 정체는 그녀의 팬이라면 다 알고 있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아마 보면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링크 보통 저렇게 게임만 하면 살 찌는데... 다만 굶을때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쉽게 동나는 자제력의 반동을 게임으로 풀 수 있긴 하다. 다이어트 하면서 격무에 시달리고 공부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 하지만 게임 한두판이 큰 스트레스가 될 순 있어도 길게 보았을 때 다른 활동에 비해 매우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며 몰입감이 커서 지속성도 크다. 실제로 게임 폐인을 유지하면서 한두 끼씩 굶으면 굳이 운동 안 해도 20키로 정도는 누구나 뺄 수 있다. 원래 히키코모리 속성이라, 두문불출한 이유가 와우가 처음은 아니고, 게임 '포트리스'에서도 만렙유저 생활을 몇 년간 한 과거가 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나우누리 공개챗방에 자주 출몰하는 걸로 유명했다. 근데 이소라라고 해도 아무도 안 믿었다고...하이텔에도 출몰한 적이 있었다...
이후 음악여행 라라라, 라이브 음악창고 등 나오는 모든 지상파 방송마다 간접 광고에 가까울 정도로 와우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고백하더니, 급기야는 2010년 7월 발매한 조규찬 9집에 이소라 자신이 작사한 노래 'WOW'를 함께 불러, 덕력의 발자취를 기록에 남김으로써 팬들을 경악시켰다. 어찌 보면 와우계의 박완규.
이렇게 말하면 코믹한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이 노래의 후렴부에서 조규찬 이소라 두 보컬의 목소리는 누가 메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바뀌는데 [32] 다르고도 같은 두 개의 목소리가, 현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너' 와 '나' 또는 가상의 나와 실제의 나의 교감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음을 나타낸다는 빠심충만한 해석[33] 도 있었으나, 조규찬의 9집 발매 인터뷰에서 그는 이 곡의 가사가 게임에서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문제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2011년 들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는데, 여기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와우저의 위엄을 보였다. 근황에 대한 유희열의 질문에 집안일 하는 걸 제외하면 하루 종일 게임하면서 지낸다고 언급했다.(정확히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근황을 아는 사람은 오직 엄마 뿐"이라고 했다. ) 게임 안에서 사회생활이 가능하니까 밖에 나갈 필요성을 못느낀다고 한다. 설상가상 방송에서는 편집되어 언급되지 않았지만 유희열이 이상형에 대해 물었을 때 '타우렌 전사 남캐'라고 답했다!
2011년 방송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의 첫장면에 벤츠 E클래스를 타고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에서 몇안되는 '성공한 와우저'라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 출연 직후 와갤러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 와갤에서는 한때 이소라의 와우 업적점수가 8900점대를 상회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때 와갤 여신자리에 등극하기도 하였지만, 방송에 나온 한 컷만으로 캐릭명과 업적 점수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와갤에서 이소라라는 말이 나온 '업적점수 8900대 사제' 캐릭터는 와갤길드에 소속된 와갤러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기사화되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결국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자신의 점수가 6500점이라고 밝혔다. 물론 3월 20일 방송이 나간 이후로 와갤에선 다시 원래 반응으로 돌아감을 넘어서 싸늘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와우상의 여자들의 안 좋은 이미지 그대로라고. 그리고 4월 3일 와갤 눈팅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본격 와갤러 인증. 그리고 와갤의 분위기는 다시 역전되었다. 덕분에 다른 갤러리에서는 "이소라가 와갤러가 되더니 개드립만 배우고 왔구나", "왜 TV에서 그렇게 눈물 흘리면서 깽판을 쳤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는 와갤러였기 때문." 라는 얘기도 나왔다.
최근의 인기 덕분에 KBS의 케이블 채널 KBS joy에서 이소라의 두 번째 프로포즈를 진행하게 되었다. (2011년 4월 26일 ~ 2012년 8월 7일) 그런데 첫방송부터 # 이런게 나와서.... # 이런 것도...
2013년 이후로는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조차 자주 접하지 않는다고 직접 발언했으나, 2014년 즈음 다시 와우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현재는 콘서트에서 게임을 잘 안 한다고 밝혔다.
2019년 12월, 단독 콘서트에서 와우 클래식에 빠졌다고 밝혔다.
평소 시간을 모르고 지내는데, 게임을 하면 화면 구석에 시간이 나와서 게임 덕분에 현실 세계(?)의 시간을 인지한다고 했다.
7. 그 외 이야깃거리
1998년 '무라카미류는 도대체'라는, 23명의 국내 대중문화인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논한 책이 있다. 이 책에 대해 참여한 바 있으며, 그 외에도 신해철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가수 이적과 동거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소라의 곡 중에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제발' 때문에 이와 연관지어 오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적과 '''모델 이소라'''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와전된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종종 실연을 당할 때마다 앨범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 이소라 본인도 직접 언급한 바가 있다. 즉, 몇몇 앨범은 '''사실'''이라는 소리. 한때 본인이 직접 작사한 노래를 부르다가 방송에서 울어버린 적도 있는데 본인이 진행하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제발"이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감정에 복받쳐서 울기를 반복하다가 3번째에서야 겨우 불렀다. 참고로 그 때 현장에서 이소라 콘서트 표를 판매 중이었는데, 관중들이 몽땅 쓸어갔다.#
2004년 음악도시 시절 고정 게스트였던 박효신을 매우 귀여워 했다. 박효신의 TV 데뷔 무대로 알려진 2000년 1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도 나오기 전부터 같이 듀엣곡 "It's Gonna Be Rolling"을 녹음했을 정도로[34] 오래 보고 합동 콘서트도 여러 번 했던 사이라 막내 동생처럼 놀리면서 잘 챙겨줬다.
박효신과는 2001, 2003 시월에 눈 내리는 마을, 2004 이소라&박효신의 'Sentimental City' 콘서트를 함께 하였고 2012 박효신의 'War Is Over' 콘서트에는 게스트로 와서 "바람이 분다"를 부르고 갔다.
2003년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이소라가 "제발" 1절을 부르고 박효신이 2절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영상) 대기하면서 1절을 듣고 있던 박효신이 이소라의 노래에 감동을 받아서 2절을 울면서 불렀었다.
8. 관련 문서
[1] 진행하던 라디오 ‘오후의 발견’에서 밝힌 바로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어머니가 꾸신 태몽이 동굴에 소라가 가득 쌓여있는 꿈이었다고.[2] 성장기 연고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3] 데뷔 시기도 비슷해 둘을 헷갈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저런 계기를 통해 모델 이소라와는 서로 진행하는 프로에 게스트로 부르는 등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4] 사실 적어놓은 곡들도 지극히 일부이다. 믿음, 이제 그만, track 시리즈와, 나는 가수다에서 불렀던 모든 곡들이 두루 사랑을 받았다. 그야말로 많은 곡을 히트곡으로 가지고 있는 가수. 전율이 일게 하는 가창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전하는 가수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이다.[5] 작사가로서 이소라에 대한 단평 # [6] 네이버뮤직 올해의 앨범. 한국 대중음악상 '올해의 팝 앨범', 트랙8 '올해의 팝 넘버' 수상[7] 사실 4월 8일 발매예정이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사흘 뒤로 연기했고 대신 4월 4일에 선공개곡 '운 듯'을 공개했다.[8] '기다리던 소라 누나의 앨범이 드디어 11일 발매 되는군요. 2년 전 W.I.O 무대 위에서 누나가 해줬던 말, 그때의 그 말들과 누나의 모습은 아직도 제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소라 누나가 남겨줄 또 한 번의 추억들, 그 추억을 담기 위해 저와 함께 많은 팬 분들이 기다리며 설레는 것 같습니다. 작업실에서 이리저리 끄적이다 공개 되었던 ‘난 별’조금 불러봤는데, 역시나 소라 누나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 같네요' 박효신 버전 [9] 이는 선공개곡 '운 듯'이 잔잔한 곡이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10] 고찬용은 '낯선 사람들' 시절 팀의 리더, 김현철은 자신을 솔로로 데뷔시킨 프로듀서, 조규찬은 현재까지의 보컬 디렉터로, 이 3인은 이소라가 지금의 목소리를 갖게 된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11] 한편 조규찬은 이소라같이 노래 잘하는 가수에게 보컬 디렉팅이 왜 필요하겠냐고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존경의 의미로.[12] 그런데 8집에는 이러한 Thanks to 란에 저 셋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13] 나는가수다 시즌1때 박정현의 '나의 하루'란 곡을 재즈 스타일로 편곡해 불렀을 때, '이 노래가 박정현 노래였나?' 싶을 정도로 원곡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고급진 재즈로 바뀌었다.[14] 물론 그렇다고 이소라가 재즈를 멀리한다고 유추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다양한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듣는 가수로 알려져있다. [15] 그 당시 꾸민 무대는 Skidrow의 'Youth Gone Wild'. 이 때 PD는 다른 곡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김경호가 이 곡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무대에 섰으며 이 무대 이후는 그는 대박을 치게 됐다.[16] 그때 박완규가 화나서 '''"에이 시 , 어디서 반말이야!"'''라고 화냈었고 그 당시 부활의 기획사 대표가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얘가 아직 가요계 이것도 모르고, 우리 태원이도 지금 얘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생략)'''"'''라고 거의 무릎 꿇듯이 사죄를 했다.[17] 초창기 계획은 이소라는 하차해도 MC는 계속 하는 거였다.[18] 원래는 '가을에 편지를 쓰겠어요'나 '아침이슬'을 부르려 했으나 그녀가 당시 호주에 맞는 노래가 이거라 판단해 변경했다고. 이는 순위에 연연하는 누구누구들과는 다르게 공연을 하고 자신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이소라의 마인드가 보이는 부분이다.[19] 이 무대에 대한 극찬 하나 http://h21.hani.co.kr/arti/COLUMN/130/30769.html[20] 나가수 카페에 의하면 6위라는 소리가 있다.[21] 무서운 건 그때 이소라의 반응이 "응! 그렇게 불렀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다. 자기 목소리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의도한 느낌 그대로 전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22] 다만 '현악기 같은 목소리'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무슨 신선같은 경지는 아니다. 레가토(음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연주하는 것)와 포르타멘토(한 음높이에서 다른 음높이로 연속적으로 옮아가는 것)를 많이 사용하는 보컬 테크닉을 '현악기같다'고 표현한다.[23] 이소라와 컬투의 인연은 꽤 오래된 편으로, 과거 컬트트리플 시절부터 이소라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고정 게스트로 종종 출연했었고, 이소라의 프로포즈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그리고 김태균은 이소라 3집 '우리 다시'의 공동 작사가로 참여 했기도 했었고 컬트트리플이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부른 '소라 소라 소라'라는 헌정곡(?)도 있다. 음원 사이트에서 찾아 들어보자 빵 터진다(...)[24] 훗날 유희열의 스케치북 500회 특집 게스트로 초대되었을 때, 비긴어게인 하차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얘기를 했다. 유희열이 근황을 묻자 키우던 개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새벽까지 붙어 있으면서 간호해야 한다고 했는데,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니 혼자서 간호를 하게 할 수는 없고 스케줄을 지속적으로 잡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해서 하차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5] 세종문화회관 대중가수 최초 공연도 조용필이다. 당시 패티김은 이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이선희, 이미자 등이 다녀갔으며, 최근(2015년)에는 보아도 했다.[26] 어느정도였냐면, 기사 참조. 천하의 그들도 머리 풀고 수수하게 입어야 했다.[27] 관련된 가수들 명단을 보면 기절초풍할 일. 개중에는 이은미, 이문세는 물론 무려 조영남, 산울림까지도 있었다.[28] 그러나 근래의 행태들을 보면, 저 당시처럼은 아니더라도 뮤지션들 대우가 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되고 있다.[29] 더 거슬러가면 다름아닌 포크송의 대모를 빼놓을 수 없다.[30] 이소라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가수라고 한다. 듀엣을 하게 되어 상당히 기뻤다고.[31] 와우를 하는 게스트와 전문가급 입배틀을 나눴다는 기록이 있다.[32] 한 소절 지나고 다음소절에서 바뀌는 게 아니라 한 소절 중간에 바뀌는 것이 서커스 묘기 수준.[33] 한 몸에 두 면의'아수라백작'을 연상해 보면 빠를지도. 이 곡에서 이소라는 보컬을 최대한 중성적으로, 조규찬과 비슷한 질감으로 내는데, 이소라 1집 이래의 보컬 스승이 조규찬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노래는 한 목소리를 가진 두 성대에서 나온 노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34] 이 곡을 만든 김현철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박효신의 해줄 수 없는 일을 듣고 박효신을 수소문하여 둘이 듀엣을 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