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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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발라드 가수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발라드의 황제.'''
2. 상세
'''1990년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이며''', 음악 PD이기도 하다. 대중적인 인기로 보나 기록적인 면으로 보나 음악적인 예술성으로 보나 정점에 위치한 가수이다. [16] 별명은 '''발라드의 황제'''.[17] 노래와 작곡을 모두 잘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18] 이후로도 수많은 후배 발라드 가수들이 나타나서 황태자, 황제 등을 자칭하지만 발라드의 황제=신승훈이라는 공식은 변함이 없다.'''"우리가 싱어송라이터를 논할 때 가장 위에 있어야 될 존재가 사실은 신승훈이며, 발라드 영역에서 시장과 예술성을 다 잡은 최고의 가수이다."''' – 평론가 임진모
'''1990년대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이며''' '''1990년대 1위를 가장 많이 한 작곡가이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국민가수 호칭을 받은 가수'''[19][20] 다.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는 14주 연속 1위'''[21] 와 미국에서도 보기 힘든 '''7연속 밀리언셀러'''와 함께 '''1집부터 10집까지 골든디스크를 10회(대상은 2회) 연속 수상한 유일한 가수'''[22] 며, '''한국 가요음반 역사상 최대의 기록인 총 누적판매량 1700만장''' 과 '''아시아 최단기간 음반판매량 1000만장 돌파'''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동시대의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와 함께 가왕 조용필의 위상과 업적에 바로 다음가는 몇 안되는 가수들 중 한 명이며[23]
'''또한, 모든 앨범의 타이틀곡을 직접 작사,작곡하였다.'''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과는 달리 단순히 발라드에만 국한되지 않은 채 R&B(3집- 소녀에게), 맘보(5집- 내 방식대로의 사랑), 하우스, 잭스윙, 디스코(7집- 엄마야), 모던락(Radio Wave- 라디오를 켜봐요), 브리티시 락(Great Wave- Sorry), 월드뮤직(7집-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국악(9집- 애심가), 뉴에이지(8집- 애이불비) 등 안 해본 장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장르를 선보였다. 물론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답게 발라드라는 특정 장르 내에서도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을 주어 작곡을 했을 정도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지만 묘하게 2010년대를 살아가는 현 세대들은 그의 업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24] 이는 신승훈이 이승환, 이승철에 비해 대외적인 활동이 훨씬 적었던 탓도 있다.[25] 또한 신승훈의 경우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배경음악에도 노래가 세 시리즈 동안 단 한 곡 나오고 리메이크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젊은 세대들에게 재조명 받을 기회도 훨씬 적었다.
2004년 이후에 일본에 진출했으며 일본어 명칭은 シン・スンフン. 2018년 기준 한국 데뷔 28주년이 되었으며, 일본 데뷔 15주년 되는 해다.[26] 데뷔 이래 처음으로 케이팝스타2 라쿤보이즈 멤버로 나와 이름을 알렸던 맥케이에게 곡을 주고, 프로듀싱하여 데뷔시켰다. 후에 그룹으로 다시 나올 예정.[27]
또한 제프 버넷에게도 곡을 주어 제프 버넷의 다음 앨범에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제작자로서의 일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2015년 하반기를 목표로 정규앨범으로는 9년만에 11집을 낼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참고로 이렇게 기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2006년 10집을 마지막으로 미니앨범 시리즈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3. 데뷔 이전 생애
3.1. 유년기 (1966 ~ 1986)
신승훈은 프로필 상 1968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966년 생이다. 충청남도 대전시 신안동에서 2남 3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 대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28] 노래 실력이 좋았던 부모님을 닮아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으며 지금보다도 더 미성인 목소리로 마이클 잭슨의 Ben을 부르고 다녔다고. 가족들이 노래를 전부 잘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가족끼리 함께 노래방을 가면 남동생[29] 이 워낙 트로트를 잘 불러 정작 가수인 본인은 찬밥신세가 된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가족들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편. 또한 초등학생 때에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모니카를 선물받아 곧잘 연주했다고 할 정도로 악기와 무척 친했다.[30]
그랬던 그는 중학생 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아버지에게 기타를 선물 받게 된 것. 사실 이 사연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아버지, 동생과 함께 스케이트장에 가려다가 얼음이 녹아가지고 가지 못해 속상해하던 신승훈을 달래주기 위해 아버지가 기타를 선물해준 일이 결국 신승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된 셈. 후에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처음 기타를 잡았던 순간, 그것이 '''나의 인생을 지켜줄 생명체'''라는 걸 느꼈다고.[31] 훗날 가수 데뷔를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당신이 기타까지 선물해주고 나선 이제 와서 뭘 반대하느냐'라며 가수가 꿈이었던 신승훈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후 중학생 때 친구들과 Poet라는 밴드를 만들어 학교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곧잘 반 대표로 노래를 부르며 빌보드 순위를 다 외우고 다닐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3.2. 청년기 (1986 ~ 1990)
1985년 대전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재수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경영학과를 86학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32] 하지만 음악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신승훈은 충남대학교 통기타창작곡 동아리인 ‘팝스우리’[33] 에서 활동을 함과 함께 통기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34]
훗날 인터뷰에 의하면 카페뿐만 아니라 음악 감상실, 호프집, 피자집, 미용실, 수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35] , 이 때의 레파토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후 꾸준히 인기가 상승했는데 당시 대전에서 신승훈이란 이름을 다 알 정도였다고.[36] 그런 유명세 덕분에 당시 성현기가 진행하는 대전 MBC 별밤의 보조 MC와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이때 즈음에 데뷔곡인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작곡했다고 한다.[37] 후에 대전에서 열린 이문세[38] 콘서트와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코러스에 참여하기도 했다.[39]
그러던 신승훈은 본격적으로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앨범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수가 되겠다며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고, 결국 3개월동안 라면만 먹고 버티다가 장이 꼬여 다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대전에서 꾸준히 통기타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울에 있는 기획사 6군데에 데모테이프를 돌렸다가[40] 작사가 신재각에게 눈에 띄어 김창환을 소개받았고, 본격적으로 가수 데뷔를 준비하게 되었다.
4. 데뷔와 활동
4.1. 데뷔 (1990)
1990년 11월 1일[41] 에 오랜 무명생활을 청산하고 신승훈이라는 이름이 박힌 앨범을 내고 데뷔했는데, 방송 출연은 다음해인 3월에야 가능했다. 원래 TV 첫 출연으로 KBS '연예가중계'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촬영 당일 결막염에 걸린 여파로 이튿날 MBC '퀴즈 아카데미' 제주도 편까지 몽땅 취소가 되었고 MBC의 '여러분의 인기가요'에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처음으로 20위권에 진입해서 방송에 출연하려고 했으나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뉴스 특보를 하느라 출연하지 못했다. 그 다음주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과 함께 1위 후보에 올랐지만 무대 리허설까지 마쳤는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제주도 방문''' 속보가 뜨는 바람에 또 출연이 불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데뷔 음반부터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KBS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과 함께 골든디스크상도 신인상이 아닌 본상을 바로 수상했으며 이는 향후 발라드의 황제로서, 국민가수로서 발돋움하게 된 시작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공이 없었다면 당시 기획사인 라인기획, 즉 김창환에게도 후에 데뷔하게 된 김건모, 노이즈, 클론 등등은 없었을 정도로 신인 가수 신승훈의 비중은 소속사 내에서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입지는 단단해졌다. 관련 기사
4.2. 1~2집 활동 (1990 ~ 1992)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가요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로서, 신승훈은 그 변화의 중심에서 시작부터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1990년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해 데뷔 앨범으로 14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1991년엔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발표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때 SBS 인기가요에서 14주 연속 1위를 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그해 최다 1위를 차지한 노래가 됐다.''' 이 해 골든디스크 대상과 KBS 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4.3. 3~6집 활동 (1993 ~ 1998)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와 함께 가요계 판도가 급격하게 바뀌어 발라드 가수들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왔었지만[42] , 그는 1993년 3집 '널 사랑하니까'로 발라드 황제의 건재함을 보여주며 2년 연속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43] . 이후 4집의 '그 후로 오랫동안'이 KBS 가요 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수상하고 '오랜 이별 뒤에'가 인기를 얻으며 성공했으며, 치열했던 1996년 가요계에서 5집의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44][45][46] 을 발표하여 역대 2위에 해당하는 247만장의 음반을 판매하며 굳건한 인기를 증명했다. 이후에도 6집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발표해 활동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발라드 가수들이 큰 타격을 입은 것에 비해 신승훈은 3집에서 6집까지의 앨범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는 등 발라드 황제의 자리를 지키며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에 그는 라인음향을 떠나게 되었다. 1집~6집까지 상당수의 노래를 본인이 작사, 작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곡 그대로 부를 수도 없을뿐더러, 1집~6집의 수록된 곡들을 신승훈의 동의 없이 신승훈 이름으로 몇 차례 앨범을 내기도 했다. 주황색 바탕의 Endless Ballad, 파란색 바탕의 The Best, 검은색 바탕의(자세히 보면 신승훈 3집때 모습이 보인다) 불후의 명작이 그 대표적인 예.
4.4. 7집~10집 (2000 ~ 2006)
신승훈은 라인음향을 떠나 무소속인 상태로 2000년 7집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이 타이틀곡인 Desire to fly high를 발표하며 7연속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였고, 2002년 도로시뮤직(현 도로시컴퍼니)를 창업하고 8집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이 타이틀곡인 The Shin Seung Hun으로는 84만장을 기록하며 그 해 단일앨범으로 최다판매량을 달성하였다. 이후 2004년 9집 '그런 날이 오겠죠'을 타이틀로 한 Ninth Reply 을 발표했으며 후에 일본에 진출했다. 2006년에는 10집 'Dream of my life' 이 타이틀인 The Romanticist을 발매했으며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콘서트와 정규 앨범, 싱글, 미니 앨범을 발표하였다.
4.5. 새로운 장르의 음악 시도, 그리고 11집 (2008 ~ 현재)
그리고 데뷔 18주년이 되는 해인 2008년엔 '3 Waves of Unexpected Twist'[47] 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Radio Wave'라는 미니 앨범을 처음 발매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창법을 바꾸기 시작했다.'''[48] 사실 정규 10집이 발매되던 2006년부터 목소리에 대한 고민은 꾸준히 해왔다. 10집 정규 앨범을 발매하면서 '내 목소리가 나의 최대의 적', '내 목소리가 이렇게 싫어질 줄은 몰랐다' 라며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앨범을 내지 말까'[49]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인 목소리만 들어가면 '신승훈화(化) '되는 것에 대해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 이는 2008년 MBC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진지하게 ''''내 목소리가 싫어요''''라고 고민을 이야기한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방송에서 '1000만장 넘게 팔린 가수 같은 경우 대중들이 목소리에 대해 익숙해지기 때문'인 것도 있고, 콜라 이론을 설명하면서 “내 목소리는 콜라 같다. 항상 콜라를 찾지만 마시면서 '야, 콜라 정말 맛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제 음악과 목소리가 그렇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실 창법이라는 게 금방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동안 과도기를 거쳤으며 본인도 엠넷 봄여름가을겨울의 숲에서 '목소리가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본인도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는 듯. 바뀐 창법은 예전보다 목소리가 더 여성스러워지고 양희은 같아졌다.
이후에 Love O'Clock[50] , Great Wave[51] 미니앨범을 냈다. 참고로 Love O'Clock를 준비하던 당시, 일렉트로닉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멜로디 중심의 전개인 본인의 스타일과 리듬을 쪼개는 방식인 일렉과의 차이를 느껴 접었고, 후에도 여러 번 장르가 바뀔 정도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2015년 10월과 11월에 9년만의 정규앨범인 11집을 발매하였다. 관련 기사
앨범 뿐만 아니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했는데, 2010년 위대한 탄생 1기에 멘토로 출연해 따뜻하고 인간미 풍기는 멘토로 김태원, 이은미 등 타 심사위원들과 함께 프로의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구체적으로 '이게 이렇게 잘못됐다'라는 걸 지적하는 능력은 가장 뛰어난 편으로, 단점의 구체적인 지적과 개선법의 제시는 이은미도 훌륭하지만 신승훈은 이해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예를 들어 실력과 재능은 뛰어나지만 R&B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R&B를 고집하는 참가자가 나왔을 때 이은미는 이를 두고 '블루지하지 않다' 라며 지적했고, 신승훈은 이를 '기타로 연주하면 재미없지만 색소폰으로 불면 참 어울리는 곡' 이라며 실제로 소리를 흉내내며 쉽게 이해시켰다. 또 모창을 지적받은 참가자에게 '처음에는 비욘세를 따라부르고 나중에는 리아나를 따라부른다' 라고 지적하는 식이다.
2012년 2월부터 엠넷에서 방영하는 보이스 오브 코리아에 출연했다. 그리고 그가 코치로서 가르친 '''손승연'''이 우승했다. 보이스 코리아 시즌2에서는 우승자를 배출해내지 못했지만 팬들은 이 영상을 건졌다. 사실 신승훈이 음악프로그램에 나오면 그 회는 음향도 다른 때와는 다르다고 할 정도[52] 로 보코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3기가 잠정연기되면서 현재로선 깜깜 무소식 상태.[53]
2013년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했으며, 이후 카카오 뮤직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54] 최근엔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든 듯. 또한 2015년엔 제작자로서 맥케이를 데뷔시켰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에 박찬호와 함께 출연했다.
2017년 12월에는 'LIMITED EDITION'이란 이름으로 데뷔 최초로 디지털 싱글앨범인 'Polaroid'를 발매했다. 기존의 신승훈 음악과 달리 삶을 얘기하고 위로를 주는 노래로 본인의 말과 인터뷰를 통해 추측컨대 앞으로 이런 류의 음악을 많이 만들고 부를 것으로 예상된다.
5. 싱어송라이터와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의 족쇄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 때문에 신승훈은 뭘 해도 발라드 같고, 발라드만 한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55] , 이는 신승훈의 앨범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승훈의 앨범에는 정말 다양한 장르가 담겨져 있다.
3집 때부터 본격적으로 콘서트에 집중을 한 신승훈은, 콘서트를 위해서 앨범을 백화점식 구성을 취하곤 했는데[56] 살펴보면 R&B, Jazz, 모던 락, 댄스, 맘보, 보사노바, 국악, 제3세계, Jazz Pop, 뉴잭스윙, 디스코, 펑키, 탱고, 하우스 등등 정말 다양한 장르의 곡을 내놓는다. 김형석도 이를 인정하고 언급할 정도다. 오죽하면 일본에 진출했을 당시, 왜 별명이 발라드의 황제냐면서 기자들이 물어볼 정도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승훈이 지금까지 스스로 자립하고 음악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 때문. 5집부터는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 모든 것을 해왔으며 그 전의 앨범인 1집~4집 같은 경우에도 타이틀곡은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을 했다. 그 외에도 그의 앨범에는 자작곡이 많이 들어가 있다. 7집부터 지금까지 낸 앨범은 신승훈의 손에서 다 탄생했다.
요즘에는 그가 싱어송라이터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지만, 예전엔 남의 곡 받아서 활동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57] 이 꽤 많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맥케이의 첫 번째 싱글인 'Angel 2 me'와 슈퍼스타K7 결승전 때 살아남은 두 도전자에게 주었던 곡들을 봤을 때 작곡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본인 스타일의 노래만 작곡을 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스타일에도 맞은 곡을 잘 주려고 하는 듯. 이러한 프로듀서로의 능력은 Mnet에서 방영한 더 콜에서도 볼 수 있다.
6. 신승훈 노래의 특징
신승훈의 가사를 보면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58]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승훈의 음악적 모티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데뷔곡인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가사에서는 '나는 울고 싶지 않아 다시 웃고 싶어졌지', '소녀에게'에서는 '슬픔이 내게 필요하다면 눈물을 미리 준비해둘게 그것이 니가 바랬던 거라면 슬픔마저 참아야 한다면 받아들일게 너를 위해서 나 혼자 슬픔을 감추며', '애이불비(哀而不悲)'[59][60] 에서는 '그대 나를 떠나려는 이유를 굳이 알려하지 않으렵니다 그저 난 그대 가시는 그 길에 그대의 행복이 있길 바랄 뿐' 'I Do'에서는 'I don't wanna be 눈물로 널 잡고 싶진 않아 I don't wanna be 너의 짐이 되고 싶진 않아' 등등이 있는데, 전체적인 가사가 ‘애이불비’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한 신승훈의 노래를 듣다 다 보면 소위 '라인'이라는 것이 있어서 비슷한 장르나 분위기끼리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노래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보는 재미도 있다. 즉, 앨범을 발매할수록 진화하는 셈이다.
특히 장르나 분위기가 비슷해서 일부 사람들은 다른 노래를 비슷한 노래로 안다든가 같은 노래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장르로 몇 개만 나누어보자면
- 가잖아 - 이런 나를[61]
- 소녀에게 - 너를 보내며 - 널 위한 이별 - 그랬으면 좋겠어[62]
- 로미오와 줄리엣 - 어긋난 오해 - 실수 - 엄마야 - 올거야 - 그게 바로 사랑이죠 - 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63]
- 나처럼 - 오랜 이별 뒤에 - 그대 떠나갈 만큼 - 못된 기다림[53]
- Game of R.O.K - 비상 - 내 멋대로 해라[64]
- 애이불비((哀而不悲) - 애이불비2((哀而不悲2) - 송연비가(送緣悲歌)[65]
- 운명 - 고개 숙인 너에게 -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 그런 날이 오겠죠 -
- 소녀에게 - Lady[66] 등등이 있다.
6.1. 히트곡 모음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 만한 히트곡만 기록했다.
- 미소 속에 비친 그대[68]
- 보이지 않는 사랑[69]
- 우연히
- 날 울리지 마
- 가을빛 추억
- 처음 그 느낌처럼[70]
- 로미오&줄리엣
- 널 사랑하니까
- 그 후로 오랫동안
- 오랜 이별 뒤에
-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 내 방식대로의 사랑
- 너를 보내며
- I Believe[71]
-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 가잖아
- 지킬 수 없는 약속
- 고개숙인 너에게
- 엄마야
-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7. 디스코그래피
7.1. 정규/비정규 앨범
'''볼드체'''는 각 앨범의 '''타이틀곡'''
정규 12집은 언제 발표할거냐는 요구가 하도 빗발치니끼 정규 12집은 언제 발표한다고 약속은 못 드리겠으나 곧 발표한다며 2020년 4월 기준 현재 3곡 정도 완성되었으며 신승훈스럽지 않은 도전적인 노래를 만들 계획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2021~2022년 쯤) 발표 예정이라고 한다.
8. The 신승훈 Show
- 신승훈의 콘서트 목록과 관련해서 자세한 항목은 여기를 참조.
앞서 이야기했듯이 2004년부터 'The 신승훈 Show' 라는 브랜드 네이밍으로 관객들을 찾아가고 있으며 2013년 11월 9일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The 신승훈 Show - Great Wave라는 명칭으로 The 신승훈 Show의 시즌1을 마무리했으며, 이후에 The 신승훈 Show 시즌2로 찾아오겠다고 밝힌 바 있다.
9. 여담
- 신승훈이 처음으로 작곡한 것은 고등학생 때 '모닥불이 피던 다락방'이라는 노래다.[88] 처음엔 제목을 지어놓고 별 생각이 없었으나 만들고 나서 보니 다락방에 모닥불을 피우면 큰일인데 왜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 부모님의 속을 썩인 것이 없을 정도로 부모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충남대 경영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위에 잠깐 언급된 바 있듯이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의 '음'자도 꺼내지 못한 채 입학한 것. 입학하고 나서도 장학생으로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 대전 J뷔페에서 부모님 고희연(어느 분인지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다)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그 뷔페가 '신승훈이 부모님 고희연 한 뷔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 50이 넘어서도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있어 보인다. 비슷한 연배가 아닌 나이차 좀 많이 나는 상대를 원하는 것도 비슷한 연배랑 결혼하면 2세가 힘들어할까봐라고 한다.
- 신승훈은 가수로 정식 데뷔하기 전에 대학교에서 만나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승훈이 앞길이 불투명한 전업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그가 가수의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음을 알자 결국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신승훈은 그녀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 작곡한 곡들에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이 녹아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 또한 신승훈이 가수로 데뷔하자 '혹시 나를 다시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는 것. 그러나 신승훈은 데뷔 때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고 결국 그녀와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신승훈은 4집 활동을 마치고 휴식차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제는 그녀를 정말로 놔줘야 할 때가 됐다.'하는 마음가짐으로 5집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89] 일설에 따르면 간단한 전화 통화조차 소속사의 허락을 맡으며 써야 했다고. 게다가 그때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이러한 사연 탓에 당시 그는 다른 동료 가수들과 같이 유흥업소를 가지 않거나 다른 여자를 소개받지 않아서 연예계의 수도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신승훈이 한창 발라드 가수로 성공하고 있을 때 이 사연이 덩달아 유명해져서 방송 진행자들이 신승훈의 신곡이 나오면 항상 그녀에게 쓴 곡이냐고 묻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 신승훈이 직접 들려준 7집 비화로는, 1~6집까지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했던 사람을 생각하며 노래를 썼는데 이 시절은 사랑과 거리가 멀어진 때라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같은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 예전 한 방송에서 PC통신으로 신승훈과 팬들의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한 적이 있었는데 한 팬이 "왜 그런 슬픈 발라드 곡만 만드세요?"라고 질문하자 신승훈이 "내가 슬프니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2011년 주병진 토크콘서트에서 주병진이 "왜 요즘은 사랑노래를 안 만드세요?"라는 질문에 신승훈은 "요즘은 러브송에 적합한 감정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냥 평생 기타만을 사랑하면서 독신으로 살 것 같다." 라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 데뷔앨범이 발표된 날짜가 1990년 11월 1일이다. 평소 존경하던 유재하의 기일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면서 한 시대를 대표한 가수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난 그 날, 그 다음 시대를 대표한 가수가 데뷔하게 되었다.
- 데뷔 초,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앨범이 생긴 것도 신기한데, 그 앨범을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듣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고. 실제로 강남역에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리어카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는 너무 신기해서 넋놓고 서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본인을 전혀 못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한 여성이 근처 레코드판 가계에 들어가서 본인의 LP판을 사가지고 나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고, 너무 신기해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이상한 눈빛을 받고는 그냥 굳어버렸다고. 근데 이러한 신승훈의 모습을, 이휘재가 직접 봤다.[90]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데뷔 때부터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본인도 먼저 언급하진 않는 이유가 이런 건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라고.
- 김창환이 대전에서 유명했던 신승훈을 데뷔시켜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김창환이 신승훈을 키웠다고 하기엔 무리인 것이 '데뷔 시켜 준 것' 그게 다였다. 당시 신승훈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면서 작곡한 곡들이 1집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뿐더러 이후에도 본인 앨범의 수록곡과 히트곡 상당수를 직접 작곡하였다.[91] 게다가 나중엔 프로듀서까지 1인 5역을 했을 정도였으니 신승훈은 오로지 본인 능력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데뷔는 시켜주었으나 이후 아티스트로서 지금까지 자생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신승훈의 힘이었던 셈이다.
-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간주를 들어보면 신승훈이 발라드임에도 불구하고 스캣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 편곡을 맡았던 김명곤에게 색소폰으로 편곡을 해달라며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시범을 보인거였다. 하지만 당시 녹음된 것을 들은 김명곤은 그대로 음반에 싣는 것을 추천하여 스캣이 포함된 채 수록되었다.
- 데뷔 초, 조용필과의 일화가 유명한데 당시 KBS홀 개관 기념으로 조용필 콘서트가 열렸는데 이 때 신인가수였던 신승훈을 불러 노래를 시켰다. 당시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같이 부른 영상 또한 조용필은 당시 신인이었던 신승훈을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당시 신인시절 여의도의 한 수제비 집에서 조용필과 함께 수제비를 먹다가 조용필이 '네 라이벌은 누구니?'라고 하자 당시 활동하던 동료들인 '심신, 윤상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조용필이 ‘그래? 난 네 라이벌이 안 돼? 그럼 넌 그렇게 살아’라고 말했다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관련기사 또 한 그 자리에서 ‘꿈을 높게 가져’라고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 위에 언급한 것처럼 조용필이 아끼는 후배 중에 한 명. 3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본인 목소리와 가장 맞는 곡이라고 생각한 '비련'을 부르고 싶었으나 조용필이 '창 밖의 여자'를 부르라고 해서 불렀다고. 그리고 후배들과의 술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면 우선 신승훈한테 전화해서 후배들을 불러 모은다고 한다. 또한 MBC 위대한 탄생에서도 후배 신승훈을 보기 위해 연습실에 방문하여 깜짝 방송출연도 했을 정도다.
- 미성과 음악적인 센스가 타고난 것과 달리 노력형에 가깝다. 신승훈은 기타, 피아노 죄다 독학으로 배웠으며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워본 적이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한 인터뷰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나’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쿵후에 빠져서 부모님이 피아노 다니라고 주신 돈으로 쿵후학원 다녔을 때 당시로 돌아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 그 때 피아노를 배웠으면 작곡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 것.’ 이라고 많이 아쉬워한 적도 있었다.[92] 그래서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맘에 드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히고 더 혹독하게 대했던 것 같다’라고 답한 바 있고, 더 나아가서 20주년 기념 IZM 인터뷰에서는 ‘저 스스로가 너무 평범하게 자라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광기가 없으면 그 수많은 대중들을 울릴 수가 없거든요. 일단 무대 위에서는 그들과 기 싸움을 벌여야 하니까요.’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 프로라는 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옷을 고를 때도 마이크를 잘 잡을 수 있게끔 포즈를 다 취해보고 사며[93] , 지인들끼리 노래방에 놀러가서 노래 불러달라고 하면 다 불러준다고. 한 번은 ‘제가 직업이 가수인데 노래방까지 와서 노래를 불러야 돼요?’라고 하는 후배가 있어서 ‘가수라면 언제 어디서든 마이크를 보면 노래를 부르고 싶어해야 하고, 또 불러야 한다’고 호되게 혼냈다고. 실제로 팬미팅에서도 팬들이 불러달라고 하면 평소에 많이 부르던 노래라도 다 불러준다. 다만 팬들끼리 워낙 친하다보니 자주 부르는 노래를 요청할 때는 튕길 때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절로 기타에 손이 간다.[94]
- 위와 관련된 예로 지금까지 데뷔한 이후에 단 한 번도 CF를 찍은 적이 없다. 기록 부분에 쓰여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직접 광고가 대부분이었기도 했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게 대부분이다보니 '그리움 때문일 거야'라고 불러놓고 광고를 찍으면 그에 대한 이미지에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대중들이 자신을 보고 싶을 때 봐야지 보고 싶지 않을 때도 보게 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2008년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하자 유세윤이 "저도 앞으로 CF를 찍지 않을겁니다."라고 했다가 강호동이 "앞으로 CF 제의가 들어오면 찍으시겠습니까?"라는 말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95] 라고 신승훈이 대답하자 데꿀멍이 된 건 함정. 문제는 무릎팍도사 이후에 이 발언으로 인해 7개의 공익광고가 들어왔다는 거고, 일반 기업광고도 제의를 받았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참고 기사.
- 신승훈은 '발라드 가수는 청중들 앞에서 잘생겨 보여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어서 데뷔 직전 극단적인 체중감량을 했고 데뷔 후 부터 지금까지 몸무게가 60kg를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96] 예로 김민종이 지나가듯이 살이 찐 것 같다고 한 마디 하자, 그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독하게 운동을 해서 살이 쪽 빠진채로 나타나서 김민종이 엄청 놀랐다고 한다. 비활동기 때는 작곡에만 열중하다 보니 살이 찌는데, 활동할 때만 되면 귀신같이 살을 뺀다. 하지만 엄청나게 굶고 미련하게 운동해서 살을 급하게 뺀다고 한다. 그래서 은근 다이어트의 달인이기도 하다. '냉면'으로 다이어트를 했던 적도 있는데, 이는 팬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이야기.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앨범을 냈던 'Radio Wave'(2008)는 팬들 모두가 인정하는 신승훈의 '외모'리즈시절이다.
- 위에 상술한 이유 덕분에 덕분에 뮤직비디오에도 꽤나 공을 들이는 편이다. 신승훈 뮤직비디오 중에 유명한 것이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국내 최초로 ‘오브제 애니메이션’을 도입해 세계 애니메이션 대회에서 커머셜 부분 상을 받은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국내 최초로 첨단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해 만든[97] '그런 날이 오겠죠', 기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제작만 두 달 걸린 '라디오를 켜봐요'[98] 등등이 있다.
- 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신인들은 인기스타가 된다는 징크스가 있다. 4집 때의 김지호[99] , 5집 때의 명세빈[100] , 7집 때의 조인성, 한지민, 8집 때의 박한별과 천정명, 스페셜 앨범 때의 남상미, 10집 때의 차예련, 김효선 등이 그런 경우. 모두 신인 때 신승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으며, 이후 인지도를 얻어 연예계에 데뷔해 스타가 되곤 했다.
- 곡 작업할 때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곡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자괴감 때문에 본인도 모르게 머리로 작업실 벽을 찧는다고.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이라 잘못하다가는 크게 다칠 것 같아서 작업실 내부를 다 뜯어고쳤다고 한다.
- 평소 녹음할 때 마디를 끊어서 부르지 않고, 한 번에 한 곡을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간에 맘에 들지 않으면 중단하고 처음부터 부른다.
- 목소리 점검차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들을 일본에서 불렀다가 그 영상이 한국에 올라와 난리가 났던 적이 있다. 저음은 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 중음엔 돈 맥클린의 빈센트, 약간 고음에는 랜디 밴워머의 Just When I Need You Most, 고음엔 스타일리스틱스의 Because I Love You Girl다.[101]
- 모창에 굉장히 능하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음악감상실에서의 관심뿐만 아니라 다른 기성가수들의 목소리는 어디서 어떻게 발성이 이루어지는지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김종서, 양희은, 김동률, 이문세, 이적, 송창식, 조덕배[102] , 등등 이러한 모창 덕에 음역대가 방대하다 못해 너무나 넓다. 애초에 가수들의 발성이나 습관을 캐치하는 센스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도 한몫하는 듯. 그뿐만 아니라 덕분에 개인기도 확보하고 일석이조.
- SBS 힐링캠프에서도 나온 이야기인데, 10집에 빅밴드를 쓴 'Love Actually'라는 곡이 삽입될 예정이었다. 마스터링까지 다 끝난 상황이었는데 뒤늦게 앞에 두 마디가 비슷하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확인 끝에 비슷하다고 판단, CD를 다 폐기하고 다시 마스터링에 들어가서 빅밴드를 쓴 비용까지 포함하여 수천만원이 날아갔다고. 그 때 당시 ‘요즘 그 정도는 다 비슷해도 넘어가요’라고 이야기했던 후배는 신승훈에게 엄청 혼났다고 한다. 팬들은 10집 앨범 발매 당시 이 노래가 빠져서 어리둥절했었다. 처음에 발표된 트랙리스트엔 포함되었던 곡이 최종적으로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럴법도 하다. 어쨌든 팬들이 계속 궁금해하자 훗날 2008년 팬미팅에서 그 노래를 잠깐 들려줬는데, 비슷한 부분이 아닌 뒷부분을 들려주었다. 사실 팬들은 비슷했던 부분이 어떻길래 그런건지 궁금했던 것도 있었는데 ‘앞부분은 안 들려 드릴게요’라며 곧 죽어도 그 부분은 들려주지 않았다.
- 1990년대 3대장 중에 한 명인 김건모는 자신을 노력, 신승훈을 타고난 재능(미성은 타고나야 한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군대에서의 혹사 끝에 얻은 노력)으로 놓는다. 신승훈은 반대로 자신이 노력, 김건모는 타고난 재능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두 명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창환은 김건모를 노력, 신승훈을 재능으로 보아 김건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 애주가다. 게다가 술도 엄청 세다. 그것도 본인이 먼저 취해서 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옆에서 지켜본 맥케이 말로는 탱크 같단다. 주변 사람을 챙긴 적은 있어도 남이 챙겨 준 적도 없단다. 아버지께 술을 엄하게 배워서 그런 것 같다고. 참고로 주사도 없단다. 팔을 테이블에 괴다가 실수로 삐끗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 마신 티를 낸 거라고. 2004년 9집때 '한밤의 TV연예'에 출연해 조영구와 술을 마시며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첫 마디가 달다였다. 요즘엔 주로 와인과 사케를 즐겨 마시는 듯하다.
- 굉장한 골초로 유명했다. 그런데 현재까지 미성을 낸다는 게 함정. 다만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목소리는 많이 변했다.
- 엄청난 영화광. 팬들이 영화 DVD를 선물해주면 이미 본 경우가 허다할 정도로 영화광이다. 심지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본 신승훈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장동건이 다음 작품으로 고민하는 것을 알고 김기덕 감독과 작업해 보라고 추천, 그래서 장동건이 출연한 영화가 해안선이다. 또한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신승훈의 노래 세상[103] 코너에서 불가사리라는 영화를 추천해줬는데 이문세에게 무슨 그런 영화를 보냐고 한소리를 들었다가 그 다음주에 KBS 주말의 명화로 방송이 되질 않나 언급 후에 대여순위 1위를 달성해서 의기양양했다. 가수로 데뷔 안했으면 어떻게든 영화와 관련된 일을 했을 거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한다.
- 요리를 곧잘 한다. 싸이 부부가 초대를 받아 함께 놀러갔더니 샤브샤브를 내 놨다고. 근데 소스가 무려 11가지 인 것을 보고 싸이는 민간인 집에 소스가 11가지가 말이 되냐면서 놀랐다고 한다.[104] 또한 이문세가 신승훈집에 다짜고짜 놀러와서 손님이 왔으니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떡국 만드는 법을 전화로 배워 음식을 해줬더니 이문세가 ‘이거 사온거 아니야?’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 별명이 '냉귀'다. 풀어쓰면 냉면 귀신. 그 정도로 냉면을 좋아한다. 날씨에 따라서 먹는 냉면이 다르다고 한다. 비오면 회냉면을 먹고 기분이 안 좋으면 비빔냉면을 먹고, 평소엔 물냉면을 먹는다고. 뒤에 다이어트 부분에 나오겠지만 냉면으로 다이어트 한 적도 있다.
-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
- 심심하면 종종 한강에 찾아가서 비둘기 모이를 주고 온다고.[105] 비둘기가 살찌는데 일조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스탭들과 거리를 걷다가 비둘기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보고 쭈그려 앉아 모이를 챙겨준 사진이 올라와서 팬들 사이에선 한동안 난리였다.
- 발라드 가수들이 앨범을 내면 타이틀곡은 발라드, 후속곡은 댄스곡을 두는 일종의 활동 공식이 있는데 이를 처음 적용한 것이 신승훈이다. 그동안 이문세, 변진섭 등 발라드를 하는 가수들은 많았으나 후속곡을 댄스곡으로 내세운 경우는 없었는데 신승훈의 성공으로 조성모, 성시경 등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 음반에 Thanks to를 잘 안 쓰는 걸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낸 앨범 중에서 Thanks to가 들어간 건 1집과 5집뿐이다. Thanks to를 쓰다보면 누구는 쓰고, 누구는 빼먹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애초에 적질 않는다고. 1집에는 ‘두 번째의 사랑’과 ‘그대의 마음은’을 작사, 작곡하고 ‘그대여 안녕’을 작곡한 백병교를 언급했으며, 5집에선 자신의 앨범커버를 만드느라 시험까지 포기한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 보통 공백기 때 친해진 음악인들이 있으면 그 다음 앨범엔 참여하는 확률이 높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권태은, 보이스 코리아 음악 감독. Great Wave 발매 이전엔 라이머 트위터에 신승훈 소식이 올라오자 다음 앨범에 어떻게든 참여하겠다는 느낌이 왔다는 팬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라이머와 함께 술을 마셨던 최자, 버벌진트가 피처링을 해주었다. 후엔 데뷔이래 처음으로 버벌진트의 노래에 피처링까지 했다. 제프 버넷과도 친하다. 처음 만나던 날 본인이 아끼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지겠냐고 물어봤다가 단칼에 갖겠다고 하자 줬다고 한다. 그 후로도 꾸준히 교류하여 맥케이와의 듀엣을 성사시키기 까지 했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제프 버넷에게 곡을 줄 예정이라고 한다.
- 'I Believe'의 아시아 초 대박 흥행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저작권을 많이 받았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8집 앨범에는 분명 작곡에 신승훈, 김형석 공동작곡이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저작권협회에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김형석 단독으로 올라가 있다. 이는 'I Believe'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 신승훈은 김형석 작업실로 놀러갔는데, 김형석은 'I Believe'를 작업하고 있었고, 신승훈이 놀러온 것을 본 김형석이 신승훈을 끌고가 녹음실로 가둬둔 다음 다짜고짜 노래를 시켰다는 농담이 있지만 신승훈이 기존에 쓰인 'I Believe'의 일부분을 수정하였다. 그 말인 즉슨 일부 가수들이 'I Believe'를 부를 뻔했다라고 하는데 신승훈이 일부 작곡에 개입한 이상 그때 제의받은 'I Believe' 노래와 신승훈 노래는 엄연히 다른 노래이며, 결국 다른 노래를 부를 뻔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쨌든 신승훈이 작곡에 참여한 이상 공동작곡으로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본인이 작곡한 비중도 적고[106]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가수들에 비해서 주목을 많이 못 받고 처우가 많이 열악하다고 하여 본인이 이름을 빼고 넘겨줬다. 그 결과는 초 대박.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신승훈은 단 한 번도 농담조라도 아쉽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 'I Believe'를 녹음한 후, 후에 엽기적인 그녀가 개봉하자 직접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고 한다. 근데 영화를 보다가 자기가 만들고 부른 OST인 'I Believe'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죄다 본인을 쳐다봐서 엄청 당황했다.
- 흔한 직업병으로는 김형석과 신승훈, 그리고 지인들이 차를 타고 가는데 지인들은 아무 소리도 안 난다고 하는 반면에 김형석과 신승훈은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알아채 억지로 카센터에 끌고 갔다가 당시 카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나사 하나 풀려서 난 소리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듣고 오셨어요?”
- 센스가 있어서 그런지 문제를 잘 맞힌다. 예전 전파견문록이나 야심만만, 쟁반노래방, 상상플러스 등 무언가를 맞히러 나가는 예능에서는 정말 잘 맞힌다. 전파견문록에서는 항상 이겼으며, 야심만만에서는 사랑과 이별노래 부르기가 특기인지라 주제에 맞춰 답을 딱딱 집어내는 신공을 보여줬다.[107] 쟁반노래방에서는 마지막까지 시도 끝에 성공했으나 가사 유추를 꽤나 잘 해냈고, 상상플러스에서도 짜깁기에 대한 어원까지 맞혀버릴 정도로 문제를 잘 풀었다. 많은 방송인들이 재미를 위해 일부러 각종 문제의 답을 모르는척하는 것이 흔하다고 해서, 마음만 먹으면 문제를 잘 맞히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어렵거나 생소한 문제들은 시청자들도 각잡고 맞히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게 사실이다.
-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MBC 게릴라 콘서트에서 목표인원 10000명보다 2,837명을 넘기면서 성공했다. 보통은 1시간 동안 자유홍보를 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에게는 예외 사항을 두어 30분 동안은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차 안에서 단순히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신승훈이 느낌으로만 차를 세워 한 곳당 10분씩 총 3번을 홍보한 다음 나머지 30분은 자유홍보 시간이 주어졌다.[108] 데뷔 이래 단 두 번 밖에 울지 않았던 사람 아니라고 할까봐 게릴라 콘서트 참가자중 유일하게 울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무대 위에서 밝힌 바가 있다.
- 8집 활동할 당시, 박경림, 박수홍에 의해 치킨집 아저씨가 되었다. 당시 박경림, 박수홍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신승훈과 몰래 전화통화가 이루어져서 생긴 일. 처음에 자기 소개하기를 여의도 근처 박경림, 박수홍이 평소에 시켜먹는 치킨집 사장이라고 소개한 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를 한 번 해보겠다고 해서 시켰더니 본인 노래를 불렀다. 그때 당시 박수홍, 박경림의 반응은 당연히 ‘노래를 참 잘 부르신다’면서 칭찬일색이었다. 후에 본인의 정체를 밝히고나서 박수홍, 박경림이 ‘지금 어디세요?’라고 물어보자, ‘지금 그곳은 몇 시죠?’라고 다시 되묻고는 박수홍, 박경림이 순순히 현재 시각을 이야기해주자 ‘여기도 같은 시간이에요’라고 이야기해서 다들 벙찌게 만들었다.
- 그의 인생에서 최강 병크이자 흑역사는 단연코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연제협) 편에 선 사건. 해당 문서 참조. 이 사건에서 그는 거의 최고령급으로 사실상 주동자급이였으며 후배 연예인들을 이 사건에 가담시킨 의혹을 받았었다.
- 2014년 제작자로도 활동할 마음이 있는지 걸그룹을 데뷔시킨다고 한다. 기사 2015년 2월 맥케이를 선공개 형식으로 데뷔시키고, 훗날 맥케이가 포함되어 완전체로 데뷔시킨다고. 2018년까지 매년 한 팀씩 ‘Neo-Artist’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데뷔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 2017년 말에도 로시라는 솔로가수를 론칭하기도 했다.
- 신승훈이 남에게 처음으로 프로듀싱해준 건 맥케이가 아니다.[109] 2006년에 이미 류자량(劉嘉亮)이라는 중국 가수에게 처음 프로듀싱을 해줬다. 당시 류자량의 사장이 신승훈의 음악을 듣고 감동받아서 류자량의 2집 수록곡 프로듀싱 및 노래 참여를 요청했다고 했다고. 류자량은 본인 앨범에 신승훈 3집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5집의 '운명'을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이중 '로미오와 줄리엣'은 중국어 솔로로, '운명'은 신승훈과 듀엣으로 각각 한 소절씩 한국어와 중국어로 노래했으며, 이에 신승훈은 운명을 재편곡해줬다고 한다. 참고영상
- 2002년에 발표한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곡 중에 하나인 'Christmas Miracle'은 신승훈이 발매한 노래 중에 겨울 느낌 물씬 나는 노래이다.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햇빛이 짱짱했던 한 여름에 안면도에서 만들어졌는데. 기획사 직원들과 함께 MT를 가서 해수욕장 가서 놀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혼자 녹음기 들고 이 노래의 후렴구의 멜로디가 떠올라 녹음기에 녹음하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직원들은 단체로 신승훈을 들쳐업고 해수욕장에 빠뜨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속사 직원들은 단체로 각잡고 녹음기 살려내려고 드라이기를 포함해서 온갖 기계를 사용해 녹음기를 말리며 안간힘으로 겨우 살려냈다고 한다.
- 2006년에 미국의 기타 전문 제조회사 Fender(펜더)로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 받았다.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others/newsview?newsid=20061012131013076 신승훈, 펜더 기타 세계 7번째로 기증받아 펜더 기타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주가와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에릭 존슨, 잉베이 맘스틴, 스티브 레이본, 일본그룹 튜브의 기타리스트 하루하타 등 총 6명이 기증받은 바 있으며 신승훈은 세계에서 7번째로 펜더 기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승훈의 이니셜이 새겨진 이 기타는 세계 유일의 단 한 대밖에 없으며, 연주자가 아닌 가수에게 기타가 증정되는 것은 최초다. 또한 앞서 기타를 기증받은 6명에겐 일렉트로닉 기타가 기증됐으나, 최초로 신승훈이 어쿠스틱 기타를 기증받게 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록의 대부 신중현과 함께 유이하다.
- 하지만 위에 언급한 펜더는 요즘에 잘 쓰지 않고 덱스터 기타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9집 때까지 푸른색의 기타를 데뷔 이래 줄곧 사용해 왔는데, 2집 ‘보이지 않은 사랑’으로 활동했을 당시 미국에서 사온 기타였다. 주로 덱스터 기타를 사용하다가도 간혹가다 푸른색 기타를 들고 나올 때가 있긴 하지만 오래 쓰여서 그런지 고이 모셔둘 때가 있고, 실제로도 고장이 나서 미국에서 겨우 고쳐서 돌아온 터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고 한다.
- 2010년 데뷔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이 아카이브 형식으로 헌정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제목은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그 후로 20년동안' . 이 때 전시회를 준비하던 팬들이 예전 자료를 보며 기함을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터뷰 내용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예전이나 지금이나 음악과 관련된 철학만큼은 확고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팬클럽 이름은 후니패밀리. 줄여서 후피라고 부른다. 과거 히어로라는 공식 팬클럽이 있었는데, 이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팬클럽이 공식팬클럽이 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또한 나우누리, 천리안 등등의 PC통신을 바탕으로 팬클럽등이 있었으나 2004년도에 신승훈의 모든 팬들을 일컫는 후니패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후에 2010년에는 모든 팬클럽이 후니패밀리로 흡수되었다. 참고로 일본 팬클럽 이름은 Symphony에서 유래된 Shin-phony이다.
- 흰색 풍선을 H.O.T. 보다도 먼저 사용한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 히어로였을 때 흰색 풍선을 사용했으며, 다만 H.O.T.가 흰색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훗날 로고를 포함된 흰색 풍선을 사용하였다. 후니패밀리로 바뀐 지금은 파란색 야광봉을 사용하는데, 2004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야광봉은 영어로 후니패밀리라고 쓰여있다.
- 콘서트를 열 때 깜짝 이벤트성 무대나 특별 영상을 선보이곤 한다. 2002년엔 싸이의 새, 2004년엔 당시 인기있었던 리마리오 춤을 준비해서 추기도 했었고, 2008년에는 당시 인기드라마였던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고 참고해 관객들을 4구역으로 나뉘어 화음을 넣을 수 있게 가르쳐주더니 지휘자로 변신해서 캐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2009년 일본 콘서트에서는 평소에 인상깊게 읽었던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본인의 음악 철학과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카가 트로트에 맞춰서 춤추는 귀여운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으며, 2010년에는 영상 교차편집을 통해서 나가수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는 듯한 패러디를 했다. 또한 2012년에는 콘서트 자체가 일탈이었고 2013년에는 컴백하고 나서 박경림의 두시의 데이트에 출연해서는 대뜸 '이 스케줄 끝나고 2:8 머리 하러 가야 돼요'라고 해서 팬덤에선 "뭥미?" 싶었으나... 때는 11월 9일, 콘서트 1부가 끝나고 2부로 넘어가는 순간 영상이 재생이 되는데... 신승훈 vs 신기자가 만나 인터뷰 하는 영상이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별 대단한게 없어 보이지만 신기자가 2:8 머리에 '점'을 찍고 나타난 것이었다. 게다가 귀요미송까지 불렀다. 그때 팬들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엄청난 폭소가 이어졌다.
- 본인이 생일이 되면 생일 겸 팬미팅 겸 미니콘서트 형식으로 항상 팬들과 만난다. 매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만난다. 꼭 생일파티가 아니더라도, 팬미팅을 통해서라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4년 舊 역도경기장(現 우리금융아트홀)[110] 에서 한 팬미팅. 워낙 비활동기에는 SNS도 자주 하는 편도 아니고, 꼭꼭 숨어버리기 때문에 팬들이 먼저 원하기도 하며, 본인도 팬들 만나고 싶을 때는 이벤트를 만들어 보려고는 한다.
- 한국에서는 '레인맨', 일본에서는 '비를 부르는 남자'로 불릴 정도로 비와 관련된 일이 많다. 신기하게도 신승훈이 뜨면 비가 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4집으로 활동할 당시 모 행사에서 '그 후로 오랫동안'을 부르는데 '그 후로 오랫동안 비가 왔어' 부분부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하늘이여 나를 도와줘' 부분부터는 비가 마구 쏟아졌다.
- 비 때문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한 것이 팬덤 사이에서 불리는 바로 8.26사태. 어떠한 일이 있었냐면 이미 한 차례 비가 많이 와서 그 다음주로 공연을 미뤘더니 공연 당일이 되니까 공연을 취소했던 1주일 전 보다 비가 더 많이 왔다. 감전의 위험이 있어서 공연을 강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던 찰나에 공연장 주변 지하철역에서 비를 피해 대기하고 있던 만 명이 넘는 팬들이 하얀 우비를 입은 채 단체로 공연장을 향해 나오는 것을 보고 공연을 감행했으며 평생 맞을 비를 다 맞으면서 공연을 바라보는 팬들이 고마워 같이 비를 맞겠다며 지붕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무대 밖으로 나왔더니, 오빠가 비 맞으면 같이 맞겠다면서 만 명이 넘는 팬들이 우비 모자를 벗어버려서 하얗게 보였던 관객들이 순식간에 검게 보이는 상황을 보며 정말 울컥했다고.[111] 이때 신승훈은 데뷔 이래 두 번째로 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정식 콘서트 명칭은 Back to the future.[112]
- 이게 다가 아닌 것이 공연을 하는 날이면 비 오는 확률이 꽤나 높으며 한국에서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비가 온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2013년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날 당시 오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가 점점 콘서트 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비가 오는 걸 본 팬들은 '역시나'라며 평소에 준비해뒀던 우산을 펼쳤다고 한다. 그리고 오죽하면 신승훈이 2008년 10월 15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뒤 제작진들도 그에 대해서 잘 아는 건지 다음주에 섭외한 게스트가 가수 '비'라는 점...
- 2007년 생일파티에서는 술 마시면 평소에 노래방가서 부르는 노래라면서 팬들에게 불러준 노래가 바로 여자 노래인 이소라의 '난 행복해'였다. 이후에 몇 번 부른 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시월에 눈 내리는 마을에서 원곡 가수인 이소라와 함께 듀엣을 했다. 이소라가 질색을 한 건 함정. 다만 팬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 '난 행복해'를 부른 것 중에서 생파때 불렀던게 최고라고 칭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시월에서 부르는 영상 생파에서 부른 영상 다만 개인이 찍은 영상이라 음향이 좋지 않으니 감안하고 봐야 한다.
- 콘서트에 가면 율동이라는 것이 있다. 율동 있는 노래를 살펴보면 '로미오와 줄리엣', '어긋난 오해'. '엄마야', '올 거야', '그건 바로 사랑이죠', '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등이 있다. 신승훈이 율동을 작정하고 만든 이런 노래들이 아니더라도 팬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율동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날 울리지 마'등이 해당되며, 또한 발라드라도 노래 템포에 따라서 야광봉 흔드는 방법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113][114] 콘서트를 오래하다보니 생긴 일종의 문화라고 볼 수 있는데, 어쨌거나 신승훈이 직접 율동을 만들었다. '엄마야'는 수영동작을 따왔으며, '올 거야'엔 '승훈짱'을 반복하는 율동이 있는데 이는 god가 '거짓말'을 불렀을 때 팬들의 'god짱!'이라고 외치는 후렴구 응원 방법이 부러웠는지 참고한 것. 그리고 언제부턴가 템포 있는 곡을 작곡할 때는 미리 율동을 생각해두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콘서트 문화중에 '땡깡[115] 앵콜'이라는 것이 있다. 땡깡이라는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콘서트와 앵콜이 다 끝난 후에도 아쉬워하는 팬들을 인해서 다시 나와서 팬미팅 형태로 앵콜을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콘서트 무대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내용[116] 으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콘서트 트랙리스트에 포함됐거나, 혹은 포함되지 않아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요청하면 '무반주'로 불러주곤 한다. 실제로 대관 시간이 임박해서 급하게 부른 적도 있었으며 무대를 철거해야 해서 스태프들이 무대를 정리할 때에도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준다. 그 가수의 그 팬이라고 팬들도 그에 굴하지 않고 노래를 끝까지 듣는다.
- 신승훈이 작곡한 곡 중에서 단 시간 내에 작곡한 노래와, 작곡에 오래 걸린 노래의 질문에 빨리 작곡된 노래중에는 10분만에 만든 Radio Wave의 'I Do'라고 대답했으며, 반면 오래 걸린 노래중에는 같은 앨범에 수록된 'Hey'라고. 또한 이 노래는 성공할 것 같았는데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노래로는 스페셜 앨범에 수록된 '그대 떠나갈 만큼'이라고 한다. 처음 가이드로 노래할 때는 가사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 콩글리시로 불렀는데 팝송 같아서 혼자 뿌듯했다고. 다만 팬들 사이에서는 좋아하는 노래의 우선순위로 꼽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 후로 오랫동안'은 본인이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잘 만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반대로 부르면서 이 노래는 잘못 만들었구나 싶은건 3집의 타이틀곡인 '널 사랑하니까'라고 한다. 음의 변화가 너무 심하고, 음 자체도 높아서 그렇다고 한다.[117] 다만 팬들이 요즘엔 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이야기가 늘어나자 가끔씩 콘서트에서 부르곤 한다.
- 사랑이 뭐길래, 천일의 약속으로 유명한 작가 김수현이 신승훈의 광팬이다. 사랑이 뭐길래에서는 당시 신인이었던 신승훈을 언급했고, 천일의 약속에서는 OST를 부탁해 직접 신승훈이 OST에 참여했으며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는 당시 발매했던 Great Wave의 Sorry를 듣고 맘에 들어 신승훈에게 부탁하여 OST로 직접 넣은 것. 이 외에도 신승훈이 데뷔 20주년이 되던 해에 '눈부셨던 20년, 또 20년을 더해서 찬란하게 보내시길'이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공연에도 직접 관람하러 오는등 무척이나 신승훈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 1990년대 초중반에 여러 히트곡을 남기며 최전성기를 보냈으나, 이상하게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신승훈의 곡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응답하라 시리즈 전체 통들어서 그의 곡은 2곡 나왔다.
- 평론가들 평도 그의 명성에 비해 매우 박하다. 대놓고 혹평을 내리는 것은 아니나, 그의 음악적, 대중적 성공은 무시할 수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이름을 단 한 번도 못 올렸다. 애초에 그 리스트가 매우 편향적이고 대중 지향적이지 않은 선정으로 악평이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앨범 하나로서 음악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고평가를 받는 1집이나 5집이 리스트에 못 오른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
10. 역대 기록
- 총 음반판매량 1700만장(역대 2위)[118] 1500만장이니 1300만장이니 하는 자료는 이미 예전 자료이고 현재 소속사에서 공식적으로 밝히기는 1700만장이 맞다. 다른 역대 1위 후보로 추정되는 조용필도 신승훈 쪽에서 역대 1위를 주장하는 것에 반박하지 않고 있다. 이후 BTS가 총 음반판매량 2000만장을 돌파하면서 역대 2위 기록이 되었다.
- 10장의 정규앨범 모두 골든디스크 본상(한국 골든디스크 역사상 최다 수상)
- 신승훈의 2집 타이틀곡인 '보이지 않는 사랑'은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에서 11주 연속 1위, SBS 인기가요에서는 14주 연속 1위(통산 15회)를 기록하면서 역대 공중파 가요 차트에서 최장 기간 연속 1위를 기록했으며 두 방송사에서 10주 이상 1위를 한 유일한 곡이다. '난 알아요','희망사항'이 각각 17, 16주 1위했다는 '카더라' 기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카더라'일뿐 공식적인 최장기간 연속 1위 곡은 해당 곡이 맞다. 참고로 한 방송사에서 최다 1위를 수상한 곡은 뮤직뱅크에서 16번 1위를 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연속 1위 기록은 10주) '보이지 않는 사랑'이 통산 16주 1위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SBS 인기가요 1992년 연말결산 방송 자료를 보면 14주가 맞다. 아울러 현재까지 우리나라 가요 차트 프로그램에서 10주 이상 1위를 한 곡은 이 두 곡을 포함해서 단 5곡 뿐이다.[119]
- 2집으로 한 앨범 방송사에서 역대 두번째 최다 1위 기록(40회): 보이지 않는 사랑 30회(가요톱텐 5회, 여러분의 인기가요 11회, 인기가요 14회)+우연히 10회(가요톱텐 5회, 여러분의 인기가요 3회, 인기가요 2회)[120]
- 가요톱텐에서 이선희와 함께 2번째 최다 1위 수상자이자(26번) 최다 골든컵 수상자(4번)
- 뮤직박스가 선정한 90년대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 1위 곡을 가장 많이 만든 작곡가
- 앨범 타이틀곡 100% 본인 작곡, 앨범 수록곡 90% 이상 본인 작곡
- 데뷔앨범 부터 7집까지 연속 밀리언셀러출처
- CF 없음[121] , 스캔들 없음
- 단일앨범 역대 판매량 2위 - 신승훈 5집한국 음악 통계 연감
- 아시아 최단기간 정규앨범 1000만장 돌파[122]
- 아시아 최단기간 누적판매량 1700만장 판매
- 신승훈의 해외 번안곡들 (신승훈→해외)
- 중국 표절곡 약 20곡 이상
- 공식 번안곡 여명(순간을 영원처럼, 가을빛 추억 등을 번안), 유덕화, 쑨난, 양한문(보이지 않는 사랑 번안), 위란(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번안) 등 (대만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랑 번안곡이 500만장), 손남( I believe 번안)
- 영미권
- '미소 속에 비친 그대'→올포원(All 4 One) ' I don't wanna cry'(#)
-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뿐'→벨기에 혼성 밴드 시티즌 제인(Citizen Jane) 'Martian Puppies'
- '날 울리지 마'→재키 무어(Jackie Moore) 'Only You'
[1] 1968년생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나 이는 호적상 나이일 가능성 또한 있다.[2] 음력 3월 21일[3] 대전시는 1977년에 중구와 동구로, 1989년 대전직할시로 승격되어 충남에서 분리되었으며, 1995년 광역시로 바뀌었다.[4] 무려 34세손 '''신해철'''의 '''아들뻘'''이다. 실제로 아버지 성함이 신중철(1931년생)로 철자 항렬을 썼고 신승훈 본인은 35세손 동(東)자 항렬로 본명은 항렬자에 맞춰 신동학이었지만 어린시절 신승훈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대신 남동생 신동은(1970년생)은 항렬 그대로 썼다.[5] 참고로 아래에도 서술되어있다시피 데뷔초엔 60kg도 채 안될정도로 깡마른 몸에 가까웠다. 최근엔 살이 약간 올라서 65kg 정도로 이 키에 이정도 몸무게는 사실상 정상이다.[6] 건축업을 했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는 은퇴.[7] 신승훈 7집 엄마야 뮤직비디오에 의도치 않게 출연했다. 3분 24초쯤 [8] 5남매 중에 셋째라고 한다. 위로 누나 2명 신향자(1958년생), 신미영(1963년생), 밑으로 남동생 신동은(1969년생) , 여동생 신은영(1971년생)이 각각 하나씩 있다. 신승훈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결혼했으며 2008년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조카가 6명이라고 한다.[9] 현재의 우송중학교.[10]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CCM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1] 現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작곡가 김창환이 설립한 기획사다.[12] 신승훈이 2002년 창업한 연예기획사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그 도로시에서 따왔다. 로시도 이 회사 소속이다. 과거에는 라쿤보이즈 출신 맥케이, 슈퍼스타k2 참가자인 김은비도 있었다.[13] 이 날은 김현식과 유재하의 기일이다. 히든싱어에서도 신승훈이 언급하였다. 데뷔 동기로는 윤종신, 윤상, 심신이 있다.[14] http://www.shinseunghun.com/으로도 들어가진다.[15] 소속사인 도로시컴퍼니 유튜브채널인데 사실상 로시의 개인 유튜브채널이나 다름없다.[16] 신승훈보다 인기나 기록이 확실하게 위라고 할 수 있는 가수는 조용필이 유일하다.[17] 그의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이 공고해지게 된 계기는 1991년 11월 발표한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18] 조용필이 본인의 후계자라고 지목한 적이 있었으며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 의하면 신승훈은 총 세 분야에 이름이 올라갔는데 그 중 두 분야가 보컬, 싱어송라이터다. 나머지 하나는 아이콘 분야이다. 이렇게 보컬, 싱어송라이터, 아이콘 세 분야에 다 뽑힌 가수는 김광석, 들국화, 조용필뿐이다. 물론 엠넷 레전드 100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는 게, 이 분야 관련 전문가들이 한국 가요사를 빛낸 가수를 모여서 선정한 것이기 때문. 게다가 음악에 종사하는 당사자들도 각자 본인이 뽑힌 분야를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더더욱 인정받는 듯하다.[19] 조용필보다 먼저 언론에서 국민가수라는 호칭을 얻었다.[20] 임진모: 1996년 한 연예주간지에서 최초로 신승훈씨에게 '국민가수'란 영예로운 수식어를 붙여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로 조금만 인기 있는 가수가 나오면 국민가수 운운하는데, 본인은 그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21]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SBS 인기가요 14주 연속 1위 달성[22]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1990년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부터 2006년 10집 'the romanticist'까지 16년간 매번 앨범을 낼 때마다 그 해 발매된 모든 앨범 중 가장 판매량이 많았던 10장의 앨범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특히 2002년부터는 음반 시장에서 음원 시장으로 바뀌어가는 시기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23] 심지어 그 다음 세대에서 엄청난 인기와 영향력, 커리어를 자랑했던 H.O.T., 조성모, god도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보다는 위상과 업적 측면에서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용필의 위상과 업적에 버금가는 저 레전드 가수 세 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 받는 것이지''' H.O.T., 조성모, god의 위상과 업적도 그 시기에는 타 팀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매우 높았다.[24] 동시대에 인기를 얻었던 이승철이나 이승환은 10대, 20대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이고 콘서트에서도 그 나이대 관객들이 보이는 편이지만, 신승훈은 팬들의 연령대가 훨씬 높다.[25] 이승철은 신승훈보다도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훨씬 많이 출연했으며, 이승환은 고정은 아니어도 라이브 방송에서 심심하면 얼굴을 비치는 편인데다가 왕성한 사회활동으로도 젊은 세대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26] 일본에서 처음 콘서트 했던 해는 2004년이나 앨범을 낸 해는 2005년이다.[27] 이 때문에 반일성향을 가진 절친 이승환과는 달리 일본 문제 관련해 노코멘트하거나, 약간 띄워주는 모습을 보인다. [28]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잘 들어보면 노래를 또박또박 불러야한다는 부담감에 '슬픔이라 생각했지'부분에서 '생각했지'를
[[생가캤지]]
를 [[생가갰지]]
라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똑바로 불렀다. 본의 아니게 충청도 사투리가 나올까봐 걱정이었던 모양[29] 성격이 형인 신승훈과는 반대라고 한다. 본인은 부드러운 성격이라면 동생은 남자다운 성격이라고. 동생과의 에피소드로는 동네 뒷산에 놀러갔다가 동생을 잃어버려 해가 질 때까지 동생을 찾아다녔으나 나타나지 않아 울면서 집에 도착했더니 동생은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고 있었다고.[30] 후에 콘서트에서 하모니카를 직접 불기도 했다.[31] 1994년 5월, 4집 발표후에 나간 토크쇼에서 이야기 한 바 있다.[32] 음악과 관련해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고 한다.[33] 훗날 1집에 수록된 '두 번째의 사랑'과 '그대의 마음은'을 작사, 작곡하고 '그대여 안녕'을 작곡한 백병교를 이 동아리에서 만났다.[34] 당시 대전에서 유명했던 PJ카페에서 돈 맥클린의 Vincent와 앨버트 하몬드의 For the peace of all mankind를 불러 바로 합격했다고 한다.[35] 음악감상실에서는 본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모창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유 말고도 다른 가수들은 어떻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도 연습했다는 듯. 참고로 남녀 듀엣곡도 가능하다. 단, 동시에 부르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미용실에서 노래를 할 경우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손님들이 노래를 듣지 않아 소리를 지르는 선곡을 해야 관심을 갖고 듣는다고 한다.[36]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팬레터가 보통 연예인급이었다고 한다.[37] 신승훈은 음악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전혀 없었던터라 자신이 작곡한 곡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불렀는데 3층 옷가게 아주머니가 내려와 누구 노래냐며 물어보는 걸 보고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고. 데뷔했을 당시에도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아 데뷔할 생각을 했지 본인이 쓴 노래가 타이틀곡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38] 후에 둘은 굉장히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되는데, 방송만 나오면 아웅다웅 티격태격한다. 그리고 가요계의 대선배가 된 신승훈이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 선배이자 신승훈이 깐족거릴 수 있는 선배이기도 하다.[39] 전영록이 아파서 대신 신승훈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전영록과 비슷하게 불러달라'라는 부탁에 코러스를 모창했다고 한다.[40] 그 중 한 곳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저음'''이라고 거절당했으며, 또 다른 기획사에는 당시 발라드는 저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는데 처음부터 지르기 때문에 거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41] 이 날은 김현식과 유재하의 기일이다. 유재하는 1987년에 사망했으며,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김현식은 신승훈이 데뷔하던 날에 사망했다. 후에 인터뷰에서 '데뷔하기 전 우연히 김현식 선배와 딱 한마디를 나눠볼 수 있었는데, 후에 나중에 가수로 데뷔해서 선배에게 술도 얻어먹고, 이정표가 된 선배들의 조언도 얻고, 친한 선후배사이가 되고 싶었다'며, 이정표 같은 선배의 사망에 많이 아쉬워했다. 오죽했으면 2012년 엠넷 원 콘서트에서는 김현식과 같이 노래를 부르고픈 마음에 이렇게까지 했다. 관련영상[42] 90년대 극초반까지 큰 인기를 누리던 김민우, 이상우, 변진섭 등도 이 무렵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43] 정작 그 해 가요톱10에서는 15주간 1위 후보에 오른 게 전부였다.[44] 신승훈이 처음으로 전곡 작사, 작곡, 프로듀싱, 편곡 등 모든 앨범 작업에 다 참여하였다. 여담으로 이 노래는 1995년에 신승훈이 각별했던 자신의 할머니와 막역한 사이였던 듀스의 김성재에게 닿길 바라며 만든 노래라고 한다.[45] 신승훈 앨범 중에 역대 최다 판매량을 지니고 있다. 이 해 골든디스크 대상은 김건모가 탔는데, 신승훈이 김건모보다 판매량이 더 높았음에도 김건모가 타는 상황이 발생했다.[46] 당시 방송 관계자들도 신승훈이 대상을 받을 줄 알고 미리 축하전화를 했다가 놀랐다고 카더라.[47] 한 앨범당 하나의 대표 장르를 정해서 내는 프로젝트 앨범.[48] 이전 앨범보다 한결 가볍고 산뜻한 목소리로 바뀌었다.[49] 가수로서 앨범을 내는 것 대신 작곡가나 프로듀서로 전향할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50] R&B[51] 브리티시 락[52] 다른 가수들은 PD에게 직접 음향을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짬밥이 모자라다고 한다.[53] A B 기타 발라드 곡[54] 이래봬도 카카오 뮤직룸의 첫 번째 연예인이다. 음악으로 인사하고 싶어하는 신승훈에게 특화된 포맷이며 팬과 신승훈 모두가 만족하는 중이다.[55] 비단 대중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당장 신승훈의 음반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는 데서 평론가들에게도 그의 음악적 능력이 얼마나 평가절하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56] 결국 신승훈은 이로 인한 저평가를 앞서 이야기한 3 Waves of Unexpected Twist 프로젝트인 미니앨범 3장의 시리즈로 정면돌파했다.[57] 지금도 신승훈이 싱어송라이터냐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카더라.[58] 김소월 시인이 갖고 있는 정서이기도 하다.[59] 노래 제목 자체가 애이불비이다 보니 가사 전체가 애이불비 정서를 지니고 있다.[60] 이는 같은 라인의 노래인 애이불비2, 송연비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61] 7집의 가잖아와 8집의 이런 나를이 꽤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이 둘을 놓고 "비슷한 노래의 장르를 작곡하는 게 더 쉽지 않냐"는 질문에 "오히려 비슷한 장르를 작곡하는 게 힘들다. 왜냐하면 비슷한 코드,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진행 과정인데 다르게 작곡을 해야 하니까."라고 답변했다.[62] R&B[63] 장르는 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콘서트 내에서 율동이 존재한다.[64] 미니앨범인 Radio Wave에서 모던락을 취했기 때문에 이를 포함시켜도 된다.[65] 장르는 다르지만 애이불비 사상에서 발전시킨 비슷한 라인의 노래[66] 장르는 다른데 제목이 하나의 라인이다. '소녀에게'를 들었던 소녀들이 10년이 지나 '숙녀'가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67] 변진섭의 1집 '홀로 된다는 것'이 180만 장의 판매고를 달성하면서 최초의 데뷔앨범 밀리언셀러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변진섭의 데뷔곡은 '홀로 된다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사랑 이야기'였다.[68] 신승훈의 데뷔곡으로, 한국 최초의 데뷔앨범 밀리언셀러[67] 와 함께 골든컵을 수상했다.[69] 한국 최초로 대중가요에 클래식을 접목하는 크로스오버를 보여주었으며,14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70] 신승훈의 대표 댄스곡[71] 신승훈의 대표곡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발라드 중 하나로 꼽힌다.[72]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라이브 콘서트에서 나왔다.[73] <엽기적인 그녀> OST[74] 사랑해도 헤이질 수 있다면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남학생이 아닌 여학생으로 잠시 등장을 하였다.[75] 데뷔 30주년 기념앨범이다. [76] 예를 들어 Christmas Memories, Christmas In Love, Christmas Miracle, Color Of Romance, A White Night, Acoustique, Limited Edition, Love O'Clock, My Way, Pop Tour, Great Wave 식으로 붙는다.[77] 물론 처음 열렸던 2004년 The 신승훈 Show는 부제가 없었다.[78] 라디, 버벌진트, ash, 김선경 등등[79] 더불어 웨일도 와서 불렀다.[80] 이 때의 부제목은 'Pop Tour'로서 대중성을 노린 제목이기도 하며, 평소에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작정한 듯 이렇게 다른 사람의 노래를 많이 불렀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불렀는데, 팬들은 마치 노래방에 와서 한을 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81] 보통 남의 노래 2곡을 부르면 본인 노래 2곡을 부르는 식이었다고 한다.[82] 부제는 Limited Edition[83] 20주년 콘서트 전국투어의 풀네임은 The 신승훈 Show - My Way이며 서울에서 앵콜 공연 했을 당시의 제목은 'The 신승훈 Show - Grand Finale'였다.[84] 부제는 Limited Edition2[85] 풀네임은 'The 신승훈 Show - I AM SHIN SEUNG HUN'[86]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에서 열린다.[87] 데뷔 25주년 기념이기도 하다.[88] KBS 상상플러스나 엠넷 봄여름가을겨울의 봄에서도 부른 적 있다.[89] 그 외에 5집 작업을 시작할 무렵, 평소에 본인을 예뻐해주던 할머니의 별세, 그리고 아끼던 후배인 듀스의 김성재의 죽음 등을 겪었고 5집에 이들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녹아냈다고 한다.[90] 상상플러스에 출연했을 당시 직접 이야기를 했다.[91] 그렇다고 김창환이 신승훈에게 음악적으로 도움 준 것도 딱히 없다. 김건모와 달리 작곡, 작사해 준 곡도 거의 없기 때문. 굳이 뽑자면 '날 울리지 마'와 '오랜 이별 뒤에' 작사 하나 해준 게 끝이다.[92] 피아노를 포기하고 배운 쿵후라 그런지 쌍절곤을 돌릴 줄 안다. 한동안 팬들의 부탁으로 인해서 자주 쌍절곤을 돌렸으나 요즘엔 팬들도 많이 봐왔고, 본인도 많이 해온터라 쌍절곤을 찾는 경우는 없다.[93] 성시경이 방송에서 웃기려고 이야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지만 사실 굉장히 프로답다고 볼 수 있다.[94] 사실 그 전에 팬들은 평소에 잘 안 부르는 노래를 신청하긴 한다.[95] 다만 일반 기업광고가 아닌, 공익광고라는 전제를 달았다.[96] 다만 최근엔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현재는 60kg대 중반 정도 나온다. 그래도 그 키에 그정도 몸무게면 사실상 정상이다.[97] 당시 뮤직비디오를 만들던 도중 전력 과부하로 인해 정전이 되면서 데이터가 손상이 돼 급히 미국까지 가서 살려왔다.[98] 영상 관련 잡지에도 실릴 정도였다.[99] 당시 방송국 리포터였는데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100] 명세빈은 신승훈 뮤직비디오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됐는데, 우연히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명세빈이 신승훈을 보고 싸인을 요청했고, 신승훈은 그런 명세빈을 보고 연예계쪽 일을 할 생각이 없냐고 묻자, 연예계 진출의 의사가 있었던 명세빈은 그렇게 연기자로 데뷔하게 되었다.[101] 무릎팍도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가 강호동에게 파리넬리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102] 연배가 비교적 어린 10~20대의 팬들은 신승훈 덕분에 조덕배를 알았다고 카더라.[103] 팬들 사이에선 줄여서 신노세라고 불린다.[104] ‘김승우의 승승장구’편에 나온다.[105] 힐링캠프에서도 언급한 바 있고, 그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 한 적있다.[106] 이는 AMIGO에서도 가사 마지막 문장을 신승훈이 작사했음에도 비중이 낮다며 공동작사로 올리는 걸 포기하고 작사가 김이나 단독 이름으로 저작권을 올리기도 했다.[107] 당시 김제동도 ‘이건 답이 아닌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면 진짜로 정답이 아닐 정도로 촉이 좋았는데 그걸 신승훈이 깼다.[108] 그 날 첫 번째로 멈춘 곳은 한산한 아파트 쪽이었고, 두 번째는 한산한 거리에 멈췄다. 다행히도 세 번째는 인파가 많은 거리가 선정되어 이전의 부진을 만회했다.[109] 다만 남에게 곡을 준건 처음이 맞다.[110] 2004년 당시 역도경기장은 후니패밀리라는 이름으로 처음 모였을 때 팬미팅 했던 장소. 그러다보니 팬들과 신승훈 본인도 애착이 많은 장소이기도 하다.[111] 이 부분은 무릎팍도사에서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112] 이 공연 이후로 8집 히든트랙으로 실린 Thanks! My Guardian Angel! 속칭 수호천사라는 팬송이 탄생했으며, 훗날 'You Are So Beautiful' 비공식(?) 팬송이 생기긴 했다.[113] 물론 마음 가는대로 흔들어도 된다.[114] 게다가 코러스가 나오는 노래들, 예를 들어 '너를 보내며', '지킬 수 없는 약속', '널 위한 이별'등은 팬들이 떼창으로 코러스를 넣어준다.[115] 표준어는 아니지만 이미 팬덤 내에서는 고유명사화 되어 그대로 적는다. 원래는 '생떼'로 순화해서 써야 하는 것이 원칙.[116] 앞으로의 계획이라든가, 스케줄이라든가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한다.[117]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같은 경우엔 처음부터 지르긴 하나, 초반부 음과 후반부 음의 높낮이가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반면 이 노래는 고음에서 더 높은 고음으로 간다.[118] 1위는 BTS[119] 못 찾겠다 꾀꼬리 - 조용필(10주: kbs 가요톱텐 1982년 9월 1일 ~ 11월 3일)/서태지 - 난 알아요(10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992년 6월 19일 ~ 8월 21일)/방탄소년단 - Dynamite(10주: 쇼 음악중심 2020년 8월 29일 ~ 11월 14일)[120] 1위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으로 총 41회 1위를 수상했다.[121] 힐링캠프에서 증명. CF를 찍지 않은 것은 슬픈 노래만 부르는데 CF를 찍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촬영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122] 어디까지나 "정규앨범"에 한정해서다. 비정규 앨범까지 합치면 일본 음반 시장 기록을 못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