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선

 



'''발해 마지막 국왕
大諲譔
대인선
'''
'''시호'''

'''왕호'''
인선왕(諲譔王)[1]
'''성씨'''
대(大)
''''''
인선(諲譔)[2]
'''왕태자'''
대광현(大光顯)(?)[3]
'''생몰연도'''
음력
? ~ ?
'''재위기간'''
음력
906년(?) ~ 926년 1월 14일 (19~20년)
1. 개요
2. 생애
3. 발해 멸망의 원인
4. 기타
5. 가족관계
6. 연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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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마지막 가독부.[4]
시호 역시 알려지지 않았는데 '애왕'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라 효소왕 때 발해가 건국됐고 (신라) 경애왕 때에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는 동국사략의 구절을 한국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부족했던 일본 학자들이 ‘(발해가) 경왕과 애왕 때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고 잘못 해석해서 같은 시기 신라 왕이었던 경애왕과 혼동해서 생긴 사건이다. 정확히는 신라 경애(景哀)왕에서 앞의 ‘경(景)’을 대현석, 뒤의 ‘애(哀)’를 대인선에 대입한 것이다. 한때는 교과서에도 이 오류가 들어있다가 현대에는 빠졌다.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에 빠진 왕인 대위해는 당시에 유일하게 당회요(唐會要)라는 책에만 기록된 인물이어서 왕인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망국 군주로서의 작명으로는 그럴듯한 슬플 애(哀) 자이기에 인상이 강렬하여 종종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 한국사나 교양 서적 등에서 아직도 애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대인선은 국가의 마지막 군주여서 백제의자왕고구려보장왕처럼 처음부터 시호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2. 생애


즉위년도는 미상이며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906년이다.[5] 그는 전대에 즉위한 대위해와 함께 배씨 세력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내치 및 외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그의 대에 이른 기록은 거란의 침략과 관련된 것뿐이다.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대인선 치세의 발해는 해족, 신라, 고려, 후량, 일본 등 발해 주변에 이름이 알려진 거의 모든 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시도하는 한편 이들과 힘을 합쳐 거란을 견제하려고 했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908년, 919년 등 몇 차례 동해를 건너 일본에 사신 배구(裵璆)를 파견했으나 헤이안 시대 당시 일본은 왕권이 추락하고 나라 사정이 좋지 않아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했다.[6] 후량에도 사신을 보내 봤지만 중국마저 5대 10국의 혼란기라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거란국지에 따르면 해족이 아예 거란에 병합당하자 대인선은 신라와 비밀 결원을 맺었다고 하는데 신라 역시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라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918년, 거란에도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는지 거란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한 것은 단 1차례로 끝났고 오랫동안 전쟁을 치뤘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요사에서는 요나라 야율아보기가 20여 년을 힘들게 싸워 발해의 요동 지역을 얻었다는 대목이 나와 903년~918년 사이 시점에 결국 거란의 침입으로 요동 일대를 잃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924년, 거란이 요동을 공격하여 발해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대인선은 군사를 일으켜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포로를 되찾는 등 대승을 거뒀으나 요동 전투는 발해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925년 12월 21일, 요동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거란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수도 상경성으로 진격해왔고 이는 발해의 마지막이 되었다. 거란은 20여 년 동안 꿈쩍도 않던 요동 방어선을 아예 무시하고 우회해서 발해의 요충지인 부여부에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부여부는 포위 3일 만인 926년 1월 3일에 함락되었고 발해는 이에 맞서 노상(老相. '늙은 재상')[7]에게 군사 3만(혹은 5천)을 주어 저지케 하였으나 이 결사대조차 맥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926년 1월 9일, 거란은 단숨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까지 진격하여 상경성을 포위하였다. 대인선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표명했으나 오히려 백성들은 고려 등지로 피난을 갔다.[8]
926년 1월 14일, 대인선과 300여 명의 신하들은 야율아보기 앞에 나와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발해는 15대 228년만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포위된지 4일, 항복을 결정한지 2일만이었으며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거란군의 방화로 인해 며칠간 불타올랐다.[9]
야율아보기는 발해 국왕이었던 대인선을 처음에는 융숭히 대접했지만 망국의 군주의 운명이란 순탄치 않았다. 발해의 옛 군현에서 반 거란 항쟁 기미가 보이자 야율아보기는 926년 1월 17일 발해의 옛 군현에 조서를 내려 회유를 시도했으며 926년 1월 19일에는 거란 장수 강말달을 성으로 보내 수색하도록 했는데 옛 발해 병사들이 강말달을 살해했다. 대인선도 움츠리고 있지만은 않아서 926년 1월 20일에 대인선이 남아있는 발해 유민들을 모아 부흥 운동을 펼치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성난 야율아보기가 다시 상경용천부를 공격함으로써 얼마 뒤 성은 함락되었다. 926년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 때 대인선과 그의 부인을 포로로 잡은 뒤 거란 본토로 끌고 갔다. 야율아보기는 끌고 간 대인선과 그의 부인에게 이름을 새로 줬는데 대인선에게 준 이름은 '오로고(烏魯古)', 그의 부인(발해 왕후)에게 준 이름은 '아리지(阿里只)'였다.[10] 이후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는데 와신상담이 생각나는 일화지만 더 이상의 복수는 없었고[11] 그렇게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발해 마지막 왕자 대광현은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내려갔고 발해 각지에서는 발해부흥운동이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3. 발해 멸망의 원인


기록이 없기에 그의 재위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대현석 때부터 이어온 지배층의 내분과 더불어 말갈과의 대립[12], 자연재해[13], 오랜 전쟁과 내분에 따른 민심이반 등이 요인들이 합쳐져 끝내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앞서 보듯 924년 때의 기록을 보면 발해가 오히려 역공을 가하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발해는 내분, 말갈과의 대립, 자연재해, 민심 이반과 더불어 거란의 첩자들로 인해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당연히 어느 나라나 충분히 안고 가는 문제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고구려와 달리 수도를 아우르는 방어선이 매우 취약한 구조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14] 고구려는 외부 세력이 수도 평양으로 진입하려면 요동의 천산산맥과 평안도의 묘향산맥 등 여러 크고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야 해서, 당나라가 수십년간 파상 공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가 무너진 건 남쪽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상대적으로 평양으로 접근이 쉬운 남쪽 신라에서 보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중심부가 위치한 길림성 ~ 연해주 일대가 농안 지역의 탁트인 평야 쪽의 방어선이 뚤리면 수도인 상경까지 별 무리없이 진격할 수 있는 취약한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상경성 주변 일대의 지리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하는 소리다. 상경성으로 직공하기 위해서는 부여성를 돌파하고 세로로 흐르는 제2송화강을 넘어서 목단강의 물길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는 산맥인 장광재령을 넘어야 했었다, 하지만 거란군이 그 근방에 위치했던 장령부의 군사를 격파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광재령 또한 방비가 철저했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게다가 상경성이 있는 영안 일대는 산으로 감싸져 있는 분지였다. 그리고 그 분지를 나가기 위해서는 목단강이 송화강 합류지점으로 흐르는 북부루트로 가야만 했다. 즉 직공이 사실상 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로로 흐르는 송화강 본류를 따라간다면 달라진다. 하얼빈을 위시로 한 송눈평원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삼강평원이 쭉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주력이었던 기병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영안분지를 나갈 수 있는 통로였었다. 물론 이 지역은 발해의 철리부와 막힐부가 있었지만, 과거 말갈족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발해 말기 말갈제부의 이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거란군의 쾌속진격에는 이러한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핵심 방어선인 요동을 놔두고 우회해서 중심부만 타격하면 되는, 2차 대전 당시 마지노선을 제껴두고 아르덴 숲을 통과했던 독일의 전격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던 셈.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야 두말할 것 없는 강대국이었지만, 순식간에 패망했다. '''마찬가지로 발해 같이 강한 나라가 쉽게 무너진건 바로 취약한 수도 방어 구조가 그 원인일 가능성이 크고, 역사에서 별탈없이 안정적이고 잘 굴러가던 나라가 이런식으로 망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너무 빨리 수도만 무너졌고 지방은 아직 건재한 잔존 세력들이 많았기에, 발해 부흥운동이 200년 가까이 지속된 것도 이러한 멸망 과정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거란과의 관계도 나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주장들도 있다. 발해는 일부 국경지역 인근의 거란족들을 복속하기도 했지만[15] 그것만 제외하면 딱히 발해와 거란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발해 초기에는 사이가 좋아서 당나라와 싸우기도 했고, 발해 후기에도 선왕 때에는 무역도 흥했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별 다른 갈등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거란에서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통일하고, 당나라 북부 국경 인근의 하동 지방까지 침략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이 때 야율아보기가 발해에게 같이 동맹을 맺고 중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발해가 이를 거절하자 화가 난 야율아보기는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여겼는지 발해와의 관계를 끊고 적대 관계가 되었다. 심지어 이 때부터 거란은 발해를 아치에너미처럼 "옛날부터 발해가 원수였다"는 언급을 한 걸 보면 선왕 사후의 발해와 거란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거나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 기타


  • 망국의 군주이기는 하지만 이렇다 평가할만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황 추측으로만 평가가 가능하다. 혼돈의 10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정세에서 거듭 성장하는 거란의 요동 지역 공략을 2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저지시킨(누대에 걸쳐 요동 방어선을 공고히 한 점이 있지만) 것으로 보아 대인선 시대의 발해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20여 년 동안 버텨낼 여력도 없다. 적대국인 거란과 직접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며 중국, 일본, 후삼국 등 활발히 외교를 펼치며 세력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아 대인선이란 군주도 나름대로 중간은 가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출처 : 왕조의 마지막 풍경)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거란에 국토 정탐을 허용했다는 점, 거란도를 통한 침입 가능성을 배제해 부여부-상경용천부 사이 수도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았다는 점, 20만의 거란군이 상경용천부로 들이닥치는데 몽진을 하지 않아서 나라가 망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 발해 국왕 중 4번째로 길게 집권하였다. 대인선보다 길게 재위한 국왕으로는 문왕(56년), 대이진(27년), 고왕(21년)이 있다. 대현석의 경우 882년 교체설도 있어서 불분명하다.

5. 가족관계


  • 왕후 - 이름 불명. 발해가 멸망한 뒤 야율아보기의 부인이 타는 말인 아라지로 강제 개명당했다.
  • 동생 - 역시 이름 불명. 책부원귀, 오대회요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야율아보기 사후 거란군이 점거한 부여성을 공격했다고 한다. 대씨족보에서는 이름이 대권으로 나오나, 다른 사료와 교차되지는 않는다.
  • 태자 대광현
  • 왕자 대소순
  • 왕자 대광찬
  • 왕자 대우모
  • 조카 대원양 - 오대회요에는 왕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6. 연표


906년 대위해가 죽고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907년 5월 대소순을 후량에 사신으로 보냈다
907년 12월 문적원감 배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908년 1월 전중소령 최예광을 후량에 사신으로 보냈다
909년 3월 대성악을 후량에 사신으로 보냈다
911년 8월 후량에 사신을 보냈다
912년 7월 아들 대광찬을 후량에 사신으로 보냈다
918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냈다
919년 거란이 요양성을 수리하여 발해인들을 이주시켰다
921년 2월 흑수말갈의 고자라가 고려에 항복하였다
921년 4월 흑수말갈의 아어간과 200명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923년 거란이 요서의 평주에 노룡군절도사를 설치하였다
924년 1월 아들 대우모를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924년 5월 조카 대원양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924년 거란의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동을 회복하였다
925년 2월 정당성 화부소경 배구를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925년 9월 장군 신덕, 예부경 대화균, 균노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500명이 고려로 투항하였다
925년 12월 좌수위소장 모두간과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백성 5000명을 이끌고 고려로 투항하였다
925년 12월 21일 거란이 대군을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였다
926년 1월 1일 거란군이 부여부와 장령부, 동평부를 공격해왔다
926년 1월 2일 거란이 상경용천부를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별동대를 동평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926년 1월 3일 거란의 대군이 급습해왔고 부여성의 군민들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3일만에 함락되었고 성주가 전사하였다
926년 1월 9일 늙은 재상에게 병사 3만(또는 5천)을 주어 안단이 이끄는 1만의 거란군을 막게 하였으나 패하였고 재상은 항복하였다. 대인선이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926년 1월 12일 대인선이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926년 1월 14일 대인선이 신하 300여 명을 이끌고 항복하였고 거란의 태조는 대인선을 우대해주었다. 발해는 228년만에 멸망하였다.
926년 1월 17일 거란의 황제가 발해의 옛 군현에 조서를 내려 회유를 시도했다
926년 1월 19일 거란군이 강말달 등 13인을 상경성 내로 들여보냈고 옛 발해군에게 살해당하였다
926년 1월 20일 대인선이 상경성에서 재차 저항하니 거란의 야율사열적이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대인선과 왕족을 사로잡았다
926년 2월 3일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 등 4부의 절도사가 항복하였다
926년 2월 19일 발해국을 동란국으로 바꾸고 상경성을 천복성으로 고쳐 거란의 태자를 인환왕에 봉하여 다스리게 하고 발해의 '''늙은 재상'''을 '''동란국 우대상'''으로 삼았다
926년 3월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가 항쟁하니 거란의 안단이 공격하였다.
926년 3월 21일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가 모두 패하였고 안변부의 발해장수 2명이 전사하였다
926년 3월 29일 거란 태조가 대인선과 왕족이 임황부의 서쪽에 성을 쌓고 거주시켰고 대인선에게 '오로고',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내렸다
926년 5월 남해부와 정리부가 항쟁하니 거란의 대원수 야율요골이 공격하였다
926년 6월 12일 남해부와 정리부가 모두 패하였고 항복하지 않았던 장령부를 이리필, 강묵기, 좌복야, 한연휘 등을 시켜 공격하였다
926년 8월 7일 장령부가 함락되었고 옛 발해의 땅은 모두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7. 둘러보기


'''발해의 역대 국왕'''
14대(?) ○왕 대위해

'''15대(?) ○왕 대인선'''

거란에게 멸망
오사성발해왕(후발해)
발해부흥운동
'''발해 왕실 수장'''
14대(?) ○왕 대위해

'''15대(?) 인선왕 대인선'''

16대(?) 대광현(고려 신하)

[1] 보통 망국의 군주는 시호가 없기 때문에 왕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과 신라 같은 경우,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이왕가로 격하됐음에도 왕실의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를 올릴 수 있었고, 신라는 평화적으로 고려에 항복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에서도 경순왕을 신라의 전 국왕으로서 예우했던 것이다.[2] 예전에는 '인전'이라고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3] 고려사엔 대광현이 발해국의 세자라고만 했지, 대인선의 아들이라고는 안 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대인선이 항복한 후 임의로 왕위에 오른 대인선의 아우의 세자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4] 제13대 대현석과 마지막 대인선 사이에 공식적으로는 대위해 1명 뿐이지만 누락된 왕이 더 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사료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한 정확한 사실을 알 길은 없다.[5] 대현석부터는 왕의 즉위년도와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다.[6] 이후 후백제도 일본에 사신을 여러 번 보내 동맹을 시도했지만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7] 노상은 발해 멸망 후 동란국의 우대상이 된다. 위 사실을 봤을 때 노상이 거란과 내통했을 가능성도 있다.[8] 사실 이전부터 발해인들이 소규모 혹은 대규모로 고려로 망명가기는 했다.[9] 제2차 세계대전마지노선을 우회한 독일군의 프랑스 전역과 같이 발해는 허무하게 멸망해버린 것이다.[10] 야율아보기와 그의 부인인 순흠황후 술률평(述律平)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 탔던 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로고(烏魯古)로 가차된 거란어 '울구'는 마부라는 뜻이라 한다. # 그렇다면 정말로 말의 이름에서 따다 붙인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모욕감을 주기 위해 준 이름라는 것에는 변함없다.[11] 문헌통고에 따르면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 동생을 시켜 부여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문헌통고에 오기가 많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12] 주로 흑수말갈.[13] 그 유명한 백두산 화산 폭발설 등.[14] 다만 이는 발해가 과거 삼국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도 방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절대로 발해의 수도방어체계가 허술하다는 것은 아니다.[15] 다만 거란 전체를 복속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