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지리
1. 개요
2. 발해 영토사
2.1. 발해 건국 이전의 발해 영토
2.2. 강역의 변동
2.2.1. 건국 초기(698년 ~ 719년)
2.2.2. 점진적 확장(719년~ 737년)
2.2.3. 전성기(737년 ~ 793년)
2.2.4. 혼란기(794년 ~ 817년)
2.2.5. 중흥기(818년 ~ 857년)
2.2.6. 쇠퇴기(857년 ~ 906년)
2.2.7. 거란과의 전쟁과 말갈의 이탈(903년 ~ 926년 1월 15일)
2.3. 5경
2.4. 15부
2.5. 62주
2.6. 현
2.7. 촌락
2.8. 도시
3. 산업
4. 도로
5. 자연 지리
6. 인구
7. 관련 사료
1. 개요
발해의 지리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해놓은 문서.
발해는 동만주 간도 지역의 타이가 삼림 지대를 중심으로 했던, 만주에 위치한 국가였다. 현재 중국의 흑룡강성과 길림성 및 러시아의 연해주와 북한의 함경도 일대가 발해의 영토에 해당한다. 중국 영토가 된 발해 영토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는 중국 정부 측의 통제로 난항을 겪고 있으며 연해주에서의 발해 관련 고고학 조사 역시 러시아 측과의 공조가 영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발해 영토의 중심이 동만주 일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한다.
2. 발해 영토사
2.1. 발해 건국 이전의 발해 영토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는 부여, 옥저와 같은 예맥계 세력들과 읍루, 숙신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1] 5세기 이후 고구려와 말갈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동만주를 두고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5세기 중반 물길이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고 곧 부여를 정복, 물길 - 말갈 - 발해로 이어지는 계보의 첫 장을 쓴다. 물길은 6세기 중엽에 말갈 7부로 분열되고 이들 중 송화강 유역의 속말부와 흑룡강 유역의 흑수부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흑수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이 6세기 중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흑수부를 제외한 모든 말갈 부족이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다. 고구려 멸망 후 말갈 부족은 재편성된다. 당에 의해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이주되는데 이들 중에는 후일 발해를 건국하는 속말부의 걸걸중상도 있었다. 695년에 거란이 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빠저나온 걸걸중상 일행이 백산부의 걸사비우와 합심하여 자립한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하고 살아남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간도의 동모산에 정착하여 698년에 발해를 세운다.
2.2. 강역의 변동
2.2.1. 건국 초기(698년 ~ 719년)
대조영이 오동성(동모산)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우고 두만강 상류, 백두산 일대의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21년이라는 대조영의 재위 기간의 기록이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2.2.2. 점진적 확장(719년~ 737년)
발해의 확장은 무왕 대무예 시기에 두드러진다. 무왕 때 무왕 대무예는 수군장수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를 초전박살 내놓는데 이 시기에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서안평이었던 압록강 하구 혹은 비사성이었던 요동 반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와 국경을 맞닿은 것도 이 시기.
2.2.3. 전성기(737년 ~ 793년)
대흠무 치세에 이르러서 발해는 확장을 중지하고 안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2.2.4. 혼란기(794년 ~ 817년)
강왕 대숭린 시기의 짧은 안정기의 앞과 뒤로 '''5명의 왕들[2] 이 10년만에 바뀌는''' 혼란기를 틈타 변경 지역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흑수말갈이 있다.
2.2.5. 중흥기(818년 ~ 857년)
선왕 대인수시기에 발해는 흑수말갈을 재복속하고 소고구려와 소백제를 흡수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이 시기의 발해는 요동 반도에서 시작하여 대동강, 북만주,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게 되는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다.
2.2.6. 쇠퇴기(857년 ~ 906년)
그러나 반세기도 안된 12대 대건황 시기부터 해동성국 발해의 영광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이 때의 기록이 안타깝게도 특히나 부실하여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측 기록에서 886년 신라 동북부 방향의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이 신라에 외교를 시도하는데, 늦어도 886년경에는 여진 계통의 함경도 지역 지방민들이 발해의 통치력에서 벗어나 사실상 독립국 상태가 되었고 발해는 만주 지역으로 영역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2.2.7. 거란과의 전쟁과 말갈의 이탈(903년 ~ 926년 1월 15일)
위키백과 발해 - 요 전쟁 참고.
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2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시작은 903년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발해와 거란 간의 전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해의 가독부였던 대위해가 죽고 마지막 가독부인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909년을 기점으로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둘러싼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되며 사실상 '''발해 - 거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918년 발해는 요양 지역을 상실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다. 이후 거란은 청천강까지 도달하여 고려와 국경을 맞닿게 된다. 기록에는 발해의 대처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글쎄… 여하튼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투에서 발해가 패배하면서 상당히 큰 전략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 때부터 '''주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주도권까지 완전히 잃은건 아닌데 919년, 요동을 병합한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것이다. 발해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923년, 거란은 요서의 평주에 노룡군 절도사를 설치하여 발해의 숨통을 쥐어오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말갈족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말갈족들도 발해의 행정 및 군사에 일정 부분 투신하고 있었던 만큼 발해로선… 결국 발해는 정국을 타개하고자 924년 5월,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요주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주를 박살을 낸다.'''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덤. 하지만 중요 요충지였던 요동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로인해 발해의 국력이 한계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중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25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할 때처럼 '''발해를 도와줄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없었다.'''
그 당시 동북아의 정세를 보자면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은 해체되고 해족과 습족은 거란에 '''병합'''되었으며 중원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 시대의 혼란기가 열렸으며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남쪽의 후백제나 신라는 멀고 고려 역시 견훤의 맹공을 받고 있어 구원할 여지는 없었다.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로 왕권 쇠퇴와 혼란이 가중되던 상황이라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3] 발해로선 더더욱 절망적인게 내부에서 '''말갈족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924년 5월에 있었던 위의 요주 전투는 발해가 일으킨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요사 본기에 '이심(내분)'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부터 발해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925년, 발해 장군 신덕이 휘하 병졸 500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4] 이 후 발해의 관리 등이 '''필사적'''으로 고려로 망명하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그로 인한 지배 계층의 분열과 민심 이반이 원인일 것이다.
여하튼 발해의 세기말적 상황을 파악한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몽골 초원 정벌을 마친 후 925년 음력 12월, 발해를 '''끝장'''내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하였다.[5] 이 때 거란은 요동을 침공했던 '''영주도'''가 아닌 '''거란도'''를 이용하여 발해의 '''심장부'''였던 부여부를 대규모의 병력으로 기습하는 '''결정적인 전략'''을 세우게 된다. 요동을 통해 올 줄 알았던 거란의 주력이 거란도를 이용해 올 줄 몰랐던 발해로선 의표를 강하게 찔렸다. 거란의 주력이 요동을 통해 왔다면 서경 압록부, 중경 현덕부라는 거대한 방어선이 있어 막기가 수월했지만, 거란도를 통해 왔다면 발해의 수도 앞에 있는 중요 방어선은 딱 하나, 일직선상에 있는 '''부여부'''밖에 없었다.[6] 발해의 의표를 찌른 거란은 부여부에 있던 발해의 정예군을 괴멸시키고 부여부를 함락하였다.[7]
발해는 증원군을 보내 거란군을 막고 부여부를 재탈환하려했으나 패배하였다. 노상[8] 으로 하여금 3만(혹은 5천)의 군사를 주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오는 거란군을 길목에서 막게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요동으로 진격한 거란군은 장령부에서 발해에 의해 막히게 된다. 결국 거란은 장령부를 돌파하여 서경 압록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지만... 부여부를 돌파한 거란의 주력은 926년 음력 1월 9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항전하기 위해 총 동원령을 선포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결국 음력 1월 12일 성문을 열고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2.3. 5경
발해 5경 중 수도였던 중경, 동경, 상경의 위치는 유적등의 발굴로 거의 확실시되지만 남경과 서경은 애매하다. 특히 서경 압록부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4. 15부
비정된 발해 행정 지도
1.상경 '''용천부'''
2.중경 '''현덕부'''
3.동경 '''용원부'''
4.서경 '''압록부'''
5.남경 '''남해부'''
6.부여부
7.장령부
8.솔빈부
9.철리부
10.동평부
11.회원부
12.안원부
13.막힐부
14.정리부
15.안변부
발해의 15부 중 5경이 속한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혹은 책성부), 압록부, 남해부를 비롯하여 부여부, 장령부는 중요 군사 요충지였다.
2.5. 62주
- 용천부 소속(3주):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 현덕부 소속(6주): 현주(顯州), 노주(盧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 용원부 소속(4주):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 남해부 소속(3주):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
- 압록부 소속(4주):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
- 부여부 소속(2주): 부주(扶州), 선주(仙州)
- 장령부 소속(2주): 하주(瑕州), 하주(河州)
- 막힐부 소속(2주): 막주(鄚州), 고주(高州)
- 정리부 소속(2주): 정주(定州), 반주(潘州)
- 안변부 소속(2주): 안주(安州), 경주(瓊州)
- 솔빈부 소속(3주):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
- 동평부 소속(5주):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 철리부 소속(6주):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귀주(歸州), 의주(義州)
- 회원부 소속(9주):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 안원부 소속(4주):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 독주 3주: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
2.6. 현
2.7. 촌락
2.8. 도시
3. 산업
발해의 산업은 밭농사와 목축과 수렵이 주를 이루었으며 벼농사도 짓긴 하였으나 기후적,지리적 한계로 일부에 그쳤다. 밭 농사에서는 주로 콩, 조(식물), 보리 등을 재배하였고 목축에서는 특히 솔빈부의 말이 유명하였다.[14]
신라와 비교하면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영 불리한 편이었다. 당에 조공했을 때 흉년이 들었을 때는 그냥 쌀로만 받았을 정도였다. 때문에 발해는 대외 교역을 많이했다. 특히 일본에 담비 가죽을 수출하기도 했는데 이게 일본에서 인기였다.[15] 민간 차원에서는 신라와 교역하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론 하지 않았다.
4. 도로
5개의 교역로가 있었는데, 이 중 2개는 수로, 나머지 3개는 육로였다.
- 영주도(대 당 교역로)
- 거란도(대 거란 교역로)
- 압록도(대 당 교역로.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16]
- 신라도(대 신라 교역로. 용원부와 남해부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 일본도(대 일본 교역로. 동경용원부에서 동해를 거친다.)
5. 자연 지리
6. 인구
구당서, 구오대사 등의 기록을 참고하자면 대조영이 탈출할 당시 무리를 40만명, 혹은 40만 군호라고 표현하고 발해 초기에 인구는 10만 가구,[17][18] 이후의 기록은 잘 알 수 없다.
7. 관련 사료
- 구당서 발해전
- 신당서 발해전
- 요사 지리지
[1] 이러한 배경을 보면 발해가 예맥계나 숙신계나 정체성 논란이 있는것도 당연. 한국에서는 예맥계임을 중국에서는 숙신계임을 강조하지만 막상 사료를 보면 반반이다.[2] 대원의, 대화여, 정왕, 희왕, 간왕[3] 같은 시기 후백제도 옛 백제 시절의 우의를 말하면서 그때처럼 친하게 지내고 일본군을 파병해 도와달라고 대마도에 사신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일본은 전부 단칼에 거절했다.[4] 발해 멸망 연도는 926년이지만 이전부터 계속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고려로 망명하고 있었고 이것을 토대로 추정했을때 발해가 거란에 급습당해 망했지만 이전부터 발해 내부에서 반란이나 내분 등이 격화되어 백성들이 탈출한 것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5] 전신인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30만 ~ 4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했는데 발해의 동원 가능한 병력이 최대 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고구려에는 못 미치는 규모였을 것이다. 일단 한참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에 10만 정도라고 언급한 기록은 있다.[6] 그런데 사실 만주쪽이 한반도보다 평야가 많아 유목민족이 달리기에 유리하긴 하지만 부여부에서 상경용천부까지 직선거리가 수백 km는 된다. 그런데 이곳이 적대국인 거란과의 교역루트였는데 이곳에 대한 방위 태세가 거의 없어 거란군에게 쾌속 진격을 허락했다는 것은 발해 군사 전략의 치명적인 패착이었다. 또한 거란군이 이렇게 상경을 향해 진격하는데 국왕 대인선은 상경성을 피신하지 않았다는 점도 큰 패착이다. 이것은 이후 고려 현종이나 조선 선조가 몽진에 성공해 왕조를 보존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만약 훈춘의 동경용원부나 함남 북청의 남경남해부로 피신했다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지언정 왕조를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남경남해부는 개마고원이라는 미친 자연장애물도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다만 이 시기의 발해는 이미 남경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 영역을 상실한 후였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발해 지도부의 무능은 발해의 멸망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7] 공교롭게도 전신인 고구려도 부여부(당시엔 부여성)이 당에게 함락당하면서 국내성, 압록강까지 당의 쾌속 진격을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때는 국내성이 연남생의 영지라 부여성 이전에 이미 항복했다는 차이는 있다.[8] 늙은 재상[9] 현재 중국 지린성 화룽시[10]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훈춘시[11]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12] 현 함경남도 함흥시 or 북청군[13] 현재 중국 지린성 퉁화시 린장 지역으로 추측[14] 안녹산도 이 솔빈부의 말을 사들였고 발해 - 당을 잇는 중개 무역을 했다. 당연히 안녹산은 발해에 우호적이었다.[15] 언제는 발해의 사신이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연회에 나왔는데 다음 연회에 어느 일본 귀족이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을 무려 '''9벌'''이나 껴입고 나왔다. 겨울이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때 '''한여름'''이었다.[16] 흔히 '조공도'라 알고 있는 그 도로다.[17] 다만 이건 실제 인구라기 보다는 당나라에서 바라본 발해의 크기를 뭉뚱그려 내놓은 표현일 수도 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왜국 열전에 일본의 기록상 인구 역시 10만 가구지만 실제 수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18] 1호가 일반적으로 한 가구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징집자원 1명이 할당된 여러 가구 등으로 편제되어서 집계되기도 하기 때문에 1호당 평균 인구는 5명이 아니라 수십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